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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나이가 들수록 명절 보내기가 더 어려워진다. 내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는지 모르겠지만. 과거는 화석이 되어 이젠 향기마저 풍기지 않고 미래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끝도 보이지 않는 계곡 사이로 이어진다. 중년이라 그런 건가. 돌파구는 늘 위기에 있다지만, 우리 인생은 늘 위기 위에 있다. 올웨이즈 리스크 모드라고 해야 하나. 


음악을 들었지만, 예전같은 감동을 찾기 어려웠다. 이렇게 늙어가는 건가. 



가을이 왔다고들 말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끔찍했던 여름이 이어져, 계속 지치고 땀이 나고 흔들거린다. 그래도, 기어이 가을은 올 것이고, 그래도 나는 나이가 계속 들어갈 것이고, 그래도 내 아이는 계속 자라날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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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곰팡이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제, <<산책시편>> 중에서  




이문재의 <<산책시편>>(민음사)가 있는데, 서가를 찾아보니 없다. 정리되지 않는 서가, 정리할 시간도 없는 서가, 이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마저 사라지고, 이 시도 읽었으나 이젠 기억나지 않아, 신문에서 읽은 다음, 출처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문재를 읽던 시간도 이젠 드물어지고, 가을은 아직 저 멀리 있기만 하다. 끝나지 않을 것같은 여름밤, 책은 읽히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데, 어찌 꿈을 꿀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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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있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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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내 마음에, 그대 가슴에, 온 우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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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에 일어나 빈둥거리고 있다. 일찍 자긴 했다, 아니 깊은 잠을 자지 않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해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방식대로 한다면, 다소 출혈이 발생한다. 그 출혈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책임질 것인가, 아닌가. 적고 보니, 전형적인 천칭자리의 접근법이다.


늘 그렇듯이 해답은 알고 있다. 딱 내 수준이긴 하지만. 


찍어놓은 사진들은 많은데, 한결같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래 사진들은 제작년 가을 경주 여행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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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할 것같지만, 여행지에 가서도 책을 읽는 터라, 실은 여행을 거의 가지 않는다. 가끔 가게 되는 여행에서도, 낯선 풍경이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풍경은 늘 빙빙 돌아 내 마음 한군데를 가르키고, 결국 내 마음만 들여다보다 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여행보다 집에 박혀 책을 읽고 음악 듣는 게 더 즐거운 일이 된 나에게 ... 이번 여행은 내 의지라기 보다는 가족의 의지로 가게 된 것이었고, 한 줄의 글도 읽지 못한 최초의 여행이 되었다. 이 특이한 경험 위로 즐겁게 웃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이 겹쳐지니, 즐겁고 가치 있는 여행이 되었던 셈이다.


2박3일 동안 남이섬, 소양강 댐, 청평사를 둘러보는 여행이었고, 숙박은 춘천 세종호텔이었다. 사진을 꽤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서울로 돌아와서 살펴보니 쓸만한 사진이 거의 없다. 


아무래도 현재 쓰고 있는 줌렌즈 대신 줌이 되지 않는 렌즈로 바꾸어야 겠다. 핸드폰 카메라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나, PC에서 확인해보면 확연히 그 품질이 떨어져, 가지고 있는 니콘 DSLR 카메라에 당분간 의존해야 한다. 


여행의 감상이나 일정을 상세하게 적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집중할 공간도 없다. 다른 글들도 밀려 있는 터라, ... ...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데, 삶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으니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지난 여행을 떠올리면서 여행의 즐거움 대신 글 쓰기나 앞날의 걱정을 하고 있는 현대인의 삶이란!)


