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크리스마스 이브

지하련 2003. 12. 24. 00:27

몇 달 전 턴테이블이 두 개 있을 때의 지저분한 내 방의 일부

어제 방 청소를 했다. 방청소라고 해 봤자 특별한 것도 없다. 이리저리 널린 책과 음반을 한 곳으로 모아놓고 방바닥을 한 번 쓸고 한 번 닦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것도 두 시간이 걸리니, 방 위에 놓인 게 책과 음반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쌓인 잡동사니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사실을 며칠 전 TV 뉴스를 보고 알았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 탓이다. 하긴 크리스마스야, 아이들 세상이니 아주 어정쩡하게 끼인 나이에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흥 따위를 기대한다면 그건 무리다.

방에 앉아 척 멘지오니의 산체스의 아이들과 케니 드류의 피아노, 벨앤세바스티안의 초기 앨범을 오가며 듣다가, 아예 작정을 하고 꺼낸 것이 베트벤 교향곡 전집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고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LP 전집이니, 턴테이블이 다 돌아가면 레코드판 뒤집기 위해 일어나서 가야 하니 가끔씩 운동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곡이 절정을 향해갈 때는 흥분해서 고개를 흔든다든지 손을 흔들게 될 가능성도 있으니 부수적인 운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침울해지고 우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문뜩 꺼낸 책 속에서 오래된 연애시가 나온다든지 작은 메모,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아주 오래 전 마음에 두었던 여자아이의 삐삐번호라든지, 혹은 사랑에 빠진 이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온다든지 하는 경우...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런 경운 무척 두렵다.

그럴 때 먼지가 쌓인 엡슨 프린터에서 공포의 흰 종이들을 꺼내 붉은 펜으로 소리 없이 적자. 끝없는 혼자만의 두려움 앞에서 지나온 시절, 날 아프게 했던 나뭇잎들에 대해서, 흰 벽돌이며, 그 벤치며, 그 공중전화, 그 여관의 괘종시계, 그 무더위며, 그 버스며, 그 머리칼을 향해 저주의 말들을 적자. 우리가 저주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향해 미친 듯이 적어보자.

그러면 턴테이블은 다 돌아가 사방은 조용해져 있을 것이고 가라앉았던 <기분은 사라지고 매혹적인 크리스마스의 어둠이 방 안에 가득할 것이다. 아름다운 어둠에 둘러싸여 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전집 자켓: 레너드 번스타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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