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얼음의 책

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렇다고 긴 문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호흡은 한결같이 짧고 반복적이며, 작가 한효주의 숨소리가 문장들에 어김없이 들어가거나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던 '있다'와 '없다' 사이 어디쯤 자리잡고 앉아있었. 그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는 이 소설집을 읽는다. 그리고 읽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지나, 작년을 지나 올해 봄까지. 


그 사이 아이는 자라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자기 주장을 펼쳤고,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이가 상처 입으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늙어가는 우리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 혼자 웅크리고 말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아름답게 수다스럽던 청춘이 사라지고, 그 청춘 옆에서 조용히 젊은 영혼을 어루만지던 책도, 언어도 얼어 간다. 그가 내 곁을 떠나고 그녀 주변을 맴돌던 그 화사한 미소도 사라진다. 


변화란, 어쩌면 과거의 상실이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의 증거다. 아마 작가 한효주는 얼어버린 마음을, 잃어버린 단어, 혹은 어떤 대명사를, 따스함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스스로 움츠리고 가라앉고 조용해지며 팔을 내리고 손을 굳게 쥐고 입을 닫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침묵을 견딜 수 없어질 때쯤 해가 완전히 졌다. 실내등이 켜져 있었지만, 매우 어두웠다. - 206쪽  


결국 침묵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다. 변화 앞에서 침묵은 그녀의, 나의 유일한 무기였고 그 무기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건, 언제나 황혼 녘이다. 작가의 숨소리에서 주저하며 강요된 억제의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나 뿐일까. 때론 글쓰기보단 우는 것이, 잔뜻 술에 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나이 들고 보니, 글쓰기가 내 일상에서 저 멀리 달아나, 도망가, 내 곁으로 오지 않을 거리로 밀려나있긴 했지만. 


문장이 딱딱해지고 건조해지고 반복되며 있음과 없음에 매달리게 된다. 실험적 글쓰기가 아니라, 침묵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싸움이고 이미 일어난 변화에 저항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얼지 않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다. 그렇게 작가는 나이가 들고, 변하고, 나도 이미 죽은 날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변화, 참 싫다. 그렇게 얼어가는 건 더 싫다. 



얼음의 책 - 8점
한유주 지음/문학과지성사




Comment +0



회사에 신입이든 경력이든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1) 회사는 당신에게 비전이나 동기를 주지 않습니다. 비전이나 동기는 자기 스스로 만들고 이를 이루기 위해 회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하기 바랍니다.


2) 글쓰기는 업무 능력의 모든 것입니다. 이메일도 글쓰기의 연장이고, 보고서, 회의록, 제안서, 모든 것들이 글쓰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맞춤법은 기본이요 문장은 깔끔해야 합니다.


3) 요약, 정리는 글쓰기의 핵심입니다. 잘못된 의사결정의 70%가 잘못된 보고서에서 나온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요약, 정리의 시작은 제대로 들었는가, 제대로 읽었는가, 제대로 대화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잘 듣습니까? 잘 읽을 수 있습니까?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나요? (그러면서 읽기,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4) 결국 제대로 읽고 쓰고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걸 위해 당신은 그동안 어떤 활동들을 했나요?


그리고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한 몇 가지 실행 팁을 알려주면서 마무리한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에서 가르치는 글과 회사에서 필요한 글은 전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면 된다. 학교에서 배우는 논문 쓰기는 회사에서 필요한 글과 가장 비슷한 형태를 띤다. 제대로 된 논문이 그렇듯이 제대로 된 보고서는 길지 않다.


결국 대학 다니면서 리포트 베끼고 여기저기 짜집기해서 제출한다면, 회사 생활 제대로 하기 어렵다.


사족이지만, 이런 측면에서 대학에서의 교양 인문학 강좌는 정말 중요하다. 전공과 관련없다.




Comment +0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지음), 김운찬(옮김), 열린책들 





이 책은 움베르토 에코가 <<레스프레소L'espresso>>라는 이탈리아 주간지에 실었던 <미네르바 성냥갑> 칼럼을 모아 낸 책이다. 칼럼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1년 전에 읽었던 도정일 교수의 칼럼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묘하게 비교된다. 어떤 이는 이 '비교'가 부적절하다고 강하게 주장할 것이다. 나도 '비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책 구입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독자로서, 도정일 교수의 칼럼집에 대해선 돈이 아까웠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에 대해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낄 뿐(그런데 이것은 저자가 신경 쓸 부분이라기 보다는 출판사 관계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집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이 책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에코의 인문학적 재치는 유머스러하면서도 그 특유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가령 <왜 시인은 게을러야 하는가> 같은 칼럼에서. 


책과 예술, 인터넷 등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한 칼럼들로 채워진 이 책은 책상에 앉아 정독하면, 도리어 재미없어진다. 스마트폰에 정신 팔린 사람들도 가득찬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나 버스, 독서는 안중에도 없이 영어 공부방이 되어버린 커피숍 등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최고의 선택이다. 


나도 거의 십수년만에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을 읽었다. 예전에 사두었던 에코의 칼럼집 한 두 권이 서가 어딘가에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번 읽든, 똑같이 교양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 32쪽 



책을 읽다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될 것같진 않고, 다만 요즘 같은 시절의 한국에서 책을 읽다는 것이 얼마나 유별난 습관인지,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 그래도 움베르토 에코 같은 이에게서 위안을 얻어야 할 것이다. 


* 움베르토 에코 사이트 : http://www.umbertoeco.com/en/  









Comment +0


데리다: 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 Jacques Derrida zur Einführung

H. 키멜레(Heinz Kimmerle) 지음, 박상선 옮김, 서광사, 1996 



  




데리다에 대해선 대학 시절부터 많은 논문과 책을 읽었지만, 늘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지만, 결론은 같다. 그의 방법론 - 미국에선 흔히 '해체'라고 부르는 - 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늘 남는다. 


물론 "차연의 철학"이라는 명칭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명칭은 - 아도르노에 의해 발전된 동일화하는 사유(identifizierendes Denken)에 대한 비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차연[다름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일화시키지 않음, 즉 다른 것 혹은 구별되는 것을 같은 것이나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연적 사유는 통일적이고 그 자체로서 증명할 수 있는 철학적 흐름으로 특징짓는 일은 사실 그 의미에 거슬리는 일이다. 차연적 사유는 그 자체 다른 것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속에 있는 것이지 항상 같은 것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이라고 말 때 그것은 동일한 것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자체가 끊임없이 바뀌는 철학이다. - 15쪽 


끊임없이 바뀌는 게 철학이라니! 


차연은 "흔적의 유희"로 완성되고 있으며, 의미도 없고, (눈 앞에 있는 물건처럼)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유희에서 스스로-자기와-구별됨(Sich-von-Sich-Unterscheiden)은 하나의 흔적으로서 이 흔적은 또다시 지워지는 흔적이다. - 93쪽 


데리다는 자주, 나에게 문학 비평처럼 읽힌다. 그는 텍스트 안으로 텍스트 행간 사이에 숨은 의미, 혹은 의미의 부재를 흔들며 해체한다. 그에게는 글쓰기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른다. 하긴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만큼 '개념'과 '개념의 해체'에 매달린 적도 없으리라.  


책의 폐쇄성(Geschlossenheit [끝맺혀짐, 닫혀짐])을 두 배로 늘림으로써 사람들은 그 폐쇄성을 부수고, ... 그 순간부터 ... 책 속의 책을, 원천 속의 원천을, 중심 속의 중심을 읽을 수 있으므로 그 때부터 심연(Alggrund [바닥이 없음])이, 무한히 다양화되는 끝없음(Un-grund)이 시작된다. 다른 것이 같은 것에 있다[있게 된다]. 

