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지음), 강주헌(옮김), 아르테, 2015 




누구나 자신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야만적인 것으로 부른다

-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문명과 야만의 경계는 어디일까? 몽테뉴의 말대로 우리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야만일까? 그러나 레비-스토스의 생각은 다른 듯 싶다. 


"계몽시대의 철학이 인류 역사에 존재한 모든 사회를 비판하며 합리적 사회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면, 상대주의는 하나의 문화가 권위를 앞세워 다른 문화를 재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거부했다. 몽테뉴 이후로, 그의 선례를 따라 많은 철학자가 이런 모순에서 탈출할 출구를 끊임없이 모색해왔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하지만 이 상대주의가 우리의 일상에선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안다. 대체로 우리 주변 대부분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바 상대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더라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선택받은) 문명 세계에 살고 있으며 (우리들과 다른) 이방인들은 야만의 세계에 속한다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바 야만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 문명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보여준다. 가령 장신구 문화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야만의 형태다. 이제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나, 애초에 주술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루비는 유해한 기운을 물리치며, 사파이어는 진통효과를 지니고, 터키옥은 위험을 미리 알려주며, 자수정은 그리스어 '아메두스토스'의 의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술기운을 쫓아낸다고 수 세기 전까지 믿었기 때문에 그런 보석들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비싸게 거래되었다는 것을 요즘에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 91쪽 


장신구는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더구나 그 부분은 내가 '야생의 사고pense'e sauvage'라고 칭했던 것이 생생하게 지속되는 부분이다. 우리 시대의 여성도 귀걸이를 착용한다. 그런 여성이나, 그런 여성을 바라보는 남자도 불멸의 물질로 소멸하는 몸을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셈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장신구가 물렁물렁한 곳을 딱딱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 93쪽 


이와 반대로 우리 스스로 야만적 형태, 주술적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꽤 당혹스러운 방식이어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곤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반문하기까지 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산타클로스가 디종 성당 앞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 디종, 1951년 12월 24일

- 12쪽 


일종의 화형식이었는데, 보수적인 가톨릭의 입장에서 산타클로스는 이교도의 문화였으며 천박한 자본주의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종교 당국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며 종교적 가치가 없는 신화를 대중의 머릿 속에 심어주며 그리스도의 탄생을 불순하게 '이교도화'하려는 시도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11쪽 


확실히 산타클로스는 이교도적이고 지독히 상업적이다. 그것에는 종교적인 것은 없다. 산타클로스를 두고 신앙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당국(프랑스 가톨릭)의 입장은 이해되고 당연해보이긴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 행위가 얼마나 고대적이며 주술적인 것인가를 드러낸다. 


식인풍습에 대한 글도 흥미로웠다. 식인풍습이 일종의 약탈이나 살인 행위의 일종일 것이라 여겼던 나에게, 실은 '사랑과 존경의 표현'으로서의 식인 풍습은 매우 의외였다. 내 생각은 더 나아가 성경에서 언급된,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이것이 내 살과 피라고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이어졌다(<<길가메시 서사시>>와 구약 성경의 일부 이야기들은 얼마나 닮아있는가).


민족학자들은 그 지역에 들어가 다른 가정 하에 구루병의 원인을 조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배를 받기 전에, 구루병이 만연한 부족사회의 식인 풍습이 있었다. 가까운 친척의 시신을 먹는 것이 고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한 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고인의 살과 내장 및 뇌를 익혀 먹었고  빻은 뼈를 채소와 함께 조리해 먹었다. 여성이 시신을 잘라내서 조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까닭에, 시신으로 여성이 감염된 뇌를 다루는 과정에서 병원균에 감염되었을 것이고, 신체적 접촉으로 인해 어린 아이에게도 옮겼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 123쪽 

(* 구루병 - 우리에겐 광우병으로 잘 알려진 '크로이츠 펠트야코프 병'을 의미함. 양의 경우에는 '진정병scrapie'라고 함. 지연성 바이러스로 인한 퇴행성 질환이며, 식인 풍습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짐)


구루병의 원인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식인풍습에 대해 보다 더 깊이 알게 된 건 꽤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먹다'와 '성교하다'라는 단어가 문명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언어에서 같은 단어로 사용된다는 것이나. 모권제 사회에 대한 추측은 잘못된 정보라는 언급은 기억해둘만 했다. 


