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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는 사람과 가슴에 많은 구멍을 가지고 있는 사람, 손가락 하나 사랑하는 이 가슴에다 심어주고 온 사람, 그렇게 세 명이서 만났다. 원래 네 명이 만나기로 되어있었는데, 한 명은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손가락'이 '고개'에게 손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개'는 웃기 시작했고, '가슴 구멍'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도 웃었다. 웃으면서 '고개'는 계속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고 '가슴 구멍'은 등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에 나 있는 구멍들을 통과해 나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손을 앞가슴 쪽에다 갖다대었다. 갑자기 돌풍이 몰아쳤고 '가슴구멍'의 몸에서 바람소리가 멜로디를 만들었다. '고개'는 너무 고개를 많이 돌려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가락'이 바지 주머니에서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 하나를 꺼내며, '이게 내 사랑이야, 음... 그녀의 향기
가 나...' 그리고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바람이 멈췄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마지막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자기 얼굴'라고 불렸는데, 늘 자기 얼굴에 걸려 넘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길을 가다 뭔가 걸려 넘어지고 난 다음에다 자기 얼굴이 몸에서 떨어져 길바닥 위를 뒹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고개'가 '자기 얼굴'을 보면서, '여전히 상처투성이군'이라고 말했다. '손가락'이 바지 주머니에서 딱딱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몇 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개'가 '한 시, 오후 한 시야'라고 말했지만, '가슴 구멍'은 '새벽 다섯 시', '자기 얼굴'은 '아침 열 시'라고 주장했다. '손가락'이 웃었다. '시간은 오후 세 시야. 그러니까 그녀의 가슴에 내 손가락이 붙은 시각이 오후 세 시야. 하하하.'

'자기 얼굴'이 또 넘어졌다. 그리고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기 얼굴을 주워 다시 목 위에다 달았다. 그러자 '손가락'이 주머니에서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을 꺼내 '자기 얼굴'에다 보여주며 '사랑의 향기'가 난다며 울기 시작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바람 한 가운데 네 명은 자기가 해오던 일을 계속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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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이론 넘어서기
- 서사구조와 그 한계



1.
몇 년전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말로 듣는 사람을 갑자기 소름 돋게 만든 이야기가 있었다. 승강기 안에서 들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엄마로 변신한 귀신의 아찔한 대화.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저 그런 공포담으로 받아넘기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어머니마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순간 우리들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대신 귀신을 등장시키는 이 공포이야기는 '가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믿음이나 가치가 상실되었고, '부모들'에 대한 아이들의 숨겨진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안쓰러운 이야기 속에서 요즘의 우리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믿을 수도 없음을,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따지고 보자면 이것은 근대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잘못된 귀결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또는 자유를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타인의 그것들에 대해서, 혹은 이 세상에 대해서 소홀해지고 그 틈 속에서 개개인들은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해'라고 중얼거리며 '고독감'에 휩싸인 채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음모이론'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한 대중문화의 서사구조의 한 양식에 불과하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지 못하고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그렇지만 합리적인 연구나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그것을 향해 가는 서사구조.


하지만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말한다면, 혹은 90년대 후반 하나의 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이 음모이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하다. 실제 이러한 '음모이론'은 그렇게 낯선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예로부터 있어왔고, 특히 근대(Modern)라는 이 시대는 그러한 이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음모이론'이 세간에 등장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속에서도 '음모'는 있었을 것이고 중세의 상업도시와 카톨릭교회 사이에서도 있었을, 계속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음모이론'이 나올 만한 시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았건만, 특히 한국이라면 7-80년대가 그 시기로 적당함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지금 '뜬금없이' 등장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2.
데카르트는 우리가 이 세상을 인식할 때 '절대적인 확실성' 위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법적 회의'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시킨다. 모든 인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결국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유명한 말로 '의심하는 나의 확실성'을 말한다.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확실한(명석 판명한) 인식'을 위해 자신의 감각과 그 감각으로 인식하는 외부세계를 먼저 부정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에서 '확실하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의 동어반복이다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외부세계를 부정하고 난 다음 자기자신마저 부정하려고 했지만 '의심하는 나'의 존재는 부정하지 못했고 이 지점에 서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이후 전개되는 모든 '근대적 사유'의 기본을 형성하게 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근법(perspective)'이란 데카르트적 사유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양식의 하나이다. 하나의 소실점은 '의심하는 나'의 시선을 보여주며 주위의 배경은 그 '나'가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표시해준다. 그리고 우리들은 사물을 배열할 때 '원근법'적으로 위치시키며 또한 그것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여긴다.

