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우울한 그리스

지하련 2008. 8. 23. 11:21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울'을 창조적인 사람들의 특징으로 보았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꼴리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우울'은 병든 자의 몫이다. 사회적 질병이 되어버린 '우울증'은 약물 치료와 정기적인 정신과 방문을 요구한다.

요 며칠 우울하다. 내부적인 원인도 있겠지만, 외부적인 영향도 크다. 도로 한 복판에서 길을 잃어버린 어린 강아지와 그 강아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강아지 바로 앞에서 멈추는 마을버스며, 소형 트럭이며, 자동차들이 낸 키익키익 소리가 내 귀에서 점점 멀어지는 풍경이며, 6호선 공덕역에서 역 안으로 들어오는 전동차로 몸을 던지는 젊은 사내며, 다리 하나가 없는 슈나우저가 인사동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이며, ... 나를 어둡게 했다.

하나의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 싸움의 원칙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 싸움에서 이겨, 그 싸움의 규칙을 정해야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와 현실 세계로 나누는 것은 그가 현실에서 희망과 비전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화는 이 세계관 속에서 깊어지고 성숙해지고, 결국 우울해진다. 위대한 고전 희극 작품이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울함을 떨쳐내기 위해 자신을 추스리고 신념과 각오를 다지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고전주의의 위대한 비극 작품이 가지는 힘이고 매혹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힘을 가지는 것은 희곡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신탁을 끝까지 거부하며 싸웠던 오이디푸스의 신념과 각오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운명(moira)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저항하고 지켜내기 때문이다. 

오늘, 종일 바쁘다. 적당하게 우울하고 쿨한 음악은 힘이 되기도 한다.


George Benson, Golden Slumbers/You Never Give Me Your Mo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