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58

필소굿 Feels so good

척 맨지오니의 저 LP가 어디 있는가 찾다가 그만 두었다, 술에 취해. 몇 해 전 일이다. 혹시 결혼 전 일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술에 취한 채 이 LP를 찾았는데,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 사이 나이가 든 탓에 찾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도 있다'는 서술어이 가지는 느낌은, 젊었을 때는 '가능성'이었으나, 나이가 들면 무너진 터널 앞에 서 있는 기차같다. '수도 있다'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무모하게 시도했다는 의미다. 가령, '그녀와 키스할 수 있었는데', '그녀에게 고백할 수 있었는데', 혹은 '사랑하던 그를 붙잡을 수 있었는데' 따위의 표현들과 밀접한 연관를 갖는다. 결국 생명이란 생명의 지속과 연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그 시작은 작은 만남과 사랑으로 포장..

스테이지 나인

퇴근길, 우연히 마주친, 새로 생긴 동네 더치 커피 전문점, 스테이지 나인. 그리고 잠깐 동안의 커피 여행. 짧고 굵은 목넘김, 낮고 은은한 향기, 초봄 햇살이 빌딩 사이로 사라지고 그 틈새를 물들이는 어둠. 출렁이는 어두움이 입술에 닿을 때, 살짝 미소를 짓는다. 아, 나는 역시 예가체프구나. 우아하고 깊은 시원함. 시큼함. 쓸쓸함. 허전함. 지난 청춘 깊이 숨겨져 있던, 늙어가는 피부 아래 잠겨있던, 그 기억이 무심한 거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함께 다가오는 공포여. 내 삶, 미래의 두려움이여. 쫓기듯 뭉게, 뭉게, 뭉게위로, 위로, 올라가는 내 삶의 진정성이여,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들뜬 모험이여, 얼마 남지 않은 내 영혼의 불꽃을 앗아갔던 사랑이여.

보편성 - 에드워드 사이드

"보편성이란 우리의 출신배경, 언어, 국적이 타자의 존재로부터 자주 우리에게 보호막이 되어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확실성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성은 또한 대외 정책이나 사회 정책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적 행위에 대한 단일한 규준을 찾아내고 이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야기된 적의 침략에 대해 비난한다면, 우리는 또한 우리 정부가 더 약한 집단을 침략할 때 똑같이 비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신의 언행을 규정하는 어떠한 법칙도 알지 못한다. 세속적 지식인들에게는 확고한 인도자로서 경배하고 숭배해야 할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최유준 옮김, 마티)..

참 미안하고 슬픈 첫 사랑

새벽에 잠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떴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한 탓이다. 나이가 들면 사라질 것이라 믿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근심 걱정은 더 많아진다. 내 잘못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인생이라는 게 이런 건지 모르겠다. 젊을 땐 내 잘못이 아니라 원래 인생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 여겼지만,지금은 원래 인생이 이런 게 아니라 내 잘못이라 여기게 되는 건 왜 그런 걸까. 내가 제대로 나이가 들고 있긴 한 건가. 인터넷을 떠돌아다는 영상이 기억나 다시 보게 된다. 사랑이라 ~. 참 미안하고 참 슬프다. 예능프로라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사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후회와 회한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 사이로 고백하고 되돌이고 싶은 저 노인의 외침이흰 눈들 사이로 사라진다. 방송 출연진의 탄식이 흘러나오고 ... ...

설중매

2004년에 쓴 포스팅이라니. 벌써 12년이 흘렀구나. 함민복과 채호기의 시다. *** 2004년 1월 27일 *** 강화도 어느 폐가에 들어가 산 지 꽤 지난 듯 하다. 세상의 물욕과 시의 마음은 틀리다는 생각에 인적 뜸한 곳으로 들어가버린 시인 함민복. 그의 초기 시들은 무척 유쾌하면서도 시니컬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연시들이 많아졌다. 외로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광고를 위해 지은 그의 시 "설중매"는 세상의 술에 취한 영혼을 살며시 깨우고 저기 멀리 달아나는 그리움을 조용히 잡아 세운다. 설중매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 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내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

새벽을 견디는 힘

CANDID 레이블. 지금은 구하지도 못하는 레이블이 될 것이다. 집에 몇 장 있는데, 어디 꽂혀있는지, 나는 알 턱 없고. 결국 손이 가는 건, 역시 잡지 부록으로 나온 BEST COLLECTION이다. 레코드포럼, 매달 나오는 대로 사두었던 잡지, 그 잡지의 부록은 클래식 음반 1장, 재즈 음반 1장. 제법 좋았는데. 유튜브가 좋아질 수록 음반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하기 힘들던 시절의 아련함은, 우연히 구하고 싶은 음반을 구했을 때의 기쁨,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아는 이들을 불러모아 맥주 한 잔을 하며 낡은 영국제 앰프와 JBL 스피커로 밤새 음악을 듣던 시절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어느 설날의 풍경

겨울비가 내리는 마산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도로 옆 수백억 짜리 골리앗 크레인은 어느 신문기사에서처럼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텅 빈 자리엔 무엇이 들어올까. 오늘의 아픔은 내일의 따뜻한 평화를 뜻하는 걸까, 아니면 또다른 아픔을 알리는 신호일까.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마음 한 켠의 불편함과 불안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