- 데리다, <<글쓰기와 차이>> 중에서 (65쪽에서 재인용) 



데리다 철학에 대해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은 값진 선물이 될 수 있겠지만, 데리다는 철학자다. 아니, '철학서에 대한 해체 비평가'라는 표현이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철학이라고 할 때, 그건 건축적(구축적)임을 뜻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반-건축적이거나 탈-구축적이다. 그는 그것을 지향했고 철학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몇 개의 단어로 모이긴 하지만, 체계적이지 않고 도리어 병렬적이고 동어반복적이다. 데리다의 다양한 전략과 실천들을 간략하게 보여주면서 데리다가 일관되게 이야기한 '차연'의 의미를 되새긴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할 당시(1998년 경으로 기억된다), 데리다 철학에 대한 소개 서적도 얼마 없었지만, 그나마 이 책이 제일 나았다. 지금은 어떤 지 모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책이 어려운 철학책임에 분명할 테니, 일반 독자에게 권할 책은 아니다.  아마 지금도 데리다 철학 소개서로 손색이 없을 테지만, 굳이 지금 데리다를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는 인문학 전공자에게도 마찬가지일테다. 차라리 그 시간에 서양철학사를 읽거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추천한다. 아니면 아도르노의 다른 책을. 이 책을 옮긴 박상선의 말대로 데리다는 아도르노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며 '아도르노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Jacques Derrida (1930 - 2004)



데리다에 대한 소개는 아래 글이 좋을 듯 싶어, 옮긴다.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형이상학의 폐쇄적 원리 해체 -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Comment +2

  •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산만한게 꼭 저같아서 좋네요.

    마침 아도르노의 「사회학 강의」를 혼자서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게 ㅋㅋㅋ 막 읽고있는데 개중 반가운 글입니다. ㅎㅎㅎ

    소개 너무 감사드립니다. 지하련님은 추천하지않으셨지만 저는 꼭 읽고싶네요. 참 저같은 사람이라 ㅋㅋㅋ

    • 데리다보다 아도르노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네요. ^^;;; 인문학도 워낙 유행을 타는지라.. ㅎㅎ



2014년의 독서 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줌파 라히리와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었다는 건 정말 뜻깊은 경험이었다. 또한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 2014년 12월에 읽었던  <제 2의 기계 시대>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아직 리뷰를 쓰지 않았지만. 


비즈니스 분야의 책들은 많이 읽지 못했으나, 읽는 책마다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 주었다. <린 스타트업>,  <뇌를 훔치는 사람들>,  <전략실행 - CEO의 새로운 도전> , <아마존, 세상의 모든 것을 팝니다> 등은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전략실행-CEO의 새로운 도전>이 출판되지 않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에선 개정판이 나와 계속 읽히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한국은 좋은 책이 계속 읽히는 풍토가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의 원인은 출판계보다는 독자의 사정 탓인 듯 싶다. 그만큼 책을 읽어 구조화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 아니 습득하는 능력 자체마저 떨어지고 있다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 특히 번역서의 경우, 인문학에서는 번역에 대한 노고에 대한 인정이 없고, 비즈니스 서적이나 실용 서적의 경우에는 굳이 번역서를 읽지 않아도 되는, 즉 영어로 읽을 수 있는 독자의 수가 늘고 있으니, 아예 번역 출판 시장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특히 e-book 시장이 활성화될 수록 아마존과 같은 웹사이트에서 구매 즉시 바로 읽을 수 있으니, 굳이 번역서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출판 시장의 기형화는 장기적 안목과 비전을 가진 출판 전문가의 부재, 정부나 유관 기관의 형편없는 정책, 독서 교육에 대한 총체적 난국(입시 논술이 아니라!) 등, 그냥 이제 출판은 꽝이요 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듯하다. 한국에 이렇지 않은 시장이 어디 있을까. 암울하기만 하다. 한국은 예로부터 근시안적이었던 건 아닐까 싶다. 에효. 


2014년 한 해, 약 50권의 책을 읽었고 소설, 시집, 만화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다양하게 읽었다고 볼 수 있다. 잡지나 도록, 기타 논문들은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실제 읽은 권 수는 더 될 것이다. 신간 서적은 몇 권 되지 않고 구간들이 많고 몇 권은 이미 절판이다. 이런 절판된 책들을 e-book으로 만들어 배포하면 어떨까 싶다. 인디자인이나 쿽으로 전자 출판된 파일이 있다면, 이를 pdf 등으로 변환하여 온라인 서점에 배포하고, 이를 on-demand printing이나 e-book 형태로 판매하는 것도 방법이 될 텐데. 여기에 대해 출판사는 별 생각이 없는 듯 싶다. 아니면 절판된 책에 대한 e-book, 혹은 on-demand printing을 대행해주는 전문 에이전시도 방법이 되겠다. (핫. 이거 비즈니스 모델 아님? 혹시 하시게 된다면 저도 같이..^^) 


인문학 서적은 꾸준히 읽어오는데, 이제서야 제대로 읽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인문학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인문학 다이제스트판 책들을 읽으면서 '아, 인문학 책을 읽었구나'고 위안을 삼는 독자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지만, 제대로 된 인문학 선생을 만난 적 없는 독자들에게, 심지어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들 조차 진정한 인문학 선생을 만나기 어려운 마당에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보아온 형편없는 인문학 교수들, 다시 말해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이나 나머지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고 심지어 세상사와는 담을 쌓고 사는 이들이 너무 많아, 그들에게 현 세상에 대해, 인생 살이에 대해 고민을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고민을 이야기해봤자 공허한 이론만을 주절거릴테니, 이를 경험한 이들은 아, 인문학은 아무 쓸모 없구나 하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인문학이 탐구하는 분야는 '사랑'이다. 그/그녀에 대한 사랑부터, 부모/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마을과 도시에 대한 사랑,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가치와 진리에 대한 사랑, 그래서 철학은 사랑을 그 어원에서부터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시작한다. 우주에 대한 사랑은 천문학이 되고 건물에 대한 사랑은 건축학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아는 이는 알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 공부는 어렵고 힘든 것이다. 그/그녀와의 사랑이 쉬웠던 적이 있는가?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쉽게 읽히는 인문학 책이 있다면 바로 쓰레기 통에 버려라. 그건 거짓말이거나 위선이고 허위로 이루어져 있을 테니.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고통스러울 때, 그것이 인문학 책이다. 그렇게 다시 읽고 노트하고 되새기는 책, 그게 인문학 책이다. 


인문학을 4주만에 배운다고? 한 권으로 끝낼 수 있다고? 세계적인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를 딴 사람들이 왜 사업을 하면 망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라. 인생살이란 쉽지 않고 사랑은 얻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쉽고 않고 어려운 것이 사랑이고, 인문학이다. 


올해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지 못했고 읽기 시작하기만 했다. 알튀세르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지오 폰티와 앙토넹 아르토는 나에게 기막힌 즐거움을 선사했다. 조중걸 선생님의 서양예술사 5권 중 3권이 출판되었다. <근대 예술>1권과 2권, <현대 예술>은 서양 예술사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현대 예술>은 이미 읽었으나, 다시 읽을 예정이며, <근대 예술>은 12월부터 읽기 시작했다. 


