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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근대 +21


유감이다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어쩌면 나도, 이 책도, 이 세상도 유감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스럽게도 책읽기는, 늘 그렇듯이 지루하지 않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는 일상을 견디게 하는 약이 되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나는 이제 책 읽는 사람들을 만날 일 조차 없이 사무실과 집만 오간다. 주말이면 의무적으로 가족나들이를 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이젠 그런 고민마저 사치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건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가 아픈 탓이다. 


근대는 "주체적 인간"이라는 이념으로 중세를 벗어났다. 현대는 "가면의 인간"에 의해 근대를 극복한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가면에 의해 운명의 노예라는 비극을 극복한다. 가면이 새로운 주체적 운명이다. (26쪽) 


Masks Mocking Death

James Ensor 

100.3 x 81.3 cm, Oil on canvas

1888, Staatsgalerie Stuttgart, Germany 



'가면'은 현대를 특징짓는 몇 되지 않는 단어라 생각하지만, 학자들은 '가면'이라는 단어 대신 '정체성(identity)'를 사용한다. 시뮬라크르와 정체성이 결합되면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이 결합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하지만, 비극적이라 여기는 건 나같은 근대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지도. 


거짓은 삶의 본래적인 양상이다. 문명과 문화는 허영과 기만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26쪽) 


이십대 후반, 태어나 처음으로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내 생의 모토를 '진정성'으로 삼았을 때, 나는 현대 문명과 문화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그 이후 내 마음대로 살았으니, 나에게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철이 없었다. 세계는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나, 나에게 벽이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집어드는 순간, 벽에 손이 닿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외부세계만 눈에 보였다. 


내적 사색과 사회적 조회가 좋은 삶의 조건이다. (135쪽) 


나는 내적 사색만 추구하는 인간이다. 사회적 조화? 그걸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회적 조화를 찾으려고 하니, 마치 수영을 하지 못하는 노인이 강을 건너기 위해 강물에 뛰어드는 꼴이라고 할까. 한 마디로 '찌질이'인 셈이다. 이 책의 부제가 '세상의 모든 찌질이들에게 바치는 헛소리 모음집'이니, 이 글도, 이 책도 헛소리의 한 종류로 구분될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하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에밀 시오랑이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였듯이, 나도 내 존재 자체를 저주하게 될까. 모를 일이다. 



* 관련 리뷰 * 

2003/01/25 - [책들의 우주/문학] - 내 생일날의 고독, 에밀 시오랑

2008/12/24 - [책들의 우주/문학] - 나스타샤, 조지수

2015/02/28 - [책들의 우주/문학] - 원 맨즈 독, 조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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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night, Death and Devil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1513, Copperplate 동판화

 

 

기사 옆으로 죽음과 악마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이 명료한 동판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까. 인간이 가는 길을 과거의 유물들 - 죽음, 악마 - 이 훼방 놓으며 가지 못하게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종종 후기 고딕적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 만큼은 근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도상학적으로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해석된다. 과거 종교인이 가졌던 역할을 이제 기사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를 문예부흥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혼돈기였음을 짐작케한다. 결국 고딕적 신앙이 뒤로 물러나고 기하학적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본격적으로 서구의 근대(modern)이 시작되고, 그 이후 거친 풍랑 속에서도 이성을 버리지 않는다. 


거의 1세기 후에야 철학에서 근대적 이성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예술에서의 이러한 선취(先取)는 놀랍기만 하다. 이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예술사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예술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짐작하고 예견할 수 있다. 


까뮈의 <이방인>이 나왔을 때, 그 충격은 대단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선 이 소설을 도덕 교과서로 읽히곤 한다. 이유없는 살인은 용서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유없는 살인을 너무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까뮈도 자신의 '뫼르소'가 그토록 많이, 현실 속에 등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양식(style) 상, 뒤러의 모든 작품들이 근대적이진 않다. 그는 양식적으로는 후기 고딕과 하이 르네상스(르네상스 고전주의)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가 외부 세계와 마주했던 태도는 르네상스 시기 그 어느 예술가들보다도 근대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뒤러가 끊임없이 연구되며 후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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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egal,

Wendy with chin on hand, 1982




잊고 지내던 조지 시걸(George Segal)을 보고 울 뻔 했다, 아라리오뮤지엄, 낮고 어두운 실내 한 구석에 있던. 


이 작품은 아라리오 뮤지엄에 있던 작품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었던, 가장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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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ppy Lovers 

Gustave Courbet, oil on canvas, 77*60cm

1844 



외근 후 바로 퇴근하는 길, 서점에 들려, 참 오랜만에 미술 잡지 한 권을 샀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은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 하나. 행복한 연인.


... 뭔가 작위적인 느낌을 풍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사랑하고 있다, 혹은 있을 것이다. 적당히 흥분해 있으며 이미 마주 잡은 두 손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음악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내 사랑의 단어가 그녀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갔음을 기뻐하고 여자는 이 남자를 가졌구나 하며 안도의 미소를 띈다. 그들 뒤 배경은 먼 듯 가까운 듯 흐릿하고 군데군데 보이는 붉은 빛은 화창하던 오후가 끝나는 어느 무렵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포도주를 마시러 갔을 것이다. 쌉싸리하게 입 안을 풍요롭게 하는 메독 지방 포도주를. 


하지만 쿠르베는 이들이 헤어질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절정의 순간에 묘한 표정으로 쟁취한 듯한 그들의 미소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어, 이게 사랑이야? 진짜 그래? 


마주 잡았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고, 서로 껴안고 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다. 아마 쿠르베도, 나도, 그도, 그녀도 모르겠지만. 


아마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내'가 있듯이, 

사랑은 없고 사랑하는 내가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개념이나 정의는 뒤로 밀리고 오직 행동하고 실행하는 내(moi)가 있는 세상. 

쿠르베는 다시 묻는다.

이 연인은 정말 행복한 것일까? 



* 쿠르베가 언급된 다른 글들. 


2007/07/29 - [예술의 우주] -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쿠르베

2005/08/30 - [책들의 우주/예술] - 명화를 보는 눈, 다카시나 슈지

2002/10/06 - [책들의 우주/예술] - 클라시커 50 회화, 롤프H.요한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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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가에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을 보았다. 여기서 '보았다'는 그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의미이지, 그 책을 다시 읽었다는 건 아니다. 반가웠다. 대학 시절 한 번 읽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또 한 번 읽었다. 이번 가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루쉰(노신)의 마음도 요즘 내 마음 같았을까. 대학시절 '아큐정전'을 읽었으면, 그 짧은 소설이 가진 거대한 힘 앞에서 나는 절대 이런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 시대는 루쉰의 시대가 아니므로, 그런 소설을 쓸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도는 법. 우리 시대가 다시 이렇게 어두워지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잘못된 것일지라도 과거는 흐릿해지며 아름다워지기 마련이고, 그 과거 화려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겐 끔찍했고 비합리적이었으며 심지어 절망적으로 죽음을 불렀던 그 때 그 시절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고 말없고 무관심하고 심지어 자신의 일로 닥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지금 당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손사레를 치는 대중은 오직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요즘, 루쉰(노신)은 다시 읽을 만한 작가가 되는 셈이다. 





*** 

2005년 1월 15일 메모한 글. 



노신의 여러 글들을 모아 옮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욱연 편역, 도서출판 창)를 읽었다. 노신의 글들을 벗 삼아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중문학을 전공하신 백원담 교수에게 강의를 들은 이후, 노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다가 최근 홍대 앞 헌책방에서 이 책이 눈에 띄어 구입하여 읽게 되었는데, 대학 때나 지금이나 역시 거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현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가는 이다. 페어플레이도 그만한 상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추근(秋槿: 중화민국의 여성혁명가)여사가 바로 밀고로 죽었다. 혁명 후 잠시 <여걸>이라고 불리더니,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혁명이 일어나고, 그녀의 고향에 도독(都督: 군사 책임자)이 부임했는데, 그녀의 동지인 왕금발(王金發)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주모자를 체포하고, 밀고 서류를 수집?조사하여 복수를 하려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 주모자를 석방하였다. 듣자니, 이미 민국이 된 마당에 구원(舊怨)을 새삼스레 다시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그 왕금발은 원세개의 앞잡이에게 총살을 당하였다. 여기에 힘을 도운 자는 바로 그가 석방해주었던 사람, 추근을 살해한 그 주모자였다.

