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895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룰루 밀러(지음), 정지인(옮김), 곰출판 의외의 반전을 숨기고 있는 이 책은 이토록 찬사를 받을 만한가에 대해선 의문스럽지만, 미국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소 의외의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서술 방식으로 다소 혼란스럽다. 자신의 사랑과 성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과 스탠포드대학의 초대 총장을 지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을 쫓아가는 과정이 서로 나란히 서술되면서 독자는 다소 혼란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책 후반부의 반전이 너무 큰 탓에, 도리어 이러한 불편한 전개가 그 반전을 더욱 부각시키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기에 굳이 이러한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는 듯 싶다. 나 또한 이런저런 추천으로 이 책을 읽었..

르네상스, 제리 브로턴

르네상스 제리 브로턴(지음), 윤은주(옮김), 고유서가 이 책은 옥스포드 대학의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한 권으로, 고유서가에서 한글로 번역해 출간하였다. 개인적으로 옥스포드 대학의 이 시리즈로 나온 를 읽고 상당히 좋았는데, 이 시리즈가 번역되고 있었음을 이제서야 알았다. (예전엔 주위에 인문학 공부를 하거나 책을 좋아하던 이들이 꽤 있어서 새 책 소식이나 유명 학자들의 근황을 쉽게 알곤 했는데, ...) 르네상스에 대한 책들은 많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성과들까지 담은 책은 보기 드문데, 이 책은 그런 성과들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시사적이었다. 르네상스의 시기나 지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관점이 다르긴 하지만(나 또한 제리 브로턴이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부..

자본의 무의식

남북한 밖에 거주하는 한인 인구는 중국인, 유태인, 이태리인, 인도인 다음으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디아스포라 집단을 이루며 본국의 인구 대비 비율로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두번째이다. - 박현옥, , 185쪽(김택균 옮김, 천년의 상상) 캐나다 요크대학교 박현옥 교수의 책 을 읽으며 한국인 디아스포라, 그 기원과 역사, 의 숨겨진 의미, 만주 이주의 역사나 배상의 정치학 등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영정조 르네상스에서 바로 세도정치 체제의 전환, 개화개방과 쇄국을 오가던 구한말 위기, 한일 합방의 이후의 일제 식민지가 이어지듯, 어쩌면 이번 정권이 그러한 몰락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함께 하면서 말이다. 거의 육백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자본주의와 새로운 형태의 통일에 대한 연..

O Do Not Love Too Long 오 너무 오래 사랑하지 마라, W.B. 예이츠

태풍이 지나가자 더위가 이어졌다. 화요일, 공휴일, 광복절, 출근을 했다. 후문이 잠겨 있었다, 정문이 잠겨 있었다, 쉬는 날엔 지하 주차장만 열린다는 걸 잊었다. 출근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업무로 신경이 곧두선 상태라 집에서 일을 하기 참, 어려웠다. 사무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소셜 미디어를 둘러보다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우연히 본다, 읽는다, 소리를 내어 읽었다. 한 언어는 다른 지역의 언어와 겹치면서 퍼져나간다. 각 나라말은 절대 일대일로 옮겨지는 법이 없다. 하나의 시가 다른 나라 말로 옮겨질 땐 여러 개의 시들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영어로 된 시를 읽을 땐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 꾸러미로 연결된다. 훨씬 풍성해지는 느낌..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Klara and The Sun 가즈오 이시구로(지음), 홍한별(옮김), 민음사 클라라는 조시를 위해 자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 돕는다. 클라라에게 햇빛이 자양분이듯, 햇빛을 향해 조시를 낫게 해달라고 빈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노력한다. 실은 이것도 일종의 프로그래밍일 텐데, 이것을 풀어내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관찰과 학습을 통해 클라라는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며 자신만의 성찰로 조시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봐, 네가 아주 똑똑한 에이에프일지 몰라도 네가 모르는 게 많아. 너는 조시 쪽 이야기만 들으니 전체 그림을 못 본다고. 조시는 엄마만 가지고 그러는 것도 아냐. 항상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해." (212쪽) 하지만 한계는..

오모테나시, 접객의 비밀, 최한우

오모테나시, 접객의 비밀 최한우(지음), 북저널리즘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다. 일본만의 손님 접대 문화를 지칭하는 단어로 서구 사회에서 일본 하면 '오모테나시'를 떠올리게 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단어다. 오모테나시 1)신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최대한 표현하는 것 2)손님에 대한 환대 3)손님에 대한 고치소오(온 사방을 이리저리 달려서 구해왔다는 의미) 4)온 마음을 다하여 손님을 맞이 하는 것 (24쪽) 과연 그러한가 하고 생각해보면, 글쎄, 하고 여기게 되지만, 같은 동양인이 일본에 가는 것과 피부색이 다른 백인이 일본 가게에 들어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테니(이건 한국이야말로 너무 심해서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 책은 오모테나시가 어떻게 일본 비즈니스를 경쟁력 있게 만드는가에..

헛되지 않을 텐데 Not In Vain,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Not In Vain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Unto his nest again I shall not live in vain. 헛되지 않을 텐데 만약 내가 어느 한 마음이 부서지는 걸 막을 수 있다면, 나는 허무하게 살지 않을 텐데, 만약 내가 어떤 한 인생을 힘들게 하는 아픔으로부터 가볍게 할 수 있다면, 또는 어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아니면 어느 쓰러지는 새 한 마리를 도와 그의 둥지 위로 다시 보낼 수 있다면 나는 헛되이 살지 않을 텐데. - 에밀리 ..

2023년 일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가와 사오, <<헌치백>>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집을 읽긴 했으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도 보았으나, 일부만 기억날 뿐이다. 메이지 다음이 다이쇼 시대인데,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나쓰메 소세키라면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바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 그리고 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문학상이 바로 아쿠타가와 상이다. 일본의 흥미로운 점은 몇 명의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은 너무나도 놀랍지만, 대중적인 저변은 몇 백년, 몇 천년 전 섬나라 그대로다. 하긴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한국은 어떻게 조선을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될 테지만, 성리학(주자학)과 양반 계급의 그릇된 세계관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거나 애써 무시한..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미셸 포르트(지음), 신유진(옮김), 1984북스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더듬어 보니 그녀의 소설은 딱 한 권 읽었다. 더 있을 듯한데, 기록된 것은 뿐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내 평가도 평범해서 금세 잊혀진 소설이었다. 그 당시 읽었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투르니에와 비교한다면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소설은 아니 에르노에게 있어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린 작품이었음을 이 인터뷰집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글이에요. 글은 하나의 장소이죠. 비물질적인 장소. 제가 상상의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과 현실의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피방식이에요. 다른 곳에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지음), 을유문화사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건축 관련 책은 흥미진진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건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구성하고 있던 사상이나 문화, 실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하였을 때, 건축가를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학자이면서 예술가이면서 사상가. 이것이 이상적인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랄까. 이 책은 그런 측면을 맛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할 만 하다. 20세기 후반, 우리의 일상을 가장 크게 바뀐 발명품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휴대폰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것도 너무 대단한 발명품이긴 하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세탁기'라고 할 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세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