또한 이우환 화백의 책들을 읽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여백의 예술>의 감동을 잊지 못하는 나로선, 역시 이우환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만남을 찾아서>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그는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고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했다)와 예술의 미래에 대한 진취적인 고민, 탁월한 방향 제시는 그가 왜 일본에서, 유럽에서, 미국에서 인정받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예술 분야의 책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이우환의 <만남을 찾아서>는 독자 리뷰가 거의 없은 상태에서 아예 절판이고, 앙토넹 아르토의 <잔혹연극론>은 품절이다. 케네스 클라크의 <예술과 문명>은 번역이 엉망이긴 했으나, 미술사가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탁월한 입문서였다. 하지만 이 책 또한 절판이다. 형편없는 입문서들만 뒹굴거리는 곳이 바로 예술 분야 책들이다. 왜냐면 입문서도 겨우 읽을 수 있는 독자들 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예술 분야는 출판 시장 뿐만 아니라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보기 드물게 아주 소수의 전문가들로만 돌아가는 이상하고 폐쇄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폐쇄성을 없애려고 하는 순간, 망하거나 쫓겨난다. 


말이 길었다. 2014년 한 해 읽은 책 목록을 제시하며, 추천하는 책들은 별도로 표시하겠다. 그리고 실은 2014년 초에 몇 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들이 있었는데, 놀라운 쓰레기였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저자의 경제 사정을 나아지게 했다는 점에서 뜻깊지만(나 또한 부러움을 가졌고), 이 책을 읽고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을 느꼈을 독자들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아예 목록에서 제외했다. 괜히 넣어 불편함을 만들 필요없을 테니(제외하니, 50권 이하로 읽었군).


책은 몇 권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책을 읽었느냐가 핵심이다. 부언하자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는냐'가 중요하다. 어떤 책들은 평생을 두고 읽는다. 성경 말고. 나는 플라톤이나 베르그송을 그렇게 읽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하지만 그의 슬픔은 어쩌란 말인가), 베르그송은 언제나 문학적, 철학적 탁월함에 반하고 만다. 그렇다고 나에게 플라톤이나 베르그송에 대해서 묻진 말아달라. 나는 그들의 발가락 끝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뿐이니. 


2015년, 내 독서는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까. 궁금하다. 몇 해 전부터 '정치란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몇 권의 '정치철학' 책들을 사 두었는데,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 책들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몇 명 저자들의 책을 꾸준히 찾아서 읽을 것이다. 또한 요즘 영시의 매력에 빠진 터라, 영시도 읽을 생각이다. 나에게 다소 버거울 테니, 주석을 구할 수 있는 시집들 위주가 될 테지만. 


 

*** 

 


문학 분야


<원 맨즈 독>,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 인문학 전공자들을 위한 수필집이라고 할까. 아니면 탁월한 지적 위트와 통찰을 즐겁게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은 탁월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지음), 서정은(옮김), 뿔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지음), 박상미(옮김), 마음산책

: 앨리스 먼로와 줌파 라히리는 정말 대단한 소설가들이다. 그냥 읽으면 된다. 읽고 난 다음 후회는 절대 없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글/그림, 길찾기 

: 문학의 영역 속에 이제 만화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몇 명의 만화가들이 최근에 보여준 극화나 스토리 역량은 한국의 여느 소설가들 이상이었다. 


<미국의 송어낚시>, 리처드 브라우티건(지음), 김성곤(옮김), 비채

: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예나 지금이나 읽히지 않는다. 그만큼 옮기기도 어렵고 한국 독자의 수도 작고 낮다.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지음), 김진영(옮김), 이순

: 롤랑 바르트의 짧은 글 모음은 여러 책들이 있다. <애도 일기> 뿐만 아니라 <작은 사건들>,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등등. <애도일기>를 읽기 전에 이들 책부터 먼저 읽기를 바란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지음), 한겨레 출판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랭보(지음), 김현(옮김), 민음사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지음), 문학과 지성사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지음), 문학과 지성사

<멈춰서서>, 이우환(지음), 성혜경(엮음), 현대문학

<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지음), 이상준(옮김), 향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보르헤스(지음), 우석균(옮김), 민음사

<셰익스피어의 기억-보르헤스 전집5>,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예술 분야


<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 1960년대 말 일본 미술 비평의 수준을 경험해보라. 아마 뜨끔할 것이다. 


<명화의 비밀>, 데이비드 호크니(지음), 남경태(옮김), 한길아트

: 데이비드 호크니! 정말 유쾌한 사람이다. 그는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를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미술의 거장들이 탁월한 예술가 이전에 전문적인 기술자였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기술을 기반으로 놀라운 예술 세계를 펼쳐보인 거장들에 대한 경외감이 밑에 깔려 있다. 


<건축예찬>, 지오 폰티(지음), 김원(옮김), 열화당

: 왜 나는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을까? 왜 나는 이 책을 그 누구에게서도 추천받지 못했을까? 이 책은 건축 전공 서적이 아니라 우아하고 감동적인 수필이자 건축에 대한, 현대 예술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다시, 그림이다>, 마틴 게이퍼드(지음), 주은정(옮김), 디자인하우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를 모은 이 책은 왜 데이비드 호크니가 현대의 위대한 예술가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다.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지음), 한권의 책 

: 잡지에 실렸던 글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다. 이 책보다는 서양미술사 5권 시리즈가 더 나을 텐데, ... ... 


<예술과 문명>, 케네스 클라크(지음), 최석태(옮김), 문예출판사 

: 절판이다.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지음), 김치수(옮김), 문학과 지성사 

: 한국에선 거의 읽히지 않는 누보 로망. 그리고 미셸 뷔토르. 그러나 이 책은 현대 소설이 어때야 하는지 말해준다. 이런 측면에서 제대로 된 현대 소설을 우리 문학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까?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로잘린드 크라우스(지음), 최봉림(옮김), 궁리 

: 좋은 책이나, 미술 이론 전공자를 위한 전문 서적이다. 이런 책들을 위한 출판 시장이 없다는 건 정말 절망적이다. 출판사가 자선 단체도 아니고. ㅡ_ㅡ; 이 책은 대림미술관의 지원을 받아 나온 책인데, 이런 식으로 전문 서적에 대한 여러 공공/민간 단체의 지원이 늘어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글로 된 전문 지식, 정보들은 늘어나야 된다. 


<잔혹연극론>, 앙토넹 아르토(지음), 박형섭(옮김), 현대미학사 

: 이것도 전문 서적이구나. ㅡ_ㅡ;;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지음), 박수지(옮김), 학산문화사

<세계명화 비밀>, 모니카 봄 두첸(지음), 김현우(옮김), 생각의 나무 


인문 분야 


<제 2의 기계 시대>, 에릭 브린욜프슨/앤드루 맥아피(지음), 청림출판 

: 정말 좋은 책이다. 증기 혁명 이후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고 있고 이 혁명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직업이,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시해주고 있다. 


<나를 지켜낸다는 것>, 팡차오후이(지음), 박찬철(옮김), 위즈덤하우스

: 다시 읽을 책이다. 현대적 관점에서의 중국 사상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유익한 책이다.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김동조(지음), 북돋음 

: 이런 책은 유익하다. 


<짝찾기 경제학>, 폴 오이어(지음), 홍지수(옮김), 청림출판 

: 미시경제학을 쉽게 풀어쓴 책. 미국에선 꽤 주목받았는데, 한국에선 거의 팔리지 않았다. ㅡㅡ;; 시장의 차이인가. 


