책들의 우주/예술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신현림

지하련 2002. 12. 4.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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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신현림 지음, 바다출판사, 2002



“나의 교향곡은 내 삶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나의 교향곡에는 나의 경험, 나의 고통, 나의 존재, 나의 모든 인생관이 들어있다. 나의 불안(Augst), 나의 공포, ... ... ”
-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1860-1911)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날, 하루 종일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고 휴양지마다 행복한 듯한 표정의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아니 그럴 것으로 예상되는 그런 날, 사각의 방에 갇혀 카랴안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1979년도에 녹음한 말러의 4번 교향곡을 듣는다. 아주 오래되었을 법한 럭스만 인티앰프와 JBL스피커를 통해. 낡은 테크닉스 턴테이블은 꿋꿋하게 지치지도 않으면서 회전을 계속한다. 낮게 깔리는 소리들.

한시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말러.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음악가. 어제 도심지 한복판에서 나는 말러적 체험을 했다. 다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들고 꽃을 들고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는 무렵, 난 백화점 지하 음식점에서 곱게 구워져 있는 소시지를 보면서 술 생각을 했다. 바보 같은 라크루아(*)는 그가 무수히 인용했던 작가들을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런 나를 보았다면 다짜고짜 욕을 했을 것이다. “술은 이제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 아니예요”라면서 내 목을 잡고 흔들었을 것이다.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순진해빠진 그를 위해 값싸고 맛도 형편없는 보졸레 누보 병으로 머리를 갈겨주었을 것이다.

낯설다는 느낌이란 다들 어떤 분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알 때, 그 속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다. 낯설다는 건 ‘근대적modern 체험’이다. 익히 보들레르가, 보들레르를 읽은 벤야민이 뚜렷하게 글로 옮겨놓은 감정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낭만주의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이 시기에서야 비로소 미래라는 것이 현대적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즉 오늘의 노력이 내일 반영된다, 내일은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내일이 있잖아 등등의, 극단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면 ‘근대적 비극’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미술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낯설게 하는 미술양식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고 꺼려한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거짓말이야 라면서 거울을 깨뜨리거나 반사되지도 않는 거울을 가져오거나 거울에다 이것저것 장치하거나 등등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한 작업을 통해 숨겨져 있는 나를 발견하려는 시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낯설음은 근대의 그 낯설음과는 반대의 양상이다. 근대의 낯설음은 모험 속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여인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 가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어떤 믿음이 있는 것이라면 현대미술의 낯설음은 왜 우리 인생이 이래야만 되는 거지, 왜 나는 우연히 마주친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없었던 것일까, 왜 그녀는 날 버리고 떠나간 것일까, 왜 내일이 오늘보다 못한 거지라는 허무의 감정 속에서 시작되는 낯설음이다. 그래서 이 낯설음의 작업들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해체)하거나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보여주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형편없지만 그나마 다른 것들보다 나은 면도 있다는 것에 집중하는 예술가들도 있기는 하지만.

신현림의 이 책은 미술잡지를 사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많은 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유용하다. 또한 현대미술에 대한 쓸데없는 이론적 분석을 시도하지 않고 가볍고 유쾌하게 자신의 감상을 적었다는 점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읽을 수 있다. 얼마 전 방한하여 한 편의 진지하고도 성실한 유머를 보여준 노부요시 아라키의 사진도 실려 있다. “나는 내 사진이 진실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라면서.

현대 미술에 대한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철학적이고도 이론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책들로서 일반 독자는 물론, 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워, 현대 미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떤 위화감을 조성하는 책들이며 다른 하나는 현대 미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이 쓸데없는 이론과 말도 안 되는 설명으로 이루어지는 책들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현대 미술이 추구하고 있는 “인생은 말도 안 돼”라는 이념에 매우 충실하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우길 수 있지만, 금전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해로운 책들인 셈이다.

기회가 닿으면 이 글 밑에 몇 개의 도판을 올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 날 때마다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곰브리치가 어느 대담에서 이야기했듯이 미술관에서 한참을 헤매고 나온 다음에 펼쳐지는 미술관 바깥 풍경이 무척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즉 미술관 속에서의 체험은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해주는 그 무엇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들이 쌓였을 때 현대미술은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책도 현대미술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책들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 <알코올과 예술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2002.
책에 대한 한 마디 : 술 마시는 작가들과 등장인물을 인용하고 난 다음, 술을 마시지 말자고 하는 어린 아이의 어처구니없는 책이다. 금전적인 해약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책으로 역자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책이다. 그리고 별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정말 슬픈 책이다. 차라리 독서노트나 쓸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