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하련 2007. 10. 17. 20:56



사물들 Les Choses, 조르주 페렉(지음), 허경은(옮김), 세계사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정해진 환경(콘텍스트) 속에서 인물(텍스트)가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이 세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다. 이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은 전형적인 환경과 전형적인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바탕으로 이 세계가 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력한다. 이렇게 보면,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작법은 에밀 졸라와 닮아있다. 지극히 유희(놀이)적이라는 점. 실험도 일종의 놀이나 게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결말을 알 수 없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읽으면서 그가 등장시킨 인물이나 그의 인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생각, 또는 사건이나 갈등에 대해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는 첨단의 소설가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소설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그의 인물들은 버려졌고, 열정적이며 도전적인, 거친 삶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되는 수동적이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인물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그가 노렸는지도 모른다. 소설 바깥의 소설가는 그의 인물들을 유기하고, 그의 인물들은 소설 속 세계에서 소설 바깥을 보며, 나는 피조물이야, 나는 저 소설가 친구가 쓰는 대로 그렇게 그려질 뿐이야, 라고 피식거리듯이, 현실의 우리들은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유기되어, 끝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나는 버림당했고 앞으로도 버림당할 것이며,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야, 그러니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 해야 해,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페렉의 소설 작법은 극단적인 니힐리즘을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를 이루는 어떤 구조에 반영한 셈이 된다. 그런데, 그래서? 에밀 졸라의 소설이 결국 우리에게 위대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페렉의 이 소설도 재미없는 씁쓸함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고 저 세계는 아직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사물들 - 8점
조르주 페렉 지음/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