<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알랭 투렌(지음), 고원(옮김), 당대

<휴머니즘과 예술철학에 관한 성찰>, T.E.흄(지음), 박상규(옮김), 현대미학사 

<책, 그 살아 있는 역사>, 마틴 라이언스(지음), 서지원(옮김), 21세기북스 

<거짓말의 힘>, 우테 에어하르트/빌헬름 요넨(지음), 청림출판 

<리더가 사라진 세계>, 이언 브레머(지음), 박세연(옮김), 다산북스

 

경제 경영 분야


<린 스타트업>, 애시 모리아(지음), 한빛미디어 

: Lean Start-up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유익한 책. 


<회사는 어떻게 강해지는가>, 이나모리 가즈오(지음), 김정환(옮김), 서돌

: 이나모리 가즈오가 쓴 책은 대부분 읽을 만하다. 또한 사업을 하고 있는 이들에겐 정말 필요한 이야기를 해준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다. 특히 동양인 사업가의 마음가짐, 태도에 대해서 알 수 있어 좋고 유익하다. 이는 서양인 사업가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전략실행 - CEO의 새로운 도전>, 로렌스 G.히레비니액(지음), 이진원(옮김), 럭스미디어 

: 최근 알게 된 사실, 순수 비즈니스 전략 책은 안 팔린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경영학자의 책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첫 번째 읽기 어렵고 두 번째 전략적인 의사 결정이나 회사/조직을 전반적인 관점에서의 고민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겐 공허한 메아리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정말 좋다! 


<뇌를 훔치는 사람들>, 데이비드 루이스(지음), 홍지수(옮김), 청림출판 

: 뉴로 마케팅?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정말 위험한 기술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정말 탁월한 기술이다. 이 책을 읽으면 절반의 흥미진진함, 절반의 공포를 알게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 새로운 마케팅의 탄생 COD>, 도준웅(지음), 21세기 북스 
: 읽을 만 하다. 특히 한국 기업의 마케팅 실무자,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추천한다. 솔직히 저자의 견해대로 한국 시장은 정말 로컬스럽다. 

<아마존, 세상의 모든 것을 팝니다>, 브래드 스톤(지음), 야나 마키에이라(옮김), 21세기북스 
: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천재 사장과 천재 부사장이 경영하는 회사가 아마존임을 알게 되었다. 이 회사 앞으로 100년 간다. 

<의미부여의 기술>, 인터브랜드(지음), 엔트리  

<파괴자들>, 손재권(지음), 한스미디어 

<미래 기업의 조건>,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지음), 이진원(옮김) 비즈니스북스 

<그룹드 세상을 연결하는 관계의 비밀>, 폴 아담스(지음), 이지선(옮김), 에이콘출판사 




Comment +5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의 '자화상'이라는 작품(?)이다. 구글에서 찾아보았으나, 구한 것은 아래 책 표지뿐. 


지난 한 달 동안 매일 들고 다니며 조금조금씩 읽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의 한 챕터에서 소개된 작품이다. 헤르바이트 바이어의 이 작품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진 실천의 비약적 발전을 기념하고, 예증하고, 분석해보고자 사흘 동안 열렸던 학술 회의 <말로는 부족할 때>의 프로그램 책자에 실렸다.


뭐랄까, '책 읽기 따위는 잊어라'는 식이랄까. 기이한 자기 반영성으로 사진 실천과 글쓰기, 혹은 텍스트와 사진 간의 기묘한 연관성을 표현한 사진인 셈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런 컨셉은 자주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 흑백사진이 주는 여운은 꽤 흥미로웠다. 제목이 자화상이라니. 


초기 사진이 가지는 리얼리티와 글이 가지는 리얼리티 사이에서 사진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은 몇몇 이들에겐 열광적인 찬탄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긴 새로운 표현 기술이 나왔을 때는 늘 있는 법이니... 이 점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표현 기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 기술의 등장에 대한 인류의 반응을 모아 분석해보는 것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요즘 몇몇 이들은 스마트폰의 등장에 열광하고 있는데,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터라, ... ) 


하지만 헤르베르트 바이어의 자화상으로 검색하니, 다른 사진들만 나왔으니... 



헤르베르트 바이어, 자화상, 1937.

(이미지 출처: http://www.barnesandnoble.com/w/herbert-bayer-arthur-allen-cohen/1114577708?ean=9780262022064) 


  


나도 이런 사진을 찍기도 했지. 


Comment +0


뒤샹과 벤야민 그리고 소셜 미디어





오늘날 나타나는 것이 프로그래밍된 체험들이다. 사회적 삶은 총체 예술이 된다.
- 노르베르트 볼츠, 『컨트롤된 카오스』 중에서


변화하는 기술 환경과 창작



노년의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아이폰의 브러쉬 기능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해외 토픽에 나오는 지금,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발달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매년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이를 쫓아 배우고 소비하기도 바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급변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변화할 뿐이다. 눈에 보이는 여러 문화와 기술 트렌드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고 해서, 19세기 이래로 우리의 일상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많다. 이는 예술가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장르를 만들기도 하지만, 예술가의 창작 작업이 급변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데이비드 호크니도, 늙은 데이비드 호크니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붓으로, 아이폰의 브러쉬로.


Three images by David Hockney - a self-portrait, a still life, and a summer dawn?made with the Brushes application on his iPhone, 2009
출처: http://www.nybooks.com/articles/archives/2009/oct/22/david-hockneys-iphone-passion/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은 종종 창작환경에 대한 불필요한 논의를 야기하기도 한다. 원고지로 글을 쓰고 종이책을 내던 작가들이 PC 키보드로 글을 쓰고, 온라인의 전자적 문서(하이퍼텍스트)로 펴내기 시작했을 때,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작업 환경과 결과물의 변화로 문학의 본질까지 건드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새로운 문학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지금, 그런 연구는 철지난 유행이 되었고, 이제 어떤 기대나 우려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진 때문에 미술이 죽고, 영화 때문에 소설이 죽을 거라는 호들갑스러움처럼. 그렇다면 최근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열풍은 예술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소설가 박범신은 인터넷 블로그로 소설을 연재하여 출판하였고 이외수는 트위터(Twitter)에 올린 짧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1차 출판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고, 실시간으로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출판은 마치 뒷북치듯 오프라인 서점에 깔리는 것이다.

2008년 뉴욕 브룩클린 미술관에서는 흥미로운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 이름은 「Click! A Crowd-Curated Exhibition」이었다. 전시의 목적은 제임스 서로워키(James Surowiecki)의 책 『대중의 지혜』에서 주장하듯, 일반 대중의 의사 결정이 전문가들의 그것보다 현명하다는 것이 미술에서 가능한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일반 대중의 의사 결정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정에서 소셜 미디어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먼저 예술가들에게 페이스북(facebook), 플리커(Flickr)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락하였으며, 전시할 사진 작품들도 온라인으로 받았다. 그리고 웹사이트에 사진 작품들을 전시하였고, 일반인들로 하여금 전시 작품들을 평가하도록 하였다. 모든 전시 활동들이 먼저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진 작품들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평가하도록 하였으며, 그 평가를 바탕으로 실제 미술관 전시가 이루어졌다. 즉 ICT의 발달로 인해 예술 창작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창작 이후의 어떤 과정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뒤샹과 벤야민의 소망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를 「샘」이라 이름붙이고 미술관에 전시했을 때, 그 의도는 분명했다. 당신들,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면서 ‘미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가 원하기만 한다면 미술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기존 예술 작품이 가지던 종교적, 정치적 아우라가 기술 복제를 통해 사라질 것이고 예술은 대중의 것이 될 것이며,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파시즘에 싸울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주도할 예술 장르로 사진과 영화를 주목했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의 의도는 성공하고 발터 벤야민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일까?