그 자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는 자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중에서, 143쪽


혹자는 문학은 궁할 때 탄생한다고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궁할 때는 문학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만 해도 곤궁해지면 사방으로 돈 구하러 다니느라 글이라곤 한 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월급을 받게 된 다음에야 책상에 앉아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바쁠 때 역시 문학은 나오지 않습니다. 짐을 진 사람은 짐을 내리고서야 글을 쓸 수 있고,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놓고서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 <혁명시대의 문학>중에서, 213쪽


여기서 조금만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생계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공산당의 특기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큰 착오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것을 실행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입니다. 둘째, 애인을 위로해 주십시오. 그런 것은 혁명으로의 길과는 정반대라는 게 세상의 여론인 듯하나, 이는 개의할 바가 못 됩니다.

- <미래를 지나치게 밝게 본 잘못>중에서, 176쪽


                                       *                                         *

 

노신을 읽고 느낀 바를 조금 적어보려다가 그만 둔다. 차라리 노신의 산문집을 한 번 더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소설가를 이웃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쉬지 않고 욕을 해대다가 어떻게 운 좋게 그 소설가가 베스트셀러라도 만들면 '그러게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칭찬해대는 게 사람들이니. 그러면 그 소설가가 대단한 걸까? 나는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확실하게 고전주의자이다. 먹여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그는 돈을 벌어야한다. 어떻게든. 예술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독재자가 한 사람을 죽일까, 아니면 <모나리자>를 태울까 할 때,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모나리자>를 선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나이가 들고 보니, 만 년 전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죽게 될 것을 조금씩만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산다면 이 세상은 분명 좋은 세상이 될 터인데.

 

희망을 만드는 것은 현실의 고통 때문이지, 미래에 대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애초부터 미래란 없어도 무방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루쉰문고 6

루쉰저 | 김하림역 | 그린비 | 2011.07.1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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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10점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갈무리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지음), 홍철기(옮김), 갈무리, 2009 





야만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야 말로 야만인이다. 

-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직장 생활을 하며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가를 새삼 느꼈다. 솔직히 끔찍했다. 사무실에 인문학 책을 꺼내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고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하며(연신 나를 찾는 이제 20개월 정도를 넘긴 아들 녀석으로 인해),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이라곤, 아들이 잠든 후나 이동 중인 전철이거나 잠시 들른 커피숍이 전부다. 이 푸념이 나에게도 생소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 독서는 참으로 멀리 있는 것인 듯 싶다. 


좀 더 많은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집중해 읽었다면 라투르의 이 책은 보다 더 흥미롭고 내가 벗어나지 못할 근대적, 계몽적 사유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 기회를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몇 년 전 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제목이 무척 도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읽었다. 아마 한 두 번 읽으려고 했을 텐데, 저자의 표현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쓰는 몇 개의 주요 단어들 - 하이브리드, 정화, 대칭적/비대칭적 등 - 에 대해선,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더 어렵고 모호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마 프랑스학계 특유의 글쓰기 방식인 듯하지만(프랑스의 다른 인문학자들처럼). 



야생의 사유와 계몽된 사유는 때때로 서로 아름다운 화해에 도달하거나 무지개 빛깔을 발하는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 7쪽 



혹시 지금 우리 시대가 '근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데카르트적 근대 말이다. 아니면 20세기의 무수한 반-근대주의자들처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정말로 그들의 책에서 이야기하듯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움직이고 있는가? 


 


원시의 정신과 오늘 우리의 정신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부될 것이다. 정보이론이 순수한 메시지에 집중한 반면에 원시 시대 사람들은 메시지의 물리적 결정론의 징후들을 메시지로 착각한다. ... ... 동식물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특성들을 하나의 메시지인양 다루고 그 속에서 '서명' 즉 기호를 읽어냄으로써 인간(원시정신의 소유자)은 엉뚱한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는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실제 의미 있는 요소가 어디에 있는지(미시적인 차원)를 알려줄 완성된 도구가 없었기에 인류를 해석을 통해 '희미하게' as through a glass darkly 나름대로 차이를 분간하였다. 이 원리의 발견적 가치와 현실의 정합성은 첨단 발명품들 즉 전기통신공학, 컴퓨터와 전자현미경 등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 249쪽 (Levi-Strauss, 1966, p268)



브뤼노 라투르는 인류학에 의지해, 근대라는 개념은 개념일 뿐, 우리 세상을 그대로 비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마치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그리고 그 단추를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이 근대에서 시작된 '탈-근대'로 이상하긴 마찬가지. 


그렇다고 라투르가 '비-근대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목표는 '화해'에 있으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출발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자는 데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인문학이 이 세계와 우리 삶 속에서 시작되었으나, 도리어 이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해석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고, 우리 삶을 기하학적으로 재단하고 억지로 정해진 어떤 틀 속에서 밀어넣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근대적 삶이고 근대의 이론들인 셈이다. 



아추아르족은 각자 폐쇄된 채로 대립을 피할 수 없는 두 세계 - 인간 사회의 문화세계와 동물 사회의 자연세계 -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이율배반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화의 연속적 가능성이 끊어지는 특정한 지점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부터 인간에게는 극도로 낯선 야생의 세계가 시작된다. 문화의 영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자연의 이 조그만 조각은 소통관계가 수립될 수 없는 사물들의 집합을 포함한다.

- 53쪽 (Philippe Descola의 1986년도 저작에서 인용. 



아추아르족의 일상에서 우리의 일상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은 인문학이 앞으로 어떤 태도로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지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으나, 근현대 철학은 우리의 진정한 세계와 무관하게 전진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투르는 근대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그 근대인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두서 없는 리뷰이지만, 여유가 되는 이들에게 이 책 읽기를 권한다. 좀 시간은 걸리겠지만, 꽤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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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문예출판사



마음, 나쓰메 소세키(지음), 김성기(옮김), 이레 



1.
나쓰메 소세키, 무려 1세기 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동시대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근대성(modernity)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리라.  

이번 소설도, 내가 이전에 읽었던 소설과 비슷하게, 큰 사건이 없이 한 편의 풍경화처럼 이야기는 조용히 흘러간다. 소설의 전반부는 나와 선생님이 만나고 가깝게 되는 과정을, 소설의 후반부는 선생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한 부분은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머지 한 부분은 독백에 가까운 편지로만 구성된다. 

그런데 누군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대화가 아닌 '글로 씌어진 편지'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고 오래 전에 상처 입었던 마음이, 누군가에 그 마음의 속내를 드러내자마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게 되는 건, 과연 올바른 방식일까 하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윤리적 질문까지 던지게 되는 건, 그 극단적인 선택- 죽음, 자살- 을 비정상적이라고 하기엔 이미 우리의 마음은 너무 닫혀있고 상처입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절벽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더군. 만족할 만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좀 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을 테지. 하지만 ... ... 자네, 알고 있나. 사랑은 죄악이야." 
- 42쪽 


2.
사랑하는 마음은 죄악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일방적이고 소통하지 않으며 오직 내 마음을 알아주길 상대방에게 호소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선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만 하고, 그 죽음 위로 사랑을 수놓아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걸까?  

그런데 결국 사랑을 해도 쓸쓸하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해도 마음은 위로받지 못한다. 마음은 혼자이고 고독하고 이해받지 못한 채 (똑같은) 죽음을 향해 간다. 마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근대의 개인주의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고, 그 근대의 끄트머리에 선 우리들에게 자살이란 너무 일상적이 된 셈이다. 


3. 
강상중 교수의 최근 두 권,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나쓰메 소세키의 충분한 해설서가 될 수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를 기초로 하여 현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위로가 될 순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두고 아래와 같이 평한다. 


