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극적인 우울증

지하련 2003. 3. 28. 11:28
밤 늦은 시각. 서쪽 중간 쯤에 있는 어느 역, 근처에는 오래 전 공군사관생도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었던 운동장을 가진 공원이 있는 그 역을 향해가던 객차 안에서, 황급한 발걸음으로 날 덮친, 꼭 매혹적인 알몸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여신같은, 그 우울증의 정체를 난 알지 못한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내 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오마르 카이얌이 매혹된 바 있고 그 이후 무수한 시인과 예술가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그 존재, 그 존재를 만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각, 근대의 표상인 내일이라는 미래로 인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내 방을 열고 말았다. 결국 혼자 약간 미친 듯, 약간 슬픈 듯, 약간 고독한 척 하면서 맥주 한 병을 마셨지만, ... ...

오늘까지 난 그 우울증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텅빈 사무실에서 조관우의 늪을 듣었다. 밝은 대도시의 정오 속에서 꿈꾸는 유부녀와의 사랑. 하긴, 모든 사랑은 불륜이며 모험이니까. 선릉역과 역삼역 사이를 걸어가면서, 허벅지에 달라붙은 여자들의 스커트를 쳐다보면서 도시의 허공을 찌르고 있는 빌딩 꼭대기와 태양 사이의 거리는 참 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들 고귀한 사랑을 하였으면 좋겠다. 불륜이면서 모험인. 자신의 심장을 향해 돌격해들어오는, 격정적인 혼란 말이다.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