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파블로 카잘스, 바흐, 흐린 일요일 아침

지하련 2008. 2. 3. 10:53
Pablo Casals- The 6 Cello Suites - 10점
바흐 (J. S. Bach) 작곡,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연주/굿인터내셔널
(* 현재 절판된 상태임)

[수입] Pablo Casals - J.S.Bach / Cello Suites - 10점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연주/이엠아이(EMI)
(* 현재 구할 수 있는 음반이나, 가지고 있지 않음)


파블로 카잘스, 바흐, 흐린 일요일 아침

거친 호흡을 연신 해대며, 겨우 담배 한 개피를 피웠을 뿐이었다. 잠시 나의 삶은 살아가면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아주 현실적인 절망 한가운데 있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 틈으로 늦겨울의 한기가 아침 햇살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 사이, 굵고 낮은 첼로 소리가 내 마음의 낮은 물가를 스치며 몽롱한 의식으로 사라져갔다.


바흐의 기적은 어느 다른 예술에도 나타나 본 적이 없다. 성스러움이 드러날 때까지 인간성을 파헤치며, 가장 덧없는 것에도 영원의 날개를 돋게 하는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뿐만 아니라 성스런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을 성스럽게 했던 이야말로 바흐이며, 바흐야말로 음악이 있어온 이래 가장 위대하고 순수한 인간이었다.
- 파블로 카잘스


CD가 나오고, 인터넷으로 음반을 사기 시작한 이후, 너무 자주 보게 되는 두 단어는 ‘품절’이거나 ‘절판’이었다. 실은 오프라인의 오래된 음반 가게에는 보물처럼 이 CD가 있을 텐데, 인터넷의 가공할 만한, 신속한 정보력은 우리에게 빠르고 현명한 포기를 강요한다. 그리고 스스로 나는 애호가, 혹은 매니아라는(때로는 형편없기는 하지만)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오랜 시간을 거친 수소문, 발바닥이 부어 오르는 고통, 음반 가게 구석구석을 오가며, 먼지가 쌓여가는 손가락들의 희열을 빼앗아 가버렸다. 대부분의 이들이 형편 없는 MP3에 만족하는 이 시대에, 가끔 고전 풍의 매너와 습성, 까다롭고 성실한 애호가가 있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형편없는 디지털 시대의, 간편하고 신속한 음향을 간단하게 무시할 줄 아는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3.21~1750.7.28)의 삶은 특별하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 평범했다. 그 시대, 그 누구도 바흐의 천재성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태양왕 루이14세가 그를 초대해, 왕 앞에서 의자에 앉아도 좋다라고 허락하고(몰리에르Moliere에게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그의 연주를 밤새 듣기 위해 자신의 플루트 연주회까지도 취소했지만, 바흐가 살았던 라이프치히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그냥 평범한 음악가였고, 교회 합창 지휘자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학자인 헨드릭 빌렘 반 룬은 이렇게 적는다.


말년에 이르러 뛰어난 그의 작품 ‘푸가의 기법Art for the Fugue’이 출판되었으나(그것은 그가 살아 있을 때 간행된 몇 개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겨우 30부만 팔렸으며 동판은 구리값으로 팔렸다. 그러나 요한 제바스티안만큼 평생을 불평없이 조용히 산 사람도 드물다. 또 이 사람만큼 초보자에게 친절하고 원수를 용서하는 데 너그러웠던 사람은 더 드물다. 평생을 통하여 그는 옛 그대로 단순한 ‘악사’였으며, 파헬벨의 금단의 음악을 달밤에 베끼던 소년이었다.
그는 불굴의 작곡가이자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며 당대의 가장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훌륭한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자였다. 성악과 모든 기악을 위해 그가 쓴 작품의 수효는 너무나 방대해서 직접 조사해보기 전에는 사실일까 하고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단순한 것이나 복잡한 것이거나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바흐의 수법이 있다. 가짜 바흐의 칸타타를 짓기란 렘브란트의 에칭을 위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 반 룬의 예술사 이야기, 3권 88쪽 - 89쪽.


바흐는 그가 죽고 난 뒤 한참 후에야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대의 이러한 평가는 바흐가 살아있을 때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준다면, 아마 콧방귀를 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바흐가 남긴 음악은 너무 방대해서, 바흐의 이 작품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냥 평범한 ‘첼로 교본’ 정도로만 여겨졌을 뿐이다. 이 음악을 연습할 시간에 바흐의 다른 작품을 연습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16세의 파블로 카잘스는, 어느 날 고서점에서 낡은 악보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10년 넘게 홀로 이 음악을 연습했다. 이후 그는 공개석상에서 이 음악을 연주했으나, 전곡을 연주한 것은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후였다.


파블로 카잘스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이 세상을 속속들이 경험해 본, 나이 든 이가 자신과 적대적인 세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혹은 눈을 부릅뜬 채, 그렁그렁한 물기를 눈가에 매달고, 비탄, 주저함, 각오, 슬픔을 삼키고 있는 듯한 모습이 떠오른다. 억제되고 절제되었지만, 조금만 날카로운 어떤 것으로 힘주어 누르면 바로 터질 듯한 긴장감이 연주 속에 묻어 나온다. 힘있게 연결되는 선율은 연주 당시의 팽팽했던 대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일요일 아침,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를 듣는다. 마음은 고요해지고 흐린 대기는 잠시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 음원은 goclassic.co.kr 에서 가져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