그리고 '개인적 공명'이라는 말에서 저는 소세키를 떠올립니다. 개인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시대에 고독한 영혼끼리 공명하는 무언가는 <<마음>>에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오고간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친척'과도 인연을 끊었으며, 고등유민이기 때문에 '사회'와도 접점이 없고, 단 한 명인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가족'인 '아내'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게 되어 버린, 세계 어디와도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우주로 튕겨 나간 공 같은 궁극의 개인입니다. 
아울러 선생님은 이름조차 없습니다. 이름 없는 공空입니다. 그 선생님은 최종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외에 길이 없었습니다만, 그때 작품의 절반에 이르는 길고 긴 고백인 '나'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는 테일러가 말하는 개인적 공명을 찾는, 세대를 초월한 이야기의 시도가 아니었을까요. 
강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146쪽 - 147쪽 
(* 개인적 공명: 찰스 테일러가 주장하는 바로, '흩어진 개인들이 새로운 차원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개인적 공명'이라고 해야 할 새로운 공통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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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10점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사계절출판사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지음), 송태욱(옮김), 사계절




결국 우리는 각자 자신이 꿈속에서 제조한 폭탄을 껴안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게 아닐까. 다만 어떤 것을 껴안고 있는지 다른 사람도 모르고 나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 

나는 내 병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럽의 전쟁도 아마 어떤 시대부터 계속된 것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우여곡절을 겪어 나갈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계속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 나쓰메 소세키, <<유리문 안에서>> (산문집) 중에서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이 번역되어 나온지도 몇 년이 지났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서 깨달았다. 그 사이 일본의 지진이 있었고 절망적인 원전 사태가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우리와 적대적일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의 전작 <<고민하는 힘>>과 함께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다. 


그는 이번에도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 특히 나쓰메 소세키에 의존하며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설명은 독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강상중 교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를 인용하면서, '거듭나기twice born'에 기대어 고통스러운 번민과 나락으로의 절망이 새로운 앎을 열게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전작 <<고민하는 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윌리엄 제임스)는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121쪽 


책은 짧고 단단하다. '사랑은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181쪽)처럼 자신을 포함한 세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주문한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테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19세기 말에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은 틀림없이 종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한 장에서는 "'자연의 법칙'이 '숭배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과학이 신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112쪽 


이는 계량적 세계의 질서처럼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적인 질문, 형이상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강상중은 신을, 종교를 부정하는 도킨스, 히친스 대신 <<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의 테리 이글턴의 편에 선다. 결국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의미를 구하는 현대인에게 과학은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 

-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중에서


이번 겨울, 이 책은 흔들리는 현대인을 위한 작은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로 이어지는 작은 독서 여행의 시작이 되기를! 


강상중 교수 (출처: 강상중 교수 홈페이지) 



<<고민하는 힘>>에 대한 서평

2011/12/26 - [책들의 우주/문학] - 고민하는 힘, 강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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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자주 최저 기온을 갱신하는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출근길, 여러번 구두 바닥이 미끌,미끌거렸다. 그러나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 또한 미끄러지지 않았다. 내 바람이, 미래가, 우리들의 마음이 미끄러져 끝없이 유예되는 것과는 반대로, 내 낡은 구두 밑은 의외로 눈이 녹아 언 길 위를 잘 버텨주었다. 


잦은 술자리,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졌다. 안 좋아지는 것만큼 세상도 안 좋아지고 개인 경제 상황도 안 좋아졌다. 말 그대로 올 한 해는 최악이다. 다행히 심심풀이 삼아 온 온라인 토정비결에선 내년 운이 좋다고 하니, 그걸 믿어볼까나. (이렇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행운(저 세상의 논리와 질서)에 기대게 된다)


아주 오래 전 서양미술사 강의를 할 때, 이집트 미술을 설명하면서 '과연 파라오 밑의 국민들이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불행했을까?'라고 묻곤 했다. 나는 '당연히 불행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라 여기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행복했을 수도 있다'고 답할 지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도 불행하지 않았고 행복했다고 믿는 편이 낫고 타당하다. 이는 '합리적이고 성실하며, 세상 분위기가 그의 편인 군주 밑의 신분제 사회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과도 연결된다. 그만큼 이집트 사회는 변화가 없었고 흔들리지 않는 질서가 있었다. 몇 천년 동안 예측가능한 시기가 계속 되었다. 변화말로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하는 어떤 것이다.  


사상의 자유라든가 발언/표현의 자유는 전적으로 근대(modern)의 산물이다. 어떤 위계질서를 버리고 극적인 변화와 새로운 질서 속에서 선택한 것이 개인의 자유이고 개인에 대한 (계량적) 믿음이다. 하지만 현대, 지금/여기에 이르기까지도 동시대 모든 사람에게 그런 근대적 의식을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과연 누가 그들에게 근대적 의식을 강요하는가! 


근대적 의식은 변화를 긍정하고 변화 속에서 진정으로 나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 대신 불안을, 두려움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내일을 택한다. 초기 근대 예술가들 - 말년의 미켈란젤로, 폰토르모, 파르미지아니노 등 - 이 보여준 불안, 두려움, 막연한 공포는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교적으로 능수능란하고 강렬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크 예술가들 - 몬테베르디, 바흐, 비발디, 푸생, 렘브란트, 베르니니 등 - 에 의해 이 불안은 극복되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츠는 합리적 세계관 속에서, 버클리와 흄은 경험적 세계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 진리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 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근대적 의식은 오래 가지 않고, 20세기 후반 논의되기 시작한, 반-근대적이라 일컫어지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은 근대의 가려져 있던 불안, 두려움, 공포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포스트모던 사회인가? 그래서 전 근대적인 시기(후기 조선에 가까웠던 시기)에 대한 향수로 목 말라 하는 것일까? 


글쎄다. 잘 모르겠다. 우리에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1인당 국민소득 1천불에서 1만불로 가는 것과 1만불에서 2만불, 3만불 가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서로 다른 의견을 공유하고 나은 대답을 찾기 위해선 시끄러운 의견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민주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엔 이미지로서의 정치가 답이고, 매스미디어에 의해 사람들의 의식은 조장될 수 있고, 비판적 시각을 키울 수 있는 책 같은 건 살아 있는 동안 1권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마당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은 두서 없고 생각은 미끄러지기만 한다. 이런 주절거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내 패배감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올 한 해, 나는 패배했다. 근대의 반성적 자기 의식은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이것이다. <매트릭스>의 니오가 선택한 알약도 바로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상학자들은 그러한 알약의 시작이 어디인지 묻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현상학적 접근이다. 


척 맨지오니의 'Consuelo's Love Theme'을 듣는다. 안소니 퀸이 주연을 한 '산체스의 아이들' OST 앨범. ... 두툼한 LP를 꺼내어 듣고 싶지만, 지금은 사무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적는 이 짧은 글. ... 결국 나는 근대인(homo modus)임으로 '내일의 나'를 향해 가겠지만, ... 16세기 사람들이 느꼈을, 그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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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이 많아도, 계속 새 책에 손이 가는 건 예전부터 읽어온 습관 탓이다. 1주일에 1권 이상은 읽어왔는데, 올해 들어 한 달에 2권 이상 읽지 못하고 있으니. 하지만 손의 습관은 1주일에 1-2권씩 새로운 책 표지에 살갗이 닿아야만 손의 마음은 놓이는 것일까. 





바람은 무척 차고 일은 많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들 중의 하나가, '비밀 없는 사람이 되자'였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강상중의 신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 ... 참, 일본은 대단하기도 하면서 신기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미 백 년 전에 20세기 후반에 최초로 마주하게 되는 현대적 모더니즘(contemporary modernism)을 보여주고 있고, 그 옆에서 재일한국인 강상중은 현대인의 마음과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 현대 일본을 지배하는 것은 그런 모더니즘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한국도 마찬가지리라) 


바람은 차고, 마음 속에 비밀만 늘어나는 것이 매우 싫어지는 화요일 오후 사각의 사무실 안 방황은 끝이 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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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정리하다가 메모 해놓은 것을 옮긴다. 수지 개블릭의 당연한, 하지만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에 대한 지적이다. 보스와 초현실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설명의 용이성 탓이지, 실제로 보스가 초현실주의와 관련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스의 작품은 지극히 후기-중세적이고 고딕적이다. 