실제로 이것은 데카르트 이전 르네상스 고전주의-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에서 시작되었지만,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그 빛을 발휘하게 된다. 문학에서는 라신느, 꼬르네이유의 고전주의 연극에서, 그리고 이후 근대 소설에서의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주인공, 제1배우)와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제2배우)의 대립과 반목, 갈등에서 하나의 중심-프로타고니스트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실제의, 의심하고 생각하는 나-로 향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데카르트주의도 20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반데카르트주의의 현대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원근법적 구축물들을 거부하면서 우리들의 인생이란 기하학적이지도, 인과율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고 오직 '우연'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유양식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소설의 정의인 '필연적 허구'는 현대 소설에 와서는 '전적인 공상'이거나 '우연적 허구', 혹은 '서사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알랭 로브-그리예나 미셸 뷔토르의 '누보로망'이나 마르께스나 푸엔테스의 '마술적 리얼리즘',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속한다. 이제 데카르트의 믿음은 그간 우리를 속여왔고 진실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아무리 우리들의 삶을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적으로, 그래서 필연적 인생을 살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몸 속 깊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근대적 서사양식은 무너지고 포스트모던 서사양식이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우연' 속에 위치하게 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조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의 대중 문화적 반영이 '음모이론'이다. 그렇다면 실제 음모이론은 대중문화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3.
토니 스콧 감독의 블럭버스터 『Enemy of the State』의 시작은 지극히 사소하고 지극히 우연적인 계기에서 비롯된다. 통신감청법안을 반대하는 한 국회의원이 보안국 요원에 의해 암살 당하는 장면이 철새를 연구하는 대니얼의 카메라 속에 녹화가 되고 그 사실을 보안국에서 알게 된다는 상황설정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변호사 딘은 단지 속옷 가게에서 친구 대니얼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영문 없이 쫓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누구에게 쫓기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쫓는 방법이 예사롭지 않고 얼마 뒤 자신의 몸은 온통 도청장치 투성이였고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노출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신용카드마저 사용정지를 되고 심지어 그가 최근 누구와 친하게 지내며 과거에는 무엇을 했는가하는 행적까지도 알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비밀이란 없고 순식간에 그는 '국가의 적'이 되어 쫓기기 시작한다. 이렇듯 현대의 국가 안에서 한 사람의 비밀이나 행동의 자유란 누군가의 감시 아래서만 허용되는 셈이다. 국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과거 경력뿐만 아니라 현재의 여자친구, 신용카드의 비밀번호, 자주 가는 술집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대중매체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정보화시대'의 실체인 셈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에도 '비밀번호'나 '신상정보' 누출에 주의해야하고 집의 전화로는 중요한 대화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올 국회에서 '도청', '감청'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모습에서 『Enemy of the State』가 영화 속 허구로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의 국회의원이 네다섯 개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실에서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권력 앞에서 우리들의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음모 이론'의 서사구조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가를 대강 알 수 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개인이 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곤경'에 빠지게 된다. 쫓기기도 하고 신용카드가 정지 당하며 하던 일이 계속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거대권력기관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구조는 매우 상투적인 것이다. 가령 질 미무니 감독의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L'Appartement』은 이러한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가 애정 영화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막스와 리자 사이에 끼여든 외로운 사랑의 소유자 알리스는 이 삼각관계에서 '음모'를 꾸미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막스에게 접근하고 그의 사랑을 유도해내지만, 무모한 사랑의 집착은 이 영화의 결말을 비극으로 이끈다. 리자는 죽고 알리스는 사랑에 실패하게 되며 막스는 자신의 사랑을 고작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리자는 앞에서 언급한 서사구조에서의 곤경에 빠지기만 하는 한 개인의 역할을 수행하며 알리스는 한 개인을 계속 곤경에 빠뜨리는 거대권력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4.
하지만 이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거대권력기관의 유/무이고 또한 음모이론의 서사구조가 다른 서사구조들과 구분되는 유일한 차이점 또한 바로 이것이다. 모든 서사들은 실제 현실의 반영임으로 해서 그 서사의 무게 또한 실제 현실의 무게와 비례한다. 그러므로 다른 서사구조들 보다 '거대권력'이 들어가는 음모이론의 서사구조에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Enemy of the State』에서 보여지는 힘없는 한 개인과 거대권력기관, 혹은 약자와 강자와 같은 이런 서사 구조는 실제 역사를 통해 부단히 반복되어온 테마이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했을 때, 그것은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음모'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 기존 체제가 잘못된 체제였을까?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놀라운 사실 하나는 로마의 현명한 왕들이 초기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서기 161년에 로마 황제가 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명상록』을 남겼고 이성을 숭상했으며 학식과 교양이 풍부한, 로마의 현명한 황제들 중의 한 명으로 역사에 남아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기독교학자였던 저스트 마틴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죽었다. 그렇다면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떤 이유를 이들을 죽였던 것일까? 지나친 판단일지도 모르나 전체적인 역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가 어떤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이미 파악했다고 보는 편이 정당할 것이다. 즉 중세 천 년 동안을, 그리고 근대에까지 종교재판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종교의 힘이 로마를 집어삼킬 것임을 로마의 몇몇 황제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이야 '유일신신앙'만을 주장했을 뿐이지만, 그 주장은 주술적이고 혼성문화적인 로마의 헬레니즘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고 기존의 문화 체제를 거부하는 반체제 행위였던 것이다.

