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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현대성의 경험 - 10점
마샬 버먼 지음, 윤호병 옮김/현대미학사




<<현대성의 경험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마샬 버먼 (윤호병, 이만식 옮김).   현대미학사. 1994.



01. 

"현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소용돌이로서 경험하는 것이고, 영원한 해체와 재생, 고난과 고통, 애매성과 모순 대립 속에서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버리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모더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든간에 자기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고, 현실, 아름다움, 자유, 정의 등 소용돌이의  도도하고 위험스러운 흐름이 허용하는 것들의 형태를 찾아서 그 흐름  속에 합류하는 것이다." ( 425쪽 )  

          

02.

마샬 버먼은 강력한 모더니즘 옹호자이다. 그것은 그가 이  책을 기획했을 1970년대 초반엔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지만,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엔 그가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꼭 다른 혹성이나 다른 은하에서 온  것처럼 되어버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모더니즘 옹호자가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던을 주장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들이 모더니스트임을 알지 못한 채  마샬 버먼을 낯선 시선으로 쳐다보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자아낸 것이다. 

          

버먼이 강력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발전과 파괴'라는 모더니즘의 강력한 특징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 <<공산당 선언>>, 보들레르, 페테스부르그, 뉴욕을 질주한다. 그리고, 어떻게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 버리고,  신성한 모든 것이 저속한 것이 되며, 인간은 마침내 제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진정한 인생의 조건 및 자기 동료와의 관계에 직면하도록  강요받는"가를 보여준다.( * ""는 <<공산당선언>> 속에서 인용된 것임) 

          

03.

발전한다는 것은, 진보한다는 것은 두메산골에서 나와  도시로 나와되는 것이며, 한 나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며,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현대 경제의 본질적인 역동성 및 이러한 경제에서 비롯되는 문화의 역동성은, 좀더 많은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세계를 새롭게  끊임없이 계속해서 창조하기 위해서 그것이 창조하는 모든 것 -  물리적인 환경, 사회제도, 형이상학적인 아이디어, 예술적인 비전, 윤리적인 가치 - 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349쪽 )

          

그러면서, 우리는 새로운 고향에 도달하는 것을 꿈꾼다. 

          

04. 

이 책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며, 무수한 책들이 펼쳐지고, 연극, 영화, 그림, 무용까지 '현대성'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경험되었는가를 증명해 주기 위해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 현대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전혀 다르게 평가되었고,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현대적'인가를 알기도 한다. 

          

05. 

불행하게도 마샬 버먼의 뛰어난 지식을 따라가기에 우리의 번역자들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  장-룩   고다르(Jean-Luc Godard)는   『호흡정지』(Breathless),『멋대로 살아라』(Vivre sa Vie) 및『여성은 여성이다』(Une Femme Est Une Femme)에서 파리의 거리를..." ( 391쪽 ) 

          

라고 옮기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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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윤 2012.09.12 17:18 신고

    책 읽다가 몇번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번역...아 이 망할 번역...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 루카치와 하우저의 대화).
                                        편역 반성완.    문학과비평. 1990
         
         
          01.
          새삼스럽게 '변증법'이라는 단어가 책 제목에 들어가는 걸 보니, 그
       동안 운동권의 논리에 의해 '변증법'이라는 단어가  얼만큼 훼손되었나
       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변증법'이란 단어는 하우저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은 내게 있어서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의미하고,  또
       그것은 나에게 매사를 두 가지 측면에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절대적
       자유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현상은 양면적이고 주관적이며
       제한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습니다.  모든 인간 행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순에 봉착하게 되는 내적 자극이나 아니면  물질적인 것입
       니다. 그리고 이 물질적인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속적인 능력과 숙
       련된 기술이 없으면 곧장 받아들여져서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적 자
       극과 물질적인 것이 대결을 해 나가는 가운데 모든 인간적인 업적이 생
       겨납니다. 예컨대, 사물의 조작, 인간의 지배, 노동의 생산, 그리고 정
       치, 경제, 학문, 예술의 모든 업적 등이 이러한 내적  자극과 물질적인
       대결 속에서 생겨납니다."(23 - 24쪽)
         
          02.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아직 읽지 않았다. 아직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사실로 인해 난 스스로 왜 읽지  않았나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아놀드 하우저의 저
       책이 우리 시대에 끼친, 특히 이 작은 나라에 끼친  영향이 지대함으로
       인해, 그 지대한 영향 속에서도 그 영향 바깥으로 벗어나  자유로운 사
       유의 힘을 보여준 글을 만나지 못했음으로해서 나 또한 그렇게 되는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을 읽으면서, 읽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
       놀드 하우저의 예리한 사유를 접하고 난 다음이었는데,
         
          "작품이 형식의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닙니다."(84쪽)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명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사람
       을 만나지 못했다. 여기서의 '형식'이란 고전주의의  그것도 포함되며,
       낭만주의, 모더니즘, 모더니즘 이후의 그것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즉,
       고전주의적 형식이나, 그 형식의 파괴나 현대의 형식의  몰락까지도 하
       나의 형식으로 포괄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형식은 일
       종의 시대적 기준으로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의 예술비
       평가들이나 문학비평가들은 형식의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지 않는
       다. 그동안 폭력적인 이데올로기(*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운동권이데올로
       기까지)에 의해 눌려져 있었던  것일까. 기본적인 형식이 되지  않아도
       뚜렷한 주제만 담고 있어도 인정을 받곤 한다(* 솔직히 말해 뚜렷한 주
       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어딘가).
         