신의 세계가 가졌던 호소력이 이른 아침의 안개처럼 정오를 향해가면서 사라져갈 때, 그 안개를 못내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스의 작품은 먼저 중세말, 근대초의 심리적 방어를 위한 공포적 상상력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외부의 제어 수단을 바라기 마련이다. 중세 사람들에게 신의 세계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었고, 보스는 그 세계가 존재함을 시각적으로 그려냈다. 이 점에서 수지 개블릭의 '종교적 사실주의자'라는 표현은 매우 타당하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초현실주의를 같이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간주되어 와서 그러한 비교를 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그릇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보스는 동시대 사람들이 괴물에 대하여 갖고 있던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이 없었다면 이 관념은 중세의 '불가사의'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오늘날 정의, 원자력, 산업 등과 같은 가장 '최신'이거나 혹은 전통적인 개념과 느낌을 '표현하는' 사회적 사실주의자(social realist)'가 존재하듯이 보스도 '종교적 사실주의자(religious realist)'였다. 
-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14쪽 (천수원 옮김, 시공사)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Bosch's most widely known triptych, El Prado Museum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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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 10점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인간사랑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La haine de la democratie 

자크 랑시에르(지음), 허경(옮김), 인간사랑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만큼 정체가 모호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실은 '민주주의'라는 게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자크 랑시에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민주주의의 해악’을 드러내며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유럽 지식인들을 향해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그 가치’를 말하기 위함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향한다.



혈통에 기초하는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의 범죄성은 우선 정치 차원의 범죄인 것이다. (83쪽)


민주주의는 우선 통치를 위한 모든 자격을 배제하는 무정부적 체제이다. (96쪽)


즉 민주주의는 혈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위계질서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03쪽)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어떻게 해석되어져 왔는가를 되짚으며, 민주주의의 현재를 묻는다.



즉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며,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 불가능 자체이며, 이러한 통치 불가능성에서 모든 통치행위가 그 기초를 찾아야 하는 그런 것이다. (111쪽) 



민주주의의 정의(definition)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민주주의 앞에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옮긴다. 왜 민주주의가 문제시되고, 증오의 대상이 되는가를 비판적으로 옮기면서 도리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묻는다. 



근대 민주주의는 근대 사회의 고유한 특성인 무한성의 법칙을 통해서 정치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40쪽) 



결국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혈연이거나 정치경제적인 부라든가, 물리적인 힘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뜻이 반영되는 어떤 정치체제-민주주의-일 것이지만, 그것은 기존 질서에서 보자면 정치적 범죄이거나 혁명이고, 현재에서 보자면 '이기적인 개인들의 소비적 차원에서의 평등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정치의 개념이 상실된 상태에서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더 이상 사용하기를 바라지 않는 "지배체제"라는 말을 대신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그것은 사라져버린 '이중적인 주체'(지배체제를 감수하는 동시에 고발하는 개인)을 대신하여 나타난, 자신의 욕망만 추구하는 '사악한 주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주체적 개인의 혼합된 모습을 통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은 그 체제에 사는 인간의 전형적인 자화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적 인간은 다름 아닌 팝콘, 리얼리티쇼, 안전섹스, 사회보장, 차별화의 권리, 반자본주의 환상 또는 대안적 세계화의 환상 등을 추종하는 얼빠진 젊은 소비자인 것이다. (183쪽) 



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란 어쩌면 책에서만 나오고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어떤 이상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정치체제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민주주의는 하나의 구조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구조를 수용한'다고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결국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어떤 체계가 된다. 



민주주의와 그것의 본질인 제비뽑기라는 스캔들은 '추첨'이라는 자격이 '자격 그 자체가 없는 자격'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의 통치는 종국에는 우연성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폭로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이다. (107쪽)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치부이거나 약점, 모호성'이 되며,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된다. 


역자는 유럽적 상황과 한국적 상황이 다르다고 말하나, 글쎄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득을 본 것은 소비주의이지, 정치적 환경의 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주화가 진전되다가 도리어 '반-민주화'적 경향이 생기고 있으며, 그 경향은 랑시에르가 말하듯 소모적이며 판단내리기 어려운 반-사회적 현상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자신이 폭행의 피해자라고 하여 프랑스 사회 전체를 숨막히게 만든 여인; 학교에서 이슬람교도의 머리 가리개 벗기를 거부하는 중, 고등학교의 여학생들; 항상 적자 상태인 사회보장 보험; 고등학교 졸업시험인 바칼로레아 시험 주제에서 라신과 코르네이유를 대체한, 보다 근대적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보들레르; 기존의 연금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시위하는 봉급생활자들; 빈곤층 출신 학생들 대상의 입학 할당제를 도입한, 전문 엘리트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grande e'cole);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텔레비전의 리얼리티쇼; 동성인들 간의 결혼과 인공수정을 통한 인간 생식, 이상에서 열거한 것들보다 더 잡다한 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이 모든 징후는 동일한 병적인 증세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현상은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근대적 대중 사회 속의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이다. (19-20쪽) 



정치 체제로의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으나, 근대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 각 개인의 존엄성을 단순 교환가치로 전환시켰으며,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여러 가지 자유를 하나의 자유, 즉 무자비한 상업적 자유로 대체했다.'(54쪽) 그리고 그 상업적 자유와 평등을 '민주주의'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자끄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주변'을 훑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고취시킨다. 실은 민주주의란 어떠어떠한 것이기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대 소비 사회의 여러 가지 해악을 민주화의 결과물로 곡해하고 있는가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분류를 따지자면, 꽤 어렵고 전문적인 '정치 철학 서적'에 속하겠지만, 책을 다 읽은 후의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민주주의나 민주화 같은 단어를 일상 생활에서 한 번이라고 이야기해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acte)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사상의 힘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자들에게 충분히 공포감과 증오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느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용기와 기쁨을 선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쪽)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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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 나오는 주석인데, 바로크Baroque 문화, 혹은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렇게 메모해 둔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화사나 지성사에 있어서도 바로크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 그리고 현대적 삶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근대, 그리고 바로크는 그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는 루이 뒤프레(Louis Dupre')에 기대어 바로크에 대해 언급하였고, 아래 내용은 그 각주이다. 그리고 이 글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저장이다. 이 각주에서 엿보이는 뒤프레는 바로크에 와서야 중세적 질서가 근대적 질서 속에 종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합의 긴장이 바로크 양식을 이룬다는 것.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너무 중세적 질서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닐까 싶다.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있듯이 어쩌면 중세적 질서(창조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질서와 이 질서에 유비된 현실적 질서)마저도 바로크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진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슬쩍 지나가는 언급 뒤에는 거창하고 복잡한 명제가 놓여 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바로크 문화란 일종의 종합명제라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내면적이고 창조적인(poietic) 존재라는 근대적 이해방식과 형상(Form)에 의해 틀 지어진 우주(cosmos)로서의 세계라는 더 오래된 이해 방식 간의 종합 말이다. 나중에야 우리는 이 종합 명제를 불완전한 것이며 교체될 운명을 지닌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바로크 문화 속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긴장을 볼 수 있다. 그 긴장은 질서와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즉 거기에 이미 존재하는 위계적인 질서 그리고 자신들의 구성적 활동을 통해 그 질서를 지속시키고 완성하는 행위자들 사이의 긴장인 것이다. 이 행위자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위계 질서의 바깥에 있고 평등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그와 필적한 것의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루이 14세의 말과 같은 혼성적 정식화는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뒤프레(Dupre)의 책에 제시된 바로크 예술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Dupre, Passage to Modernity, pp. 237 ~ 248. 뒤프레는 바로크가 인간 행위주체성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세계 사이의 "최후의 포괄적인 종합 명제"라고 말한다. 거기서 이 행위주체성에 의해 발생한 의미들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발견한 의미들에서는 어떤 관계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찬 종합명제이다.

바로크 교회는 정적인 질서로서의 우주보다는 신에 이러한 긴장의 초점을 맞춘다. 이 신의 힘과 신성은 우주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하향성의 힘은 인간의 행위주체성에 의해 취해지며 또 앞으로 나아간다. "따로 떨어진 권력의 중심으로 개념화된, 신적인 질서와 인간적인 질서 사이에서 근대적인 긴장을 빚어내면서"(226) 말이다.