간단하게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현재 특별한 주술적 의미도 없는 '단군상'을 몇몇 철없는 기독교인들이 훼손하는 것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얼마 정도의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지금의 단군상을 고대 로마로 비유하자면 '만신전'에 모셔둔 여러 신들 중의 하나였을 테니깐. 이러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그 당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박해는 요즘의 우리들이 말하는 '음모이론'이였을 테지만 지극히 평범한 로마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상황은 정반대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에서 고대 로마의 체제와 기독교도들과 관계에서 설정되는 음모이론의 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음모이론과는 상황이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기독교도들이 원하는 것이 종교적 자유였지만 그들이 종교적 자유를 얻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이교도들은 종교적 자유를 박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자유'이며 천 년 넘게 유럽인들은 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았다.


5.
이미 결론이 나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음모이론'의 유무를 따진다는 것은 매우 가치 없는 작업일 수도 있다. 즉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테마를 반복해왔고 기존의 체제를 새로운 체제를 거부하며 시기하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가령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우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정확히 말해서 그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이다. 왜냐면 이미 그 종교재판에 임했던 카톨릭 주교들도 지동설이 사실임을 깨닫고 있었거나 전적으로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동설이 사실이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싸워야만 했다. 그렇다면 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70년이 지난 후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아야만 했을까?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그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문제는 '우주라는 이 거대한 책은 ‥‥‥ 수학의 언어로 저술되었고 그 알파벳은 삼각형, 원, 여타의 기하학적 수식으로서, 그것들 없이는 우주의 단 하나의 단어도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한 채 어두운 미로를 배회하고 있다'(『The Assayer』, 1623)라고 말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근대적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인물들 중의 한 명이었고 그 방식은 종교가 중심에 있던 시대의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상업 시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카톨릭교회는 그를 종교재판에 세웠고 지동설이 진실임이 명확한 상황 속에서 교황과 주교들은 갈릴레이에게 거짓을 강요했던 것이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서 우리들의 알고 있는 '음모이론'의 구도는 명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거대권력기관인 '종교집단'과 한 개인인 '갈릴레이'의 갈등. 하지만 우리가 현재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음모이론과 달리 여기에서는 역사가 갈릴레이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후세의 우리들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실은 음모이론이 아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을 '음모이론'이라고 주장한다면 음모이론은 너무 많아 일일이 따질 수 조차 없어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7-80년대에 한국에서 사회운동을 하다 투옥된 사람들 전부가 이러한 음모이론의 구도 속에 위치하며 잘못된 판결이나 오해로 누명을 뒤집어쓰는 사람들도 모두 이러한 음모이론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음모이론이란 하나의 이론이라기 보다는 그저 하나의 명칭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진실의 편에 속해있지만, 외면 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무마하기 위한. 혹은 진실을 숨기기 위한 거대 권력의 간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이론'이 지금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 이유는 세계는 너무 거대화되었고 이 세계 속에서 한 개인은 고작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절망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보면 과연 이렇게 많은 이들이 어디에서 걸어나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을 것이고 그들 나름의 가치관이나 행동방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하지만 그 순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우리들은 눈 앞에 닥친 일상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이 몇 명쯤 될까?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 그 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고 다시 스쳐지나가더라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다. 이 익명성 속에 우리들 자신도 포함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스타병'에 걸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떻게든 자신을 널리 알려 익명성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무의식적 갈구. 하지만 그것은 가능할까? 현대인들은 천천히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죽더라도 내 죽음에 신경을 써주는 이들이라곤 '가족'이거나 심지어 '가족'마저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그 공포이야기는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듯 한 개인의 죽음은 너무나 사소해서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셈이다. 커다란 회사에서 몇 명이 정리해고를 당한다고 해서 그 회사가 망하지 않듯이 몇 명의 개인이 사고로 죽거나 자살을 하더라도 이 사회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거나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 사회는 끊임없이 한 개인에게 강요하지만 사회는 그 개인의 인생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한때 데카르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확실성의 기초로 삼은 '생각하는 나'는 이제 회사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으며 이 세상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이런 경우를 당하기 싫으면 이 세계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나는 은행만을 위해서 일한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라는 짤막한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 30대 가장(家長)의 모습에서 우리들과 관계없는 한 타인의 모습 대신 우리들의 쓸쓸한 자화상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음모이론은 90년대 후반의 자연스러운 대중문화의 한 양식으로 우리들 옆에 자리잡게 된다.


