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먼 미래에 ...

지하련 2009. 1. 5. 20:59

루이 알튀세르의 (저주받은 듯한 느낌의) 자서전, '미래를 오래 지속된다'가 재출간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93년,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니,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이 책, 내가 20대 시절 생각나면 뒤적이던 책이었다. 잔인할 정도로 자신을 파고들며, 자신이 목 졸라 죽인 아내에 대한 기억을 태연하게 하는 죽기 전 알튀세르의 문장들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과거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모든 걸 포기하지 않는 어떤 지식인의 슬픈 초상 앞에서, 그나마 내 20대는 낫다고 위안받던 시절이 있었다.

일 때문에 잠시 나간 삼성역 반디앤루니스 서점(아직도 서울문고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에서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와 알랭 레네의 '내 사랑 히로시마'를 샀다. 아, 오랫만에 만나는 내 20대의 우상들이었다. 요즘에도 장 뤽 고다르와 알랭 레네에 흥분하는 이들이 있을까. 하긴 알튀세르보다는 낫겠지. 그가 죽고 난 다음, 마르크스주의 학자로는 보기 드물게 르몽드 한 면을 다 차지하는 추모기사가 실렸지만, 그가 죽은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프랑스에서나 한국에서는 그는 이미 잊혀진 인물에 가깝다.

문득 내 나이를 떠올릴 때면, 종종 아찔해진다. 내 머리 속에 가득차, 끝없는 심연을 헤매고 있는 스토리들과 인물들, 정제되지 못한 표현들. 그리고 모호하고 불투명한 열망들. 삼성역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잠시 20대에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으나, 사람들은 거의 기억 나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에 만났던 이들마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도망만 다닌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문득 머스 커니햄을 찾아보았다. 그의 무용을 보고 있으면, 늘 흥미롭지만, 새로운 표현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현대 예술이 막다른 골목으로 향해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Merce Cunningham--Beach Bird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