민족학 연구가 발전하면서, 한때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모권제의 환상에 종지부가 찍어졌다. 부권제 아래에서는 당연하지만 모권제 아래에서도 권력은 남성의 몫이었다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모권제에서는 어머니의 남자 형제들이 권력을 행사했고, 부권제에서는 남편이 권력을 생사한다는 게 유일한 차이였다.

- 154쪽 


이 책에 실린 레비-스트로스의 글은 대부분 저널에 실렸던 것이라 그 길이가 짧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무척 시사적이면서도 그 소재나 주제가 흥미로워 추천할 만하다. 


내 경우엔 이 책을 다소 급하게 읽긴 했으나, 오귀스트 콩트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언급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 콩트의 책을 읽지 않았고 그 위상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가 없었으나, 콩트의 실증주의적 태도가 후대 학문에 꽤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콩트가 이야기했던 그 이론들이 지금도 유의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아래는 니콜라 푸생의 <에코와 나르시스>>에 대한 언급이 있어 메모해둔다. 


Echo and Narcissus

Nicolas Poussin(1594-1665), oil on canvas, 74 cm* 100 cm, 1630, Louvre Museum 

이미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



무엇보다 그림의 구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모든 선이 분산되며 서로 멀어진다. 나르키소스의 두 다리는 오른쪽을 향해 벌어졌고, 두 팔은 서로 반대방향을 향한다. 다른 두 인물, 즉 숲의 요정인 에코와 장례의 횃불을 쥐고 잇는 푸토의 몸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런 분산은 그림에서 윗부분을 차지한 나뭇가지에서도 반복된다. 이런 분산 방향은 메아리(숲의 요정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했지만 거절당하자 슬픔으로 몸은 없어지고 메아리가 되었다 - 옮긴이)의 청각적 현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메아리는 소리의 원점에서 점점 멀어지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보들레르의 유명한 시가 그렇듯이, 감각적 자료들 간에 연상되는 이런 조응(correspondance)으로 푸생의 그림에서는 멜랑콜리, 즉 일정한 배색 효과로 강조된 회상에 젖은 서글픔이 느껴진다.

- 144 ~ 5쪽 



푸생의 그림에서 주조를 이룬듯한 분산이 온갖 모습으로 나타난다. 멍청한 듯 하면서도 기막히게 놀라운 일을 해내는 메아리의 물리적 현상에 내재된 분산이다. 따라서 메아리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산책자와 여행자를 유혹한다. 푸생의 그림이 요정 에코와 초자연적 세계의 작은 특사(푸토)가 취한 상반된 방향을 강조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낸 분산이기도 하다. 에코는 일관된 단조로운 색조로 이미 자신과 하나가 되어버린 바위의 형상으로 땅을 향하고 있다. 이런 대비가 구도와 색이란 상보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에코 요정의 헛된 회상과 나르키소스의 숙명적인 오해, 그리고 메아리의 무익함과 전능함을 하나의 그림에 담아내고 있다.

- 152쪽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 10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강주헌 옮김/arte(아르테)




Comment +0


아미엥에서의 주장 Positions(1964~1975)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지음), 김동수(옮김), 솔, 1991 








정치는 나를 열광시켰으며 나는 공산주의 투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철학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유물론과 그 비판적 기능, 즉 과학적인 지식의 편에 서며,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의 모든 신비화에 대항하는 기능, 그리고 신화들과 거짓말들의 단지 도덕적인 포고에 대항하여 그것에 대해 합리적이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기능이었다. - 44쪽 



* *


솔직히 말해, 이 글은 어색하다. 1991년 양장본으로 번역 초판이 나왔고 1996년 보급판 3쇄까지 나왔다. 보급판 3쇄, 내가 읽은 책이다. 내가 알기로 그 당시 보통 2,000부를 출판하였으니, 지금과 비교하여 많이 팔렸고 많이 읽혔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알튀세르가 사라졌다.


