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895

사카구치 안고 단편집

사카구치 안고 단편집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지음), 유은경(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자정쯤 잠에서 깼다. 지금은 낯설지만, 실은 수백 년 전엔 일상적인 패턴이었다. 밤의 어둠을 촛불로 몰아낼 수 없듯이, 전등이 등장하기 전 대부분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저녁 잠에 들어 자정이나 이른 새벽에 깨어, 한밤 중 산책을 나서곤 했다. 유럽에서도 그랬고 조선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밤 늦게까지 밝은 전등 아래 생활을 할 수 있다 보니, 새벽에 잠에서 깨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쉬이 피곤해지는 나이 탓으로 집에 오면 바로 잠을 청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새벽에 깨어 어슬렁거리곤 한다. 오늘 그렇게 잠에서 깨어, 러시아 피아니스트 스바토슬랴프 리흐테르(Sviatoslav Richte..

저 사람은 알렉스, 욘 포세

저 사람은 알렉스 Det er Ales 욘 포세Jon Fosse(지음) 정민영(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시간은 겹쳐지고 각기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대화를 하며 사라진다. 어슬레의 실종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하여 그 공간 속으로 어슬레의 고조할머니가 등장하면서 약간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욘 포세 만의 흥미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마치 한 무대의 한 쪽 편에서 현재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다가 그 무대의 불이 서서히 꺼지면서 다른 편 무대에 불이 환히 들어오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전개되듯 소설의 문장도 그렇게 이어진다. 지극히 연극적이거나 영화적인 수법이다. 이렇듯 현대의 장르는 서로 다른 장르들에게 영향을 주며 각 장르들의 표현 방식을 풍성하..

2050 거주불능지구,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2050 거주불능지구 The Uninhabitable Earth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지음), 김재경(옮김), 추수밭 번역되자마자 구입했지만, 선뜻 손이 가는 책은 아니었다. 다소 반복되는 내용들과 기후 위기나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증명하는 정보나 통계, 자료 등을 인용하는 것으로 책이 구성된 탓에, 형식 상으로만 보자면 상당히 지루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 책에 실린 내용은 꽤 충격적이고 끔찍하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다음, 우리는 왜 이렇게 태평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이들이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후변화는 티머스 모턴Timothy Morton이 ‘초과물hyperobject’이라고 부르는 개념, 즉 인터넷처럼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

독서모임 빡센 - 2050 거주불능 지구 The Uninhabitable Earth

책을 읽는다는 건 뭘까.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더 궁금해지고 조금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심해지는데,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경제 불평등이나 기후 위기, 또는 현대인들에게 널리 퍼진 우울증이나 정신적 불안, 포스트모더니즘 다음에 오게 될 어떤 예술 사조에 대한 전망, 새로운 패권 국가(들)이 만들어가게 될 국제 질서, 인공지능(AI)이나 시간에 대한 물리학적 고찰 등 내가 요즘 관심을 가진 분야는 넓기만 하다.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마치 활자 중독처럼 읽기만 하는 건 아닐까 반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지금 이 시기는 너무 중요해서 우리의 미래가 희망을 품어도 될 것인지, 아니면 절망적인 상황을 대비할 수 있을지, 또는 ..

책들의 우주 2023.10.08

불의란 무엇인가, 대니얼 돌링

불의란 무엇인가 Injustice : Why Social Inequality Persists 대니얼 돌링(지음), 배현(옮김), 21세기북스 1. 생각은 깊어지지 않는 대신 많아지고 해결보다는 포기가 더 나은 선택처럼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다들 비슷하게 늙어가고 비슷한 생각과 습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게 된다. 이것도 어쩌면 패거리일 수도 있고 카르텔일 수도 있겠다. 우습다. 결국은 목소리가 큰 권력자가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 되었다.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나 행동 따위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저 대중들의 손으로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실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나 행동을 할 것이라 여겼던 이들조차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절망적인 회의감으로 물드는 가..

