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 '나'로부터
       
        세계가 있다. 그리고 난 그  세계를 본다. 그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없어도 세계는 존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난 세계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이미 지금 난 여기 있으며, 동시에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으로(동시에 난  내자신이 부재하
     는 상황을 인식할 수 없음으로). 그렇다면, 왜 난 세계 속에서 아파하
     는 것일까? 나의 고통 때문에, 혹은 타인의 고통때문에.  정말로 타인
     의 고통이라는, 보다 넓게 세계의 고통이라는 것은 내  고통이나 아픔
     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험상 세계의 아픔은  내 아
     픔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소설가 박상륭은  예술가들의 '메시아컴
     플렉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아픔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는
     길, 즉 나의 아픔과 세계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 현대사상의 모험 - 타케다 세이지(김원구 옮김. 우석. 1996)
       
        '치유'라는 단어 대신 '변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자(힘없는 단
     어와 힘있는 단어의 차이). 타케다 세이지는 현대사상-현대 프랑스 철
     학들-들은 헤겔-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발이거나, 그것에  대한 절망,
     혹은 연속이라고 정의내리며, 현대사상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현대사
     상들은 한결같이 니힐리즘이며, 회의론(懷疑論)이고, 그러면서 사회와
     개인 간의 적대적 관계에 대해 일방적으로 反사회적 심정을 감추지 못
     하는 사상이라고 정의내린다.
        헤겔 철학은 '절대적으로' 이성을 신뢰하였기 체계가 완성될 수 있
     었지만, 과연 그 헤겔적 이성은 믿을 만한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철학이라는 것들의 원조로  '니체'가 소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성'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
       
        * 학생운동 - 진보의 몸짓?
       
        요즘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들 중의 하나가 '난 왜  운동권이 되지
     않았을까'이다. 여기에 대해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대학을 처음
     들어갔을 때, '운동권 선배들의 그 일자무식' 때문이었다.  동시에 꼭
     평생 사회운동을 할 것같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대더니  지금은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다(* 무턱대고 따라다니던 동기들을 보면  말이 나오
     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난 학과의 아웃사이더가 되기
     로 자처했다.
        최근 임수경의 '난 이념보다 인간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버스 안의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다. 순간 난 내가 왜 운동권을 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왜냐면, 난 인간보다 이념을 믿고 있음으로. '이념'이라
     는 단어에 너무 현혹되지는 말자. 이것은 단지 임수경의 말 그대로 사
     용하기 위해서 선택한  단어일 뿐이다.  여기서 '이념'이라는  단어는
     '이성'이나 '철학' 등으로 바꾸어 사용될 수 있는, 광의(廣義)의 단어
     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광기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경험상으로 알
     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인간들은  한발 늦게
     도착한다. 모든 상황은 이미 '광기'들에 의해 종결되었음으로. 그렇다
     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개짓도 해보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어
     두운 전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진보의  몸짓은 '광기
     와 이성 사이'에서 오간다. 한총련이라는 학생운동 단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광기와 이성의 두 갈래 사이에서 한순간  '광기'로 가
     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국가권력의  광
     기'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추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광기는 합
     법적인 광기이다. 그래서, 홉스는 국가를 '리바이던'이라고 하지 않았
     는가). 이성은 언제나 합법적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광기를 제외한
     모든 광기는 비합법적인 것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광기를  만든 것
     은 무엇인가?
       
        * 다시 '이성'의 문제로
        
        국가 권력의 광기를 제조해낸 것은 '이성'이었다. 그리고  그 광기
     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이성'뿐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철학들은 그
     이성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버린다.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아무래도
     틀렸어. 이 세상은 너무 단단하단 말이야"라는 한탄의 목소리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전망이 아직도
     유효하다'라는 입장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다. 왜냐면, '이념은
     말로 지껄일 때는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보
     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념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가져오느냐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현대사상의 모험>>. 33쪽)
       
        타케다 세이지의 결론은 '그래도, 그래도, 진보를 위해서 ... ...'
     이다. 이 힘없는 결론이 포스트모던철학를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는 방법 중에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사회의 변혁 그자체를 초월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가능성이 하나하나의 인간이 저마다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초월을 찾는 것을 떠받쳐주는 근거가 된다는 이유로 의하여 현
     실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시도
     하여 보는 길을 저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같은 책. 241쪽)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발을 멈칫멈칫거린다. 이 멈칫멈칫거림의 흔적
     들이 우리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포스트
     모던철학을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율
     배반적 행위는 도리어 우리에게 화를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 이성: 유일한 희망
       
        내가 움직이는, 일종의 판단의 축은 크게 감성과  이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대립된다기 보다는 보완적인  관계를 형
     성한다. 이 보완적인 관계에 대해선 여러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이다. 대체로 작품창작에서는 '감성'에 의존한다. 하지만,  다른 것들
     은 대체로 '이성'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둘은 내  작품(혹은 사유思
     惟)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서로 도와주고 있다. 이성적으로  파악된 세
     계를 감성적으로 옮겨놓는 작업임으로.(1) 현대철학들이  '미학'에 주
     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난 현재 이 지점에 서있다.  왜냐면, '감
     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기 때문
     이다. 현대  예술들의  주류는 '감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들이
     다.(2) 모더니즘에서의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아방가르
     드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난 이 지점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다.
     난 나자신의 '이성'을 믿고 있음으로.
       
