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Vermeer, 창해 ABC북
한낮의 기온도 영도를 넘기지 못한다. 겨울이다. 추운 겨울이다. 늦은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오전 뉴스를 보면서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때때로 소란스러움도 수면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종일 거리에서, 지하철 속에서, <베르메르Vermeer>를 읽고 보았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 아주 짧은, 그러나 깊고 자욱한 슬픔의 감정에 빠진다. 이 책의 표지그림인 <터번을 두른 소녀>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고 어깨 너머로 관람자를 쳐다보는 소녀의 자세는 더할 수 없이 자연스럽’고 ‘눈동자에 반사되는 빛, 진주 속에 비친 창문의 영상, 아랫입술에 보일 듯 말 듯 반짝이는 윤기는 마치 이 소녀가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이 ‘소녀의 윤곽은 빛과 색채의 효과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나 이 그림 속에서 베르메르 작품들이 보여주는 관능성과 그 관능성이 취하는 바로크적 몸짓을 본다.
‘마흔 셋에 닥친 갑작스러운 죽음. 30점 가량의 알려진 그림 중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은 단 3점뿐. 제자 한 명 없이 200년 동안이나 거의 잊혀져 있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베르메르의 그림은 실내의 정경, 가정에서의 안주, 기하학적인 배경, 내면적인 성격의 것들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그림이 지니고 있는 농밀한 색채와 치밀한 구도, 그리고 인물들의 관능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이 고요함의 화가는 또한 색채의 화가가 아닌가.’
많은 작품을 보아왔고 내 스스로 매혹당하면서 예술 감상과 이해가 오직 가슴으로만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지적 교양을 요구로 하는 것인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폴 발레리의 말대로 ‘회화만큼 지적인 예술’은 없을 것이다. 베르메르는 19세기에 유명해진 화가이다. 따지고 보면 바로크 양식이 ‘르네상스의 동어반복이며 더욱 야만적인 형태’라는, 그 오명을 벗어나게 될 수 있었던 것도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 개념> 덕분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베르메르의 발견은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 책은 베르메르에 대해 각각의 항목별로 설명이 나열되어있다. 따라서 어떤 이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독서의 지루함과 어려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네덜란드의 시대 상황-당시 유럽에서는 드물게 개신교를 믿는 이들에 의해 정치와 경제가 운영되었던-과 동시대 다른 지역의 예술가들과 네덜란드 예술가들의 양식상 차이점-이는 르네상스 시기까지 거슬러갈 필요가 있는데, 이 때에는 남부 유럽과 북부 유럽으로 나누어진다. 북부 유럽의 경우 매우 정적인 풍경화가 두드러지는데,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또한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지배적인 영향 하에 놓여있으면서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떠났던 몇몇 이들과 이들에게 영향받은 이들이 보여주는 변화들은 그 지역만의 독창적인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베르메르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크 미술이 갖는 특징-바로크 양식의 공통 영역은 운동성, 강렬함, 긴장, 힘 등이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몬테베르디와 바흐가 속한 이 시대에는 신이 떠나버린 우주의 무한함을 깨닫고 고독하고 나약한 인간임을 자각하게 되며 이성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가득찬 시대였다. 그래서 바로크 양식은 대립과 극단 속에서 회의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책은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일부의 독자들은 여기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도 베르메르의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Girl with a Pearl Earring(* 불어로는 '터번을 두른 소녀'임)
c. 1665-1666; Oil on canvas, 44.5 x 39 cm; Royal Cabinet of Paintings Mauritshuis, The Hague
Vermeer 작품을 볼 수 있는 온라인 갤러리
http://www.ibiblio.org/wm/paint/auth/vermeer/
http://www.mystudios.com/vermeer/
http://www.artcyclopedia.com/artists/vermeer_ja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