그 많던 독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 앞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강제하던 선후배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그 강제의 폭력성을 떠올릴 때면 그들이 저항하던 폭력적 사회와 그들의, 갓 들어온 신입생들과 소위 운동권에 대해 관심이 없던 동료 학생들을 향한 폭력성은 닮아있음을, 그리고 결국 그들이 이 사회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공범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맑스의 전(全)이론, 다시 말해 맑스에 의해 확립된 과학(역사적 유물론)과 맑스에 의해 열린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은 계급 투쟁을 그 중심과 핵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계급 투쟁은 맑스-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실천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에 있어서, 그리고 맑스주의적 과학과 철학에 있어 '결정적인 고리'다. - 69쪽 



이십여 년 전에도 읽었을 위 문장을 다시 읽으니, 참 멀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 의식부터 생겨야 하는데, 솔직히 계급 의식을 만들기조차 버거운 상황이 되었다. 아니 부르조아 -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은 이미 호소력을 잃은지 오래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용감하게 프로이트와 라깡을 마르크스 안으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르겠구나. 



왜 철학은 단어들을 두고 서로 싸우는가? 계급투쟁의 현실은, 단어들에 의해 '표현되는' '사고들'에 의해 '표현된다.' 과학적, 철학적 추론 속에서 단어들(개념,범주들)은 인식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투쟁 속에서 단어들은 또한 무기이고 폭탄이며 진통제이고 독약이다. 모든 계급투쟁은 때때로 한 단어의 편에 서서 다른 단어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요약될 수 있다. - 54쪽 



알튀세르의 이런 면 - 이론적 실천 - 으로 인해, 그의 제자였던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단호하게 알튀세르의 이론을 거부한다(알튀세르의 제자들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이, 자끄 랑시에르 등이 있다).



자크 랑시에르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 박기순,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고 다르게 사유하다> 중에서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261 



하지만 이 작은 책,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인 이 책이 읽혀야 한다면, 그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논문 때문이다. 아마 철학 전공자보다 영화나 미디어 전공자들이 더 많이 읽었을 이 논문은 앞으로도 계속 읽힐, 꽤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 짧은 논문을 통해, '생산 관계들, 즉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들의 재생산'을 위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국가가 허용하는 폭력에 의해 기능하는 억압적 국가 장치 - 군대, 경찰 등 - 과 달리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하며, 종교(다양한 교회들의 체계), 교육(공적, 사적인 다양한 '학교들'의 체계), 가족, 법률, 정치(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적 체계), 조합, 커뮤니케이션(잡지, 라디오, TV 등), 문화(문학, 예술, 스포츠 등)에 걸쳐 있다고 말한다(실은 그냥 이 사회 전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결국 기존 체제는 억압적 국가 장치로 관리되면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유지된다. 여기에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이는 '완전히 혼자서 활동'하도록 하면서 '종속에 의해서, 종속을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각각의 개인들이 자유로운 주체임을 알게 되는 것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각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서이고 이 호명은 보다 거대한 주체(신이거나 국가이거나)에 의해서다. 즉 누군가를 불러줌으로써 개인을 자유로운 주체로 올리고 그 주체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심는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통해 기존 생산관계는 확대, 재생산된다. 어쩌면 이러한 확대, 재생산 구조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것을 알튀세르는 이론적 실천으로 여겼는지도. 





그 외의 논문들, <프로이트와 라깡>,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맑스주의와 계급투쟁>, <아미엥에서의 주장> 등도 읽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책에 관심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싶고, 이 책은 이제 시중에서 구하기도 어려우니, 다시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그리고 이 책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 지도 의문스럽다.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나 접근이 아니라, 그냥 정치 일반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면 충분해 보인다. 그 정도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으니까. 그냥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지금은 이상한 시대다. 보수라는 단어까지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으니, 마르크스주의는 그냥 신기루다.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인데, 이제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었지만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부패, 비리 의혹으로 얼룩져 실패한 정권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인 보수정부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하다. 