뒤샹의 「샘」 원작(?)은 한 번 분실된 후, 새 변기에다 「샘」이라고 적는 해프닝이 있었다. 뒤샹의 의도와는 반대로 뒤샹만이 상점에서 파는 변기를 「샘」이라는 현대 미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뒤샹의 도발적인 ‘레디메이드’는 20세기 이후의 미술을 개념 미술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소망, ‘아우라’는 사라지고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그가 바라던 어떤 사회는 결국 오지 않았다. 도리어 뛰어난 예술가가 되려면 먼저 시장과 정치를 알아야하고, 예술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전문가, 아마추어, 일반 대중의 거리를 더욱 멀어졌다. 20세기 중후반까지 현대 예술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셜미디어가 만들어가는 예술적 일상

제롬(Jean-Leon Gerome)이나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같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보기에 모네(Claude Monet), 피사로(Camille Pissarro)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마치 형편없는 아마추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마추어들은 현대 미술(Modern Art)을 만들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연극 무대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 되길 바랐다. 그의 서사극이론은 관객이 무대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개방된 무대를 지향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얼마 전 끝난 국립현대미술관의 「누가 미술관을 두려워하랴 - 박기원」전은 현대 미술이 어떻게 일반 대중의 참여를 바라는가를 드러내는 전시였다.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예술의 시대는 가고 평등과 개방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마치 뒤샹과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소셜미디어가 바라는 것도 이것이 아닐까. 모두에게 개방되고 모두가 참여하며 공유하는 어떤 것.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운영하며 대중들과 대화하고 있다. 미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블로그에 올려 공유하고, 온라인을 통해 판매까지 하고 있다. 미국시인아카데미에서는 ‘Poem Flow'라는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휴대폰에서 시를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런 어플리케이션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미 많은 갤러리와 미술관들은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로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고 있으며, 미국의 인디아나폴리스 미술관은 아예 소셜미디어 기반의 웹사이트인 ’ArtBabble'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을 정도이다.

소셜미디어의 개방성으로 인해, 일반 개인도 이러한 활동이 가능해졌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나 직접 그린 그림, 그리고 자작시나 소설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하고 공유하며,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졌다. 즉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작품을 온라인으로 전시하고 평가받는 일이 가능해졌다. 19세기 인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시장을 가지기 위해 고분 분투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면 된다.

소셜미디어의 힘은 전문 예술가와 일반 대중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예술 창작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 아니라, 예술 유통의 기반을 흔들어, 예술가의 존재를 새로 정의내리고 있는 셈이다. 전문 화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해야 된다든지,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 등단을 해야만 한다는 기존 공식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기존 예술 권력의 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중과 소통하며 대중과 호흡하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소셜미디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하는 것이 현대 예술가의 중요한 활동이 된 셈이다.

2006년 타임지는 ‘세계의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일 뿐’이라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사상이 현대에서는 더 이상의 호소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며, 올해의 인물로 ‘당신(YOU)'으로 선정했다. 뒤샹이 원했고 벤야민이 의도했던 바, 모든 이들이 예술가가 되고 예술의 유통이 무한 복제와 공유가 가능한 공간이 소셜미디어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http://www.artbabble.org/ 



* 이 글은 인천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저널인 '플랫폼'에 실렸던 글입니다. 2010년 봄에 실렸던 글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소셜미디어와 관련된 책 여러 권을 구입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아 씁쓸했던 기억이 나네요.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쓰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제목은 저널에 실린 제목대로 올렸습니다. 원래 제가 적었던 제목이 있었으나, 편집자가 선택한 제목이 좋습니다. 책이든 저널이든 편집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Comment +2

  • 참좋은글이네요...호크니의 아이폰드로잉들은 모순적으로 오히려 공유되지못하게 철통보안하고있다고하더라구요 갤러리측에서..말그대로 원화라는개념이 없으니 판매를위한전략?이라더라구요...참 아이러니한거같아요^^

    • ㅎㅎ.. 그러니 벤야민의 예언은 잘못된 거죠. 아우라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우라가 강화되고 어떻게 하면 아우라를 만들까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죠. ㅜㅜ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태도 - 대중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사회주의적이며 카발라적인 진지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그 속에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 에서도 기인하지만,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책은 벤야민 글쓰기의 급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러한 글쓰기의 급진성으로 이미 조각난 시간, 조각난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꽤 적절한 책이 되었다(그러나 가끔 만나게 되는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 앞에선 아쉽긴 하지만). 


고전적 예술 양식은 이미 사라지고 그 흔적들이 광고 문구 -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에서 따오거나 유래한 비유적 문장들로 즐비한 - 나 디자인 소품 - 이미 고전 예술을 넘어 현대적 예술 양식의 하나로 인정받는 - 으로 남겨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란 24시간 꺼지지 않는 케이블 방송처럼 끊임없이 변하며, 이 세계의 본질마저 이미지들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연속체, 즉 영화적인 병렬적 구성 -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구성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는 각 단락을 나누고 그 단락마다 에피소드를 담는다. 마치 각기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선 아케이드를 지나는 산보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거리 풍경처럼, 이 책도 그런 구성을 띄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산책할 때나 그 산책을 끝내고 혼자 있을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끝없는 허전감, 쓸쓸함 - 혹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행인들 사이에서 경험하는 익명성의 공포 - 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벤야민이 향하는 곳은 그 산책의 본질을 호도하고 그 산책의 외관으로서의 글쓰기 형식 자체이거나 그 산책의 쓸쓸함을 극복하기 위한, 비현실적 이상향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여러 문학작품들에 빗대어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을 통해 현실 변화의 단초를 읽기 보다는 이미 변해버린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실은 너무 늦게 우리가 벤야민을 읽기 시작한 것이며, 너무 일찍 벤야민이 절망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나마 이런 글쓰기를 통해 변해버린 현실을 알려주는 이마저도 드문 탓에, 벤야민은 우리들의 숨겨진 친구가 된다. 


이 책은 벤야민의 주저가 아니다. 일종의 산문집에 가까우며, 짧은 글들의 연속으로 인해 도리어 독서의 혼란스러움만을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을 지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벤야민저 | 김영옥외역 | 길 | 2007.1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Comment +0



마치 21세기의 새로운 목표를 40도로 잡은 듯, 서울 8월 기온은 연일 40도까지 올라가는 듯하다. 이런 더위, 낯설다.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현관을 나가면, 밖에 절정에 이른 아열대성 더위 속에 야자수들이 길게 뻗어 있고 빽빽한 녹색으로 우거진 숲이 펼쳐질 것같다고 이야기하자, 아내가 너무 낙천적이라며 웃었다. (진짜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에 온 기분이 든다.)


낙천적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주말에는 올해 처음으로, 한 페이지의 글도 읽지 않았다. 실은 서재가 너무 더운 탓이다. 무거워져 있는 머리 탓이기도 하다. 한 페이지라도 읽지 않으면 불안했는데, 책을 읽으려고 하면 8개월 된 아들 녀석의 소리가 들리는 탓에 읽지 못하고 거실에서 빈둥빈둥 거렸다. 


