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 8

물, 프랑시스 퐁주

물 프랑시스 퐁주 나보다 더 낮게, 언제나 나보다 더 낮게 물이 있다. 언제나 나는 눈을 내리깔아야 물을 본다. 땅바닥처럼, 땅바닥의 한 부분처럼, 땅바닥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반짝이며, 형태 없고 신선하며, 수동적이라 못 버리는 한 가지 아집이라면 그것은 중력. 그 아집 못 버려 온갖 비상수단 다 쓰니 감아 돌고 꿰뚫고 잠식하고 침투한다. 그 내면에서도 그 아집은 또한 작용하여 물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순간순간 제 형상을 버리고, 오직 바라는 것은 저자세, 오체투지의 수도사들처럼 시체가 다 되어 땅바닥에 배를 깔고 넙죽이 엎드린다. 언제나 더 낮게, 이것이 물의 좌우명. '향상(向上)'의 반대. (역: 김화영)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오랜만에 읽는 이름. 프랑시스 퐁주. 물에 대한 시다. 물은 ..

눈,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 윤상인, 박이진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이런 인터뷰집은 감동적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인터뷰를 위해 그가 냈던 소설들을 다시 읽었고(거의 50여 권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한 오자키 마리코는 질문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은 지 십 수년이 지난 나에게도 이 책은 , , 을 읽던 그 때 그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리어 최근 들어 오에 겐자부로를 읽지 않았구나 하는 후회까지 들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가의 일반적인 인터뷰집이라고 하기엔 문학(이론)적이고 다양한 작가들-일본 작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작가들-이 등장하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

지금에 대한 잡생각

일이 바빠서 - 이것도 핑계일 지 모르겠지만 -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다 보니, 책읽기, 글쓰기가 형편 없어졌다. 며칠 사이로 좋은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다음에 링크를 달아 블로그에 올려야겠다. 페이스북을 하다보니, 정리되지 않은 단상을 올리고 그것으로 끝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글의 길이가 짧아지고 깊이는 얕아졌다. 여튼 그런 단상들 중 일부를 아래와 같이 옮긴다. 여유가 된다면 관련된 책들도 몇 권 읽고 길게 정리하고 싶지만, ... 늘 생각에만 머물 뿐이다. * * 정치에 대한 글을 적었다. 야당의 모습을 보면서 한심해서 적은 글이다. 몇 주 전에 적은 글이라 시의성이 떨어진다. 얼마 전 원내대표가 된 이종걸 의원은 한순간 언론에서 자신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건 (너무 불행..

평일 정오, 한강 공원

몇 장의 사진, 몇 줄의 문장, 몇 개의 단어, 혹은 유튜브에서 옮긴 감미로운 음악,으로 내 삶을 포장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진 못했다. 점심 식사를 하고 한강시민공원까지 걸어나갔다. 더웠다. 근처 직장인들은 빌딩 앞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짙게 화장을 하고 곱게 차려입은 처녀는 향수를 뿌린 흰 와이셔츠 총각을 향해 윙크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평일 점오의 한강변은 텅 비어 있었다. 멀리 강변북로가 보였고 서쪽으로 흘러가는 강물 위로 유람선이 지나갔다. 이상하고 낯선 모습이었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겠지만, 이게 자연스러운 풍경이겠지만, 약간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지나치게 낯선 풍경은 이국적이나,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와 우리를 두려움와 공포로 둘러싼다. 어쩌면 그건 그건 이 세상에 어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