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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이는 시간을 먹고 나는 청춘을 먹었다. 게걸스럽게 먹는 사이, 많은 것들을 잃고 얻었다. 노트 한 장을 찢어 길게 반으로 접어, 한 쪽에 내가 잃은 목록을, 한 쪽에 내가 얻은 목록을 적는 사이, 계절이 가고 계절이 오고, 너무 하얀, 그녀의 창백한 볼을 닮은 눈이 내린다. 반쯤 마신 맥주 잔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이 쌓인다. 쌓인 눈 위로 서로 손을 마주 잡은 그들이 잔 위로 걸어나와 대학로 거리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그렇게 취해가던 금요일 밤, 다행히 나는 그녀들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실은, 전화번호도 알지 못했다, ...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녀들과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이 만날 수 없음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적어도 나는 앞으로 그 찬란하던 고통을 받지 않아도, 그렇게 투명하던 눈물도, 끝없는 저주의 언어를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시 볼 수 없을, 하얀 잔 위로 그 발자국처럼, 그 쓸쓸하고 아름다웠던 청춘의 발자국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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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이런저런 고민에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잠은 오지 않고... 그는 원두커피 원액이다. 차가운 물에 그를 섞어...서... 그녀같은 얼음을 넣어 마셨다. 추운 초여름 밤인가, 아니면 쓸쓸한 늦봄 밤인가. 바람 한 점 없는 도시에 내 마음만 바람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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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티 2015.06.27 11:15 신고

    주름과 이정복의 시집은 같은 책을 갖고 있고요 채호기의 시집은 비교적 최근 책인가요?박청호는 모르는 시인입니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끌리는군요. 치명적인. 저는 이 말은 늘 체게바라와 함께 떠올립니다. 치명적인 순수함. 그의 여정들, 타협을 몰랐던. 그런 사람들은 마흔을 넘겨 살기가 힘들더라고요. 예수도 그렇고. 윤동주와 전태일이 그렇고.또 시몬느베이유도 있군요. ( 어느 포스트에선가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책이 찍힌 사진은 무조건 확대해서 책 제목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요)
    창원분이시더군요. 저는 마산출신입나다.저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문학을 전공했고요. 마산이나 창원의 어느 길에서는 어쩌면 스치기도 했을 인연일 수도.있겠어요.
    제가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별명이 하루살이였어요.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인데 한치 앞을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 그거 별 쓸모없다, 저의 표어랍니다. 이리 나이 먹은 제가 저는 쫌 자랑스럽답니다.
    주인장님도 고민거리가 있을 땐 그냥 무심히 걷거나 잠을 잘 수 있다면 잠을 자거나 아이들이나 부인과 수다를 떨거나
    그리 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주제 넘지만 감히.



    • 마산이시면, 동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절 고등학교는 다들 마산에서 나왔으니깐요. 주름은 몇 장 읽다가 말았어요. 질 들뢰즈는 아직 읽지 못한 철학자입니다. 문학으로 읽기에도 애매하고 철학으로 읽기에도 애매해요. 시집들은 대부분 옛날 것들이지요. 박청호의 첫 시집인데, 그 땐 반짝했지요. 그 이후 후속타가 없었고 뭐랄까, 팬심을 불러일으키는 시집이 아니었던 터라 ...
      고민거리가 있을 땐 모르는 사람과 술 마시는 게 최고였던 것 같아요. 저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저를 타인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망각, 또는 거리두기와 객관화를 동시에 ...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너무 위험한 짓이죠. ㅡ_ㅡ;
      채호기의 시를 좋아라 했는데... 요즘은 거의 읽지 않아요. 확실히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기엔 나이도 많이 들었고 돈벌이가 쉽지 않네요. ~ ㅎㅎ 장난과 수다는 일종의 의무사항이 된 터라, ... 고민과는 무관하죠. 기혼자의 고민이라는 게 대체로 가족과 관련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ㅋㅋ 더운 날씨, 건강하고 활기찬 하루 되시고요~.

  • 느티 2015.06.30 23:46 신고

    동문일 리는 없겠어요. 저는 여고를 졸업했거든요. 마산의 고등학교들이 다 산등성이에 있으니 교실에서 바라보던 합포만
    바다에 대해서는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겠군요. 해가 떠오를 때, 저녁 무렵, 흐린 날 비오는 날 그 각각의 물빛 말입니다.
    서울 가서 처음 몇 달은 바다가 보이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어쩌면 바다는 핑계고 그 추위와 무지막지한 남자애들과 하루도 쉴새없이 터지던 최루탄과 뭐 그런 낯선 것들이 적응이 안 됐던 것도 같아요. 들뢰즈는 저도 아직 잘 몰라요. 남편이 좋아하는 철학자지요. 타인과 얘기하기. 대학 4년 간 마산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그 대여섯 시간 동안 옆 자리에 앉은 사람과 얘길 나눠 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컴퓨터라는 공간에선 이러고 있네요. 비가 내리고 집 뒤 논에선 개구리 울고 내일도 종일 비 내리면 뒹굴뒹굴 무슨 책을 읽울까, 두근거리며 존 버거와 겐자부로와 베네딕토 16세의 여러 책들을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 가장 오래 탔던 버스는 약 13시간이었습니다. 이른 오후에 출발해 다음 날 새벽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저도 옆 자리에 앉은 이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은 없어요. 대신 한 번은 중앙 통로 건너편 자리에 나란히 40대 중반의 남자와 30대 초반의 여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 그 땐 그들의 이후가 궁금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젊은 시절, 삶의 신비 같은 게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 신비로움이 살아지는, 그 속도만큼 이 세상에 익숙해졌다는 것이겠지요.
      산복도로를 한 번쯤 가고 싶은데, 고향 내려가선 영 갈 일이 없네요. ㅎㅎ