최근 힘들게, 두 개의 글을 연기된 마감 기한을 끝까지 채우고 보냈다. 최근 들어 원고 마감을 심하게 어기는 법이 없었는데, 이번엔 너무 심했다. 


이번에 쓴 두 개의 글 주제는 '상대의 마음을 얻는 협상법', '부하에게 효율적으로 화내는 방법'이었다. 솔직히 글의 방향 잡기가 어려웠다. 글이란 자기가 알고,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실용적인 내용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고민이 많았고 예상 밖으로 내가 참조할 수 있는 자료도 많지 않았다. 책 몇 권 읽은 것이 다였으니.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나이가 들수록 반성하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한때 '나이 들어 반성하는 나'를 무척이나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젊을 때의 반성은 종종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희석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이 들었을 때의 반성은 이제 세상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가족과 조직에 대한 책임감으로 반성한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강한 실행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 (실은 나이 들어 반성하면서, 그걸 되풀이하는 부끄러움을 아는 탓일테지만) 


나에게 제법 큰 변화가 생겼는데, 8월 하순부터 다른 곳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출근하기 전, 먼저 명함을 요청했다. 그 사이 뵙지 못한 분들께 연락하고 안부라도 전할 생각에.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선 업무 인수 인계를 진행 중이다. 사장도 아니면서, 지금 있는 회사 걱정 하는 내 자신이 우습긴 하지만, 여하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두꺼운 업무 인수 인계 문서를 작성하고 파일은 업무 폴더별로 정리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얻게 된 연락처 목록, 이메일 기록 등을 전달할 예정이다. 현재 몸 담고 있는 프로젝트 협업사 담당자는 '나가시는 분이 너무 열심히 하시네요'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


요즘 부쩍 책이 읽히지 않고 글이 씌여지지 않는다. 머리는 무겁고 마음은 걱정스럽고 몸은 더위에 지쳐 현기증까지 돈다. 나이 들어 이직하는 것이 엄청 부담스럽고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름은 이직의 시대다. 박지성이 자리를 옮겼고, 마리사 마이어가 구글에서 야후로 자리를 옮겼다(ㅡ_ㅡ;;). 


여름 휴가 기간 동안, 미술 비즈니스를 끝내고 들어간 IT 기업에서 최선을 다해 부딪힌 4년의 고민들을 정리하고(여기에는 의외로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성과중심주의, 효율적인 조직 구성과 Team제, 주간회의 운영법, 조직 갈등과 CEO의 역할, 벤처 기업(중소기업)에서 중간 관리자의 역할, 작은 기업을 위한 인력 충원 전략 등), 예전부터 정리해보려고 했던 경영 주제들 - 전략적 아웃소싱, 기업 전략과 혼다 효과(Honda Effect), 자원기반 관점에서의 기업 경영 등에 대해 읽고 메모하기, 최근에 알게 된(너무 늦게 알게 된 주제인) Lean Startup에 대한 스터디 등을 해볼 생각이다. 그러면서 새롭게 맡게 될 업무들에 대해서 준비할 것이다(너무 많은가?).








 

Comment +0


오늘 커피를 많이 마신 탓에 잠이 잘 올련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반성이자, 정리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행동의 지침과도 같은 역할을 하곤 한다. 오늘 쓴 글의 일부를 옮기면서 하루를 마무리 해볼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 따위는 없다. 하지만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외톨이는 드물다. 유능한 협상가는 협상 파트너를 친구로 만들 줄 알며,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열게 만든다.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고 나아가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고 예상되었던 결과물 이상의 성과를 달성하게 만든다. 왜냐면 성공적인 협상이란 서로의 이기심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가 모두 승자가 되는 협력의 장이기 때문이다.'



두 편의 글을 마무리 하면서 참 많은 반성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반성하는 횟수가 많아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Comment +0


일년 반 정도 모 통신사의 사보 편집장 했는데, 유명하다는 몇몇 필자들의 형편없는 원고를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국엔 일반 독자에게 어필해야 된다는 것이니, 나에겐 요원한 일이다제대로 된 글을 읽으려면, 그만큼 독자도 준비해야 된다. 바둑판을 읽을 수 없으면서 바둑을 두겠다고 하는 것이나, 글의 품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읽으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Comment +0


부영사 - 10점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정우사



부영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1984. (민음사 이데아 총서 중 한 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98쪽)



그들은 계절풍 속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혹은 그녀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어떤 행동을,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그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혹은 계절풍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가던 서사(narrative)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 ‘놓침의 독서’는 나의 기억 속에 몇 개의 이름만을, 몇 명의 존재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 그녀, 그, 그녀, 그, 그, ......

그와 그 사이, 그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아이를 밴 몸으로 계절풍 속을 떠돌다 캘커타 속으로 들어온 한 걸인 소녀의 배고픔과 몇 명의 백인 남자들 사이에 서있는 안 마리 스테레뗴르의 공허 사이. 하나의 공간 속을 떠도는, 멀리 떨어진 존재들, 그 존재들의 영혼 깊숙한 곳, 그 곳까지 계절풍은 불고.



** 뒤라스의 문장은 독특하다. 그래서 그녀의 동시대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 누보로망의 작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작가이다. <<부영사>>는 그녀의 영화 <<인디안 송>>의 원작 소설이며, 그녀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뒤라스의 소설들이 다 그렇듯이 흥미진진한 물결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염두에 두길.

*** 위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적은 리뷰다. 오늘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떠올라, 오래된 자료들 사이에서 이 리뷰를 찾아 올린다.




Comment +4

  • 윤민연우맘 2009.11.20 12:39 신고

    며칠째 부영사.
    부지런한 포스팅으로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주던 주인장 어디갔나.
    아, 짜증으로 점철된 일주일이로다.
    나, 사업한다~ 여러가지로 골 아프네.
    태생이 게으른데 신경쓰면서 돌아다니면서 할 일이 왜 이리 많은고.

    • 이제 좀 신경써서 포스팅해볼까하고. 딴 이들은 블로그에 올린 글(?)로 책까지 내던데, 나도 제대로 써서 책을.. 흐흠.. 그것보다는, 하도 "지하련씨, 예전 당신 글 좋았는데, 요즘은 엉망이야, 왜 그래?"라는 소리를 최근 들어서 너무 자주 들어, 좀 포스팅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초고만 쓰고 올리지 못하는 글들이 꽤 있네. 크크. 기대하삼~.
      그리고 사업한다고? 사업하지 마삼. 천칭자리는 우유부단하고 느려서 사업에는 별로이네. 그런데 어떤 사업을 하길래? 여튼 돈 많이 벌어, 소원 성취. ; )

  • 지나가는사람 2011.05.28 14:15 신고

    리뷰가 참 슬프네요 ㅠ_ㅠ

    • 뒤라스의 소설을 읽는 이가 드문 요즘, 20세기 후반 프랑스 소설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겼지만, 이젠 잊혀져 가고 있는 것같아요.~ 그래서 더 슬플 지도 모르겠어요. ... 뒤라스, 정말 좋은 소설가예요.