- 이상돈, <<공부하는 보수>>, 책세상, 12쪽 



거참, 이런 시대에 알튀세르라니!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아래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영문 번역이다. 관심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 연구를 위한 노트 (영문 번역)



*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은 랑시에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E.P.톰슨은 아예 책까지 냈다.<<이론의 빈곤>>(책세상, 2013). 알튀세르에 대해 조금 웹 서핑을 해보다가 찾았다. 직장인이다 보니, 이런 책이 나오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건 그렇고, 요즘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데, ... ㅡ_ㅡ;; 




아미엥에서의 주장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솔출판사

Comment +0

애도 일기 Journal de deuil 

롤랑 바르트(지음), 김진영(옮김), 이순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벵제(Henriette Binger)가 죽은 다음부터 씌여진 메모 묶음이다. 그의 어머니가 1977년 10월 25일 사망하고, 그 다음날 10월 26일 이 메모들은 씌어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그리고 1980년 2월 25일 작은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롤랑 바르트는 한 달 뒤인 3월 26일 사망한다. 그리고 그 해 쇠이유 출판사를 통해 이 책이 나온다.


롤랑 바르트 팬에게 권할 만한 이 책은 두서 없는 단상들의 모음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씌어지는 이 책은 짧고 인상적이다. 롤랑 바르트 특유의 문장들을 만날 수 있고 그의 슬픔에 대한 인상, 분석, 인용들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깊이 있는 분석이 있거나 설명이 있지 않으니, 독자들에겐 친절하지 못한 책이다. 문학비평가이자 이론가, 혹은 철학자로 알려진 롤랑 바르트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니,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책 몇 권을 이미 읽은, 그리고 롤랑 바르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실은 아직도 사람들이 롤랑 바르트를 읽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롤랑 바르트를 읽지 못했음을 알고 꽤 슬펐다. 내가 읽었던 몇 권의 책,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사랑의 단상', '작은 사건들', '이미지와 글쓰기',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 ... 그러고 보니, 이 책들을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모르겠으니, 나는 참 오래 떠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죽기 전 발간된 책인 '카메라 루시다'에 대한 배경을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역자는 후기에서 푼크툼을 이야기하며, 이 책 - 애도일기 - 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니, 아직 '카메라 루시다'를 읽지 않았다면, '애도일기'와 함께 읽으면 좋다. 


(아래 사진들은 애도일기의 표지들이다.)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저 | 김진영역 | 이순 | 2012.12.1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Comment +0



며칠 전부터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Journal de deuil>>를 읽고 있다. 뒤라스, 바르트, 끌레지오, 모디아노, ... 읽지 못한 지 꽤 되었구나. 올해는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다. 




1977년 11월 21일, 롤랑 바르트. 


절망, 갈 곳 없는 마음, 무기력: 그래도 여전히 맥박을 멈추지 않게 하는 건 단 하나 글쓰기에 대한 생각. "그 어떤 즐거운 것". 피난처, "축복", 미래의 계획으로서의 글쓰기,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으로서, 기쁨으로서의 글쓰기. "신"을 향하는 경건함으로 가득한 어느 여인의 가슴 벅찬 감동들 또한 다른 것이 아니리라. 



(새해를 의욕적으로 시작해야 되나, 작년의 영향권 아래서 꽤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일본에서 나온 책 표지 디자인은 너무 깔끔하다! 사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 화가 친구에게 안부 메일을 보내야겠다.)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저 | 김진영역 | 이순 | 2012.12.1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Comment +0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이매진




그가 죽고 난 다음, 르몽드에서 한 면을 통째로 특집으로 꾸몄다. 20세기 후반기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내팽개쳐져 있을 무렵,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생과 학문 세계가 유력 일간지 특집으로 나온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현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거의 독보적인 인물.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마르크스주의에 도입한 철학자. 


하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동료이기도 했던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침묵의 세월 보내며 죽는다. 그리고 죽기 전에 발표한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며, 자신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도려내어 분석한다. 


