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58

현충일 국립묘지 방문기

현충일 국립묘지엘 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하철에서부터 사람들이 빼곡했다. 동작역에서 나와 보니, 경찰관들이 임시 횡단보도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유가족들도 있었고 군인들도, 경찰관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현충원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면서, 위패봉안관에 갔다.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 곳이지만, 현충일 유가족들을 위해 개방하고 있었다. 위패봉안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유골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 위패만 모아둔 곳이다. 위패봉안관 옆에선 유가족 유전자 시료 채취를 하고 있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유해를 발굴하게 되면 그 뼛조각과 유가족의 유전자와 비교해 유족을 찾아주는 것이다. 유해발굴감식단의 활동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위패들만..

일요일 출근

1. 봄날이 간다. 여름이 온다. 비가 온다는 예보 뒤로 자동차들이 한산한 주말의 거리를 달리고 수줍은 소년은 저 먼 발치에서 소녀의 그림자를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그 사이로 커피향이 올라오고 내 어깨에 매달린 가방의 무게를 잰다. 내 나이를 잰다. 내 남은 하루, 하루들을 세다가 만다. 포기한다. 2.포기해도 별 수 없는 탓에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게 된다. 포기해도 된다면, 포기가 좋다. 내려놓든가, 아니면 그냥 믿는다. 포기를 해도 남겨진 삶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포기는 그저 단어일 뿐, 행동은 아니다. 3. 비가 내리는 날 저녁 황급히 들어간 카페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 저녁 식사의 수선스러움을 기억한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일상. 그런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텅 비어가는 중

5월 7일. 텅 빈 대체 공휴일. 아무도 없는 사무실. 인적이 드문 골목. 몇 시간의 집중과 약간의, 불편한 스트레스. 태양은 빠르게 서쪽을 향하고 바람은 머물지 않고 그대는 소식이 없었다. 봄날은 하염없이 흐르고 내 마음은 길을 잃고 내 발길은 정처없이 집과 사무실을 오간다. 운 좋게 예상보다 많은 일을 했고 그만큼 지쳤고 어느 정도 늙었다. 몇 만 개, 혹은 몇 백만개의 세포가 소리없이 죽었고 텔로미어도 짧아졌을 것이다. 책 몇 권을 계속 들고 다녔지만, 5월 내내 읽지 못했다. 밀린 일도 많고 읽을 책도 많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대체공휴일, 조금의 일을 했고 나를 위해 와인 한 병을 샀다. 그리고 마셨다. 최근 콜드플레이를 우연히 듣고 난 다음, 아, 내가..

카프카의 드로잉. 그리고

카프카의 드로잉을 한참 찾았다. 뒤늦게 발견한 카프카의 그림. 하지만 제대로 나온 곳은 없었다. 잊고 지내던 이름, 카프카. 마음이 어수선한 봄날, 술 마실 시간도, 체력도, 여유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살짝 절망하고 있다. 한 때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나를 사랑하던 존재들이, 내가 그토록 원하는 어떤 물음표들이 나를 스치듯, 혹은 멀리 비켜 제 갈 길을 가는, 스산한 풍경이 슬라이드처럼 탁, 탁, 지나쳤다, 지나친다, 지나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오늘을, 십년 전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똑같이 내 십 년 후의 오늘을 지금 나는 상상할 수 있을까. 뜬금없는, 나를 향한 물음표가 뭉게뭉게, 저 뿌연 대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새벽, 여전히 사는 게 힘들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 그건 변하지 않았구..

요즘, 자주, 스타벅스엘

요즘, 자주, 스타벅스엘 간다. 오늘의 커피를 시킨다. 기다린다. 5분. 3분. 2분. 1분. 커피를 받아들고 걷거나 앉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낯설다. 익숙한 풍경 속의 낯선 나. 시간이 갈수록 내가 낯설어진다. 익숙한 나는 저 멀리 있고 낯선 내가 나를 드리운 지도 몇 년이 흐른 걸까. 나는 익숙한 나를 숨기고 낯선 나로 포장한 지도, 무심히 보내는 오월 봄날처럼 둔해진 건가. 요즘, 자주, 읽지 못할 책을 펼친다. 롤랑 바르트. 그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언제였을까. 오직 바르트만이 줄 수 있는 위안. 그건 언제였던가. 누군가를 만나 바르트 이야기를 하고 바르트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마시고 바르트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신 적은 언제였던가. 바르트가 이야기한 사랑과 문학과 사진과 그 자신을..

