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The Knight, Death and Devil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1513, Copperplate 동판화

 

 

기사 옆으로 죽음과 악마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이 명료한 동판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까. 인간이 가는 길을 과거의 유물들 - 죽음, 악마 - 이 훼방 놓으며 가지 못하게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종종 후기 고딕적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 만큼은 근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도상학적으로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해석된다. 과거 종교인이 가졌던 역할을 이제 기사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를 문예부흥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혼돈기였음을 짐작케한다. 결국 고딕적 신앙이 뒤로 물러나고 기하학적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본격적으로 서구의 근대(modern)이 시작되고, 그 이후 거친 풍랑 속에서도 이성을 버리지 않는다. 


거의 1세기 후에야 철학에서 근대적 이성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예술에서의 이러한 선취(先取)는 놀랍기만 하다. 이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예술사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예술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짐작하고 예견할 수 있다. 


까뮈의 <이방인>이 나왔을 때, 그 충격은 대단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선 이 소설을 도덕 교과서로 읽히곤 한다. 이유없는 살인은 용서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유없는 살인을 너무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까뮈도 자신의 '뫼르소'가 그토록 많이, 현실 속에 등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양식(style) 상, 뒤러의 모든 작품들이 근대적이진 않다. 그는 양식적으로는 후기 고딕과 하이 르네상스(르네상스 고전주의)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가 외부 세계와 마주했던 태도는 르네상스 시기 그 어느 예술가들보다도 근대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뒤러가 끊임없이 연구되며 후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Comment +0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러한 이념의 회화적 대응물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재현적 요소도 없다. 그것은 서로 단지 네모들의 집합일 뿐이다. 세계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추상적 창조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모방으로써의 예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이제 창조로써의 예술만이 남게 되었다.(307쪽) 



이렇게, 묵시록적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사에 대한 소개나 이해로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 하나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상학적 해석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예술(혹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히 그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고, 그 시대의 생각, 사고, 감정, 웃음과 눈물을 편견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책이 때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시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시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도 못하는데, 어찌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그렇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와는 다소 떨어진 어느 자리 쯤에 위치해 있고 지금의 예술가들이 변방에 있듯이(혹은 소수의 지지 속에서)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나와는, 우리와는 참 멀리 있는 듯 느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이해를 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한 권이 될 것이다. 그것도 한국을 떠나, 세계적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굳이 필요없다. 그냥 사서 읽으면 된다. 비단 예술에 관심있는 이뿐만 아니라 인문학에 관심있는 이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함수의 도입과 바로크baroque 예술의 발생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함수는 이제 근대 세계에 있어서 중시되기 시작한 운동법칙, 곧 인과율의 수학적 표현이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이러한 함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과 X축의 독립변수의 연속적 변화에 따른 종속변수의 운동법칙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 몇 점만 보아도 금방 확인되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 해명이 없는 예술사는 도상학이나 도상학적 연대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필자는 인간의 정신이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형이상학적 해명은 필자의 신념이다. 고딕은 단지 건축적 기법의 문제가 아니며, 다위니즘Dawinism은 하나의 생물학적 가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심미적이거나 학구적인 업적도 동시대의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시대 이념의 선구이거나 반영이다. (서문에서) 



 




Comment +0

 

 

 

노트를 정리하다가 메모 해놓은 것을 옮긴다. 수지 개블릭의 당연한, 하지만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에 대한 지적이다. 보스와 초현실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설명의 용이성 탓이지, 실제로 보스가 초현실주의와 관련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스의 작품은 지극히 후기-중세적이고 고딕적이다. 


신의 세계가 가졌던 호소력이 이른 아침의 안개처럼 정오를 향해가면서 사라져갈 때, 그 안개를 못내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스의 작품은 먼저 중세말, 근대초의 심리적 방어를 위한 공포적 상상력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외부의 제어 수단을 바라기 마련이다. 중세 사람들에게 신의 세계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었고, 보스는 그 세계가 존재함을 시각적으로 그려냈다. 이 점에서 수지 개블릭의 '종교적 사실주의자'라는 표현은 매우 타당하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초현실주의를 같이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간주되어 와서 그러한 비교를 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그릇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보스는 동시대 사람들이 괴물에 대하여 갖고 있던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이 없었다면 이 관념은 중세의 '불가사의'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오늘날 정의, 원자력, 산업 등과 같은 가장 '최신'이거나 혹은 전통적인 개념과 느낌을 '표현하는' 사회적 사실주의자(social realist)'가 존재하듯이 보스도 '종교적 사실주의자(religious realist)'였다. 
-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14쪽 (천수원 옮김, 시공사)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Bosch's most widely known triptych, El Prado Museum 

