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45

2023년 일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가와 사오, <<헌치백>>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집을 읽긴 했으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도 보았으나, 일부만 기억날 뿐이다. 메이지 다음이 다이쇼 시대인데,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나쓰메 소세키라면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바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 그리고 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문학상이 바로 아쿠타가와 상이다. 일본의 흥미로운 점은 몇 명의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은 너무나도 놀랍지만, 대중적인 저변은 몇 백년, 몇 천년 전 섬나라 그대로다. 하긴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한국은 어떻게 조선을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될 테지만, 성리학(주자학)과 양반 계급의 그릇된 세계관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거나 애써 무시한..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미셸 포르트(지음), 신유진(옮김), 1984북스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더듬어 보니 그녀의 소설은 딱 한 권 읽었다. 더 있을 듯한데, 기록된 것은 뿐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내 평가도 평범해서 금세 잊혀진 소설이었다. 그 당시 읽었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투르니에와 비교한다면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소설은 아니 에르노에게 있어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린 작품이었음을 이 인터뷰집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글이에요. 글은 하나의 장소이죠. 비물질적인 장소. 제가 상상의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과 현실의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피방식이에요. 다른 곳에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지음), 을유문화사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건축 관련 책은 흥미진진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건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구성하고 있던 사상이나 문화, 실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하였을 때, 건축가를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학자이면서 예술가이면서 사상가. 이것이 이상적인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랄까. 이 책은 그런 측면을 맛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할 만 하다. 20세기 후반, 우리의 일상을 가장 크게 바뀐 발명품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휴대폰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것도 너무 대단한 발명품이긴 하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세탁기'라고 할 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세탁기'..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지음), 송은경(옮김), 민음사 '위대한 집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숙고해 보지 못한 어떤 총체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145쪽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왜 스티븐스의 집사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연신 재미있어하며 읽고 있었다. 실은 대부분 의미 없는 에피소드들이다. 스티븐스이 캔턴 양을 찾으러 가는 동안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스티븐스과 캔턴 양과의 관계로 집중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개에 익숙한 독자는 이 관계에 호기심을 가지며 읽지만, 켄턴 양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

작가 피정, 노시내

작가 피정 - 경계와 소란 속에 머물다 노시내(지음), 마티 세상을 떠돌며 살다보니 지인은 많아도 친구는 적다. (230쪽) 이십대 무렵 잠시 유학을 생각한 적 있었다. 하지만 집에 말을 꺼내자 반대에 부딪혔다. 그냥 나가도 상관 없었을 텐데, 나는 곧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에서야 그 때 무모하게 갔다면, 어땠을까, 나는 지금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아마 나갔다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부모님께서도 그럴 기미가 보였으니, 반대를 하셨을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 이런저런 일로 터키, 독일, 프랑스에 나갔을 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으니, 나는 어딜 가도 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렇다고 부러워하는 건 아니다. 가끔 지금 내 삶에 ..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 인영균 끌레멘스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 인영균 끌레멘스(지음), 분도출판사 고향집에서 성당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5월이지만, 꽤 더운 날씨의, 일요일 오전. 신부님은 강론 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셨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스 노터봄의 을 몇 년째 읽고 있는데, 이 기행수필은 노터봄의 명성에 걸맞게 예술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우아한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여기엔 번역가 이희재 선생의 한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나는 안다. 돌아오는 사람, 떠나가는 사람의 감정이 쌓일 대로 쌓여서 그곳에만 가면 어쩐지 반가움도 더 부풀려지고, 아쉬움도 더 부풀려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곳이 이 세상에는 있음을. 섬세한 영혼을 가진 사..

책그림책, 크빈트 부흐홀츠

책그림책 BuchBilderBuch W.G.제발트, 밀란 쿤데라, 아모스 오즈, 미셸 투르니에, 세스 노터봄, 마르크 퍼티 등(지음), 크빈트 부흐홀츠Quint Buchholz(그림), 정희창(옮김), 민음사 크빈트 부흐홀츠(1957~, 독일)는 삽화가이다.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 그림들을 그려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만을 보면 참 좋은데, 이 책에서는 몇몇 글들은 참 좋지만 대부분의 글은 평이하다. 내 생각엔 번역 탓일 듯싶다. 모두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을 테니. 결국 두 세 번의 번역을 통해 한글로 옮겨왔을 테니, 최초의 글과 우리가 읽게 되는 글과의 거리는 상당할 것이다. 가령 오르한 파묵은 터키어로 글을 쓴 후 영어로 옮기거나 독일어로 옮겼을 것이고, 영어라면 다시..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지음), 김용재(옮김), 봄날의책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몇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당신한테는 내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동물원에 가보면 짐승들은 더욱 짐승다웠어, 긴 몸통을 지닌 기린의 고독은 슬픈 걸리버의 고독과 유사했고, 동물 묘지의 묘석에서는 푸들 강아지가 괴로워서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어. 콜리제우 극장의 야외 통로 냄새가 나는 동물원은 노처녀 체육 선생 같은 타조와, 엄지발가락 건막류로 절뚝거리는 펭귄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 코카투 같은 이상한 새들로 가득 찬 새장 같았지. 게으르고 비대한 하마가 수조에서 느릿느릿 움직였고, 코브라는 부드러운 나선형 똥 무더기처..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지음), 송태욱(옮김), 문학동네 첫 책이 61세 때 나왔고, 그로부터 8년 후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살고 결혼했으나, 이탈리아인 남편이 죽자 1971년 일본으로 귀국해 일본문학을 이탈리아로 번역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문학을 일본에 번역 소개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5년 정도가 흘렀다. 어쩌면 그녀는 일본의 전성기를 살았던 문학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시선, 혹은 태도. 세상과 문학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인 양 표현하고 있기에 스가 아쓰코의 수필들은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1929년 생이니, 그 당시 한국..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지음), 송태욱(옮김), 뮤진트리 어쩌다 보니 언제나 옆에 두고 읽는 작가들은 정해져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렇다. 십수년 전 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 지금도 오에의 소설이나 수필집을 읽는다. 일본의 사소설적 경향을 바탕으로 하되, 일본의 민담이나 전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면서 나아가 세계적인 소재나 주제까지도 이야기하며 소설을 쓰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일본 내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상당히 정치적이다. 실은 오에 겐자부로가 왜 정치적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정부 인사처럼 보일 듯 싶다. 가끔 일본 지식인 사회가 일본 정치나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