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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빵굽는 타자기 - 8점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열린책들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지음), 열린책들


우리 시대는 근대 개인주의의 어떤 극점에 와 있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소설가가 바로 폴 오스터이다. 그는 어떤 인도주의나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지 않고, 아니 그런 것들에 심한 경멸감을 내비치면서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한 순간도 냉정을 잃지 않으며 감정의 쓰잘데기 없는 부분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은 차가우며 어떤 점에선 매우 매력적이고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이것은 과연 미덕인가, 악덕인가.

<빵 굽는 타자기>는 폴 오스터의 자서전 비슷한 것이지만, 꼭 자서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누가 알겠는가. 허구일지. 따지고 보면 진실에 기반한 자서전이란 없는 셈이다. '진실'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빵 굽는 타자기> 속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글을 어떻게 쓰고 어떤 고민을 하는가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문장이나 혹은 세계관 따위,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그런 것들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오는 것은 작중 화자인 '나'가 겪는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나의 시선에 의해 걸러지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즉 독자는 작가가 던져주는 평가에 만족해야 한다. 매우 권위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진다면 이 책은 아마 쓰레기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악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문제는 우리 시대가 폴 오스터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시대. 그 끝은 어디일까.

**********

뒤에 나오는 희곡 세 편은 읽지 않았다. <로렐과 하디, 천국에 가다>,<정전>, <숨바꼭질>. 재미있어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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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무한Ethique et Infini』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필립 네모와의 대화, 양명수 역, 다산글방. 2000





분명 앞으로 펴쳐질 100년 동안 윤리, 또는 윤리학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사유가 '존재'에서 시작되었기에 그 존재가 허무로 휩싸이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퍽퍽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는 부정되기 시작했으며 존재가 부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생의 허무(vanitas)'는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존재의 철학들(이 말이 가능하다면!)은 대학 강단에서, 먼지로 뒤덮인 책 속에서 걸어나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 철학들의 우두머리격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몇몇 명징한 말들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하고 너무나도 착한 이 사람은 타자에 대한 책임만을 말할 뿐, 자기자신에 대한 책임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책임성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므로 내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성이요 얼핏 보면 나와 상관없는 것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와 관계가 있고 내게 얼굴로 다가오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란 정말로 중요한 문구이다. 하지만 갑자기 '나'로 살아온 역사가 '나를 잊어버리고 타자만 배려하는' 역사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차이의 역사'를 증언한다면, 그래서 '타자의 배려'만을 강요한다면 그리고 레비나스가 이처럼 말하기를 계속한다면 나약하고 외롭고 지친 '나의 영혼'은 누가 돌볼 수 있는 것일까.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포스트모던의 주요 테마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부정만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뿐이다. '있음'으로서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

그는 '윤리의 증언은 앎이 아닌 계시'이며 '윤리란 거룩함의 요청'이라고 말한다. 그가 끝내 의지하는 곳은 '성스러운 종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철학의 어려움과 종교의 위로>이다. 왜 그는 종교로 발길을 돌릴 것일까. 이 세상은 다시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되었고 그것은 어떤 계시로 이루어진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해명을 구하고자 할 때 과거의 빛나는 철학적 영광은 이제 피바랜 청동거울로 변하고 오직 신만이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다시 중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옛 스승들이 그랬듯이 '불경'해져야 한다. 불경해져야 한다. 거친 황무지로 추방당한 존재로서 직접 맨 몸으로 세상과 대자적 위치에서 다시 존재를 세워야하는 것이다. 인생의 자그마한 위로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이 세상을 해명하는 의미에서의 종교란 고귀한 것을 추구하는 학자에게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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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 전에 번역되어 많이 읽히지도 못하고 사라진 소설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은 있을 것이다. 빠스깔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하층 계급의 여자와 상류층의 남자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하층 계급의 여자, 뽐므라는 이름을 가졌고 투명한 영혼을 지닌, 그녀가 거리를 걸어가면 주위의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어떤 매력을 지닌 여자와 파리 고문서 학교를 다니며 미래의 파리 박물관 관장이 될, 미래에 대한 야망과 꿈을 가진, 에므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서로 메워줄 수 없는 어떤 거리를 꼬집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에므리의 편이 아니라 뽐므의 편을 들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뽐므는 여자이기 때문에. 실제 그런 독자들이 에므리의 입장이 되었다면 에므리보다 나은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에 버림받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버림받는 여자들의 이야기에 더 감동받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래서 무수한 사랑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버림받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자란 과연 무엇일까?

에스테 빌라의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황금가지)라는 책을 읽어보면 남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 수 있다. 책의 첫 구절만 인용해보자.

