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miscellaneous, 또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지하련 2003. 3. 8. 21:57
돈 많이 주고 산 오디오가 말썽이다. 앰프에 문제가 있는 건지, 스피커에 문제가 있는 건지, 계속 한 쪽 스피커 소리가 죽는다. 오늘 테스트를 해보고 바꿀 생각이다. 빚을 내어. 아마 미친 짓이라고 혹자들은 말할 지도 모른다. 통장에서 고작 몇 십만원 있는 주제에. 공과금 내면 사라지는 돈인데. 하지만 통장에 돈 없어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음악 들을 때 한 쪽 스피커가 죽는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크니 어쩌겠는가.

오랫만에 토요일날 휴식을 취한다. 내가 원하는 걸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걸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참 부럽고 속이 타고 내 경제적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내 고매하기 짝이 없는 순결주의는 시대 착오적이고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문학은 시대의 아픔과 이상을 동시에 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이상은 사라졌고 아픔만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현대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다.(또 그렇게 배웠다) 얼마 전에 읽은 무질의 소설은 그의 생각을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픔을 통해서 성숙해진다는 건 고전적 테마다. 아픔을 통해 성숙해진다고 해서 세상을 잘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니다. 도리어 이렇게 물어보자. 아픔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왜 우리는 성숙을 강요당하는지. 왜 성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은연 중에 우리는 세상의 시스템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시스템을 긍정하게 되고 끝내 그 속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스템의 확대 재생산, 혹은 포기만을 반복하다가 죽게 된다.

오래된 책들을 보면 우리의 주인공은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오랜 모험 끝에 귀환하여 보다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폴 오스터의 소설을 보면 모험처럼 보이는 몇몇 사건을 거치더라도 보다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 더 냉소적으로 바뀌거나 성숙하거나 완전하다는 것과는 전혀 딴 판이 되어버린다.

어쩌면 아픔의 확대재생산이지, 성숙과는 무관하다. 군대에 가서 보면, 계급이 낮을 때 당했던 아픔을 재생산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참이 되면 자신이 당했던 아픔을 그대로 전해주려는 이들이 대다수라는 걸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밑에 있는 있는 애들이 깔보는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 아픔만큼 성숙해진다는 건 허울좋은 변명일 뿐이다. (* 현대가 변명의 시대라는 점에서 이 문구의 키취성은 현대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요즘 가위에 자주 눌린다. 몇 년만의 일이다. 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며칠 동안 너무 아팠다. 약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것 때문일까. 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