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늦은 봄의 오후

지하련 2008. 6. 13. 16:18


연초에 세웠던 대부분의 결심, 계획들이 어긋났다. 아무 것도 된 것이 없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되기도 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 대부분이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일을 추진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임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잘 헤쳐나가는 사람으로 보지만, 도리어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어젠 방배동 커피숍에 앉아 여기저기 전화를 하다가, 새로 산 검정색 노트를 꺼내 뭔가 적으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책을 전혀 읽지 못했고 글도 쓰지 않았다는 것, 아니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럴 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어 공포증에 대한 얼마간의 위로가 되고, 그녀를 향한 아주 짧은 문장 하나 정도 떠올릴 수 있으리라 아주 오래 전 생각했으나, 이젠 사랑이라는 것도 일종의 감각적 허위이거나 사치가 아닐까 싶다. 언어 공포가 아닌, 나는 사랑 공포증 환자가 되어 가는 걸까.

<<오리엔탈리즘>>으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는, 실은 20세기 후반 손에 꼽히는 문학/예술 비평가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그의 책 몇 권은 한국의 문화 예술 관련 비평가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수 있을 듯 싶다. 어제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뒤적거린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어보면, 군데군데에서 그의 박학함과 통찰력을 빛난다. 이 책은 예술가가 늙어 죽기 전 발표하는 작품들이 가지는 일련의 양식적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도 이런 비평적 기획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아마 내가 계속 진학해 공부를 했다면, 그 중의 몇 개의 비평문을 작성했을 것이고, 어느 정도 필명도 얻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유약하면서, 터무니없는 언어적 욕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이에게 비평 언어는 얇은 영혼을 아프게 찌르고 도려내는 화살촉 같은 것이다.

내가 내 예상보다 빨리 은퇴하게 된다면,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성에 주목했듯이 처녀성에 주목하고 싶다. 위대한 작가들의 처녀작에서부터 미술가, 음악가, 그리고 어떤 양식이나 장르의 시작 단계들이 가지는 공통된 양식적 특성,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그리고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해내고 싶다.

늦은 봄, 무더위 속에서 햇살은 투명하기만 하다. 이런 날, 나는 뜬금없는 슬픔, 혹은 우울함, 또는 절벽을 향해 떨어지는 유쾌함을 느끼곤 한다.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소리가 조금의 위안이 되는 늦은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