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하련 2003. 3. 12. 21:59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울력.





‘지난 시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 1891년의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봄의 깨어남 Fruhlings Erwachen>, 에밀 슈트라우스 Emil Strauß의 <친구 하인 Freund Hein>(1902),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소설들과 함께 무질의 이 소설 또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1)

하지만 나이가 너무 든 탓일까. 아니면 그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가 틀리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바지니, 이렇게 네 명의 소년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학교 모험담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쉽게 말해 나이를 어떻게 먹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까 연약한 친구에게 행사하는 폭력, 비난, 따돌림, 성적 수치 등등을 통해 우리의 퇴를레스는 혼란을 거치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지? 한 편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한 편으로는 모든 걸 다 아는 척 해대는 이 소설은 현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리석음의 한 쪽 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근대 교양주의가 현대 소설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읽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번역된 무질의 다른 소설, <<세 여인>>(문학과지성사)은 언제나 추천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젊은 소설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뜻 모를 단어와 문장으로 설교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지극히 나쁜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

진지하고 슬픈 퇴를레스는 이미 없고 영혼의 성장이라는 테마는 현대에서는 오래된 유물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늙은 채로 태어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에 얼마나 더욱 잘 적응하는가의 다른 말일 뿐이다.



(1) http://hesse-library.mokwon.ac.kr/archiv/HeFo6-03.htm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8점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