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10

어느 저녁

조금 빨리 사무실을 나왔지만, 그래도 집에 오면 늦었다, 늘. 연휴 때 미사에 가지 못했고 음력으로 다시 시작하는 새해라, 나름 반성한다는 뜻으로, 평일 저녁 미사엘 갔다. 본당 보좌 신부님 헤어 스타일이 변해 다른 신부님이 오셨나 생각했다. 퍼머를 한 단발이었다가 이젠 단정한 스타일이다. 나이 든 신자들은 좋아하시겠다고 적었다가, 나도 나이 들었음을 떠올린다. 평일 저녁 미사를 금방 끝난다. 그래도 미사를 보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이제 서둘러 집에 갈 시간이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집에 도착하니, 아들은 학원에서 오지 않았고 아내도 퇴근을 하지 않았다. 살짝 냉기가 도는 어두운 집에 전등을 켰다. 조금 늦게 들어오는 불빛, 인공의 환함. 나는 다시 집을 나왔다. 면세, 침묵,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주연: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 커티스 뭔가 SF스러우면서 홍콩 무협 액션 무비를 기대했다. 그런 면이 없진 않으나, 과하지 않다. 도리어 가족 영화에 가깝다. 세파에 찌든 중국인 아내(그러나 영어는 다소 부족한), 마음씨 좋기만 한 중국인 남편, 나이 든 아버지, 여자친구와 사귀는 딸. 흥미로운 격투 장면이 오가지만, 결국 가족의 의미를 묻는 영화다. 지금 개봉 중인 영화라 내용 소개는 이 정도로 줄인다. 영화를 다 보고 들었던 생각은 아래와 같다. 1. 양자경의 주름살이 두드러져 보였던 건 그녀가 액션 무비 스타여서 그런 것일 게다. 그녀의 액션이 나..

낮잠

살짝 감긴 눈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찬다. 한낮의 빛은 소란스럽게 망막을 자극한다. 그제서야 내가 낮잠 중임을 알게 된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힐 때, 얇은 잠은 편안해진다. 겨울 햇살은 따갑지만, 따스하고, 누군가 옆에서 떠들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나는 미동도 없이 잠을 잔다. 세상이, 사람들이, 우리 가족이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알 수 있는 잠이다. 그런 낮잠이었다.

추석 연휴, 코로나 확진

지난 주 목요일에 걸렸으니, 이제 나흘이 흘렀다. 심하게 아프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무기력했고 밤에 잠을 잘 수 없었으며, 두통과 인후통은 종종 견디기 어려워 약을 먹어야만 했다. 코로나 탓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니 책이나 실컷 읽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약을 먹으면 졸렸고 졸리지 않을 때는 머리가 아프거나 힘이 없었다. 뭔가 집중할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았다. 남은 격리기간 이틀은 평일 재택 근무다. 아마 쉴 새 없이 전화가 울려댈 것이다. 좀 쉬고 싶긴 한데 말이다. 세상이 혼란스럽게 돌아간다. 이럴 때 기회가 생기는 법인데, ... 나에겐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뭔가 저질러야 되는 건가. 고향집 뒷산에 가서 아버지 계신 곳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잡..

데이비드 밴 David Vann 인터뷰 중에서 (Axt 2017. 11/12)

를 가끔 사서 읽는다. 얼마 전에 한 권 샀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겨울에 산 것이었다. 그 사이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버렸다. 아. 데이비드 밴David Vann이라는 미국 소설가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의 번역 소설을 보긴 했지만, 읽진 않았다. 라는 잡지가 출간되었을 무렵 자주 사서 읽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지 않는다. 사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놓고 읽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읽을 것들이 너무 밀려있기 때문에. 좋은 잡지이긴 하지만. 데이비드 밴이라는 소설가와의 인터뷰 중 흥미로운 몇몇 구절을 옮기고 메모해둔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풍경 묘사와 가족 이야기. 소설을 쓰는 이들에겐 꽤 유용한 조언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소설을 쓸 때 항상 인물과 장소에 집중한다. 인물의 정신은 대체로 풍경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지음), 송은주(옮김), 민음사 결국은 울고 말았다.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 오스카와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TV 방송 뉴스 채널로 가보라. 모든 뉴스들이 현대판 비극들로 도배되어 있다. 뉴스 앵커나 기자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인양, 무미건조한 어조와 '이건 진짜야'라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빠를 찾아나선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빠를. 첫 번째 메시지. 화요일 오전 8시 52분. 누구 있니? 여보세요? 아빠다. 있으면 받으렴. 방금 사무실에도 전화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구나. 잘 듣거라, 일이 좀 생겼어. 난 괜찮다. 꼼짝 말고 소방..

토레 다비드 - 수직형 무허가 거주 공동체

토레 다비드 - 수직형 무허가 거주 공동체Torre David: Informal Vertical Communities알프레도 브릴렘버그 등 저, 김마림 역, 미메시스 이 책은 토레 다비드(Torre de David(the Tower of David), Centro Financiero Confinanzas)라는, 금융위기로 미완성된 초고층 빌딩이 어떻게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이 건물이 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수행하기 위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기록하고, 어떻게 발전해나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베네주엘라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기나 상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초고층 건물에 집을 구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이 몰려 사는 모습은 위험천만한 일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여름휴가

고대의 유적이란, 비-현실적이다. 마치 만화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일상 속으로 들어오지만, 기억에 남지 않고 현실과는 무관하거나 반-현실적이다. 가야 시대의 고분 위로 나무 하나 없는 모습을 보면서 관리된다는 느낌보다는, 신기하게도 나무 한 그루 없구나, 원래 묘 위엔 나무가 자라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생각은 논리와 경험을 비껴나간다. 그 당시 인구수를 헤아려보며 이 고분을 만들기 위해 몇 명의 사람들이 며칠 동안 일을 했을까 생각했지만, 이 역시 현실적이지 못했다. 자고로 현실은 돈과 직결된 것만 의미할 뿐, 나머지는 무의미했다.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20대 때 알았더라면, 나는 돈벌기에 집중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이 점에서 진화..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그저 좋은 사람 (원제: Unaccustomed Earth 길들여지지 않는 땅)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www.telegraph.co.uk/culture/books/10304137/The-Lowland-by-Jhumpa-Lahiri-review.html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이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였으니, 이 시기는 고향을 떠나 바다 건너 도시로, 전 세계가 고향이 되거나 고향이 사라진 때였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한다'는 이율배반적 싯구가 역사 최초 등장한 시기였으며, 전쟁으로, 혹은 폭정으로 몰락하는 도시를 뒤로 하고 새로운 도시를 향해 떠나던 시기였다. 젊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길을 떠나 ..

남자 삼대 교류사, 박유상

남자 삼대 교류사 - 박유상 지음/메디치미디어 남자 삼대 교류사박유상(지음), 메디치 나이 마흔에 아들을 얻었다. 늦어도 이렇게 늦을 수가 없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니, 준비가 되었을리 만무하다. 모든 게 낯설고 힘들다. 한 해 한 해 나는 나이가 들 것이고 주름이 늘 것이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아들이 야구를 하자거나 축구를 하자고 했을 때, 내 나이는 쉰을 넘길 것이니, 내가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테고 ...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신문을 읽다,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 - 아버지 - 아들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남자들의 교류사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해 걱정을 가졌던 터라, 이 책은 내심 반가웠다. 못난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