이번 여행에서 새삼스럽게 인종을 불문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확실히 늘었다는 걸 알았다. 남이섬엔 외국인 단체 관광객이 가득했고(한국에선 남이섬의 정돈된 정원 풍경이 다소 이국적이겠지만, 유럽에 가면 훨씬 더 좋은 정원 풍경이 펼쳐지니, 남이섬의 관광객 대부분은 강변이라는 것과 한국 드라마 탓일 게다), 청평사로 올라가는 길에서도 백인 관광객들을 자주 만났다. 그만큼 한국이 국제화되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혼자 여행가길 좋아하는 이들에겐 남이섬은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과 연인이 너무 많았고 청평사는 내가 가본 절들 중 최초로 유원지처럼 느껴졌다(그냥 유원지라고 하는 것이 옳은 듯하지만). 특히 주말 남이섬은 가지 않는 편이 좋을 듯 하다. 우리 가족은 금요일에 갔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남이섬에 모여들었으니까. 


피카사를 다운로드 받아 로모 스타일로 적용해,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남이섬 



청평사 올라가는 길 옆 풍경


청평사 앞 구룡폭포


청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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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가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 집에 오니, 밤 12시가 가까이 되었고 나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상태다. 하긴 내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딱딱한 걸 먹으면 안 되는데, 맥주 몇 잔에 딱딱하다 못해 씹혀지지도 않는 오징어 뒷다리를 안주 삼았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가 사라지는 것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상 속에 내 온 몸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데, ... 올해 그런 여유가 생길 지 모르겠다. 


여름, 뜨거운 절망을 뒤로 하고, 가을, 내년을 위한 희망을 꿈꾸어도 좋을 시기다. 몇 번의 주말 오후, 핸드폰으로 늦은 오후 석양 아래의 서울을 찍었다. 내가 가진 니콘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있지만, 지금 PC에 옮기기가 귀찮다. 














이 작은 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이루어지지 못할 지라도, 신의 시간과 비교한다면 보잘 것 없는 시간이라도 희망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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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추위를 지나자, 다시 날씨는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건 이상 기후.

탈정치화, 탈역사화를 떠들던 학자들이 물러나자, 정치적 삶, 정치적 일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유행. 모든 것은 유행이고, 유행을 타는 타이밍은 모든 이들에게 중요해졌다. 진짜 중요한 것은 뒤로 숨어버리고 ...

가산디지털역 인근 커피숍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다. 몇 개의 전시, 몇 개의 작품을 떠올려 보지만, 역시 예술은 우리 일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 삶 속에서 예술은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공허한 대기의 무지개같다. 아무런 영향도 행사하지 못하는, 때도는 대단한 통찰을 수놓지만, 그건 마치 미네르바의 올빼미와도 같아서 그걸을 깨달은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흘러 되돌릴 수 없을 때, 혹은 작품만 먼지 속을 뒹굴고 ...



네이쳐포엠 빌딩에서도 우리는 예술의 침묵과 만나고, 가을은 이미 지나 겨울 바람이 부는 어느 주말 밤, 며칠 전 노트와 사진을 꺼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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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추장스러운 퇴근.길. 먼 길을 돌아 강남 교보문고에 들려, 노트를 사려고 했다. 몇 권의 빈 노트를 뒤적이다가 그냥 나왔다. 노트 한 권의 부담을 익히 아는 탓에, 또 다시 나를 궁지로 몰고 싶진 않았다. 

토요일에는 비가 내렸고 일요일은 맑았다. 지난 주 세 번의 술자리가 있었고, 오랜만의 술자리는 내 육체를 바닥나게 했다. 늘 그렇듯이 회사에서의 내 일상은 스트레스와 갈등 한 복판에 서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고, 내가 느끼는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만, 그럴 형편도 되지 못했다. (다만 지금 내 경험이 시간 흐른 후에 내 능력의 일부로 남길 바랄 뿐)

모든 이야기는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텍스트는 없고 컨텍스트만 있을 뿐이라고들 하지만, 결국엔 텍스트만 있고 컨텍스트란 없다. 포스트모던의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모나드로 남을 텍스트가 자기 자신임을 확인하게 된다.
 
