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283

다 좋은 세상, 전헌

다 좋은 세상 전헌(지음), 어떤책 1. ‘다 좋은 세상’이라니.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은 세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전헌 교수의 이야기가 설득력 없는 건 아니지만,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젊은 날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난 다음 다 좋은 세상이라 이야기하고 하지만, 그러나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아마 최악의 조건에 놓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안다면, 그는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약육강식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옛 철학자들의 문장들만 나온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 교양서적으로,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다 좋은 세상’과 저자가 생각하는 의견들로 이루어진 (흥미로운) 산문집으로..

빈곤의 종말, 제프리 삭스

빈곤의 종말 The End of Poverty 제프리 D. 삭스(지음), 김현구(옮김), 21세기북스, 2006 극단적 빈곤이 의미하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생명의 낭비는 한마디로 전 인류에 대한 모욕이다. - U2의 보컬 보노의 ‘추천의 글’에서 (5쪽) 상당히 무거운 책이다. 진지한 프로퍼간다다. 제프리 삭스는 이 책 내내,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대놓고 기부하라고, 돈을 내놓으라고 주장한다. 올해 초에 읽은 앵거스 디턴은 (2015년)을 통해 ‘원조 환상’에 대해서 비판하지만, 그보다 약 10여년 전에 출간된 삭스의 (2005년)에서는 경제적 불평등, 즉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국, 부유층의 원조와 기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원조와 기부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지만, 적어도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년 8월호

르몽드 디블로마티크, 2021년 8월호 Le Monde Diplomatique 창간호부터 약 2년 가까이 매월 사서 읽다가 그만 두었다. 의외로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나라의 지엽적인 부분까지 다루고 있어, 차라리 다른 책이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또한 종이 종류나 두께(살짝 두꺼워 제대로 접히지 않는다), 그리고 사이즈도 애매해서 서가에 보관하기도 쉽지 않았다(반으로 접어 세우면 서가에 들어가지 않는 칸이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잡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돈 주고 사서 읽을 만한 거의 유일한 잡지에 가까워서, 종종 사서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다른 책을 들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마틴 스콜세지의 헌사, “펠리니와 함께 시네마..

투명사회, 한병철

투명사회 Transparenzgesellschaft 한병철(지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년 “그대가 자유를 사랑한다면 베일을 거두지 마라. 나의 얼굴은 사랑의 감옥이니까.” - 레오나르도 다빈치 (151쪽에서 재인용) 2012년말 한병철의 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인문(철학)책으로 그 목록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때로 지적 허영이 독자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도 한다. 마이클 샌델의 처럼 이 책을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이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후 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읽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베스트셀러’가 가지는 대중적이고 때로는 속물적이기까지 한 이미지와 달리 상당한 울림이 있었다. 그는 현대의..

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 엠마누엘 레비나스(지음), 강영안(옮김), 문예출판사 1996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고 나는 1997년에 구했다. 그 이후로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첫 문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외롭다는 생각, 혹은 그런 경험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무서워했던 걸까.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우리는 이 강의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다. (29쪽)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살펴보며 자아(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탐구를 해나간다. 유행하는 철학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면서도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결국 하이데거에 있어서 타자는 서로 함께 있음(Miteinandersein)의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지음), 문학과 지성사 생각보다 많이 읽혀지는 책이라는 데 놀랐다. 2015년에 나와 벌써 24쇄를 찍었으니, 인문학 서적으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책이다. 어느 수준 이상의 깊이를 가진 국내 학자의 책이라는 점도 좋고 적절한 시각에서 우리가 아닌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좋다. 이제 한국의 민족주의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우리 사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 대한 논의가 시작해야 시기에 이 책이 가지는 인문학적 성찰은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지음), 마티 1. 어떤 경향성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기 보다는 그냥 손 가는 대로 들고 읽는 듯하다. 그래서 책 자체의 완성도나 집중도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씌어진 글도, 그렇게 만든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은 온전히 작가 장정일의 태도나 문장 자체가 될 것이다. 가끔 우연히 읽게 되는 장정일의 짧은 글들은 상당히 좋다. 그렇다고 해서 꾸준히 찾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장정일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 나로선, 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여준 변화가 한 편으로 보기 좋다. 그러나 가끔 소년 장정일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에겐 반항적이며 이단적이고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거부하는 자아를 가진 예술가의,..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마이클 샌델(지음), 함규진(옮김), 와이즈베리 빠른 속도로 읽었고 뒤늦게 리뷰를 올린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단어는 최근에 등장한 단어다. 그냥 우수한 성적,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 더 나은 보상을 한다는 의미이다. 일견 보기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최근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이다. 특히 좌파나 중도 우파 정치인들과 결부되어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며, 최근 선진국 사회에서의 정치적 지형이나 물질적 불평등을 볼 때, 능력주의는 간과할 수 없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미 많..

동정에 대하여, 안토니오 프레테

동정에 대하여 Compassione -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역사 안토니오 프레테(지음), 윤병언(옮김), 책세상 동정compassione이란 ‘함께com’ 나누는 ‘열정passione’을 뜻한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나누는 아픔, 고난passione에의 참여를 의미하기도 한다. 동정은 타인과 타인의 고통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하지만 동정은 보기 드문 감정이다. 타인의 고통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고통으로 변하는 경험 자체가 진귀하기 때문이다. (9쪽) 문학의 차원과 예술의 차원에서 그려지는 동정의 모습은 곧, 타자의 현존, 타인의 얼굴과 타인의 정체가 지니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이다. 이 깊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정체를 강화하는 것이 바로 타인..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The Weird and The Eerie 마크 피셔(지음), 안현주(옮김), 구픽 마크 피셔Mark Fisher의 대표작은 이다. 마크 피셔를 읽겠다면, 보다 이 낫겠다. 나 또한 아직 읽지 않았지만. 내가 마크 피셔를 알게 된 계기는, Slow Cancellation of the Future라는 표현(에 나온 문구라는... 이 책은 번역되지 않았고 아마존 위시리스트에만 올라가 있을 뿐이다)때문이었다. 어떤 맥락에서 이 표현이 나왔는지 잊어버렸지만, 적어도 21세기 초반 젊은 세대들이 마주한 어떤 분위기라고나 할까. 얼마 전 치러진 선거도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야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여당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반영된... 여튼 마크 피셔가 궁금하던 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