뒤프레는 바로크 문화가 "포괄적이며 영적인 비전"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발생 중인 세계에 형식과 구조를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개인이 있다. 하지만 - 그리고 여기에 그것의 종교적 의미가 있다 - 그 중심은 여전히 초월적인 근원과 수직적으로 연결된 채 남아 있다. 인간 창조자는 매개체들이 하강하는 단계를 거침으로써 그 근원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 인간적이며 신적인 - 이중의 중심이 바로크의 세계상을 중세의 수직적인 세계상과 구별 짓는다. 중세의 세계상에서는 실재가 단일한 초월적 지점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몇몇 특색 안에서 미리 나타난 바 있는, 이후의 근대성이 지닌 확실하게 수평적인 세계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중심 사이의 긴장이야 말로 바로크에 복잡적이고 불안정하면서도 역동적인 특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237)
-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128 -129


아래 관련 글 2개를 올린다. 하나는 찰스 테일러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이고, 하나는 바로크 예술에 대한 글이다. 서양미술사 책을 내기 전에 요약, 메모해놓은 글이다. 이젠 미술 관련 글을 쓸 시간조차 없이 바쁘니...





뒤프레의 책도 꽤 재미있을 것같은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ㅡ_ㅡ;;


 
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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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 
1630년도작, 24.1cm*15.6cm, 에칭 판화 




오래된 작품은 어느새 내 일상과는 너무 많이 멀리 떨어져있다. 녹슬어가는 내 지식은 서재 한 구석에 박힌 강의노트 속에서 박제가 되고, ... 바로크의 초상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와 15세기 초의 반 아이크 형제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을 이 작은 자화상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여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그런 피치 못할 사정을 보는 이들이 이해해 주겠거니 하는 여유로움이 있거나, 한 발 더 나아가 여백을 작품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하거나 ... 여러 가지 이유를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거친 여백을 드러내거나, 또는 고른 채색의 화면 처리가 사라지는 것은 바로크 시대부터다.  마치 하나의 원리로부터 시작해 예외가 되는 모든 것을 다 잘라내는 듯한 자신만만한 태도를 가졌다고 할까. 마치 '오캄의 면도날'같지 않은가. 

고딕 시대의 유명론이 본격적인 근대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영국의 경험론이라면, 그 경험론적 태도가 묻어나는 것은 바로크 시대의 초상화가 될 것이다. 뭐랄까. '인생은 살아봐야 되는 것'이고, '살아봐도 잘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그런 느낌의 작품들... 

할 말이 많은 듯하지만, 정작 세상을 살아보면 하고 싶은 말은 나이가 들수록 사라지더라. 그리고 이제서야 말을 할 때가 되었다 싶으면 해질녁이 되고 저 먼 평원 너머로 붉게 물은 하늘이 펼쳐진다. 바로크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은 그런 해질녁 밑에 모여들 뿐, ... ... 실은 나도 그렇게 변해가는 건 아닐까, 요즘 들어 종종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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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 반 다이크 라는 이름을 보니, 입시 때 썼던 물감 이름 중 '반다이크브라운'이라는 이름이 생각나네요. 혹시 그 이름의 주인 일까요? (물감 이름은 램브란트였으니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ㅎㅎ)

    아무튼 아침부터 왠지 알 듯한 이름이 와서 반가움에 냅다 댓글을..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 또 놀러오겠습니다~

    • 반 다이크가 만든 브라운 색이 있나보군요~. 아니면 즐겨 사용했던 브라운 색이든가... 유화 물감이 만들어진 것이 르네상스 시기였고, 색의 구분이나 작명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을 겁니다.

      미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오피스 한 번 놀러간다는 게 영~시간이 나지 않네요. ㅎㅎ.. 수첩 너무 탐나는데..ㅋㅋ

    • 아하! ^^)~
      네에 뭐 그런 구분... 어렵네요.. ㅎㅎ

      그나저나 다시보니 저 위에 반다이크 그림이 너무 멋져서..
      퍼가요~♡ 개인소장을;; ㅎㅎ

      좋은 하루 되시구요~ ^^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4점
이진경 지음/푸른숲



아직도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높나? 새로운 개정판을 읽지 않았으니, 아래 글은 정확한 서평이 아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서양 예술 형식에 대한 탐구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에 속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 책은 '근대적 시, 공간의 탄생'이라는 매우 거창한 제목과 비교해 아주 허술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더구나 아래 서평에서도 지적했듯이 잘못된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시간도 가치도 못 느끼겠다. 혹시라도 살 생각이 있다면 사지 말기를 바란다. 흥미로운 소재를 취했으나, 소화하기 힘든 소재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개정판이 나와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면 내 지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기회가 닿는다면, 근대적 시간, 공간에 대한 간단한 아티클을 적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근대적 시간이나 근대적 공간 속에 살고 있으면서 ..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와 반성이 먼저다. 내일 서울시장 선거 투표나 하러 가야 할 것이다.
(2011. 10. 25) 




-- 아래는 2004년 5월 14일 쓴 글.

오래 전부터 관심이 가던 책이었다. 그러나 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실망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강서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빌려서 저녁에 읽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실망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책에 언급된 미술에 대한 설명은 미술과는 관련없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틀린 단어도 있으며 틀린 설명도 있다.

가령 늑골 궁륭(ribbed vault)를 flying buttress(공중부벽)로 표기하였지만, 이 둘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고딕 성당의 수직성(verticality)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어 언급하였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다. 왜 고딕 성당이 수직성을 강조하는가에 대해선. 그런데 이 수직성과 근대적 시.공간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개념은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깐 42쪽부터 설명되는 부분은 도리어 근대 과학에 대한 설명이 있는 89쪽 이후 부분을 먼저 설명하고 난 다음 그 다음에 나와야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과학을 포함한 근대의 지식 체계가 고대 희랍이나 중세의 그것과 어떻게 틀린가를 서술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을 설명하는 것보다 독자에게나 저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설명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근대인들이 시간,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떤 의미에서 새롭고 혁신적인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흐와 세잔의 세계는 반 근대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세계이며 이는 원근법의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서로 반대되는 것을 추구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잔의 입체감은 근대 회화의 입체감과는 전혀 틀린 종류의 것이다. 이를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잘 모르겠다.

저자는 폴 세잔과 반 고흐의 그림을 두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설명도 엉성할 뿐더러 이것이 저자가 설명하는 근대적 시.공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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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 부분은 정독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성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 공간에 대한 연구 방법들이라고 언급해놓은 걸 보면선 한숨이 나왔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한 나머지, 나는 이 정도로 공부했어요라고 자랑하고픈 마음에 채 정리되지 않은 노트를 대중에게 공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노트만이라도 확실하게 하면 좋겠는데, 이를 엉성하게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이라는 제목까지 붙여놓고 군데군데 틀린 설명과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선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좀 야박한 서평일 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양미술사를 한동안 공부한 이로서 이 책은 너무 엉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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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사회적 상상

찰스 테일러 지음, 이상길 옮김, 이음



기대했던 것만큼 책은 재미있지 않았다. 하긴 이런 인문서를 읽으면서 재미를 바란다는 것도 다소 당황스러운 종류의 일일 게다. 찰스 테일러는 역자의 말대로, '현재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분야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서구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찰스 테일러의 이름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찰스 테일러의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의 다른 저작, ' The Ethics of Authenticity'(불안한 현대 사회)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불안한 현대 사회'과 비교한다면, 다소 재미있는 구상이긴 하지만 호소력 있는 저작은 아니었다. 도리어 헤겔주의자로서의 찰스 테일러를 드러내며, 근대의 여러 기획들은 계속 이어지며,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의 독특한 시각, 근대(modern) 형성의 깊은 영향을 끼친 물질적 자본주의(혹은 경제적, 물질적 사회형태)의 변화 대신 근대의 관념적인 기획으로만 근대의 형성을 서술하면서, 단일화된 근대성이 아닌 다원적 근대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이 책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근대성의 역사이자, 그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자의식'과 '자기비판'은 그 자체로 근대적 에토스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테일러는 다원적 근대성 개념을 통해 자신의 분석 대상을 '서구적 근대성'으로 상대화시킨다. 다원적 근대성 개념의 핵심은 근대성이 어디서나 동일한 형식으로 발전하게끔 되어 있는 동질적이고 수렴적이 과정이라는 시각을 거부하는 데 있다. 즉 근대적인 관념과 실천, 제도와 생활 양식은 배경 맥락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고, 따라서 언제나 복수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의 역사적 사례를 근대성의 다양한 모델 가운데 하나로 '지방화'해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타자에게 함부로 부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면에 깔고 있다.
- 역자 후기 중에서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라고 할 것은, 철학서 답지 않게 문화적 양식 분석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종 흥미로운 사례와 분석이 등장하여 흥미로움을 더하기도 한다.