문장 문장 하나가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며, 추억은 쪼개지며, 사랑은 냉정하게 분석되며, 민감한 영혼은 자리잡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희망으로 대변되는 미래를 이야기하기엔 이 책은 철저하게 자기 분석적이다. 


나는 20대 후반 이 책을 두 세번 읽었다. 그 이후 나는 학문의 세계를 떠나 직장인이 되었고 사랑과 술에 대한 개인적 역사를 만들며 사십대가 되었다. 그 사이 루이 알튀세르의 자리엔 다른 학자들이 자리잡았고, 알튀세르는 한참 유행에 뒤진 학자가 되었지만, ... 그의 자서전은 현대적 자서전- 지극히 비극적이고 철저하게 외로웠던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 속에서 - 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것고, 끊임없이 되새기게 될 것이다. 진정한 독서란 한 번 읽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 읽는 것이기에. 






Comment +0


책 읽기와 글 쓰기에 예전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밀린 원고마저 있다. 회사 업무로 읽어야 하는 리포트와 아티클도 쌓여있다. 지난 번 읽은 '슬픈 열대'(http://intempus.tistory.com/1353)의 역자 서문에서 기억해둘 만한 내용을 노트해두었다. 이를 되새길 겸하여 블로그에 옮긴다.

'슬픈 열대'라는 책이 레비-스트로스의 명성을 크게 알린 책이나, 그의 주저라고 보기엔 한계가 있다. 그의 학문 체계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슬픈 열대'의 역자는 다른 책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나온 '친족의 기본구조''야생의 사고'였다. 특히 후자는 인문학 전공자라면 필독서에 해당된다.


'친족의 기본구조'
- 미개인이 생물학적 충동으로 단순히 반응하는 '자연'으로부터 미개인이 그의 사회집단을 기능화하는 '문화'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탐구한 것이다.
- 자연적 환경이 제공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화한다는 사실.
- 모든 기존의 사회 집단에 의해서 동등하게 실천되고 있는 근친금혼(incest taboo)
 : 이 제도는 문명 사회나 미개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경계선.
- 근친금혼에 대해서는 인류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피력하고 있음.
  : 모건(John Pierpont Morgan)의 생물학적 해석 - 유전학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 웨스트마크(Edward A. Westmarck)의 도덕적/심리학적 해석 - 친족 질서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 레비-스트로스 - 근친금혼이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음.


야생의 사고 - 10점
레비 스트로스 지음/한길사

'야생의 사고' La Pensee Sauvage
- 원시적 사고란 동식물의 세계를 민감하게 이해하고, 우주적 조화를 구축하려는 감각 속에서 균형과 연속성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과학적 태도와 다른, 어떤 지식 획득의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
- 원시인이 사용하는 논리는 하나의 구체적이고 감지적이며 심미적인 논법인 것.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의 특징을 '무시간성'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야생의 사고의 목적은 세계를 하나의 통시적, 공시적 전체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위 노트는 박옥줄 교수(불문학)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 옮긴 것임.



레비-스트로스의 말들.

“나는 태생적인 구조주의자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내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글을 읽기 한참 전인 시절, 하루는 내가 유모차에서 ‘부세(boucher, 정육점)’와 ‘블랑제(boulanger, 제과점)’ 간판의 첫 세 알파벳이 ‘bou’인 것 같다고 소리쳤다는 거예요. 그 두 단어의 앞 철자들이 동일했으니까요. 그 나이에 이미 난 불변자(不變者)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라는 회고록에서 실린 대화의 일부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10점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강


“구조(structure)는 체계(systeme)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체계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관계들로 구성된 총체를 말하지요. 구조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요소들과 여러 집합들의 관계들 사이에 불변하는 유사점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 집합이 변형을 통해 다른 집합으로 이행해 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위 인용은 서동욱 교수의 글에서 옮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751 





Comment +0


슬픈 열대 - 10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한길사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
박옥줄 옮김, 한길사, 1998(원저: 1955)