      제 주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소설 같은 인생들을 살았던 터라, ㅡ_ㅡ;;

초겨울이었다. 95년 창원이었다. 그녀의 방에서 양말 하나를 놔두고 나왔다. 침대에서 뒹굴었지만 성공적이진 못했다. 술을 너무 마시고 나타난 그녀를 안고 그녀의 집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술에 취해 침대에서 바로 곯아떨어지리라 생각했던 그녀가 덥석 날 껴안았을 때, 내일 오전까지 그녀와 있어야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침대 옆 큰 창으로 새벽빛이 들어왔다. 새벽빛들이 그녀와 내 몸을 감싸고 지나쳤다. 텅빈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고 새벽 취객의 소리도 들렸다. 내 몸 위에서 그녀는 가슴을 두 손으로 모으면서 내 가슴 이쁘지 않아. 다들 이쁘대. 하지만 그녀와의 정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술에 취한 그녀는 금방 지쳐 잠을 자기 시작했고 그녀 옆에서 아침까지 누웠다 앉았다 담배를 피워댔다.

그녀에게 시디 한 장을 줬다. 마마스앤파파스 베스트 시디. 부산의 P대를 다니다가 채 일 년을 채우지도 못한 채 학교를 그만 두고는 술집을 전전하다가 창원까지 오게 되었다. 커피숍에 앉아 그녀는 마일드세븐 한 가치를, 얇은 입술로 물고 불을 붙이고는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입술로 약간 젖은 담배를 피우면서 내 나이 스물셋은 그렇게 지나치고 있었다.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이며 소설은 그녀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가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진 못했다.

새벽 두 시부터 마시기 시작하던 술은 새벽 네 다섯시까지 계속되었다. 오빠완 키스를 못하겠어. 그냥 입술만 대자. 오빠 교정 중이잖아. 내 혀 다치면 어떻게 할 거야. 헐렁한 털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곤 어제 손님과 이차 나간 이야기를 했다.

대학 다닐 때 킹카였다며 자랑을 하곤 했다. 가끔 백화점 전단지 사진을 찍곤 했으니깐. 키가 172였으니, 제대로 차려입으면 나보다 컸다. 그 때 키노 창간호를 구입했고 모니터 기자에 응모했다. 이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필명으로. 내 나름대로는 진리를 거꾸로 읽으면 리진이 된다면서. 지금은 없어진 어떤 연구소에서의 ‘문화연구’ 수업을 방송 교재 형태로 듣고 있었고(나중에 서울에 와선 꼬박꼬박 열심히 다녔다) 아주 오래된 영화 보는 걸 좋아했었다.

그 때 새벽 공기는 참 슬프고 어두웠다. 새벽, 창원 중앙동, 우동집에서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날 옆에 있는 술집 아가씨에게 아저씨는 요즘에도 마약해라고 물었다. 아뇨. 끊었어요. 그 옆으로 조용히 경찰차가 지나갔다.

어제 마마스앤파파스 레코드를 구했다. 턴테이블에 올려놓으니, 모양이 이뻤다. 그녀 가슴처럼. 어느날 새벽 네 시. 그녀가 술에 취한 상태로 전화를 걸어왔다. 나에게 ‘이 새끼야. 날 좋아하지마.’라고 하곤 끊어버렸다. 그 때 술에 취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몇 년이 지난 뒤, 고향 집으로 날 찾는 어느 여자의 전화가 왔다고 했다. 그녀였을 게다. 그 때 내 나이가 스물셋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그 때 내가 속한 세상은 어둔 터널을 지나고 있었고 그녀의 세상은 이미 어둡고 축축한 상태였다.

술에 취해 내 품에 안겨 그녀는 오빠 따라 서울 가면 안 될까 라고 했다. 그 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마스앤파파스의 노래가 검은 색 JBL 스피커에서 기어나와 내 방을 떠돈다. 그 풍경 속으로 나타났다 지워지는 그녀의 술 취한 모습. 꺼졌다 다시 살아나는 그녀의 목소리.

초겨울이었다. 95년 창원이었다. 그녀의 방에서 양말 하나를 놔두고 나왔다. 그 때 양말 하날 두고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양말 하나 속에 내 슬픈 마음이 숨겨져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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