        _____________
        1. 여기에 대해선 부가의 설명이 필요하리라. 문제는  세계 인식의
     방법일 것이다. 과연 작가의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작가의
     '감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도대체 그 작가의 이성적  세계 인식
     과 감성적 세계 인식의 차이는 뭔가라는 의문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문장이다. 여기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경우라는 점이다. 나의 믿음: 작가는  최대한 합리적(이성)
     으로 세계를 파악해야 하며, 그 파악된 세계를 '재구성'하여 독자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 '재구성'의 방식에 따라 어떤 소설은 낭만주의소
     설이 되고, 어떤 소설은 누보로망이 된다.
       
        2.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부터  먼저 던져
     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견해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존재하
     다. 한국은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미
     국이나 유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신디 셔먼이나 에릭 피슬같은 예술가들을  모더니스트들로 분
     류하기에 그들은 모더니스트들과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들의 창작에 대해선 아직 뭐라 평할 단계가 되지 못한다. 이전과 구분
     되고, 뭔가 다르다고 두 손을 들고 환영할 것인가에 대해선 아직 미지
     수이다.
        이 문장에서  이야기한 '감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은  팝아트
     이후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선 그 이전의 미술의 흐름을 숙지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포
     스트모던 예술가들은 단호하게 이 미술의 흐름의 바깥으로 벗어나  버
     린다.
       
       
        * 덧붙이는 말
       
        01.
        혹시, 타케다 세이지의 <<현대사상의 모험>>을 사려는 생각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보다는 낫다.
     왜냐면, 타케다 세이지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1970년대 초두에 두 개의 상징적인 사건이  났다. 하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이고 또 하나는 아사마 산장에 있었던 연
     합 적군 사건이다. 왜 이 두 사건이 상징적이냐 하면  이들 사건은 이
     른바 좌우의 양익으로부터 사회 체제에 가해진 거의 마지막 직접 행동
     이었기 때문이다."(29쪽에서 30쪽)
       
        그의 이 문제의식은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 나카무라  유지로의 그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철학
     과 굴뚝청소부>>에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
       
        02.
        위의 글은 타케다 세이지의 문제의식과 내  자신의 상황(문제의식)
     을 서로 연관지어 작성한 글이다. 무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03.
        번역은 '개판'이다. '개판'이라는 표현도 어쩌면  약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으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이
     번역하지 그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저작권법에 의해 마음대로
     번역도 하지 못한다(* 꼭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난 일
     본어는 하나도 모른다). 이 책의 역자 약력을 보니, 이 정도의 번역도
     꽤나 힘들게 했을 것같다. 그러니, 이 책의 역자에 대해선  아무런 감
     정도 없다. 단지 이 나라의 번역문화에 대한 감정만 있을  뿐. 다분히
     감정적인 발언이지만, '번역 감사원'같은 것을 만들어  엉터리 번역들
     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곳을 만들면 좋겠다. 동시에 번역에 대해 학문
     적 성과를 인정해주어야 함은 물론이고. 

신고

Comment +0


질투 - 10점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민음사


질투la jalousie
. 알랭 로브-그리예. (현대의  세계문학 9권. 범한출판사. 1988)
        
        
          * Pour Le Vide *
        
       
        01: 사라진 인물을 위하여
       
        그가 사라졌다. 그가 '소설  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었으며, 화자이며,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지만, 지금  그는 소
     설 속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지점에서  <<질투>>라고 이름붙여진
     이 소설의 모든 비평적인 글들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마당
     에, 비평적인 글들은 과연 소용있는 것일까?
       
        02: '질투'의 화신인 '그'
       
        그는 '질투'한다. 그의 아내에 대해. A는 그의 아내이다. 아니, 아
     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가 소설 속에서 사라졌음으로, 그는  A에 대
     해 한 마디로 독자에게 하지 않음으로, 단지 그가 보고  있는 세계(표
     피表皮로서의 세계)를 그저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 A는  그의 정
     부일 수도 있다. 혹은 약혼녀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좋아하는 사
     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 혹은 추측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사라진 마당에 이 소설을 이
     해한다는 것이 과연 독자에게 무엇을 던져 줄 수 있겠는가.
       