찰스 테일러와 근대의 시작과 발전에 대한 색다른 분석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읽을 만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찰스 테일러의 또 다른 서적을 한 권 주문했다. 주문한 책은 그의 헤겔 연구서이다.



찰스 테일러의 다른 책(강력 추천)
- 불안한 현대 사회, 찰스 테일러 http://intempus.tistory.com/1323 



 

근대의 사회적 상상 - 8점
찰스 테일러 지음, 이상길 옮김/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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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10점
한나 아렌트 지음/한길사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지음), 한길사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잡지의 칼럼이나 신문 기사에서 종종 접하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책은?

솔직히 말해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아주 느리게, 아주 천천히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나 아렌트. 젊은 시절 하이데거의 연인이었으며, 미국으로 넘어간 유태인, 여성 철학자,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면서 학문적 주목보다는 센세이션과 거부감을 더 불러일으킨 학자.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학문적, 지적 명성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들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근대적 인간의 오래된 소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전체주의'가 가지는 비극성, 그것이 어떻게 근대와 현대의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철학적인 견지에서 탐구하고 분석해 낸다. 특히 고대 철학과 정치적 환경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논의는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일관성과 통찰력은 종종 놀라움을 선사할 정도이다.


*    * 

한 달에 한 권을 선정해 읽는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제대로 읽은 것은 아니다.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읽을 생각이다. 오랜만에 너무 빡빡한 책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철학책을 1~2년 만에 읽는 듯한 생각이 든다.

회사 일이 바빠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읽은 책도 제대로 서평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읽었으나 서평을 쓰지 못한 책이 벌써 열 여권에 이른다. 이를 어쩌면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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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 아렌트의 파워에 대한 그녀에 생각에 관심이 있었는데, 한 번 읽어 봐야 겠네요^^

    •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읽고 난 다음,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했습니다. 바쁜 직장 생활 와중에 읽었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천천히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실은 제가 쓴 리뷰도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쓸 시간이 없어 '무책임하게' 올려버렸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간들이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이들은 바로 인상주의자들이다. 시간 따라 변하는 색채의 현란함, 그 현란함이 가지는 찰라의 쓸쓸함, 그리고 쓸쓸함이 현대인들의 피부를 파고 들어 삶의 양식이 되었음을 깨닫게 해준 이들은 인상주의 이후의 모더니스트들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본래적인 것이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견고한 피부를 만들고자 한 이들이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이라면, 그 쓸쓸함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순간의 희열 속에 온 몸을 던지는 것이 후기(post)의 모더니스트들이 아닐까.

고객사를 가다 오는 길에 어느 집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붉은 잎사귀를 찍는다. 하나는 내 혓바닥 같다. 다른 하나는 누구의 혓바닥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혓바닥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붉은 혓바닥 하나가 붉은 혓바닥 하나를 기다리는 가을 풍경이란, 처참해보인다. 단풍은 원래 그런 빛깔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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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미래 - 10점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문학동네


지나간 미래 Vergangene Zukunft
라인하르트 코젤렉 Reinhart Koselleck 지음, 한철 옮김, 문학동네



겨우 이 책을 다 읽었다. 대중 교양서라고 하기엔 너무 전문적이고 그렇다고 손을 놓기에는 너무 흥미진진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역사적 기본개념들, 정치적-사회적 언어에 대한 역사사전>>이라는 방대한 사전의 편집자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그리 유명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몇 달 동안 이 책을 잡고 있었는데, 읽고 난 다음 느낀 바를 크게 아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1. 역사 서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실제 경험한 사실, 목격자의 증언, 또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역사 서술은 ‘서사’와 ‘묘사’를 바탕으로 하면서 과연 ‘허구’와 얼마나 많은 거리를 두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역사 서술에 사용되는 개념 분석은 매우 인상 깊었다.

2. 근대Neuzeit에 대한 깊은 이해: Modern으로 옮겨지는 근대에 대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많았지만,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분석은 그간 읽어온 그 어떤 글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근대에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 때까지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p.399) 즉 미래에 대한 기대가 대중에까지 미치게 된 시기는 18세기이며 이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 ‘새로운 시대’가 대중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근대적 삶에 대한 이해: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지게 된다는 것은 경험된 것들 이상의 의미를 미래에 부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예측 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가 더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높게 보았으며 인간 이성에 대한 강력한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러한 신뢰와 지지를 부분적으로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예측 불가능함, 즉 ‘우연적 요소’에 더 큰 무게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물질만능주의(소외와 자본주의의 심화)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측가능성을 잡아두려는 심리에 기인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는 이미 그 시작에서부터 그 붕괴를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인문학 전공자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이지만, 비전공자에게는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같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 생각된다. 역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근대에 대해, 근대적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간 미래>>에 대한 보충 설명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일독을 권할 만큼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밑줄을 엄청 그었다) 그리고 리뷰를 올렸는데, 몇몇 분들께서 리뷰가 어렵다는 견해를 밝혀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보충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이 책의 목차의 아래와 같다. 목차에 적힌 단어들부터 만만치 않다.


I. 근대사에 있어서의 과거와 미래의 관계
- 근대초기의 지나간 미래
-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 근대 혁명개념의 사적 기준
- 로젠츠 폰 슈타인의 역사예측

II. 사적 시간규정의 이론과 방법
- 개념사와 사회사
- 역사, 역사들, 시간의 형식구조
- 서술, 사건, 구조
- 우연: 역사서술에서의 계기화의 불가능성
- 입장연관성과 시간성

III. 역사적 경험변화의 의미론
- 비대칭적 대응개념의 사적-정치적 의미론
- 역사의 생산가능성
- 공포와 꿈: 제3제국에서의 시간경험
- ‘근대’: 현대적 운동개념의 의미론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2. 각각의 챕터는 각기 다른 내용을 서술하고 있지만, 크게 ‘역사서술 방법론’과 ‘근대의 시간 경험’이라는 두 부분으로 모여질 수 있겠다.

3.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하여
과연 '역사의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란 가능할까?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의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란 불가능하다. 이 부분에서 역사 서술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서술 방법(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서술가들은 나름대로 정확한 사실 전달을 위해 여러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고고학적인 탐사를 벌이기도 하며 목격자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 모였다고 해서(* 대부분 다 모을 수도 없지만)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 가능해질까. 또한 여기에 또 개입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서술가의 시각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당파성’. 이렇게 어려운 일이니,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더 더 낫다고 한 것이 일견 수긍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주목하는 부분은 여러 개념을 담고 있는 단어들의 변천사이다. 이를 그는 ‘개념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 변화를 통시적으로 분석하여 그 당시의 의식 구조를 예리하게 분석해 낸다. 하나의 단어가 시대 마다 다른 의미로 통용되었고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역사 서술가의 시각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이런 역사서술과 관련된 논의를 담고 있다.

4. ‘근대의 시간 경험’
아마 이런 생각을 낯설게 여기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란, 바로 ‘내일은 좋아질꺼야’ 따위의 생각을 말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코젤렉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몇 세기 되지 않는다. 아마 르네상스 무렵부터 이런 생각의 단초가 보여졌을 텐데, 이런 생각이 일반 대중 속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인 18세기이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고 한다.

