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조중걸

지하련 2008. 11. 3. 20:59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10점
조중걸 지음/프로네시스(웅진)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조중걸(지음), 프로네시스

 

키치’(Kitsch)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은 키치를 설명하기에 구체적인 스타일이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어떤 인식론적 태도라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카르스텐 해리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저자들은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인식론적 태도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키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영국 경험론을 이야기하고 현대 물리학과 현대의 추상 미술의 기원을 탐구해야만 한다. 이를 다 설명해야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실은 이 설명을 듣고 있는 (지적으로 무능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대부분의 한국의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수나 강사도 드물다. 

이 책은 ‘키치’라는 단어에 대해 적고 있지만, 실은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허위’에 대한 집요하고도 논리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키치라는 단어 대신 ‘불행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행복을 가지기 위해 받아들이는 허위적 태도’로 표기해도 무방할 정도다. '키치'라는 단어가 일반 독자의 귀에 솔깃하고 흥미로워 보이겠지만, '키치'와 '키치가 뜻하는 바' 사이에는 소쉬르의 의견대로, 자의적 관계가 있을 뿐이다. 아무런 필연적 연관 관계도 없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키치'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몇몇 독자들은 쉽게 이해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정신과 삶 전반에서 키치적 것들을 다 몰아내고 한순간이라도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분투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이가 있을까?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공은 불이 꺼진 무대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너무 아찔하지 않은가? 같은 침대에 누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의 입술이 실은 거짓말이라고 탄로난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신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저 뾰족한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공중 부벽처럼, 두터운 벽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처럼 기괴하고 현란하며 경련적으로 변하게 된다면? 고흐가 미쳐갈 때, 세잔은 자신의 내부에 견고한 기하학의 성을 쌓고 외부세계로 나가지 않는다. 고흐의 터치와 색상이 자신의 삶을 포기했을 때 나오는 것이라면, 세잔의 고전적인 기하학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영혼을 저 불가해한 현실 세계 속에서 지키고자 했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예술가 모두 이 세계 속에서는 이방인이었으며, 침묵했다.

정말로 이 세계에는 아무런 질서도, 원리도 없는 것일까?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으며, 그저 우연하게 왔다가 무의미하게 살다가 죽는 것일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끊임없이 그것을 반복하며, 현대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그렇게 여겼으며, 철저하게 그들의 학문과 예술에 매진했음을 강조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그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현대의 고전주의자들인 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의 내부에 견고한 성을 짓고 고전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가들은 그마저도 거짓과 허위라며 부정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은 도리어 자본주의와 흥미로운 결탁을 만들어내며, 거짓된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어떤 양식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 예술의 문제 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거짓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예술과 세계에 대해 궁금해지듯이, 우리의 정신적 방황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나에게 서양 미술사를 가르쳐 준 분이기도 한) 저자는 지성사(특히 철학과 역사)를 바탕으로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대 철학(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과 데카르트를 구분짓는 방식으로 기하학을 이용한다. 좌표 평면 상에서의 직선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면서 근대에 있어서의 ‘운동’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과 바로크 예술의 연관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인상주의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베르그송의 철학과 드뷔시의 음악, 프루스트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지성사적 이해에 기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우저는 철저하게 유물론적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고딕 양식이나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대해서는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조중걸의 말대로 ‘예술은 기술의 문제라기 보다는 예술의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욕’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예술에 대한 기술은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면, 기술은 철저히 인과적 관계 위에서 예술을 설명할 수 있지만, 예술의욕은 인과적 관계를 무시하며 그 당시의 사람들의 심성, 일상적 삶, 학문과 역사 등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먼저 요구한다. 이 책에서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고 철학과 과학을 가로지르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여러 번 읽기를 권한다. 적어도 현대 예술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그래야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최소한 진실해질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