여행이여, 이제 그대가 우리에게 맨 먼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류의 면전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의 오물이다. - 140쪽

1. 여행 문학으로서의 ‘슬픈 열대’

20세기 세계 문학사에서 여행문학의 대표적인 저서로 손꼽히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하지만 나는 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한 번도 이 책을 교수나 강사에게서 권유 받았던 적이 없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느 외국 신문의 기사에서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여행기라는 평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http://intempus.tistory.com/403)이라는 다소 어수선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나열로 읽히는 산문집에 열광하는 독자에게 여행문학의 정수를 알려주고 싶었다.(1)


하지만 이 책은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것으로 밝혀졌다. 역자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설은 석사 과정 이상의 인문학 전공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번역은 마치 수 십 년 전 번역한 것을 대강 다듬어 다시 펴낸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독서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길 여행이 보편화된 요즘, 몇 달씩 걸리는 바다길 여행은 육체적 고단함과 피폐함, 지루함과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지만, 종종 아래와 같은 낭만적 표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고대의 항해자들이 그토록 무서워하였던 적도 부근의 농무지대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양반구(兩半球)에 고유한 바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 미풍 한 점 없는 하늘에 검은 구름들만이 해면으로 서서히 움직이면서 중력에 감응하고 있었다. 만약 이 구름들이 왕성한 활력을 지닌 것이었더라면, 그것들은 번쩍거리는 해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것을 깨끗이 청소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태양 광선을 간접적으로 받고 있는 해양에는 공기와 물 사이의 빛의 가치에 대한 통상적인 관계를 뒤집어놓는, 단조롭고 번들거리는 반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바다로부터 소멸되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들 앞에서 하얀 파도 사이를 우아하게 헤엄쳐 나가던 돌고래들도 보이지 않았고, 수평선에는 고래들이 뿜어 올리던 물기둥도 없었으며, 적자색(赤紫色)의 앵무조개과가 이루던 장관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 192쪽



또한 레비-스트로스의 여행에 대한 성찰은 누구나 흉내 내어 쓰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여행을 공간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간의 여행은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 사회적 서열에서의 변화도 수반한다. - 211쪽


그리고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독자들에게 딱딱한 인문학 서적에서 줄 수 없는 묘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비는 이 도시에 스며들고 있는 습기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마치 보편적인 증기가 진주색의 물방울로 변하는 것같다. 마치 유럽에서처럼 비는 일직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빗방울은 공기 속에서 습기와 뒤섞인 다수의 매우 작은 물방울처럼 창백하게 번쩍이는 것 같다. - 230쪽


1930년대 브라질에서의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의 배경이 되었던 시절이다.
출처 - http://www.telegraph.co.uk/news/obituaries/science-obituaries/6496558/Claude-Levi-Strauss.html


2.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의 시작은 아마 레비-스트로스로 지칭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한 발 물러나 부정한다. “오늘 날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나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 … 나는 결코 어떤 지적 운동이나 주의를 주장하거나 이끌지 않았으며, 오직 민족학자의 집단에 둘러싸여 고립적 활동을 계속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그의 학문을 전개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이 서평에서 구조주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 모습이 다소 무모해 보이지만, 짧게 언급해볼까 한다.

2-1. 언어에 대한 탐구

현대 인문학(철학)을 여는 인물로 우리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맨 앞에 위치시켜야만 한다(니체가 아니라!). 하지만 소쉬르는 순수한 언어학자라는 점에서, 그가 창안해 낸 개념들이 현대 인문학을 주름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읽히지 않는 학자가 되어버렸다.(2)


그의 ‘일반 언어학 강의’는 20세기 철학을 물들이게 될 허무주의와 반역사주의에 대한 이정표와도 같은 저서이다. 그는 먼저 언어를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로 나눈다. 우리가 나무를 ‘나무’라고 할 때, ‘나무’라는 단어를 기표, 실제 땅에 심어져 자라는 나무를 기의라고 한다. 이는 ‘형식과 내용(의미)’에 대한 오래된 분류법에 대한 또 다른 변주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가 필연적이 아니라 자의적인 것이라고 할 때 시작된다. 즉 우리는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나무를 ‘술병’이라고 표기하여도 되고, ‘탁자’라고 표기하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의적인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소쉬르는 사회적 언어로서의 ‘랑그’와 개인적 언어로서의 ‘파롤’을 제시한다.(3)