(출처: 위키피디아)







Comment +0


중세의 가을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옮김)
문학과 지성사



책을 다 읽은 지 몇 달이 지났고, 그 사이 여러 번 책을 꺼내 읽으며 노트를 했지만, 쉽게 소개 글은 씌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으니, 나는 거의 십 년 넘게 이 책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완독하지 못했다. 자끄 르 고프의 ‘서양중세문명’을 금방 완독한 것과 비교한다면, 이 책에 대한 내 느린 독서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은 두툼하고 활자는 작으며 문장은 길다. 제 1장의 제목은 ‘삶의 쓰라림’이고 이렇게 시작된다.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게 여겨졌고,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어린 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그런 즉각적이고도 절대적인 강도를 띠었다. 매 행동과 매 사건들은 언제나 일정한 의미를 갖는 형식에 둘러싸여졌고, 또 그 형식들은 거의 의식의 높이에까지 올려졌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 등의 주요 사건들은 성례를 통해 신비의 후광을 띠었고, 여행, 직무, 방문 같은 대단치 않은 사건들조차도 강복식이니 의례니 서식 따위를 동반하였다. - 11쪽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중세 시대의 여행에 대해 단단히 각오하라는 어투다. 그런데 이 주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대로 드러난다. 라틴어와 병기되는 무수한 인용구, 사례, 문헌들. 우리와는 다른 시대, 다른 사고, 다른 종교 아래에서의 삶, 일상, 문화와 예술은 슬프고 기묘하며 어딘가에선 현대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신에게 있어서는 의미 없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nihil cavum neque sine signo apud Deum”

절정기 중세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로 가는 길목의 이정표와도 같은 이 책의 저자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ga(1872~1945)는 문화사, 혹은 예술사가 시작되었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최고의 학자이자, 현재까지 중세 문화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학자이다. 그의 이 ‘중세의 가을’은 중세 후기 유럽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이자, 현대인들이 종종 부딪히는 심리적 갈등이나 병적이고 경련적인 마음이 어떤 배경 위에 이루어져 있는가를 파악하는 우회로와도 같다.

이 책은 역사, 특히 문화와 예술에 집중된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대해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연구자들이 늘어나 마치 중세 연구의 부흥기처럼 여겨진 20세기 후반에도 이 책의 명성이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더해진 것도 문화사 연구에 있어 호이징가의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시대 전체가 보다 아름다운 삶을 열망한다. 현재가 어둡고 혼란스러울수록 그 같은 열망은 더욱 더 깊은 바람을 띠게 마련이다. 중세 말의 삶은 침울한 멜랑콜리로 가득 차 있다. - 40쪽


 

열렬하고 격하며, 냉혹하면서도 동정적이며, 세계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또 세계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이 시대의 정신은 엄격한 형식주의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같은 감동들은 관례적 형태라는 엄격한 틀 속에 당겨져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 생활 역시 그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었다. 삶의 사건들은 아름다운 광경이 되었고, 고통과 기쁨 역시 비장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입혀지고 단장되었다. 감동을 표현하는 수단에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감정은 단지 그 미적 표현에 의해서만 그 시대가 열망하던 그 높은 단계의 표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60쪽



 

삶의 이상으로서 기사도의 개념은 매우 특수한 성격을 띤다. 본질상 그것은 환상과 영웅적 감동에서 나온, 그러나 외관에 있어서는 윤리적 이상을 담당한 하나의 미학적 이상이었다. 중세적 사고는 기사도의 개념을 종교와 미덕에 결부시키면서만 그 기사도적 개념에 귀족적 위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 83쪽



중세 초기의, 신흥 종교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열정, 그리고 그것이 반영된 여러 종교 의식들은 이제 형식으로만 남아 종교를 지탱할 뿐이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어 변하지 않고 도리어 피폐해지는 삶의 조건들. 신앙의 힘, 기도의 힘 대신 보다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행동들이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 정신은 그 변화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 이것이 중세 후기 대다수 민중의 삶이었다. 미학적 형식주의에의 경도는 그 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고딕만의 해결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학적 표현으로 경도되던 형식주의적 세계 속에서도 생의 실존적 물음은 절대 사라지는 법이 없다.

