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하련 2009. 11. 21. 01:20
모데라토 칸타빌레 - 10점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마르그리트 뒤라스




뒤라스의 세기도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 그의, 그녀의 세기가 있었듯이, 뒤라스에게도 그녀만의 세기가 있었다. 그녀가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그녀 옆엔 늘 서른 다섯 살 연하의 젊은 연인이 주름진 뒤라스의 손을 잡고 그녀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녀의 유작 ‘C’est Tout그게 다예요’는 마치 젊은 날의 그녀가 찾아 헤매던 언어와 사랑의 완결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얇은 책 위로 젊은 연인의 얼굴이 겹쳐지곤 하던 시기도 있었다.

191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에서 태어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알베르 카뮈와 같이, 식민지령 출신이었다(알베르 카뮈는 북아프리카 태생의 혼혈이었다). 그리고 누보 로망의 시대를 관통하며, 누보 로망과는 전혀 다른 글쓰기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완성한 여류 작가로서 그 위치를 명확히 했다. ‘내 사랑 히로시마’로 알랭 레네와 같이 영화 작업하였으며,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피터 브룩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피터 브룩 감독, 잔 모로, 장 폴 벨몽도 주연.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이 소설은 뒤라스의 비밀스런 일기장과도 같은 작품이다. 짧은 순간 스쳐가듯 어느 여인의 사소한 방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은, 실은 그 속엔 여인의 내밀하고 농염한, 어쩔 수 없이 갇혀 지낼 수 밖에 없는 상류층 여인의 억압된 욕정과 솔직한 애정 결핍이 뒤범벅되어 끝 간 데 없이 끈적끈적한 외로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작품이다.


사이렌이 떠나갈 듯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시내 구석구석은 물론, 바닷바람에 실려 저 멀리 변두리와 주변 도시에까지 우렁차게 들렸다. 황갈색이 더욱 짙어진 석양빛이 홀벽을 쓸어갔다. 황혼 무렵이면 종종 그렇듯, 하늘이 오히려 고요하게 부푼 구름 속에 머무르고, 구름을 벗어난 태양은 마지막 불길을 사르며 빛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사이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지만 다른 날 저녁처럼 결국 그치고 말았다.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 118쪽



하지만 뒤라스의 글쓰기는 언제나 가볍고 스쳐가는 듯한 언어의 운율에,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인물과 사건의 표면만을 훑고 지나간다. 마치 건조한 인상주의 작품처럼.

 

“처음으로 밝히는 것인데,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나는 비밀스레 겪어낸 개인적 체험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외설적이라는 평을 받을까 두려워 이 경험 주변에 벽을 쌓고 거울로 둘러놓았지요. 경험이 격렬했던 만큼 더욱 엄격한 형식을 택한 것이랍니다. 이 작품 속에는 내가 숨어 있어요.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 더욱더 말입니다.”
- 129쪽

 

편지를 읽고 있는 뒤라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뒤라스의 저 문장들은, 이 작품을 접하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읽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주인공 안 데바레드와 뒤라스가 겹쳐져고, ... ... 어느 순간, 안 데바레드 자리에 뒤라스가, 그리고 그녀는 우리들의 비밀스러운, 쓸쓸하고 외로운 연인이 된다. 


이처럼 인물들은 특권적 관찰자에 의해 내부로부터 조명되지 않으며, 감정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대신 조심스럽게 추측될 뿐이다. 따라서 내면의 격정을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문체기법이 사용된다. 단어들은 필연적인 위치에서 엄격하게 통제되고 지각 작용과 문체가 일체화되어 절제와 암시, 간접화의 문체 기법들은 표현효과를 높여주는 것은 물론 구조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뒤라스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으로서 새로운 언어 기업의 지평을 열어 보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자해설 중에서, 133쪽








하지만 이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녀의 초기 소설 몇 편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이러한 문장, 글쓰기,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어반복적 양식이 아니라, 늘 새롭게 읽히는, 마치 변덕스러운 여성의 마음을 닮은 듯 우리에게 읽힌다. 그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마음을, 그들을 둘러싼 사건과 풍경을, 그저 스쳐가듯, 표면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녀는 깊은 곳에 숨겨진 어떤 것들을 끄집어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이번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가슴 사이에 꽂은 목련 꽃은 완전히 시들어 버렸다. 한 시간 만에 한 여름을 겪어낸 것이다. 사내는 곧 정원을 지나쳐 더 멀리 갈 것이다. 그가 지나갔다. 안 데바레드는 가슴에 꽂은 꽃은 비틀어대는 끝없는 몸짓을 계속 하고 있다.
- 109쪽


 

안 데바레드의 방황이 ‘제 자리 뛰기’와도 같은 궤적을 그리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난한 여정임을 뒤라스는 특유의 감수성과 표현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향한 우리의 마음, 우리 영혼의 제 자리 뛰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행인가를 뒤라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녀의 연인 얀 안드레아.


 그리고 그녀가 얀을 위해 쓴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