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남겨진 술 한 잔의 쓸쓸함

지하련 2008. 2. 17. 10:58


 

무슨 다른 생각을 하자. 눈을 감자 숨쉬듯 흐르는 몇 줄기 긴 선이 떠오른다. 사구에서 움직이는 바람 무늬다. 반나절을 줄곧 보고 있었으니, 망막에 각인되고 말았다. 그 모래의 흐름이 과거, 번영했던 도시와 대제국마저 멸망시키고 삼켜버린 적이 있다. 로마 제국의, 사브라타였던가…… 그리고, 주성(酒聖) 오마르 카이얌이 노래한, 뭐라고 하는 마을도...… 거기에는 옷가게가 있었고 정육점이 있었고 잡화점이 있었고, 그런 건물들 사이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길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고, 그 길을 하나 바꾸려면 관청을 둘러싸고 몇 년에 걸친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누구 하나, 그 부동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역사 깊은 마을……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도 직경 1/8mm의 유동하는 모래의 법칙을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민음사), 45쪽 중에서



‘그도 오마르 카이얌을 읽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술을 좋아한다면, 오마르 카이얌은 반드시 읽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 디오니소스를 부르기도 했다. 21세기를 향해가던 어느 겨울날, 인사동에서 ‘주신제’(酒神祭)를 열기도 했다. 남는 건 청춘의 방황, 혼미해져 가는 영혼, 다음 날의 몽롱한 육체뿐이긴 했지만.

최근 들어 새벽에서야 비로소 술에 취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다음 날 취기에 매우 고통스러워하게 되고. 이런 일이 반복되자 술의 맛이나 향에 자연스럽게 둔감해지게 되고 술을 마셔도 별 기분 좋아지지도 않게 되었다. 흥겹게 술을 마시던 시절도 있었는데.

아베 코보의 저 단어, ‘酒聖 오마르 카이얌’을 보면서 크게 웃었던 것이 기억난다. 슬프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소설이었지만,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The Rubaiyat)’가 다소 위안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55.
벗이여, 푸짐한 술상을 차려 놓고
새 장가 들던 나를 기억하는가
불모의 이성(理性)일랑 침실에서 몰아내고
포도 넝쿨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지

56.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榮枯盛衰)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91.
죽어가는 이 내 몸에 포도주를 먹여주오
목숨 다한 이 내 몸을 포도주로 씻겨주오
싱싱한 포도잎 감싼 이 몸을
사람들이 왕래하는 정원에 묻어주오
-피츠제럴드 영역,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The Rubaiyat of Omar Khayyam>>(민음사) 중에서


오직 포도주만이 인생의 참된 해결사로 등장하는 이 시집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컬트(숭배) 시집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11세기의 페르시아나 19세기의 영국이나 현대의 동아시아나, 술에 빠진 사람들은 별반 다르지 않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듯.

술은 예술가들에게 빠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임에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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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오르세미술관(파리), 1892년


테이블 옆에 놓인 포도주 병을 보라. 액상 프로방스의 외골수 화가 폴 세잔에게도 카드 놀이 중 술 한 잔의 여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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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메르시에(Philippe Mercier, 1689-1760), <<술을 맛보는 젊은이>>, 루브르박물관(파리)


하지만 술에 대해 전문적으로 접근한 화가도 있었다. 필립 메르시에의 이 작품은 와인 감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여기에 대해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콜레트는 이렇게 표현한다.

“자, 이제 입을 다물어야 할 때다. 먼저 불룩한 잔을 천장 꼭대기를 향해 들어올린다. 눈으로 먼저 확인하고 나서 코를 들이대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나서 잔을 천천히 입으로가 가져간다.”
- <<와인>>(창해ABC북), 86쪽에서 재인용함


반짝이는 저 젊은이의 눈동자를 보라. 잔 속에서 달아오르는 포도주의 율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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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소아 드 트로아(Jean Francois de Troy), <<굴 요리가 있는 오찬>>, 1735년, 콩데박물관


와인과 함께 굴 요리는 어떨까? 이름하여 ‘사랑의 굴 요리’.

우리는 펀치를 만들었고 굴을 먹으면서 입 속에 들어 있는 굴을 서로 바꾸어 먹는 놀이를 했다. 내가 내 입 속에 든 굴을 그녀의 입 속으로 밀어 넣을 때 그녀도 자기 입에 들어 있는 굴을 혀 위에 올려놓고 나에게 내밀었다. 두 연인이 벌이는 장난만큼 사람을 흥분시키고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다.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움이 그 매력을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웃음 역시 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사람의 입 속에서 미끄러져 나온 굴 소스는 얼마나 환상적인 맛인지! 더군다나 그건 그녀의 침이 아닌가! 내가 그런 굴을 깨물고 삼킬 때 사랑할 힘이 더욱 샘솟는 건 당연한 일이다.
- 자코모 카사노바, <<사랑의 유희>> 중에서(로타 뮐러의 <<카사노바의 베네치아>>(열린책들), 113쪽에서 인용함)


하지만 포도주가 있고 굴 요리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96.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피츠제럴드 영역,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The Rubaiyat of Omar Khayyam>>(민음사) 중에서


연인들이 모여 앉아 사랑을 속삭이며 술을 마시던 카페 테라스는 텅 비어 가는데. 반 고흐의 쓸쓸함은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모든 이들이 다 떠나가고 유쾌하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드디어 그 바닥을 드러낼 때, 비로소 가슴을 울리며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알아가고 있다고 여겨지던 술의 묘미도, 진귀한 향을 풍기며 매혹시키던 한 잔의 와인도, 달콤하던 사랑의 굴 요리도, 늙어가는 인생의 쓸쓸함을 지워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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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몽마르트르에 있는 카페 테라스>>, 오르세 미술관(파리), 18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