파리 Paris, 명동 Myeong-dong

아직 대기 틈으로 봄이 스며들기 전, 혹은 그렇게 스며들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안은 숙녀들이 지나가던 세종로 인근 카페에 들어가 잠시 머물렀지.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고, 그 남자도 지나고 그 여자도 지나고 사랑도 지나고 이별도 지나고, 내 철 없고 순수하던 마음도 그렇게 지나가 버렸지. 하지만 내 몸은 철 없는 채로, 순수한 채로 여기 있는데, 이 몸에 어울리던, 그 마음은 사라지고 지치고 의욕 마저 희미해진, 누군가의 마음만 남아 그 몸과 싸우고 있었지. 그러다가 어느 새 봄이 오고, 황사가 오고, 미세먼지가 내 코와 입을 통해 내 폐로 들어오고, 내 깊은 마음 속으로 들어가, 억지로 잊고 있었던 그 옛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따스한 계절이 오고, 그 핑계로, 혹은 다른 핑계로 술을 마시고 자유로운 일탈..

바니타스 Vanitas

제프 쿤스도 그렇고 데미안 허스트도 그렇고 현대 미술에서 잘 나가는 스타 예술가들을 보면, 진지함보다는 번뜩이는 재치와 탁월한 유머와 놀라운 비즈니스 감각과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풍부한 비평적 언어와 적절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재/주제를 제시하고 어느 공간에서나 어울리면서 그 중심에 예술 작품이 위치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궁금하게 한다. 예술작품 앞에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사람이 무조건 한 두 마디를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실패하지 않는 작가가 된다. 다른, 심각하고 진지한 예술가 앞에 서서 현대 미술을 주도하는 예술가가 되는 셈이다. 현대를 가벼움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 현대의 공기일 것이다. 느린 속도는 태도의 진지함을 부르고..

2월 21일

최근 몇 년 꽤 힘든 나날을 보냈던 건 사실이다. 그게 잘못된 이직 탓인지, 아니면 내 능력 부족인지, 어쩌면 둘 다인지... 고민하더라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할 수 있는 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임을. 나이가 들면 말이나 행동이 분명해질 것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정반대가 된다. 매사에 자신이 없어지고 알고 있던 것도 다시 한 번 더 묻게 된다. 최근 블로그에 신변잡기는 거의 올리지 않고 책 읽은 티만 냈다. 이번 주부터 헤밍웨이 인터뷰를 읽기 시작했다. 몇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탓에, 심리학 책 한 권, 앨리스 먼로 단편집, 헤르만 헤세 수필집과 함께 같이 읽고 있다. 헤밍웨이의 대표 소설들은 거의 다 읽었는데, 기억 나지 않는다. 해는 또다시...나 누구를 위해 종..도, 노인..

요즘 근황과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안경을 바꿔야 할 시기가 지났다. 나를,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신경쓰이게 한다. 글자가 흐릿해지는 만큼 새 책이 쌓이고 잠이 줄어드는 만큼 빨리 지치고 상처입는다. 변화는 예고 없이 방문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곤 사라지며 흔적을 남긴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빠르게 늘어나 거의 매일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노트북이 가벼워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가벼워질수록 이 녀석이 자주 나타난다. 사무실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까페에서, 심지어 집 거실에까지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메일이 오고 문자가 오고 전화가 온다.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근처 카페에 들어와 메일을 확인하고 일을 한다. 그렇게 오후에서 저녁이 되었다. 또 야근이었다. 스트라다..

스탠포드 인 부산 호텔 출장

대도시에서 대도시로의 출장. 그냥 평범한 가을날. 바다가 아닌 곳에서 바다 앞 도시로. 그렇게 서울에서 부산으로. 고등학교까지 마산시-지금은 창원시로 바뀐-에서 다녔고 가끔 부산에 갔던 터라, 왜 서울 사람들은 부산에 가고 싶어할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출장으로 그간의 오해가 풀렸다고 하면 과장일까(아니면 내가 서울 사람이 다 된 것일까). 부산 출장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고, 휴가를 가기도 했으며, 그 때마다 어떤 연유에선지 몰라도 해운대 근처 호텔에서 묵었다. 많은 이들이 광안리나 해운대를 좋아하지만, 너무 관광지의 느낌이 강하다고 할까. 멋진 수평선과 높은 파도로 뒤덮이는 넓고 긴 백사장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무수히 넘쳐나는 외지인들의 일부에 휩쓸려 들어가 관광객으로만 머물다 그렇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