          03.
          "괴테는 침묵이 때로는 모든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
       다고 상상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상황은 이러한  꿈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어가 완전히 침묵한  것은 아닙니
       다. 우리의 어려움은 괴테적인 의미에서 보면 예술의  종말은 정반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종말은   단지   예술시대
       (Kunstperiode)의 종말, 다시 말해  고전적, 낭만적 시대가 다  지나고
       난 후에  나타난 19세기  이후에 보는   예술 시대의 종말일  따름입니
       다."(31쪽)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
       다는 점입니다. 언어 자체가 문제적이 되었습니다.  사무엘 베케트같이
       누가 봐도 재능을 지닌 작가가 말을 하는 대신에 우물거리고, 무언가를
       전달해야 할 경우 더듬거린다는 사실,  즉 입을 다물거나 침묵을  하는
       것이 예술의 수단이 되어 버린, 한마디로 언어가 상실되고 부재하는 상
       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65쪽)
         
          인용된 하우저의 말은 예술의 위기에 대한 견해들이다. 그는 예술의
       위기가 예술의 종말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최근 이야기되는 미
       술의 위기나 문학의 위기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면서,  괴테적인
       의미의 '침묵'을 강조한다. 분명 괴테의 침묵과 베케트의  침묵은 다른
       것이지만, 둘 다 나은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임을 강조하며,
         
          "예술은 새로운 언어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합니다."(65쪽)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성급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를 얻기도 전에 포기하든지,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아예 몰락의 길을 자초하기도 한다. 하지만, 변증법적이라는 말이 환기
       하듯이, 그것은 예술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 위에서  벌어지는 투
       쟁인 것이다.
         
          04.
          '루카치와 하우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있지만, 이 두 학자의 대
       화는 얼마 되지 않는다. 전반부는 하우저의 대화들이며, 후반부는 하우
       저의 <<루카치 미학에 나타나는 <제 3의 소여>의 여러 변형들>>과 페트
       루츠의 논문과 반성완의 글 하나가 있을 뿐, 루카치와 하우저의 대화는
       전반부의 <50년만의 해후>에 약간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우저 스스로
         
          "저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외우(畏友)이자 제자로 남을 것이며 또 제
       가 당신에게서 힘입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처럼 잊지  않을 것입니
       다."(80쪽)
         
          에서 말하고 있듯이 루카치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1915
       년부터 시작된 부다페스트의  <일요써클>이라는 모임에서 비롯된  것이
       다. 이 모임엔 벨라 발라즈(*시인이자 영화이론가), 칼 만하임 등이 속
       해 있었다. 그리고, 이  모임의 중심은 루카치였다. 그러므로,  부제로
       붙은 '루카치와 하우저의 대화'는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하우저는 대
       화 내내 루카치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강조하고 있으니.
         
          05.
          최근 읽은 책들 중에 현대 예술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가장 명확한
       입장을 피력한 책이었다. 그런 만큼 손에 닿자 마자 쉬지 않고 읽었다.
       하우저의 책을 읽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말한 것은 예전에 하우
       저의 책을 읽었다면 분명 난 하우저의 절대적인 영향력  속에 머물렀을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인 영향력이 나의  내부에서 비롯
       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비롯된 것일 경우 그것을 뛰어넘기란 나로선
       매우 벅찬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한 듯 싶으나,  지금 상
       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의 전부임을 양해해주길 바란다). 아마 몇
       달간 계속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미루어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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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입문 - 10점
그래엄 터너 지음/한나래


         
문화 연구 입문

그래엄 터너 지음(김연종 옮김)   한나래
          


         
          이 책의 원제는 <<British Cultural Studies>>이다. 즉,  제목 그대
       로 영국의 문화 연구 전통에 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입문서라고 해
       서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서이기 때문에, 꼼
       꼼히 읽을 필요가 있기도 하다.
        
          이 책의 구성은 제 1부  기본 원칙들-<제 1 장 문화  연구의 이념>,
       <제 2 장 영국의 전통:간략한 역사>. 제 2 부 중심 범주-<제 3 장 텍스
       트와 맥락>,<제 4 장 수용자>,<제 5 장 민속지학, 역사학, 그리고 사회
       학>,<제 6 장 이데올로기>.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문화연구(혹은 문화이론)에 대한 교양강좌가  각 대학교(원)나
       사설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곳에
       서 이루어지는 강의는 절대로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난
       다면, 그건 강의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문화연구(문화이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적
       이 있었음으로해서 몇 권의 책과 여러 강의에도 가보았지만, 알  수 없
       는 묘한 반감같은 것이 있었다. 그 당시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
       만, 최근에 들어 약간의 가닥을 잡았다. 이 가닥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
       하기로 하고, 먼저 '문화이론의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적어보겠다.
         