쇠퇴기의 중세만큼 그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큰 강조와 감동을 부여한 시대는 달리 없었다. 그 시대에는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는 호소가 메아리친다. - 166쪽



가령 이런 표현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할까?

“여자는 음란과 악취 속에서 아이를 배며, 슬픔과 고통 속에 아이를 낳고, 번뇌와 노동으로 아이를 키우며, 탄식과 공포로 늙어간다. Concipit mulier cum immunditia et fetore, parit cum tristitia et dolore, nutrit cum angustia et labore, custodit cum instantia et timore” - 170쪽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신앙의 기운이 깃든다. ‘정신적인 양극 사이의 긴장’, 즉 ‘위선과 텅 빈 편협한 신앙’이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15세기 사람들은 늘 근엄한 신앙에 기괴한 허식에의 애호를 결합시킨다.’

이런 이유로 중세는 종종 현대의 우리에게 낯설고 기괴하며 불가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정신적인 사랑은 쉽사리 단순하고 순전한 육체적 사랑으로 전락한다 Amor spiritualis facile labitur in nudum carnalem amorem”. 이는 단순하고 순전한 육체적 사랑에 대한 교회의 관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성스러운 사랑을 대상으로 한 지극히 관능적인 환상을 용인하는 것이다. 마치 바로크처럼.

상징주의는 직관에 의해 예감되고, 음악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과 유사한 관계들의 불완전한 표현이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Videmus nunc per speculum in aenigmate” 사람들은 하나의 수수께기에 직면해 있다고 의식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울 속에서 형상들을 분별하려고 애썼고, 이 형상들은 다른 이미지들을 수단으로 해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상징주의는 창조라는 거울에 마주 세울 수 있는 제 2의 거울과도 같았다. 모든 개념은 조형적이거나 회화적이 되었다. 세계의 표현은 달빛 아래 선 성당의 고요함에 도달했고 거기서 사고는 잠들 수 있었다.  - 260쪽

 

호이징가는 중세의 종교 생활, 세속 영역의 확장, 사랑의 방식, 이미지와 상징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한다. 실은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책을 읽을수록 책은 더욱 복잡해지고 다채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마치 고딕 성당의 스태인드 글라스에 비친 햇살처럼.


중세의 가을 - 10점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문학과지성사




Comment +2

  • 비지엠 2016.10.15 20:03 신고

    그렇다면 중세의 형식주의가 대두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 형식주의는 모든 시대에 등장합니다. 아마 후세의 역사가들은 20세기를 형식주의 시대라고 할 지도 모릅니다. 반-형식주의를 표방하며 많은 이론들과 예술작품들이 넘쳐났지만요. 따라서 중세의 형식주의가 대두되었다라기 보다는 '모든 시대는 그 나름대로의 형식주의를 가진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같네요. 다만 중세는 눈에 보이는 형식주의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의 형식주의를 가지고 왔으며 이를 교회나 교회 의식으로 형식화시켰습니다. 이는 천상의 질서를 현실 속에 내리기 위함이며, 이 때의 형식주의는 플라톤주의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퀼른 대성당은 13세기에 짓기 시작해 19세기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도대체 그 공사비는 누가 댄 것일까? 짓기 시작했을 때의 설계도는 남아있는 걸까? 자끄 르 고프는 '장기 지속의 중세'를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여러 저서들에서 기독교가 그 힘을 유지하고 있었던 19세기까지 '중세'라고 이야기한다. 그러고보면 아직 중세가 끝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 속에는 언제나 절대자 신을 염원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으니 말이다

기독교에서의 신은 인류가 고안해낸 어떠한 신보다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그에겐 불가능이란 없으며 시간마저도 그의 권능 아래에 있다. 그리스의 신들이 시간, 또는 운명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그렇게 절대적이라는 신의 힘을 느낄 때가 그리 많지 않다.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입고 죽임을 당하는, 우리가 기대하고 염원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아무런 까닭 없이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걸 자주 경험하는 우리들로서는 신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자주, 강하게 받기도 한다.