초거대 위협, 누리엘 루비니

초거대 위협 - 앞으로 모든 것을 뒤바꿀 10가지 위기(Megathreats) 누리엘 루비니(지음), 박슬라(옮김), 한국경제신문 안타깝게도 다가오는 위기를 안다고 해서 한국의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도리어 절망에 휩싸일 확률이 더 높고 희망을 가질 수 조차 없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보자면, 투표한 사람의 절반 이상은 우리의 미래 따윈 관심 없고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만 따져 물었다. 특히 노인들은 그들의 지나온 과거를 보며 투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투표해야 하지만, 그런 미래지향적 사고를 가졌다면 아마 험난하고 굴곡 졌던 한국 현대사를 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그런 사고를 가졌던 이들은 비명횡사를 당했거나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거나 해외 이민을 떠날 것이..

그 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그 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지음), 이재룡(옮김), 열린책들 세상에 참 많은 작가들이 있다. 무수한 작품들이 있고 그 작품 하나하나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어떤 세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놀랍고 안타깝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글로 번역된 걸 읽다가 영어 원문으로 읽었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란 신비롭고 예술의 끝은 없다. 일년에 읽고 볼 수 있는 작품의 개수는 한정적이다. 소설가 장강명이 어느 글에선가 1년에 백사십여권을 읽었다고 했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권씩 읽은 것인데, 대단하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 정도의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애초에 소설가나 시인은 책을 잘 읽지 않거나 문학 작품에만 편중된 독서를 하기 일쑤다. 실은 작품 ..

인생, 예술, 윤혜정

인생, 예술 윤혜정(지음), 을유문화사 살짝 궁금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거의 가지 못했다. 미술 잡지도 거의 사지 않으며 미술 관계자와 만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미술, 아니 예술은 내 삶의 일부다. 내가 마음의 안식을 얻는 곳은 늘 예술이 있는 장소이거나 공간이다. “미술관은 탐색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많은 진실에 둘러싸인 하나의 진실이다.” - 마르셀 브로타에스(20쪽) 마르셀 브로타에스(Marcel Broodthaers, 1924 -1976)는 벨기에의 현대 시인이자 미술가였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나,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뒤늦게 회고전을 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현대 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긴 개념미술가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마흔이 되어 미술계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

일인칭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단수 무라카미 하루키(지음), 홍은주(옮김), 문학동네 다 읽고 보니,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건 무려 이십년만이다. 가 나온 지도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 일 년에도 여러 차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읽거나 보게 되지만, 정작 그의 소설을 읽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일년에 읽는 소설은 채 열 권도 되지 않고 심지어 서재에는 읽으려고 사둔 소설만 수십권이 될 터니. 우연히 도서관 서가를 지나치다 이 소설 를 보게 되어 빌려 읽었다. 예상한 대로의 하루키 소설이었다. 늘 기대하는 모습 그대로 이 소설집에서도 하루키는 가볍고 경쾌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는 너무 진지했다고 할까. 하루키가 어딘가 진지해지면, 그 순간 모든 그의 매력은 반감되고 깔끔하던 그의 작법은 도리어 어설퍼진다. 그 이..

자본가의 탄생, 그레그 스타인메츠

자본가의 탄생 The Life and Times of Jacob Fugger 그레그 스타인메츠(지음), 노승영(옮김), 부키 푸거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서문에 나온 아래 문단만 읽어도 된다. 책은 이 요약문의 자세한 설명이며 역사적 근거와 시대적 배경을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카를이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푸거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푸거는 카를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거액의 뇌물을 빌려주었을 뿐 아니라 카를의 할아버지에게 자금을 투자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정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중앙 무대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왔다. 푸거는 다른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그는 고리대금업 금지 조치를 해제하도록 교황을 설득해 상업을 중세의 미몽에서 흔들어 깨웠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