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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안경을 바꿔야 할 시기가 지났다. 나를,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신경쓰이게 한다. 글자가 흐릿해지는 만큼 새 책이 쌓이고 잠이 줄어드는 만큼 빨리 지치고 상처입는다. 변화는 예고 없이 방문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곤 사라지며 흔적을 남긴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빠르게 늘어나 거의 매일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노트북이 가벼워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가벼워질수록 이 녀석이 자주 나타난다. 사무실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까페에서, 심지어 집 거실에까지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메일이 오고 문자가 오고 전화가 온다.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근처 카페에 들어와 메일을 확인하고 일을 한다. 그렇게 오후에서 저녁이 되었다. 또 야근이었다.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합정역 인근의 커피숍. 높은 천정. 단순한 인테리어. 직사각형의 공간. 낮은 테이블 맞은 편으로는 높은 선반 위에 그 모습을 뽐내는 커피머신들. 그리고 혼자 샵을 지키는 소녀. 커피를 내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퍼지고. 





무심코 시킨 아메리카노.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움. 커피는 매우 근사했다. 견고한 아로마. 고소하면서도 깊이 있는 풍미. 끝 여운 속에서, 일부는 부드럽게, 일부는 거칠게 입 안을 휘감아 돌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여기저기 전화를 받았고 전화를 했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잠시 내 삶을 생각했고 길게 그동안 내렸던 내 의사결정들을 후회했다.






스트라다 로스터스의 커피에 매료된 나머지, 드립용으로 분쇄한 커피를 사가지고 왔다. 오래된 칼리타 서버, 드리퍼도 작은 것으로 새로 장만하고 드리핑을 했다. 물줄기는 얇게, 속도는 천천히, 그렇게 빙빙, 빙빙,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빙빙 돌아 여기로 온 걸까. 물줄기는 빙빙 돌아 커피와 섞여 근사한 드립 커피가 되는데, 나는 빙빙 돌아, 돌아, 왜 뒤쳐진다는 생각만 드는 걸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다시 읽으며 문학과 연극, 예술과 삶에 대해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에 대한 결론은 없고 오직 죽음만이 우릴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칼 야스퍼스였던가. 오직 죽어가는 나만 있을 뿐...이라고. 어쩌면 실존이란 바로 저것이다.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 나와 너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 



햄릿: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마음 속으로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냐.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 남은 것이 오로지 잠자는 일뿐이라면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서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잠들면서 수만 가지 인간의 숙명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최상의 것이로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 아마도 꿈을 꾸겠지. 아, 그것이 괴롭다. 이 세상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 망설여진다. 

- 셰익스피어, <햄릿>, 제 3막 1장 



하지만 다행이다. 작은 것들은 지친 우리를 위로해주고 있으니. 저 커피처럼. 


혹시라도 합정역에 가게 된다면 저 커피숍에 가길 바란다. 최근 몇 해 동안 마신 커피 중 최고였다.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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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지음), 난다(문학동네 임프린트)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다행이다. 이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는 건 좋은 일이다. 불문학자인 황현산 교수가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은 이 산문 모음집은 출간 후 몇 년간 많은 이들의 밤을 조용히 채웠을 것이다. 


글들은 대체로 짧고 읽기 편하며 담백하다. 실은 이런 글 읽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탓에, 이 책의 유명세는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나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약간 밍밍한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취향의 문제일 뿐,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편안하게 권할 수 있는 산문집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 220쪽 




  





밤이 선생이다 - 8점
황현산 지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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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La Pesanteur et La Grace 

시몬 베유 Simone Weil(지음), 윤진(옮김), 이제이북스 




신은 오직 부재不在의 형태로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 

- 183쪽 




나이에 따라 읽는 책, 읽히는 책은 달라진다. 새삼스럽게 지루하던 고전이 재미있어질 수 있고 웃고 열광하던 대중 소설이 식상해질 수도 있다. 이건 책의 탓이 아니다. 나이듦의 신비일 뿐이다. 


성당을 다닌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렇다고 미사에 쓰이는 모든 기도를 외우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시몬느 베유(1909-1943)의 마음을 알 것같기도 하다. 


이 책은 세계2차대전, 그야말로 전쟁통에 쓰여진 짧은 아포리즘 모음집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존재를 끌어당기는 ‘중력’ 앞에서 신을 향해 상승하려는 신앙의 은총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종, 자주 기독교적 테마가 극적인 불행,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속에서의 믿음, 신앙의 확인, 은총과 기적, 마치 그리스 고전비극의 한 장면들처럼 극적인 비애감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렇기 때문일 테고, 최선을 당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지켜 살아가는 선량한 우리-신앙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종교나 신앙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들이 살아가게 되는 삶의 서사구조일 탓이다.


책은 기독교적 테마로 가득하지만, 비극적인 상황,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또는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신, 보이지 않는 질서, 저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우주 그 자체에 의지하고자 하는 우리인간의 본성을 비애조로 노래한다.



창조는 사랑의 행위이며 영원하다. 매순간 우리의 존재는 곧 우리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그러나 신은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이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해 주는 신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겠다고 동의할 때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의 존재는 오로지 이와 같은 신의 기다림과 그리고 존재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동의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한 신은 우리들 곁에서 영원히 그 존재를 얻으려 애걸한다. 우리에게 주고 나서 바로 얻으려고 애걸하는 것이다. 

- 58쪽 



 



13살 때의 시몬느 베유





중력과 은총 - 10점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이제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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