"레몬색 리무진이 비틀거린다. 운전석의 젊은 여자는 서둘러 차를 세우고 내려 왼쪽 타이어가 평크 났음을 발견한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수리할 방도를 찾는다. 즉, 마치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력한 여성>이라는 이 국제적인 신호에 따라 곧 콤비 한 대가 멈춰 선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 "곧 해결될 겁니다"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듯 그는 수리 공구를 달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가 타이어를 손수 갈아 끼울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 (p.9)

이 책의 주제는 인용한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의 지성과 능력은 오직 여성을 위한 것이고 여성의 우둔함이 여성을 신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페미니즘은 이 책 앞에서 별 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흔하게 남자들은 여자들의 꾀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서.

2.
예술사에서 여자는 바라봄의 대상이었다. 여자가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나 그렇지 못할 때나 여자는 시대의 투영이었고 모호한 매력의 대상이었으며 시대의 바닥에 깔린 우울을 말해주었다. 그래서 <슬픔의 아테나>는 그리스 시대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 시대가 어떤 정신적 태도 위에 기초해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멜랑콜리와 다문화주의의 우울, 흔들림, 그리스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문화는 남성적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BC 455∼450 아테네 출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미술관
(Acropolis Museum, Athens)
Grand Collection of World Art


중세를 지나면서 '성모 마리아'가 예술의 주요한 주제로 부각된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라는 종교적 의미보다 예술가 자신이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보다 더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상. 여러 예술가들에게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상은 미켈란젤로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ieta
1499
Marble, height 174 cm, width at the base 195 cm
Basilica di San Pietro, Vatican


르네상스 전성기때의 성모마리아는 편안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보여준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미켈란젤로의 정신적 태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년의 미완성 작품인 론다니니의 피에타(Pieta Rondanini)에서는 그가 어떤 정신적 격동, 불안 속에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다른 마니에리즘 화가들이 여성을 표현함에 있어 비례의 파괴라든가, 창백하고 퀭한 얼굴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어떤 대상으로 내려앉은 여성의 경우 여성의 특성이 부각되기보다는 심미적 대상으로 탈여성화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ieta Rondanini, (unfinished)
1552-64
Marble, height: 195 cm
Castello Sforzesco, Milan


3.
그러나 탈여성화는 대체로 작품의 소재가 되는 여성이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녔거나 어떤 신성을 대변하고 있을 때뿐이다. 그러므로 예술사에서 작품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여성의 어떤 이미지를 나타내는가에 따라 구분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어머니의 여성과 섹스의 대상으로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가 될 때 대체로 고전주의 시대일 경우가 많으며 섹스의 대상으로서 여성이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가 될 때는 대체로 낭만주의 시대일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하기엔 이 지면이 짧고 요즘 유행되고 있는 두 화가의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자.

빈 분리파의 대표적인 두 화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와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 속에 나타난 여성상은 매우 비슷해보인다. 둘 다 놰쇠적이며 성적인 메타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쉴레의 작품은 감정적이면서 자기 파괴적이지만, 클림트의 작품은 지성적이며 자기 보호적이다. 쉴레는 자신의 여동생의 누드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생전에 주위의 조롱을 받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여동생의 누드를 그렸다. 그의 그림은 선이 매우 두드러지는 쫙 마른 여성들을 주로 그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chiele, Egon
Female Nude
1910
Gouache, watercolor and black chalk with white highlighting
44.3 x 30.6 c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한동안 '죽음과 소녀'라는 테마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슈베르트의 작품이 있었고, 에드바르트 뭉크의 작품도 있다. 그 외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여성의 음탕함과 죽음을 연결시킴으로서 여성의 부도덕성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전통적인 도덕적 명제를 품고 있다. 비록 후대에 와서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쉴레의 작품은 여성의 음탕함 속으로 스스로를 침몰시킨다. 여성의 음탕함은 바로 죽음이며 죽음 속으로 자신을 침몰시키는 것이다. 세기말 쉴레의 선택은 지극히 우울했고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클림트는 쉴레와는 반대되는 그 무엇을 선택한다. 클림트에게 있어 여성이란 '팜므 파탈'(숙명의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표현하는 여성들은 한결같이, 쉴레와 비슷하게 놰쇠적이며 성적으로 강조되어 있지만 그런 여성을 감싸고 있는 것은 기하학적 이미지들이다. 즉 기하학적 이미지로 여성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클림트의 세계 속에서 팜프 파탈로서의 여성을 기하학적 이미지, 지극히 이성적이며 남성적인 기호로서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클림트에게 여성이란 피해가야할 무엇, 방어해야만 할 그 무엇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Klimt, Gustav
Danae
1907-08
Oil on canvas 77 x 83 cm
Private collection, Gr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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