스트레스는 내 건강을 위협하고 내 영혼을 힘들게 한다. 언어의 휴식처는 이젠 없고 캔버스 속 색채의 유혹은 이젠 아무런 호소력을 가지지 못한 2011년의 가을.

지난 날의 추억은 거리의 어둠 속 술 자리 안주만도 못하고 ... 오직 불투명한 오늘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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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폰으로 오늘 하늘을 찍은 사진임)


이 색깔은 ... 도시마다 다를까? 계절마다 다를까? 바람에 따라 달라지고,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까? 그래서 이 색깔은 계속 달라져 형체도 없이 사라질까?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닿지 못하는, 끝내 나를 향해 열어주지 않을 색으로 둘러쳐진 채, 말없이 흔들거렸다, 내 몸이.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들어오던 1970년대 후반의 창원 어딘가에서 가을 바람과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린 나는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 때면, 까닭없이 그립고 안타깝다.

어느 새 나도 닫히는 법만 배웠다, 거대하고 거친 도시에서. 닫힌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닫는 법만 배우는 우리는 이제 문을 여는 법, 마음을 여는 법, 대화를 여는 법을 잃어버렸고, 21세기에 들어서자, 마지막으로  닫힌 우리는 더 이상 낯설어하지 않게 되었다.

저 색깔은 ... 닫혀 있는, 너무 익숙한, 그래서 가치없는 색이다. 하늘색이다. 세계 최초로 소리 없이 활자를 읽었던 수도사에게서부터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지나, 우리는 그렇게 닫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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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비스듬하게 바람 따라 나풀나풀거렸다. 커피 향이 거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대비되는 빛깔끼리 대화하는 법이 없는 도시에는 외로움만 흘렀다. 투덜되는 쓸쓸함 앞에서 커피는 사소한 위안이 되었을 뿐, 결국엔 둥근 테이블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푸른 하늘 위로 떠나버렸다.

가을이 왔다. 그리고 가을이 갈 것이다. 해마다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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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아침 출근길의 빼곡한 지하철 속,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스북을 하다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페이지에 업로드된 가을 작품 하나. 그 작품을 보니, 나는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보다 '가을이어서 술 생각 난다'거나, '찬 바람이 부니 왠지 쓸쓸해지는 느낌이다'라는... 가을 자체가 아니라 가을이 불러오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문득 가을이라는 계절을 생각하게 된다. 


Tosa Mitsuoki(Japan, 1617 - 1691)
Quail under Autumn Flowers
ink and color on silk, 97.8 x 41.6cm, Met Museum
출처: http://www.kurl.kr/ZLyOq1


가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Tosa Mitsuoki라는 17세기의 일본 화가는 가을 풍경을 가을 국화 아래의 메추라기로 표현했다. 화사하게 핀 국화를 보는 메추라기의 모습이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하다.

17세기 일본에서의 가을이란 저런 모습이었을까. 저 작은 새는 무슨 생각을 하며 국화를 바라보는 것일까. 사람 없는 저 그림 속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정수영(鄭遂榮, 1743 - 1831, 호 지우재之又齋)
추경산수도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101 x 61.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http://blog.daum.net/inksarang/16877985 


그렇다면 조선의 가을 풍경은 어떠했을까. 혹시나 싶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웹사이트를 검색해보니,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내 웹사이트 검색을 통해 구한 작품 이미지이다. 하지만 작품의 도판이 좋지 않다.