우리가 쓰는 언어는 사회적 언어로서의 ‘랑그’이며, 개인적 언어로서의 ‘파롤’은 어린 아이 시절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거나 무의식의 차원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또한 그는 언어에 대한 연구는 공시적 차원(동일한 공간)과 통시적 차원(시간의 흐름, 또는 구분)으로 연구될 수 있으며 이를 공시태, 통시태라고 표기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자의적 관계’라고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는 토마스 쿤이 과학법칙이란 당대 과학자들의 사회적 합의이지, 실제의 자연 현상과는 무관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동일한 지평에 있는 것이다.(4) 또한 중세의 유명론(nominalism, 唯名論)과도 맞닿아 있는 해석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형식과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표기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다를 수 있다. 누군가 ‘나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나무를 떠올린다는 점이다. 또한 누군가 ‘나무’라고 말했을 때, 그 나무가 우리가 떠올리는 바 나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종국에는 랑그란 존재하지 않고 파롤만 존재하게 되는 어떤 세계가 도래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러한 허무주의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리고 현대 철학은 소쉬르가 제시해놓은 언어학적 인식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2.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자들이 언어에 대한 연구 태도를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시킨 학문 태도를 일컫는 단어이다. 인류학에서는 레비-스트로스, 문학 비평에서는 롤랑 바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자끄 라캉, 철학과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미셸 푸코, 마르크스 연구에 있어서는 루이 알튀세르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각자는 연구 태도에서만 유사점을 드러낼 뿐, 각기 다른 영역에서 다른 학문 세계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을 구조주의자라는 한 단어로 묶는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을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조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이유를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찾아보기로 하자.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의 원시 부족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삶의 형태들(기표)을 서술한다. 그리고 형태의 의미(기의)를 탐구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부족들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된다. 심지어 그는 동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든다. 즉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듯이, 삶의 보여지는 형태로 인해 그들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만약에 물고기가 명암에 의해서 냄새를 미학적으로 구분한다면, 또 벌들이 빛의 강도를 무게에 의해서 분류한다면 - 벌들에게 어둠은 무거운 것, 밝음은 가벼운 것이므로 - 화가, 시인 또는 음악가의 작품과 신화, 그리고 미개인들의 상징은, 우수한 형태로서는 아니더라도 가장 근본적이며 또 우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지식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야만 한다. - 266쪽


 

현재의 서양과 동양 간의 오해는 우선 의미론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동양에서 우리(서양인)가 선전하는 개념의 형식은 그곳에서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의미가 다른 것이다. - 309쪽



이렇듯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인류학 전반으로 확장시키는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의 우열이나 시간에 따라 진보한다는 찰스 다윈식의 역사주의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레비-스트로스식의 역사 의식에 따른다면,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은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유지되어온 의미나 지식의 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 시대와 공간적 특성에 따라, 동일한 구조가 다양하게 변모하였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는 진보의 개념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결코 지니지 않았다. 단지 그는 진보란 인간 발달의 차원에 대한 범주로서, 어떤 사회가 자기 인식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언제든지 다른 차원으로 이전되어 버리는 동일한 구조 내의 불연속적 다양화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 역자 서문, 92쪽


출처- http://web.mac.com/ 


레비-스트로스는 루소를 다시 읽으며, ‘남비콰라족의 사회가 내가 그 사회에서 오직 인간만이 발견할 수 있었을 정도로 단순화된 상태’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 언어학의 태도를 학문 연구 태도로 받아들여, 역사에 대한 부정을 기본 태도로 받아들여, 반역사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내가 지금 이를 오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 보여지는 것에 대한 진실한 탐구가 결국에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상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존 역사주의가 가졌던 획일적 방식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가 가졌던 미덕을 ‘반역사주의’로 획일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슬픈 열대'를 덮으며