앞선 글에서 내가 인용한 “근대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 때까지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쉽게 설명해서 평생을 시골에서 산 사람에게 (시골이라는 공간 속에서의) 내일에 대한 예상은 자신이 살아왔던 경험의 범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고대적 삶이나 중세적 삶은 이런 환경 속에 속해있었다. 즉 하나의 행위 결과는 경험의 범위 안에 있었고 그것에 대한 기대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로 오면 상황은 급격하게 바뀐다. 시간이 갈수록 이 상황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즉 이때까지 살아온 경험의 범위 안에서 내일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맨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니깐 18세기 무렵에는 미래에 대한 열광으로 표현되었다. (* 이 열광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고 이러한 열광은 예술적 반영은 바로크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내일이 되면 새로운 과학 법칙이 생겨나고 새로운 기계가 생기며 카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근대가 새로운 시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즘은 더 심해졌다. 블로그를 보라.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하루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이러한 상황은 내일, 즉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삶 속에서 미래란 과거와 똑같은 그 무엇이었지만, 18세기에 오면 미래는 과거에도 오늘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으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내일 일을 누가 알아’라고 말해버리기 시작했다.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내 인생이 내일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 경험과 기대의 간격이 벌어짐으로 인해 나는 온전하게 내 삶을 제어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즉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이는 인생에 드리워진 생의 불확실성에도 기인하지만, 최근의 인문학적 성찰은 이 인식(*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에 더 큰 무게 중심을 두게 만든다.

최근의 자본주의 심화(* 돈 중심주의)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초조하고 불안한 심리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면 내 영혼의 삶은 아니더라도 내 육체의 삶의 안정성을 그나마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는 것은 ‘돈’이기 때문이다.

근대는 내일에 대한 기대로 시작되었지만, 그 기대 속에는 이미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나는 내일 펼쳐질 내 삶의 운동을 알지 못한다’는 인식을 숨기고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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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 10점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민음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1.
모든 것들이 '희극'으로 결론 나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존재하지 않는 자'에 의해 존재하는 자들(우리들)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인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 의미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기만'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현대란 보이는 세계의 화려함과 편리함, 또는 현란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의해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 아슬아슬한 지탱이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그 존재를 유지해 나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우리 인간들이란 그 아슬아슬함과 비례하는 만큼의 허황된 희망을 품는데, '포스트모던 사회'란 바로 그런 허황된 희망으로 축조된 사회이고 포스트모던 사회 속의 우리들은 그 희망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것도 던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경우 더 끔찍한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까닭에 끊임없이 그 희망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란 매우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존재함'을 택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말해 불가능한 것이다. 꼭 꿈 속의 소녀를 잊지못해 그 소녀를 그리며 그 소녀가 현실 속으로 걸어나오길 바라는 젊은 화가의 바램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바램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이란 현실 속의 누군가를 꿈 속의 소녀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계속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2.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말하는 토리스몬도는 그가 말하는 그 순간까지만 정당하고 그 이후로는 그 어떤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믿는 성배기사단도, 그가 믿는 어머니도, 그가 믿는 신념도,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인간'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꼭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존재하듯이 그가 믿는 바도 그와 비슷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적 인간들로서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셈이다.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의 대비로 인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애초부터 실패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서사를 위해 그는 아질울프의 명령에 따르며 동시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사유로서만 존재하는 자와 연장으로만 존재하여 자연의 모든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의 승리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다만테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며 계속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쫓는다. 그리고 프리쉴라는 오직 언어로만 존재하는 자에게 매혹당한 채 "그 사람은 남자야, 진짜 남자야, ... ... 하룻밤 내내 천국이었어......"라고 말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즉자(en soi)로서만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앞에선 자신의 존재를 때때로 깨달으며, 브라다만테와 프리쉴라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소설을 읽어나가면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게 매혹당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기사와 싸워도 이길 것처럼 보이던 아질울프는 자신의 존재가 거짓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리스몬도에게서 듣고는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찾아나서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브라다만테가 사랑하였고 프리쉴라가 매혹당했으며 그 어떤 전투도 그의 하얀 갑옷에 흠집 하나 만들지 못했던 위대한 기사가 한 사람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영혼에 깊은 상처입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람발도는 '투구를 향해, 갑옷을 향해, 떡갈나무를 향해,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며 아질울프를 불렀'지만, "기사님! 갑옷을 입으세요! 프랑스 군대와 귀족 사회에서 기사님의 지위는 분명해졌습니다!"라고, "기사님, 당신은 존재합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쳤지만, '갑옷은 똑바로 서 있지 못했고 투구는 땅에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3.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남긴 <이 갑옷을 로실리오네의 기사 람발도에게 남기노라.>라는 쪽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근대의 신념이 탈근대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람발도는 그 하얀 갑옷을 입었고 그녀 앞에, 브라다만테 앞에 선다. 그리고 그를 아질울프라고 믿는, "드디어 당신이 저를 찾아 달려오시는군요, 잡히지 않는 기사님!"라고 소리치는 브라다만테는 람발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순간, 소설 속 이 소설을 써나가는 수녀가 브라다만테라는 사실을 드러나는 순간, 모든 사건들은 허구의 미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람발도가 그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그는 달려오는 브라다만테에게 '나 역시 서투르게 행동하는 그런 남자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넌 모르겠지? 행동을 할 때마다 욕망이나 불만족이나 불안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그런 남자라는 걸 넌 모르겠지? 내가 바라는 것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거짓없이 무언가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들과 똑같이 존재하는 그 기사에게 희망을 걸어야할 것이다. 수녀가 된 브라다만테의, 람발도를 향한 사랑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아마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몸짓으로 람발도가 계속 그의 생을 꾸려나가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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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구조 - 10점
이마무라 히토시 지음, 이수정 옮김/민음사


근대성의 구조
, 이마무라 히토시(지음), 민음사, 1999.


1. 인과율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현상에는 인과율 (causality)이라고 하는, <원인-결과>라는 이름의 족쇄에 묶여 있다. 그리고 현재의 고통이나 불합리는 이것을 둘러싼 이러한 인과 관계를 이해할 때에만 벗어나거나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 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근대인(Moderni)라면 그렇게 생각 할 것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이 속해 있는 우주에 비한다면 '근대(Modern)'란 그렇게 특별한 시대는 아니다. 단지 이 세계와 우주, 그 속에서 진행되는 인간들의 삶을 이러한 인과 관계와 이성의 눈을 통해 보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시대이며, 20세기 후반의 학자들은 이 치밀하고 정확하려 했던 활동에 큰 문제점이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마무라 히토시는 『근대성의 구조』라는 책을 통해 이 난삽한 지도를 간략하게 정리해놓고 있을 뿐이다.

2. 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시대로서 1960년대, 그 중에서도 1968년의 파리와 프라하가 있었다라는 말로 이마무라 히토시의 논의는 시작된다. 그러나 그가 68세대의 철학-소위 '포스트 구조주의'라 불리는-을 긍정하면서 걸어가려 하는 이러한 논의의 시작은 마샬 버먼이 미셸 푸코를 언급하면서 '그의 언어는 꿰맨 자 국이 없는 거미집, 즉 베버가 일찍이 꿈꾸었던 모든 것보다도 훨 씬 더 완벽한 새장, 어떤 생명도 꿰뚫고 들어갈 수 없는 새장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많은 오늘날의 지성인들이 그 새장 안에서 푸코와 함께 질식사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이다'(『현대성의 경험』, 현대미학사, p.37)라고 말했을 때처럼 스스로 새장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위험한 작업임을 미리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토시의 논의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데, 그것은 근대 속에 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대해 보다 정확하 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전해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큰 희망을 부여하기 보다는 그러한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 긴 하지만.

3. 시간관

우리는 밝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는 근대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라든지 '내일은 이렇게 비참 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현재를 극복하려 한다. 하지만 과연 그 옛날 내일이라고 믿었던 오늘은 행복에 가득차 있는 것일까?