7.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음모이론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 그 속에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품지만 그 곳에서 정지한다. 이 거대한 세상 속의 한 평범한 개인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자기가 왜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조차 모를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진실이란 없고 이 거대한 세계 속에 살아남기 위해 껍데기로서만 살아가는 자신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음모이론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이 세계의 희생양으로 설정하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의 음모라면 최소한 '어쩔 수 없다'라는 포기라도 할 수 있으리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아예 '외계인의 음모'라면 상황은 매우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는 그러한 음모이론을 다룬 영화를 보며 한 사소한 개인의 영웅적 행위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의 본질을 이룬다. 즉 그것의 시작은 현실 속의 한 우연적 사건이지만 그것을 메워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상상'에 의하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서사의 한 양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음모이론이란 거대권력기관의 음모로 희생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것들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그것이 '음모'였다는 것이 결론 날 뿐 지금의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의 음모이론은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그것의 뒤에는 끔찍하고 가공할 만한 음모가 들어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이거나 검증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현대인들의 고독하고 처량하며 껍데기 인생을 위한 위안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군가가 우리들 침실을 엿볼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법이 한 개인의 완벽한 방패막이 되어 주리라고 믿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음모'이며 음모 한 가운데 우리들은 서있다 하더라도 음모이론은 우리들의 곤궁한 삶의 변명을 제공해주며 한순간의 위안이 될 뿐, 그것의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모든 포스트모던 서사 양식이 비난받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현실/가상의 경계를 흐려놓고서 현실의 문제를 가상의 범위(상상의 공간) 안으로 들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 문화의 대표적인 서사양식인 영화는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친절한 이웃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라곤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할 뿐이다. '음모이론'은 늘 충격적이고 돌발적인 서사를 동반한다. 의외의 곳에서 어떤 사건의 진실이 숨어있다는 식의 설정은 믿을 곳이 사라져가는 현대인들이 어떤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원하는 것이라곤 오직 돈을 보기 위해서 더욱 잔인하고 충격적인 영상이나 서사를 만들어낼 뿐이다. 만약 이 세상에 진실이 있다면, 천박한 상업주의와 대중문화들은 우리들에게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오직 한 순간의 재미와 쾌락, 달콤한 위안만을 선사할 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은 우리들의 처지가 더욱 힘들어져 병적으로 그것에 빠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우리들이 용기 없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그 속에서 잠시라도 잊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대중문화를 향유하면서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의 인생이 우리가 진정 원하던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있다는 사실, 심지어 사랑마저도 믿지 못하는 상황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 속에서 '자기 반성'이란 등장하기 않고 오직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그 누군가를 향해 있는 것이다.