5. 홍보와 마케팅

6) 지식iN 마케팅

(이 글을 적은 지도 벌써 1년이 되었으니, 이젠 다소 식상한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네요. 읽을 때 지식인이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지식인'과 같은 서비스나 게시판이 온라인에는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젠 지식인에서의 마케팅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은 정보가 쌓여있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고심해서 올리는 것보다 다른 마케팅 공간을 찾아 활용하는 것이 좋을 지도 모릅니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해둘 것은 '게시판 글쓰기 전략'은 반드시 습득해야 됩니다. 온라인에서의 홍보는 '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작성하고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요건입니다.
온라인 전체가 마케팅 공간입니다. 단지 효과가 높은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간을 선별해내고 전략적 홍보로 공략한다면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지식in 서비스는 네티즌이 궁금한 내용을 질문으로 올려 다른 네티즌이 여기에 답을 해주는 서비스이다. 상식이나 전문 정보 가릴 것 없이 질문을 할 수 있고 많은 네티즌들이 여기에 답을 해주고 있다. 핸드폰을 구입하고 싶은데, 어느 상품을 구입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치자. 이 경우에도 지식iN에 접속하여 질문을 하고 올라온 답변들을 바탕으로 물건을 구입을 할 수 있다.

여기에 주의해야 될 사항이다. 온라인 쇼핑몰의 홍보의 장이 되어버린 ‘지식iN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답변이 아니라 ‘한 줄 리플’ 홍보는 보는 이도 짜증나게 만든다.

상당수의 쇼핑몰 운영자는 한 사람의 답변을 위해 새로 작성하기 보다는 이미 있는 내용을 복사해서 붙이기를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방식이다. 그 질문과 답변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네이버 지식iN DB에 쌓여 계속 검색 결과로 노출된다. 따라서 한번의 답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검색되어 읽히는 답변이라는 점이다. 또한 좋은 답변의 경우에는 네티즌들이 자신의 커뮤니티나 블로그에 옮겨다 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 줄 리플로 이것이 가능할까? 또는 아무렇게 올려놓은 답글이 여기저기 게시판에 옮겨질까? 이것을 알지 못하는 온라인 쇼핑몰 운영자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똑 같은 답변을 여기저기에 복사해서 붙여놓는다. 하지만 이는 질문을 올린 사람을 위해서도,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온라인 쇼핑몰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홍보 방식이다.

반드시 한 사람의 답변을 위해서라도 새롭게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답변은 온라인 쇼핑몰 홍보가 목적이 되면 안 된다.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간단하게 답변을 정리하기 위해서 참고한 사이트로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온라인 쇼핑몰 이름과 주소를 남겨두면 된다. 또는 url에 찍힌 상품 이미지를 답변에 이용해도 된다.

또한 네이버 오픈 백과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마케팅 툴이다. 이 오픈 백과도 지식in과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한다. 오픈 백과도 1차적으로 홍보/마케팅 툴이기 이전에 온라인 백과 사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용한 정보를 먼저 정리하고 예로 든다거나 출처 정보에 온라인 쇼핑몰을 소개하는 형태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고객들이 알지 못하게 온라인 쇼핑몰의 신뢰감을 높일 수 있으면서 쉽게 접근을 유도한다.




Comment +0


드디어 책상 스탠드 불빛이 반가운 계절이 왔다. 스탠드 불빛의 독특한 열기는 서늘한 밤공기가 밀려드는 때야 비로소 나의 즐거움이 된다. 어둠 속에 반쯤 묻힌 서가의 책들, 어지러진 팜플렛과 도록들, 읽다만 신문들, 그리고 요요마의 탱고가 흐른다.

추석이 지나고 광주에 잠시 들려, 몇 분의 작가들을 만났고, '포플레이'라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보는 린LP12 턴테이블. 아직까지 린LP12 턴테이블의 명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린LP12 턴테이블이 유명하게 된 것은 CD의 음질이 낫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사람들이 이게 LP 소리가 맞느냐고 반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리가 탁월하고 안정적이다. 나는 이 곳에서 찰스 밍거스를 오랜만에 들었다.

하지만 아직 린LP12 턴테이블은 호사스러움이리라. 그러나 나의 오래된 파이오니아 턴테이블도 이제 바꿀 때가 왔다. 뮤직홀 MMF 턴테이블을 구하고 싶은데, 어떻게 될련지.

좋은 작품을 만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행복을 지나 마음이 아프고 다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신기운의 '알람시계'(비디오영상, 4분 12초, 2006)은 의미심장하면서도 보편적인 메시지를 보는 이들에게 던진다.

실망스러운 광주비엔날레보다 미디어비엔날레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비엔날레에는 전시를 보러 온 꼬마 아이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만큼 신기하고 즐거운 작품들로 가득했다. 진지한 작품들 사이로 미디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일반 관람객들을 즐겁게 한 것이다.

역시 글이 씌여지지 않는다. 글을 써서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을 땐, 절대로 글이 씌여지지 않는 법이다. 마음만 무겁고 문장은 길을 잃은 미아처럼 갈팡질팡하면서 두려움에 떤다. 이 짧은 블로깅을 위해 거의 두 시간을 이러고 있다.

작년에도 가을밤이 있었을 텐데, 작년 가을밤 기억은 없고 지금 가을밤 기분만 알겠다. 이 밤 요요마가 적절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련가.


Comment +0


Latte E Miele를 듣는 아침, 이스탄불에서 사온 터키식 차를 마시며 글을 쓰려고 해보지만, 요즘 나는 아주 심하게 글쓰기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Passio Secundrum Mattheum(1972) - Calvario / Il Dono Della Vita 

Comment +6

  • wooyeons 2008.05.01 01:40 신고

    이 집 글 읽는 재미가 참 좋은데... 아유.. 섭섭해.

  • noi 2008.05.21 17:33 신고

    latte e miele라.. 젖와 꿀인가요.. 상당히 성서스럽군요.. 갑자기 홍차가 마시고 싶어졌다는.. ㅋㅋ

    • noi 2008.05.21 17:37 신고

      앗 그래서 터키식 차를 드시며 이 음악을 올리셨구나!! ^_^b

    • 성서에서 가지고 왔어요. 가사도 성서에 나온 내용이고요. 이 음악이 나온 게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쯤이었으니, 그 당시로는 대단히 혁신적이고 놀라운 음악이었어요.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엄청 좋아요. 한 동안 레코드판에 구멍이 날 정도로 들었으니깐요..

새로운 사적인 공간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새로운 ‘사적’ 공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속해 있는 커뮤니티나 블로그(blog)가 있는 웹사이트에 로그인을 반복한다. 인터넷 메신저는 늘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며 메일 프로그램은 수시로 열어 살펴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프라인에 있으면서 동시에 온라인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낯설고 기묘한 상태가 언제부터 익숙해지고 심지어는 온라인에 내 존재가 없으면 불안해지기까지 한 상황이 시작된 것일까.
 
 고백하건대, 그건 십 여 년 전 내가 피씨 통신을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물리적 실체 없는 공간 속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 곳을 친숙하고 익숙한 공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 공간을 대체하거나 오프라인 공간을 변혁시킬 새로운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몇 명의 이들을 만났고 만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오프라인 공간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학자는 이러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온라인 공간이 열린 공간을 지향하기 보다는 닫힌 공간을 만들기 쉽다고 지적한다. 자신과 비슷한 취미, 지적인 경향, 정치 성향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시작하며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채널들이 비슷한 경향의 사람들만을 모아 하나의 커뮤니티(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결국에는 닫힌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닫힌 공간이 훨씬 안정적이며 안락하고 사적인 친밀감 내지 유대감으로 가득차있는, 늘 일상에 쫓기는 오프라인 공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공간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열려있는 온라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실은 닫혀있고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은 않을까. 아마 우리는 온라인 속이 사적이고 친밀하며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익명의 타자들로 둘러싸여 있고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모든 가치가 계량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사적 공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꼭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이 꿈의 안락함으로 가득 찬 사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갔듯이.
 