이 책은 레비-스트로스의 여행기이다. 그가 브라질에 가게 되었던 이유, 그가 인류학자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사연, 그리고 브라질에서 만났던 원시 부족에 대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라져가는 미지의 풍경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묻어난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번역 서적이 가지는 몇 가지 고질적인 문제 탓이며, 이런 종류의 책을 자주 접해보지 않는 탓일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학문 세계를 드러내려는 목적은 아니었으나, 책을 읽고 쓰는 감상문 치고는 다소 길게 적었다. 그의 다른 책들 - 가령, ‘야생적 사고’나 ‘신화학’은 레비-스트로스의 학문 세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들을 읽기 바란다.

 

미주)
1. 이 책은 독서모임 ‘빡센’(http://cafe.naver.com/spacewine)의 다섯 번째 도서로 읽었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하루 종일 사무실에 매여 있는 직장인이 읽기엔 적당한 강제력이 필요한 책이었다.
2. 소쉬르에 대한 무관심은 다른 학자들에 대한 열광적인 호응과 대비되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 그의 주저인 ‘일반언어학 강의’는 최근에 새로 번역되어 나왔다. 내가 읽은 책은 대우학술총서로 나온 낡은 것이었으나.
3. 랑그와 파롤은 자끄 라캉에게는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힌트를 제시해주었다.
4. 토마스 쿤의 주저인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Comment +2

  • 지나가는사람 2011.06.01 04:48 신고

    제가 소화하기엔 어려워서 이 글 읽으면서 헤롱거렸지만 뭔지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아요!!
    이 책 꼭 읽어보고싶네여
    만약에 물고기가 명암에 의해서 냄새를 미학적으로 구분한다면, 또 벌들이 빛의 강도를 무게에 의해서 분류한다면 - 벌들에게 어둠은 무거운 것, 밝음은 가벼운 것이므로 - 화가, 시인 또는 음악가의 작품과 신화, 그리고 미개인들의 상징은, 우수한 형태로서는 아니더라도 가장 근본적이며 또 우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지식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야만 한다. - 266쪽
    ㄴ>제가 티비에서 원주민 다큐를 보았는데요 예를들면 원주민이 하늘과 잎사귀를 쳐다보는 순간이 내가 소설을 읽을때의 신비한 순간과 똑같다고 느꼈어요 엄마가 후지다ㅉ_ㅉ는 눈빛으로 미개하다는 말을 쓰는게 짜증났거든여!!후 제가 경험한 직감을 잘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요 슬프네요 암튼 이 책 완전 멋있네요...와웅.. 쩔어요 ㅠ_ㅠ ㅋ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경쟁 우위의 종말The End of Competitive Advantage, 리타 맥그레이스

경쟁 우위의 종말 The End of Competitive Advantage 리타 군터 맥그레이스(지음), 정선양, 김경희(옮김), 경문사 "소니는 스스로 경쟁우위의 함정에.....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지음), 강주헌(옮김), 아르테, 2015 누구나 자신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야만적인 것.....

요즘 근황과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안경을 바꿔야 할 시기가 지났다. 나를,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신경쓰이게 한다. 글자가 흐릿해지는 만큼 새 책이 쌓이고 잠이 줄어드는 .....

반듯이 누워

반듯이 누워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얇게 흔들리는 콘크리트 건물의 건조함에 묻혀 아주 짧게 내 삶을 되새기며 슬퍼한다. 이름 모를 바람이 들어와 잠시 내 몸 위에 살짝 앉았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장영준(옮김), 그린비 노엄 촘스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지음), 권진아(옮김), 마음산책 헤밍웨이가 너무 유명했던 탓에, 내가 그를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이것이 세계문학전집의 폐해다. 헤밍웨이의 소설들.....

지식인의 표상, 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의 표상, 에드워드 사이드
유현경, <은주>
비 오는 날
데이비드 밴 David Vann 인터뷰 중에서 (Axt 2017.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