작품 도판이 좋지 않은 게 대수로울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가, 실제 작품을 보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네이버에서 정수영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는 작품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북송(北宋)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이 가미된 암준(岩?)을 보이고 있어 어느 만큼은 정형상수를 따르고 있다. 형체를 조방대담(粗放大膽)하게 이룬 필치와 온건 침착한 맛을 살린 설채기법(說彩技法)을 신기하게 조화시킨 것은 그의 화풍이 지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노송(老松)은 가지 끝에 담청(淡靑)으로 설채하고 잡목은 크고 작은 수묵점(水墨點)을 찍어내려 구분 지었다.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미술오천년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낙엽이 눈에 띄지 않는다. 가을 하면 단풍과 낙엽인데 말이다. 어쩌면 가을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는 낙엽이 조선 사람들 눈에는 과히 좋게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심사정의 작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http://blog.naver.com/jsasm1944/80129366467 


인터넷으로 조선의 가을 풍경을 그린 작품을 찾다보니, 심사정(1707 ~ 1769, 호 현재)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겸재 정선의 제자로, 중국에까지 작품이 알려질 정도였으며,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심사정의 '추경산수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추경산수도'와 꼭 닮은 '하경산수도'도 있지 않은가. 가을 풍경과 여름 풍경이 너무 같았다. (두 작품 중 하나는 없거나, 한 작품의 이미지가 다른 작품으로 오인되었거나 한 것일텐데.. 참고할 만한 정보가 없다.)

두 작품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웹사이트에 가보았으나, 검색되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수준의 웹사이트가 되어야 할텐데..)

하지만 심사정의 다른 작품을 보자.

선유도(船遊圖)
18세기 중엽, 중이에 담채, 27 x 39.5cm, 한국 개인 소장
출처: http://blog.naver.com/chansol21/50040103428


배 타고 노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소용돌이 치는 물살 위 배 풍경이 너무 한가로워 더욱 매력적인 이 그림은 ...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심사정이 왜 대단한지 알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니, 가을 푸른 하늘 아래 고요히 흘러가는 한강 위로, 돗단배 띄워놓고 술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사람 그리워지고 술맛이 좋아지는 계절이다. 책 향기가 좋고 언어들 사이의 의미가 쉽게 눈에 들어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좋은 계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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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만난 이는 도시를 흐르는 대기의 흐름이었다. 가을 아침 바람. 강남구청역 1번 출구. 내가 아침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곳.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기 틈새로 비가 내렸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어버린 중년의 감각 세포들.

거리는 어수선한 지난 밤 속을 헤매는 듯 보였고, 상기된 표정의 행인들은 가져온 우산을 힘없게 펼쳤다. 그 때 마침 문을 연 커피숍에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참 멀리 걸었다. 걸으면서 낡은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데이비드 린치, 스매싱 펌킨스의 EYE를 떠올렸다. 기억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 내 몸도 따라 휘말려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어디까지 걸어온(혹은 걸어간) 것일까? 기억은 길을 잃었고 의식은 희미해진다. 아주 길게.

커피숍에서 커피를 가지고 난 순간, 빌딩 지하 고급스러운 술집에서 나오는 젊은 여자와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남자와 만났다. 그러자 테이크아웃 종이컵 위로 갈색 커피 향이 밀려들었다. 기억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게, 추억은 고통스럽게 한다. 어느새 2011년도 채 네 달이 남지 않았고, 그렇게 내 삼 십대도 지나고 있다. 멀리 돌아온 커피 한 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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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에 마시는 커피가.. 참.. 향이 좋아요..ㅎㅎ 이상하게 낮에 먹는 커피보다도..

    • 저도 밤에 커피를 내려마셨는데, ... 요즘은 거의 마시질 않아요. 다음 날 출근이 힘들더라고요. ㅎㅎ.. 조용한 밤의 커피 향기 참 좋죠~. ^^



지난 주말, 회사 워크샵을 강화군 석모도로 다녀왔다. 이 회사에 다닌 지도 벌써 2년이 꽉 채우고 있다. 그 동안 많은 도전과 실패, 혹은 작고 어정쩡한 성공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이 작은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니기 시작한 곳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보다는 물음표가 더 많다는 건, 경험이 많아지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는 너무 욕심이 많은 것일까.

늦가을 햇살이 갯벌을 숨긴 바다 물결 위로 부서졌다. 사소하게 눈이 부셨다. 