8.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대중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가 원한 것은 '과연 미술이란 있는 것인가?'라고 한 번쯤 대중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서 기존의 통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원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그 작품으로 인해 일약 미술계의 스타가 되었다. 음모이론이 한 번쯤 눈 여겨 볼 가치가 있다면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 세상의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음모이론의 신봉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듯이 우리는 왜 우리들이 음모이론들 속에 파묻혀 있는지를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뒤샹이 '변기'를 보여주면서 그 당시의 대중에게 원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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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Baroque)와 로코코(Rococo)를 분리된 예술사조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면 로코코는 자신감 넘치던 바로크의 숨겨진 이면을 예술가 스스로가 깨닫게 된 것에 불과하니깐. 그리고 예술사에서도 흔히 로코코를 바로크 예술의 후기 경향으로 분류한다.



바로크 예술가로는 바흐, 베르니니, 카라바지오, 렘브란트, 푸생, 루벤스, 베르미르 등등이 속한다. 음악에서는 통저음과 변주의 형식이 등장하고 미술에서는 인간적인 면모의 강조와 빛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형식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적 화풍은 확고한 질서 속에 대상들을 위치시키길 원하지만 바로크는 끊임없이 변하고 운동하는 이 세상의 우연 속에다 대상들을 위치시킨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 병들어 죽는 풍경을 자신만만하게 묘사하기도 하고,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 수녀의 표정이 꼭 오르가즘에 빠진 여인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고, 칼로 목을 베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하드보일드’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이 세상의 진리를 포착하겠다는 예술가적 본능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점에 이른 바로크를 ‘바로크적 고전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다보면 어떻게 되는가를 로코코의 예술가들은 보여주고 있다. 즉 뜨거운 사랑이 지나가고 난 다음 남는 것이 섹스에 대한 공허한 갈망이듯이 로코코 예술가들은 그것을 진실하게 보여준다. 


Fragonard의 <그네>라는 작품을 보면 바로크가 어떻게 로코코로 향해갔는가를 알 수 있다. 운동과 빛에 대한 배려가 이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관능성이 지나쳐 지극히 퇴폐적이다. 그리고 그네를 타고 있는 여인의 치마 속을 상상해 본다면 로코코의 퇴폐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음증환자 처럼 그네 바로 아래 한 남자가 올려다 보고 있다. 바로크의 빛과 운동은 그네를 타는 한 여인의 치마 속을 향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로코코는 와또와 모짜르트에게 와서 끝도 없는 유미주의로 빠져버리고 만다. 와또가 화려한 색채로 그의 그림을 꾸미는 이유는 여인의 치마 속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로크적이고 매우 건강했던 사랑이 희미해지자 사랑을 지탱시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관능이 등장하고 그 관능이 생의 거짓된 안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꾸며놓은 작품 속에 자신의 꿈을 새겨넣는다. 즉 로코코는 바로크의 숨겨진 이면인 셈이다.



