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

장 뤽 고다르와 영화

지하련 2007. 10. 2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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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약간 읽기 불편한 번역이긴 하지만, 꾹 참을 수 있는, 국내 저널에서는 읽기 힘든 생소한 칼럼들의 모음. 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월호를 읽는다. 나에게 익숙한 이름들: 노암 촘스키, 장 브리크몽, 레지 드브레, 존 버거.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건 기 스카르페타의 ‘장 뤽 고다르’.


영화에 대한 내 생각 - 그것은 시작하자마자 자본주의 앞에서 몰락해버린 예술, 혹은 예술가에 대한 저주다. 스크린 앞에서 이제 누구도 예술을, 영혼을,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돈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예술 영화의 정신은 스크린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영상 이미지는 시간 위에 수놓아지는 서사를 시적인 감수성으로 육체를 바꾼 채, 미술관의 작은 브라운관이나 흰 벽면, 또는 여기저기 뿌려지는 이미지들로 이어진다. 이제 예술을 사유하는 영화감독은 없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인디 영화 감독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장 뤽 고다르는 다시 예술을 이야기한다.


장 뤽 고다르를 우리 앞에 불러세운 이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시트인 기 스카르페타(Guy Scarpetta). 그는 이렇게 적는다.



- 고다르에 관한 이상한 풍경: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그의 새 영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인터뷰나 기자 회견을 하면 “영화는 기억을 만들고 티브이는 망각을 만든다”, “그것은 당연한 이미지가 아니라 당연히 이미지일 뿐이다”, “문화가 규칙이라면 예술은 예외이다”와 같은 길이 남을 만한 번득이는 발언들을 기대하게 하는 영화계의 소크라테스, 그것이 대중들에게 심어진 그의 이미지이다.


- 세르쥬 다네가 말한 대로, ‘이미지들이 완전히 판매 촉진과 광고, 즉 권력의 편으로 돌아서버린’ 세상에서 튕겨져 나와, 침몰하는 난파선에서 구출 된 듯한 창조물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열정>, <프레농 카르멘>과 같이 결연하게 주류에 반하는 독창적인 영화들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저항이란, 그에 따르면, 영화의 예술적 요구들을 축출하려는 세상의 기획에 맞서 그것들을 지탱하는 것 - 스토리의 몫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겪어보지 못한 속도를 발명해내며, ‘위대한 형식’의 모범에 따라 영화를 구성하는 것(시각적 모티프의 구조물로서 먼 메아리의 울림과 리듬의 대회, 불협화음이 만들어 내는 건축적 구성), 그리고 그레코와 들라크루아로부터 베토벤에 이르는 소위 주류예술에 영화를 맞서게 하고 ‘그림으로 음악을 하는 예술’로 영화를 인식하는 것들이다.


- 고다르 자신의 영화를 포함하여 영화사 전체에서 추출한 장면들과 다큐멘터리 사진들, (그가 영화의 주된 경쟁 상대라고 평했던) 회화에서 온 이미지들이 겹쳐지고 미끄러지며 서로 대화하고 뒤얽혀 달려가다가는 분할되고 재구성된다: 영화가 어떻게 역사를 굴절 시켰는가, 어떻게 역사에 개입했으며 지금은 잃어버리고 만 하나의 존엄한 예술로서의 지위를 어떻게 획득하였는가 하는 것을 한꺼번에 좀 더 관찰하기 위함이다.



서울, 가을, 10월, 수요일, 어느, 오후, 무료함을 뚫고 지나가는 찬란한 빛처럼, 색처럼, 흔들리는 운동처럼,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