차를 싣고 짧은 거리의 바다를 건너는 배 뒤로 갈매기들이 쫓았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에 입맛이 길들여진 갈매기는 이미 야생의 생명이 아니었다.






석모도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황혼이 찾아들었다. 근처 해수욕장으로 가, 갯벌을 지나 바다를 너머 지는 태양을 보라보았다. 그런데 나는 황혼녁만 되면, 고등학교 시절 혼자 경남 도립 도서관의 작은 열람실에 앉아 소설을 읽던 기억이 겹치곤 한다. 그 때 나는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유희'를 읽었다.  






오랜만에 에릭 사티를 듣는다. 지금 나는 점심 시간 텅빈 사무실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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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가을이 오자, 사무실 이사를 했다. 다행이다. 직장생활에 뭔가 변화가 필요했고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없진 않지만, 좀 더 넓은 사무실로 옮겼다.

강남구 삼성2동. 강남구청역에서 내려 높은 아파트들을 지나 근사한 빌라촌을 지나 있는 어느 흰 빌딩.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10월 초의 어느 날.

몇 해 전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던 텔런트 고 장자연의 소속사가 있던 건물 근처다. 그 건물 앞을 지나칠 때마다 사람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체계에 갇힌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혹은 치유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결국엔 세월이 약이라고들 이야기하겠지.

안 좋은 일이나 사건이 지나고 난 다음, 사람들은 곧잘 세월이 약이라고들 하지. 그런데 세월이 약일까.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문득 박인환의 시를 떠올렸다. 적절한 감상주의로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듯한 이 시는 1956년도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움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래,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다. 

마치 19세기 영국에 때아닌 고딕의 바람을 붙었던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린 채, 옛날을 더듬는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를 아프게 했던 사건을 잊어버린 채, 과거를 더듬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은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지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명확하지 못한 반대항보다 명확한 반대항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 그런 이유로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정치적 안정은 종종 스포츠의 활성화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과거 회귀란 우리의 상실감 속에서 싹트고 자신도 모른 채 십 년 전, 이십 년 전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퇴보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새 우리 행동도 보수적으로, 과거 회귀적으로, 시대 착오적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잃어버린 채, 그 어느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자기 혼자만 상처 입었다는 마음을 가진 채... 

사랑은 가고 옛날이 우리의 마음을 물들이지만, 우리는 내일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더라. 나이가 들어갈 수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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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저녁 7시, 도시의 가을,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익숙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어둠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동굴을 파고 숨어 들어간 내 마음을 찾을 길 없어, 잠시 거리를 걸었다. 삼성동에서 논현동까지.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리는 10월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나이 탓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무 어린 마음이 늙은 육체를 가졌을 때의 그 비릿한 인생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 냄새를 숨기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린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렸다. 이 세상이 익숙해진 육체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요 며칠 하늘은 정말 푸르고 높았지만, 그건 고개 돌린 외면의 색의 높이였다. 집에 들어와 오랜만에 김치찌게를 했다. 다진 마늘, 올리브유에 김치, 참치캔와 햄 몇 조각. 배가 고팠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거대한 기업에서 수천명의 이름으로 만든 햇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내가 김치찌게를 제법 끓인 탓일까.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고 움직이면서, 15년이 넘은 대우 TV 속에서 아나운서들이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하듯 국내 뉴스를 전하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차피 그들은 나를 향해 하는 소리가 아니었고, 내가 TV 속 그들을 본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표명한다거나, 내일 전화를 한다거나, 커피나 술을 사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19세기의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그 모더니티의 익명성은 이제 우리의 일상 모두를 지배하는 감옥이 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나서서 모더니티가 감옥을 찬양했으며, 감옥을 낯선 것이며 열광했다는 일을 지금도 좋아하는 걸 보면 정말 웃긴 일이다. 내가 알기로 오직 막스 베버만이 그것을 새장이라고 표현했다.) 