내일을 염두해 두고 인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즉 오늘은 어제보다 나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는,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직선적 시간관'은 중세 와 그 이전의 순환적 시간관을 대체한, 근대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순환적 시간관 속에는 과거 와 현재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겐 미래란 없었고 끊임없이 순 환하는 시간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시와 상업의 발달 그리 고 종교개혁 등 일련의, 근대를 향해가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우 리는 '직선적 시간관'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알 수 있다. 간단 하게 우리가 내일을 예측하기 위해 오늘의 주가동향을 유심히 살 펴보는 것처럼 그러한 행동들이 중세 말기의 도시 상인들에게서 도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를 향해 기도 한다고 하는 시간의식'인 것이다. '기도하는 정신의 시간의식은 미래를 선취하여 현재에 편입시키고, 미래를 편입시킨 현재에 있 어서 계획을 세우며, 또다시 미래를 향해 모험적으로 도박을 해 가는 시간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시간과는 정반대이다. 순환 시간은 전적으로 과거를 향하지만, 근대의 시간의식은 전적으로 미래를 향하는 것이다.'(p.76)

4. 기계론

그렇다면 근대의 직선적 시간관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미래를 선취한다는 것, 그것도 신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능력으 로 <계획>하고 <제작>하고 끊임없는 <실험>의 반복을 통해 <확실 한> 미래를 달성하는 것. 여기에는 '이 세계 즉 자연이라고 하는 책은 삼각형이나 원과 같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언어로 씌여있다' 라는 수학에 대한 신뢰(갈릴레이), '제작으로써 자연을 정복한 다'라는, 기계를 제작하듯이 자연도 수학적 확실성을 바탕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새로운 태도(베이컨),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나>의 발견, 그런 나에 대한 절대적 믿음, 그 믿음으로 시작되는 <분석>, <종합>, <검산>의 시스템(데카르트)이 밑바탕 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속에서 세상 의 모든 것은 등질 공간과 등질 시간 속에 위치하게 되며, 시간 은 직선적인 양적 존재로 파악되면서 진보라는 새로운 시간관념 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뉴튼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듯 기계론적 이성은 '세계를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적 정신'의 다른 이름이며, '이 방법을 뒷받침하는 원점에 분할 불 가능한 개인'이 놓이게 된다.(p.121) 근대 시민사회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기계로서의 인간과 세계'를 말하고 있으며, 근대의 <자연법사상>이란 데카르트의 '코키토'가 만들어낸 근대 정신의 끝없는 변주들 중의 하나이다. 개인의 자 유와 권리는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것이라는 <자연법사상>은 근대 자유주의와 정치 사상의 뿌리를 형성하게 되며,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에서 '인간이 자유이며 공적 시민으로서 권리를 주장 할 수 있다'는 근대적 <개인>의 개념이 확고하게 선언되기에 이 르게 하는 밑바탕이기도 하다.

근대 시민 사회는 이러한 기계부품으로서의 개인들이 모여 있 는 곳으로서, 크게 나와 나의 관계(윤리 혹은 정신), 타인과의 관계(정치 경제), 자연과의 관계(생산과정)라는 세 가지 관계가 기계론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래서 홉스는 '사람들에게 이성 (기계론적 이성)을 자각시키고, 개개인이 이성적 존재자가 되어, 만인의 생명과 소유물을 보전할 수 있는 국가를 창출하고, 근대 세계에 어울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p.146)한다. 여기에는 '부품으로서의 개인, 톱니장치로서 의 사회'가 구성되며, 국가란 거대기계(리바이어던)가 된다. 이 렇게 새롭게 구성된 세계 속에서는 스미스는 홉스가 <이성>이 인 공적 인간관계를 만든다고 본 것과 대조적으로 <감정>이 인간적 인 대타관계를 만든다고 본다. 스미스의 이런 주장을 통해 시장경제의 매커니즘이 완성되며, 칸트에게서는 자기 입법과 자기 통 제가 이루어진다. 근대란 개인적 자율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자율은 정치 혁명과 산업 혁명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며, 근대 기 계론은 부분적으로 근대 유기체론-라이프니츠, 헤겔, 화이트헤드 -으로 그 결점을 보완하면서 시민사회에 더욱 강력하게 정착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근대는 똑같은 이름의 다른 모습으로 나가게 된다.

5. 근본적 회의

하지만 1968년의 파리와 프라하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는 어떻 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마무라 히토시는 자본주의 내부에 서, 그리고 사회주의 내부에서 일어난 이 움직임을 근대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파악한다. '근대 세계가 충분히 <합리적>이기 때 문에, 근대적 시민의 내면이 너무나도 충분히 <자기 통제적> <자 기 입법적> 이기 때문에, 도리어 근대성은 배제적, 차별적이라는 반성이 일어나게 된 것', 다시 말해서 근대 세계가 스스로의 인 과율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순 수 자아>가 <경험 자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 안에는 가능하 면 <경험 자아>(신체와 욕망을 갖는 자아)를 말살하고 싶다는 욕 구가 몰래 작용하고 있다. 근대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이미 배제와 차별의 구도를, 말하자면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p.175)

인간 내부에서부터 이루어진 이러한 <배제>와 <차별>은 근대 성의 구조가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것 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계론적, 수학적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직선적 시간관과 진보에 대한 확고한 신뢰는 신의 손을 떠 난 인간이, 자신의 앞에 놓여진 세계를 해명하고 구축시키면서 자연의 질서가 아닌 인간의 이성이 파악한 질서와 인과율을 부여 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성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배 척당하게 된 것이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이러한 근대성의 구조를 진단하면서 이러한 근대를 넘어서는 방법을 제시한다.

6. 타자 공동체

'타자의 공동체는 중심이 없는 공동체이다. 동일화도 배제도 없는 공동체이다. 솔선해서 자기배제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만든 소극적 공동체는, 비록 무력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서는 인간이냐 비인간이냐 하는 물음이 완전히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p.190) 하지만 이러한 타자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해 야 하는 일들-자신 내부의 타자를 발견하는 것, 스스로 타자화 되는 것, 그리고 세계의 타자를 수용하는 것 등에 앞서 먼저 '타 자'를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 는 결코 타자를 알 수 없는데, 왜냐면 우리가 진리를 알아가는 방식은 전적으로 수학적 이성에 의지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는 우리의 사고가 진행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이마무라 히 토시의 진단한 근대성의 구조- <배제>와 <차별>-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적 자아가 아닌 <경험 자아>(신체와 욕망 의 자아)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는 모든 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궁극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지점 은 바로 이 지점인 것이다.

7. 근대

근대란 <희망>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신의 손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상정한 '이성이라는 이름의 빛'을 따라 항해한 시대이며 항해 도중에 만나게 되는 파도와 암초, 바람과 별빛의 지도를 손 수 제작하는 것과 동시에 배 안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점들을 여러가지 규칙으로 제도화하려고 노력한 시대이다. 그것은 뉴튼 과 케플러가 '과학혁명'을 진행시켰을 때, 프랑스 민중들이 바스 티유감옥을 습격했을 때, 그 희망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 만 이제 그 근대가 꿈꾸던 '희망'이란 고작 '자본주의의 승리'쯤 이라는 사실에 우리들은 당혹해하고 있다. 그 동안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현대 과학이 어떻게 인간을 조직적으로 학살 할 수 있는가와 폭탄 하나가 한 도시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가 에 대한 처절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20 세기 최대의 정치실험이 68년 프라하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었을 때,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을 제도화하고 억압하며 감시하 는가가 그 해 '파리'에서 드러났을 때, 근대에 대한 회의는 그 극단에 치달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소위 탈근대라 고 불리는 '절망'뿐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절망을 요약하고 있 는 책이다. 나는 '타자공동체'론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무라 히토시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근대가 마주하게 된 '절망'을 이성의 눈으로 그 깊숙이 응시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근대인 이 될 지도 모르는 우리들이 해야할 첫번째 일일 것이다.

'절망적이라고 일단 판단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달콤한 언설과 이데올로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사회성이 내포하는 끔찍스러움에 직면해 나가야 한다. 그 편이 인간적인 성실함의 표시가 될 것이다.'(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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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련 님,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번에 지하련 님의 리뷰를 9월 5주 <반디 & View 어워드>로 선정하였습니다. 어워드 관련 적립금은 지하련 님의 반디 아이디로 일주일 이내에 지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네요.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컨텐츠팀 현선 드림

    • 고맙습니다. ^^~. 코엑스 반디앤루니스에 가끔 들려서 책을 사가지고 가곤 해요. 사무실이 근처라서요~. 인터넷 서점으로도 책을 사보기도 하지만, 그래서 책은 실제로 만져보고 내용도 확인하고 사는 게 최고라서..ㅋㅋ. 이번에도 요긴하게 써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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