현대는 매너리즘의 시대이면서 군데군데 로코코적 장식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수지나 나스타샤 킨스키같은 여자들이 인기를 독차지 했던 시대가 로코코 시대였다. 바로크에서는 건강한 여자들이 인기가 많았지만 그 건강성도 로코코에 와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현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넌 사랑을 믿니? 훗, 난 섹스를 믿어. 한 번 하자’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섹스를 하나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자는 말 속에는(* 지극히 예술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퇴폐를 숨기기 위한 거짓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냥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편이 훨씬 진실된 모습이다.


* 요즘 읽고 있는 책들 중 하나가 프랭클린 보머의 『유럽 근현대 지성사』(현대사상사)인데, 위의 글과 관련된 언급을 하려고 한다.


푸생은 1642년에 친구에게 “나는 기질상 혼잡함을 피하고 잘 정돈된 사물을 찾고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고 썼다. 또한 프랑스의 모든 화가 중에서 가장 ‘고전주의적’이고 가장 지적인 이 화가는 특히 생애 중반에 그린 풍경화에서 - 케네스 클라크의 말에 따르면 - 자연에게다 “질서와 영속성이라는 풍채”를 부여하고자 시도하였다. <포키온의 장례식>(1648)과 같은 그림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자연은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평선적 요소와 수직선적 요소가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푸생은 이런 균형을 얻기 위하여, 주로 고대양식에 따른 건축물과 신전 등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이상(理想)과 영원함에 대한 감정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63쪽)


-- 보머의 시각은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푸생과 브왈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 말은 그 당시 유럽 대륙의 예술적 경향들 속에서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고전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17세기는 바로크의 시대였지만, 프랑스 문학에서는 라신느, 꼬르네이유, 몰리에르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문학이 휩쓸고 지나간다. 이 불일치에 그렇게 당황할 필요는 없다. 보머가 지적하고 있듯이 17세기의 사람들은 “새로운 항구적인 사물체계”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 이 시기의 고전주의자들은 말 그대로 ‘고전’을 통해서 질서를 파악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을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하나의 질서를 포착할 수 있다는 예술적 자신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자신감이야말로 ‘근대인’을 특징짓는 성격들 중의 하나이다.


* 제르맹 바쟁의 『바로크와 로코코』(시공사)은 꼭 자료집같다는 느낌 때문에 재미있게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만 읽고서는 바로크가 무엇이며 로코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서문에 뵐플린을 빌어 고전적 미술과 바로크적 미술을 설명한 문장은 깔끔하다. : 


“고전적인 미술은 자연에 등을 돌리지 않으므로 관찰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현상의 무질서함을 넘어서 세상의 질서 이면에 놓여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구성은 단순하고 명료하며 구성의 각 부분들은 제각기 독립적이다. 또한 정적이며 틀 안에서 폐쇄된 형태를 하고 있다. 반대로 바로크 미술가들은 다채로운 현상에 참여하고자 하며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사물의 유동성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구성은 역동적이며 개방되어 있고 틀을 깨고 외부로 확장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구성을 이루는 형태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행위 안에 서로 연관되어서 따로 따로 분리될 수 없다. 바로크 미술가들은 확장하고자 하는 기질로 인해 정적이며 육중한 형태보다도 ‘유동하는 형태’를 선호하였으며, 고전주의자들이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파토스를 선호하여 고통과 감정, 삶과 죽음의 모습을 가장 격렬한 형태로 묘사하였다.”(6쪽에서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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