그 느낌은 세속적 세계의 확장과 그 시작을 같이 한다. 고딕 양식은 중세 도시의 승리를 알리는 양식이며 신의 권좌 앞에서 자주 신에게 우리의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져든 양식이었다. 믿음이란 늘 쌓여져가는 실패와 아픔의 경험 앞에서 의심으로 바뀌고 결국 철회된다. 12세기에 시작된 고딕 양식은 기독교 세계의 쇠퇴와 이어지며 그 쇠퇴의 분위기 속에서 신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몸짓이었다.


Comment +0


르네상스 - 10점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학고재


르네상스 Renaissance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 학고재






모든 시대는 동등하다. 그러나 천재는 항상 그의 시대를 초월한다
- 월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는 르네상스 개론서라기 보다는 그의 관심을 끌었던 르네상스적 인물들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배경이나 특징, 주요 사건들이나 인물 등과 같은 르네상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구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19세기 말의 뛰어난 비평가였던 페이터의 심미안이나 그의 비평언어에 대해선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의 서문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평가 지망생들에게는 꼭 읽으라고 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지적인 만족을 위하여 미의 엄밀하고 이론적인 정의를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질적 소질, 즉 아름다운 사물에 깊이 감동 받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9쪽)

요즘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미술/음악 작품에 대한 비평문들-나이든 이의 것이나 젊은이의 것이나-을 보면 단번에 글쓴이가 이 작품에 감동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론을 위해 뛰어나지도 않은 작품들을 인용하고 분석하기도 한다.

쉽게 이런 생각을 해보자. 바로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고정시키며 영혼을 요동치게 만들고 시간을 정지시켜버린다고 치자. 그 속에서 그 아름다운 여자 앞에 선 이는 무슨 말을 할까.

아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영혼의 표면이 잠잠해질 때 한 마디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뛰어난 비평이란 이럴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리뷰를 쓰게 되는 이의 글이 '악평'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깊이 감동 받기란 드문 경우이고 감동 받기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듣게 되는데,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전시/공연 리뷰를 쓰는 일은 대체로 한국에서의 사적/공적 관계를 해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례사비평'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데 사적/공적 관계까지 해치게 되니 어떻게 '악평'을 올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제대로 감상하는 법도 모르는 비평가들이 태반인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월터 페이터는 너무 르네상스에 경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는 '르네상스는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프랑스에서 끝난다'라고 말한다. (* 이도 월터 페이터가 프랑스에 너무 빠져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그는 고딕 시기의 프랑스 이야기 두편에서 시작해 피코 델라 미란돌라, 산드로 보티첼리, 루카 델라 로비아, 미켈란젤로의 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르조네 유파, 조아생 뒤 벨레, 빙켈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빙켈만의 경우 르네상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시기적으로는 바로크 후기에 속한다. 하지만 그리스 고전 문화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르네상스적이다.

중세가 종교 중심적이라면 고딕은 종교와 세속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는 시기이며 르네상스는 세속의 승리가 최초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위대한 이교도들(무신론자들)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여기에 대한 월터 페이터의 찬사는 이 책 내내 반복해서 드러난다. 즉 경건한 신앙과 대비해서 현세에 대한 의욕적인 태도와 세속적 의식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인 셈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신화는 바로 그러한 기이한 꽃과 같아서, 그것은 성스러움과 속됨의 두 가지 전통, 두 가지의 감성이 혼합되어 피어난 것이었다."(49쪽)



* 참고로 르네상스에 전반적인 개론서로는 폴 존슨, <<르네상스>>(을유문화사)가 좋다.

Comment +0

보르헤스 씨의 정원

일러스트: 메테오 페리코니 보르헤스 씨의 정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레꼴레타 인근의 어느 집에는 이중의 특권을 가진 창문이 있다. 그 창문에서는 한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이웃한.....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메시Messy, 팀 하포드

메시Messy -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 팀 하포드(지음), 윤영삼(옮김),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확실히 기존 통념을 깨뜨린다. Messy라는 제목 그대로, 무질서와 혼.....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

맑스주의와 형식,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

점심 식사 대신 에이미 로월(Amy Lowell, 1874 - 1925)의 시를 한글로 옮겨보았다. 며칠 전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로웰의 시가 실렸는데, 처음 듣는 시.....

이상원 미술관 방문기
이상원 미술관 방문기
이상원 미술관 방문기
이상원 미술관 방문기
연인들Lovers, 리처드 브라우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