        03: '지네', 혹은 질투의 고조高潮
       
        '지네'의 등장과 지네를 둘러싼 서술의 변화는 그의 질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부엌문은 닫혀 있다. 그 문과 복도의 활짝 열린 입구 사이에 지
     네가 있다. 커다란 지네로서, 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놈 중의
     하나이다. 촉각을 뻗치고 거대한 다리를  쫙 펴면, 보통 크기의  접시
     표면을 거의 가릴 정도로 크다.
        (중략)
        지네는 이미 위험을 눈치챈 모양이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
     는 것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촉각만  완만하고 연속적으
     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중략)
        (2)그 소리는 긴 머리칼  빗질하는 소리다. 비늘형의 빗살은  짙은
     갈색으로 반사하는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칼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면서
     머리 끝에 전기를 일으킴과 동시에, (중략).
        (3)두 개의 긴 촉각은 교대로 민첩하게 운동을 하고  있다. (중략)
     침묵 속에서 이따금 특징있는 소리가 들린다. 틀림없이 입의 부속기관
     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4)프랑크는 묵묵히 일어나서 타월을 집어든다. 그것을  둘둘 말아
     서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지네를 벽에다 눌러죽인다. 그리고 침실 바닥
     에서 그것을 발끝으로 비벼버린다.
        (중략)
        파란색으로 칠해진 박스형 자동차는 침엽수의 밑동에 충돌한다. 나
     무는 심한 쇼크에도 불구하고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5)즉시 화염에 솟는다. 자체  전부가 환하게 드러나고 탁탁  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번진다. 그것은 지네가 내는 소리다. 지네는 또다시
     벽 위 널빤지 가운데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6)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에는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슈우
     슈우하는 소리도 섞여 있다. 빗은 지금 잘 빗겨진  머리칼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 72쪽에서 74쪽(*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임).
       
        (1)지네의 등장과 그것의 소리는 (2)A가 빗질하는  소리이다. 그러
     나 다시 (3)지네가 내는 소리이다. 하지만, (4)프랭크는  지네를 죽인
     다. 그리고, 몇 개의 단락을 거쳐 프랭크의 차가 침엽수의  밑동에 충
     돌한다. 나무와 차가 부딪히는 소리. 불타는 소리.  (5)그러나 그것은
     지네가 움직이는 소리이다. (이미  죽은, 아니면 새로  등장한)지네의
     소리이다. (6)아니다. 그것은 A가 빗질하는 소리이다.
        그는 '질투'한다. 그의 질투에는 끝이 없다. 소설 속의  세계는 그
     가 바라보는 세계이지만, 그의 질투로 인해 그 세계는  일상적 서술의
     세계가 아니다.
       
        04: 다큐멘터리적 자아/비-다큐멘터리적 자아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이 죽어 있다. 이 죽어 있음의  상태는 이전
     소설들-누보로망 이전의-과의 차이에 대한 표현이다. A는 그녀 스스로
     생각한 것을 서술하지 못한다. A는 그의 시선 속의 질투의 대상으로서
     의 한 객체일 뿐이다. 그것은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질투'
     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이다.
     하지만, 그 카메라는 지금 '질투'에 불타고 있다. 불타는 카메라는 다
     큐멘터리를 다큐멘터리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소설 속의
     세계는 죽어 있는 세계이지만, 질투로 인하여  과거/현재가 뒤섞이고,
     객관적 사실/주관적 상상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질투에 불타는
     카메라'때문이다.
       
        05: 그가 사라졌다.
       
        그는 이 소설의 화자이며, 질투의 화신이다. 그는 이  소설의 숨겨
     진 작가이다. 하지만, 그 또한 소설 속 죽어 있는 세계 속의 일부분임
     으로 해서 죽어 있으며, 동시에 부재不在한다. 부재하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소설은 '죽은' 소설이다. 그 어떤  극적인 면도
     없으며, 그 어떤 감동도 없다. 감동을 느끼려 한다면, 이 소설과 이전
     소설과의 차이라는, 소설사적인 이해뿐이다. 하지만, 이  이해는 얼마
     나 감동적인가! 그러나, 이것은 비평가적 입장-사치스럽고 부르조아적
     인-일 뿐이다. 보통의 독자에게는 이 소설은 수면제이거나, 그 비슷한
     것일 뿐이다.
       