새로 산 운동화를, 버리려고 내놓은 수 백 권의 책 옆에 밀어두고 벨앤세바스티안을 들었다. 미친 짓이다. 요즘 잘 듣지도 않는 팝 음악에 빠져있다는 건 권장할 만한 짓은 아니다. 연말엔 클래식 공연을 몇 개 챙겨서 볼 요량이었으나, 혼자 가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람스 전집을 사려고 인터넷 서점 소망리스트에 올려놓았으나, 결정적으로 들을 시간이 없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마르크스주의'(한길 그레이트북스)를 읽고 있다. 아마 이 책이 재미있다고 하면 욕 먹겠지. 보편과 특수, 개념과 총체성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마르크스나 엥겔스, 혹은 루카치가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와 오캄을 떠올린다고 하면 돌았다고 하겠지. 

오늘 점심 시간, 점심 대신 압구정 트리니티 빌딩 지하 2층, 3층에 자리잡은 PKM Trinity Gallery에 가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전시를 보았다. 몇 년 전 웹 기사를 통해 그의 The Weather Report를 보면서 경험해보고 있었는데, 막상 서울 전시는 그의 스케일을 느끼기엔 다소 약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퇴근 후, 올라퍼 엘리아슨의 기사 몇 개를 찾고 이미지와 동영상을 찾다고 보니, 금세 열 한 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열 두 시가 넘었다. 

글쓰기도 잘 안 되고, 책읽기도 잘 안 되고, 연애도 잘 안 되는 느낌이다. 결국 내 어린 마음은 믿을 수가 없고, 내 늙은 육체는 이 가을, 너무 쉽게 지치기만 한다. 터무니없는 가을을 용케 잘 버티고 있는 중이다. 술을 조금 줄이든지, 아니면 도어스의 '인디안 섬머'를 들으면서 병맥주를 조만간 마셔야 겠다. 이번 가을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중이라며 나에게 스스로 술 한 잔 권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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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리를 거의 못하고 있었다. 급한 일 하나를 끝내고 사진 정리를 한다.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다. 지난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이 흔들, 흔들 거린다.


갤러리 프레드릭 모아상의 입구. 17세에 지어진 건물 1층에 자리잡은 갤러리다.




갤러리 입구에서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의 풍경.



비가 왔다. 차창으로 카메라 렌즈를 고정시키고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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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의 풍경.
칼라는 한 쪽으로 치닫고 골목은 고요하고 마음은 마구 흔들리면서 어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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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카메라가 서툴다. 내가 원하는 구도는 우연히 맞추는 경우가 있지만, 내가 원하는 색상은 거의 맞추는 경우가 없다. 카메라, 꼭 물감과 붓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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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엘 갔다. 바람이 불고 햇빛이 내렸다. 

방울방울. 구름이 지나갔지만, 그가 지나가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한 척 했다. 

처마 끝에 매달린 여름이 안쓰러웠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그리고 결국 술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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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이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이들은 바로 인상주의자들이다. 시간 따라 변하는 색채의 현란함, 그 현란함이 가지는 찰라의 쓸쓸함, 그리고 쓸쓸함이 현대인들의 피부를 파고 들어 삶의 양식이 되었음을 깨닫게 해준 이들은 인상주의 이후의 모더니스트들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본래적인 것이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견고한 피부를 만들고자 한 이들이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이라면, 그 쓸쓸함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순간의 희열 속에 온 몸을 던지는 것이 후기(post)의 모더니스트들이 아닐까.

고객사를 가다 오는 길에 어느 집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붉은 잎사귀를 찍는다. 하나는 내 혓바닥 같다. 다른 하나는 누구의 혓바닥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혓바닥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붉은 혓바닥 하나가 붉은 혓바닥 하나를 기다리는 가을 풍경이란, 처참해보인다. 단풍은 원래 그런 빛깔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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