          1.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
          2.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3. 담론은 권력이다.
         
          어느 강의에서 적은 것으로 기억되는  이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전적으로 구조주의적이며, 정치적이다. 첫  번째의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라는 문장에서의 '기호'란  꼭 글자 뿐만  아니라,
       영상기호, 패션, 건물, 도시공간, 모든 기호학적인 논의가 가능한 것들
       을 의미한다. 즉, 문화이론의 대상은 우리가(* 독자)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시간적인, 공간적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연구  대상으로 한
       다. 두 번째의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구
       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텍스트를 얼마만큼 분석해낼 수 있을까, 또한 과연 세상의 모든 것들을
       텍스트는 담고 있을까? 세 번째 '담론은 권력이다'라는 문장에서의 '담
       론'이라는 단어와 '권력'이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렇
       다면, '담론discourse'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담론들은 그것이 형성되는 제도와 사회적 실천의 종류에  의해, 그
       리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말을 하는 상대의 위치(position)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담론의 영역은 동질적이지 않다. 담론은 사회적이다.
       어디서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진술이 만들어지고 단어와 단어의 의미가
       사용된다. (... ...) 모든 제도(institution)에는 개인에게  배당된 담
       론이 있고, 담론의 위계질서(hierarchy)가 있다."
          - <<담론이란 무엇인가>> 다이안 맥도넬(임상훈 역. 한울) 11쪽에서
       12쪽.
         
          간략하게 인용하였지만, 인용된 부분을 통해서  보자면, '담론'이라
       는 단어가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해됨을 알 수 있다(*  '권력'이라는 단
       어에 대해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즉,세 번째  문장인 '담론
       은 권력이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지배담론을 쥐고 있는  자에게 권력
       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 이론이 우리 인문학의  주된 흐름
       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일까?
         
          먼저, 문화연구는 유럽의 학문이라는 점이다.
         
          "전체성, 그리고 분리되고 복잡한 부분들을 연결시키는 합리적 틀에
       기초한 설명이 위대한 대륙적 사고 체계의 특징이다."(이안 챔버스. 25
       쪽. 재인용)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니? 즉, 문화연구는 유럽적 학문의  한 경향
       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 먼저 '문화연구'를
       수입함에 있어 저 꼴 사나운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는 것부터  비판,
       분석하여 없애는 일부터 필요하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국내의 인문학연구자들은 서구의 그것을 무비판적
       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한 예로, 영국의 문화 연구에서 '하위
       문화sub-culture'에 대한 연구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짐으로해서 국내
       연구자들도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영국의 하위문화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
       을까? 폭주족(?), 혹은 건달(?) 양아치(?)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 부류
       의 문화가 그들의 하위문화일까? 내가 보기엔 전적으로  다르다고 생각
       된다. 영국의 하위문화적 전통은  젊은 세대의 부모세대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그 이전 세대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폭주족 문
       화는 팝문화영향 때문이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폭주족이었거나, 혹은
       그 비슷한 문화를 향유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너무  쉽게
       연구를 하려는 것같아 안타깝다.(* 연구를 하려면,  먼저 하위문화라는
       단어 자체부터 우리 실정에 맞게 새로 정의내려야 할 것이며,  또한 그
       것은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영국의  문화연구는
       그들의 인문학전통, 특히 영문학  전통에서 벗어나 이루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영국 문화연구자들이  이전엔 문학연구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때문이었다(*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좌
       파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연구는 전통 때문이라기 보
       다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엔
       임상훈처럼 문학을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  해석한다(;<<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 역자서문에서)). 하지만, 그 정치적인 이유는  이미 퇴색되
       어졌다. <<문화과학>>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문화'에 대해서 공개적
       인 채널을 통해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들 문화
       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문화과학>>이 노렸던 정치
       적인 목적은 이루어진 것같지 않으며, 문화담론들은 지배권력의 이데올
       로기로 이용되거나, 상업자본의 그것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
       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존재가 순수예술이다(* 필자의  순수예술에 대한
       사랑을 용서하시라). 여기에 대해선 다분히 감정적인 어조로 <<K에게>>
       라는 글에서 언급했음으로 그냥 넘어가겠다.
         
          글이 서평적인 성격을 넘어서버리고 말았다. 읽는 사람 각자 나름대
       로 읽어주었으면 싶다. 혹시, 현재 이야기되는 '문화연구'에 대해서 알
       고 싶다면, 그래엄 터너의 <<문화이론입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문화이론, 문화연구 라는 말을 섞어 사용하였다. 이 두 단어의 차
       이란 거의 없다. 단지 문화연구라고 했을 때에는 영국의 그것을  더 상
       기시키기는 하지만, 별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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