        06: '죽어 있음'(不在)
       
        '죽음'이 이 세계 속에서 부재함을 뜻한다. 그것은 이 세계 속에서
     그 어떤 발언도 하지 못함을  뜻한다. 그러나, '죽어 있는  상태'로서
     이 세계에 참여(;발언)한다. 즉, 죽음은 이 세계 속에서  부재함을 뜻
     하지만, '죽음'이라는 두 글자로서 이 세계에 현존한다.  이것은 인식
     론적 세계와 존재론적 세계의  갈등을 의미한다. 그는 세계를  인식한
     다. 그러나,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그의 두  눈과 두
     귀일 뿐이다(다큐멘터리적 인식). 그래서, 그는 A의  생각이나 프랭크
     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다. 단지, 그 읽어냄은 표피로서의  세계을 바
     라본 결과일 뿐, 이것은 그가 읽어낸 세계가 거짓일 수 있음을 의미한
     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A와  프랭크와의 삼각형의 한 지점에  있다.
     이 질투의 삼각형 속에서 그는  세계를 읽어낸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인식한 세계를 그가 존재하는 저점을  통해서 변형시킨다(비-다큐멘터
     리적).
       
        07: '사랑'에 대한 절망
       
        그는 그가 있는 세계 속에서 소외된 지점에 있다. 그것은 A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A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그의 질투를  낳고
     그 질투의 눈으로 그는 A와 프랭크를 바라본다.
       
        08: '버림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는 A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생각하는 모양이다). 동시에 이
     세계는 신에게서 버림받았다. 이 두 버림받음은 이 소설의  위치를 정
     해 준다. 그러나, 신은 이미 죽었고, A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사라졌다. 그는 소설 속에서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A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
     았다. 그는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는 잘못된 소설이다. 질투하지  않기 위해, 그는 A와  프랭크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A의 사랑을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그
     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 소설의 세계관은 '니힐리즘'이다. pour le
     vide. 그러나, A는 죽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는 그의 앞에 서있다.



* 아주 오래 전에 쓴 글이다. 하긴 로브-그리예의 이 소설도 읽은 지 꽤 되었다. 하지만 그 때의 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소설들 중의 한 권으로 자리매김될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에서 이 리뷰를 다시 올린다.



신고

Comment +0


자유롭지 못한 영혼 하나
또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날아와 보잘 것 없는
절망의 흔적을 남긴다

"누가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단지 ......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 그러나 사랑은 침묵이다. 우리는 모두 남모르게 죽어간다."
- 알베르 까뮈

몇 달만에 벗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모델이다. 그는 티브이에 나오기도 했으며, 곧잘 패션쇼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자유였다. 그는 그 자유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망가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에서 망가짐이란, '자본으로 온 몸에 떡칠하기'다. 일 년 전쯤, 그와 함께 강남의 술집과 호텔 나이트를 전전했으며, 새벽이면 이태원으로 나갔다. 지금 그는 술과 여자로 젊음을 탕진하고 있다. 오늘 전화기 속에서 그는 대뜸 나에게 "술 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밤 10시가 지난 상태라 은행 현금인출기가 되지 않는 까닭으로 해서 그의 작은 희망을 들어주지 못하고 말았다. 아마 그가 자유를 꿈꾸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망가지지 않고, 잘 나가는 "스타"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몇 명의 여자가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을 지나갔고, 몇 명의 남자는 베낭을 메고 인도로 떠났다. 가끔 자신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한 채 무너지는 젊음과 만나기도 하고, 가끔 자신이 누구인가에 집착한 나머지 모든 것을 버리는 젊음과 만나기도 한다. 술에 취해 아스팔트 위를 기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 허공을 비추는 별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난 기억하지 못한다. 술은 하늘의 별빛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모든 기억, 모든 아픔들은 술 속에서 묽어지고, 술과 더불어 우리들에게서 멀어진다.

오늘 누군가 아이디 해지 신청을 했고, 오늘 누군가 우리집에 전화를 걸어 아직까지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몇 년 만에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꺼내보았다. 책의 첫 여백에 적힌 글자들....

"내 사춘기 때 유일한 꿈은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 아직까지 사랑을 하지 못했다. 거짓으로 세상을 살아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활자의 틈 속에서 죽고 싶다. 영원히."
- 96.4.4. 涉.

혹시 꿈 속에서 꿈 속 허공을 나는 '검은새'를 만난 적이 있는가. 그 검은 새. 그는 우리들이다. 정처없이 아스팔트 위를 떠도는 90년대의 우리들. 그 위에서 상처 입어도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 단지 그 상처가 곪아가는 과정을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며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밖에 없다.

어제 집을 나간 그녀와 오늘 해지 신청을 한 그녀에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소설책 첫머리에 놓인 詩人 안재찬의 산문을 들려주고 싶다. 턴테이블에 존 레논의 'LOVE'를 올려 놓고.
신고

Comment +0

어둠이 내렸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알 턱도 없었고 알기도 싫었을 것이며 알려는 의지도 없었다. 이미 선 긋기는 시작되었다. 저 땅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곳.....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쓸쓸한 커피숍

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늦은 봄날의 일상
늦은 봄날의 일상
늦은 봄날의 일상
늦은 봄날의 일상
쇼핑몰 멤버십 프로그램 (e-commerce membership)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