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화사한 색채들의 모험 - 김보선의 ‘꽃’에 대하여

지하련 2008. 2. 6. 10:44

화사한 색채들의 모험
- 김보선의 ‘꽃’에 대하여




김용섭(yongsup.kim@yahoo.com)
A&B Gallery - 한불문화교류협회 ‘내-안에’ 전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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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추상화에 대한 자연스런 욕구는 눈에 보이는 세계 이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본질이나 실체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눈에 비친 세계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비친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감각지각에 비친 구체적인 외부 세계의 추상적이고 반-감각적인 본질을 향해갔다는 점은 모더니즘이 가지는 여러 아이러니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후 현대 미술을 수놓고 있는 추상 미술들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외부 세계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끊임없이 묻고 탐구한 결과들이다. 김보선의 ‘꽃’ 연작들은 이러한 연장 선상에 위치한다.

‘꽃’에 매혹된 현대 예술가들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꽃’을 성적인 메타포로 표현한다. 이 작가들은 사랑의 소리를 속삭이지 못하는, 사랑의 몸짓을 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었다가 지는 과정을 반복하는 꽃의 농염한 색채와 형태를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 인간이라는 동물의 순수한 성애를 반영한다. 생식기로서의 꽃은 인간의 손길을 통해,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종종 우리는 이런 작품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식물의 일부로서의 ‘꽃’은 식물의 ‘생식기’로서의 매혹을 드러내며, 급격하게 동물화된다.

하지만 김보선의 ‘꽃’은 성적인 메타포도 아니고 ‘생식기적 특성’에 주목하지도 않는다. 아예 이를 추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만개한 꽃이 가지는 농염한 색채와 형태를 캔버스 여기저기에 흩트려 놓는다. 꼭 사랑을 추구하려는 꽃의 뜨거운 열정을 숨기려는 훼방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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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다소 실험적인 표현을 통해 생식기로서의 꽃이 아닌 그
이전의, 더 본질적인 꽃의 형태, 그 형태 속에 포함된 색채와 운동성을 드러낸다. 생식기로서의, 성적인 메타포로서의 꽃이 아니라, 꽃이 가진 형태, 또는 조형적 특성, 그리고 색채, 그 색채가 시간, 공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꽃이 가지는 조형적 특성을 분석하고, 다시 재조합하고, 다시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 고유의 꽃이 탄생한다. 눈 앞에 존재하는 꽃의 이면에 숨겨진 생명체의 일부가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 주기 위해, 그래서 김보선의 꽃은 다채로운 색으로 여기저기 흩어지고 움직이며 한 자리에 머물러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안 여기저기를 오가며 꽃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찾아 헤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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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정해져 있는 삶 따윈 없다. 실존주의적 회의감이 깊게 물들어 있는 상대주의 시대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우리 삶의 이정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방황만을 거듭할 뿐이다. 우리가 탐구를 깊이 하면 할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세계의 거대함뿐이다.

이는 예술 탐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꽃은 생식기의 기능을 수행하고 싶어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우리가 그 기능이나 존재 의미를 알지 못하는, 진한 색채들의 얇은 이파리들의 공생 관계일 수도 있다. 혹은 줄기로부터 뻗어 나와, 그 식물 내부에서부터 탈출하려는 몇몇 세포들의 반란일 수도 있다.

작가는 꽃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바라는 바의 어떤 꽃의 이미지를 버리게 한다. 김보선의 꽃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꽃이 아니다. 작가는 꽃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체로 보이게끔 만든다. 붓이 아닌 나이프로 작업한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숨어 있다. 굵고 강렬한 터치는 이제 막 모험을 시작하는 하나의 세포가 움직이는 듯한 모습과 닮아있다. 캔버스 속의 꽃은 여러 색채의 파편들로 분열해, 사람들 앞에 서서 모험을 바라며, 세상을 향해 운동하려는 어떤 몸짓을 보여준다.

그 꽃의 몸짓 앞에서 사람들은 사소하고 작은 감정적 혼란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꽃이 가진 화사한 색채들의 모험이 낯설고 도발적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 치 앞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부단히 움직이는 작은 모험들의 연속으로의 삶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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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전시는 2월 27일부터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