 
 진실과 거짓의 문제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모든 것이 실은 거짓이고 거짓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슬플까? 아니면 안타까울까?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보다는 기쁘고 행복하다는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현실의 세계가 아닌 내가 바라는 어떤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 내가 사랑하지만, 날 사랑하지 않는 그녀가 날 사랑해주는 세계. 경제적 능력이라곤 제로에 가까운 내가 풍부한 경제적 능력으로 남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세계. 현실 세계의 진실들이 거짓으로 되고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 현실 세계에서는 거짓인 것들이 진실이 되는 것.
 
 영화 ‘매트릭스’(Matrix)는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다분히 교훈적으로 안락한 거짓 대신 힘든 진실을 택하는 등장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은 관객의 입장에선 시온의 세계가 진실인지, 매트릭스의 세계가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나누어져 있는 이 두 세계 모두 진실일 수도 있고 두 세계 모두 거짓일 수 있다. 도리어 객관적인 세계란 존재하지 않고 한 개인이 어떤 세계를 진실로 선택하느냐에 대한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두 세계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영화 ‘매트릭스’가 그러하듯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적 태도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에게 과거 진실이었던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인식되며 진실을 복사한 형태, 또는 그것을 변형한 형태들이 진실을 압도하여 결국에는 현재의 우리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실이 되는 어떤 세계가 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현대에 와서 때 아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희망하는 어떤 거짓이 진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매트릭스’나 장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던 이론이 새롭거나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우리를 사로잡았던 꿈과 환상에 대한 요구가 현대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셈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것이 거짓이었으면’하고 되뇌이는가. 실은 우리는 종종, 혹은 자주 진짜인 모든 것들이 가짜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온라인 공간이다. 나는 채팅하면서 나이를 속일 수 있고 내 소유의 대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라고 속일 수도 있으며 최근 심각한 실연의 상처를 겪어 누군가의 애정 어린 위로를 구한다는 글을 온라인 공간 어딘가에 남겨 누군가의 위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감행하기 힘든 종류의 행동을 온라인에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다. 익명의 공간 속에서 낯선 이의 대화가, 낯선 이의 게시물이 진실인지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믿게 되는 과정이 논리적인 과정이기 보다는 직관적인 느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종종 겪게 되는 차별적인 대우나 비슷한 종류의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그러한 일을 온라인 공간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꾸며내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라인 공간 속에서 업데이트 되는 내용들을 모두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도리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믿는 것이 어쩌면 더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보들레르(Baudelaire)는 19세기 파리 거리 한 복판을 거닐면서 고독한 산책자(fl?neur)의 이미지를 발견하고는 경악하고 흥분했다. “새가 공장에서 날아가고 물고기가 물 속에서 노는 것처럼 그의 활동 영역은 대중이다. 그의 정열, 그리고 그의 직업은 대중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산책자, 정열적인 관찰자에게 있어서 숫자와 물결치는 것, 움직임, 그리고 사라지는 것과 무한 속에서 자신이 거주할 집을 세우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자신의 집 밖에 있으면서 어디서든지 자신의 집처럼 느끼는 것,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계로부터 숨어있는 것, (… …) 관찰자는 도처에서 자신의 익명을 즐기는 왕자이다.”1) 그리고 “현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으로 예술의 반을 이루고 나머지 반은 영원한 것, 불변의 것이다.”2)라고 말한다. 19세기 중엽의 보들레르는 익명의 대중들에 둘러싸인 한 개인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열광하고 있지만, 실은 그 거리 속에서 나를 아는 이라곤 한 명도 없는, 그리고 내가 아는 이도 한 명도 없는, 나를 제외한, 심지어 나까지도 포함한 거리의, 도시의 모든 것이 풍경인 어떤 비극적인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21세기 서울의 종로나 명동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 우리가 종종 ‘나는 혼자구나’라는 쓸쓸함이나 외로움 같은 것을 느낄 때, 19세기의 보들레르는 이 느낌을 새롭다고 느끼며 흥분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리차드 세네트(Richard Sennet)은 『공적 인간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에서 이러한 보들레르의 경험을 사회학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해낸다. 그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변화, 그리고 공적 공간이 과거의 위상과 권위를 잃어버리자 사적 공간 속으로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보들레르에게 19세기 파리의 거리는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었지만, 20세기와 21세기의 개인에게 대도시의 거리란 외롭고 쓸쓸한 곳이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거나 두 공간을 지배하는 질서가 비슷했던 시대는 근대(17세기) 이전이었다. 17세기 이전에도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이나 분열이 나타났던 시기-대표적으로는 로마 후기-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갈등이나 분열을 사라졌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질서가 비슷할 경우, 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은 특별한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한 개인의 꿈은 그 시대나 그 나라가 원하는 꿈과 비슷하거나 그 공간 속에서 용인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일 가능성이 높고 한 가족, 가문의 단위가 확대된 것이 한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틀리다. 이를 본격적인 탈주술화의 과정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중세의 세계관이 뒤로 물러나고 계량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인 시대가 된다. 이 때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중세적인 것들은 그 위력을 서서히 잃어나가고 가치를 상실한다. 아마 근대 초기에 살았던 지식인들은 이 낯선 변화에 대해 열광하고 흥분하였을 것이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났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떤 개인이 근대 이후의 계량적 세계관과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공적 공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한 가족, 한 가문 내에서 통용되던 전통적인 질서가 공적 공간 속에서 통용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장(Market)이다. 시장 속에서의 모든 것들은 계량화되어 거래된다. 근대 이전의 추상적인 가치들이 근대 이후에는 계량화되어 언급될 수 있다는 신념이 급속도로 확대된다. 이것이 바로 서양 인문학에서의 ‘근대’(Modern)이다. 근대 초기에 이러한 태도는 혁명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내었으며 17세기의 바로크적 자신감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갈수록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능동적 참여자이기 보다는 수동적 참여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시장의 질서는 개인들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시장의 경우에서처럼 계량화된 가치들이 통용되는 근대의 공적 공간은 개인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종류의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19세기 자본주의가 준 치명적인 쇼크로 인해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승자도 패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 질서의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어떤 방법이라도 써서라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공생활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다스리려던 의지는 점차적으로 무너져갔으며, 사람들은 공생활의 질서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데 더욱 관심을 쏟았다. 가정은 이러한 보호막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를 통하여 가정은 특수한 사적 생활 영역의 중심으로서의 성격을 점점 잃어갔으며 대신 공생활 영역보다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독자적인 세계로서의 이상적인 도피처로 점점 인식되어져 갔다.”3)
 
 19세기에 본격화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은 20세기에 들어서는 더욱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공과 사를 나누어 생각하려는 태도’도 20세기에 들어서서 분명해진 태도이다. 하지만 사적 공간에서의 실수가 공적 공간으로 일어질 수 있거나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점에서 공과 사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 것인가를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오래 전 루소(J.J. Rousseau)가 “가족이라는 사회도 결국은 약속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을 때4), 근대 초기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공적 공간에 대한 이해를 사적 공간까지로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개인들은 공적 공간과는 무관하고 비밀스러운 사적 공간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공적 공간 속에서의 개인들의 삶이란 꼭 무대에서의 배우처럼, 일정한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은 채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은 채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나가듯이 공적 공간 속에서 우리는 배우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보들레르는 산책자의 존재를 발견해내며 열광하지만, 이 열광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보들레르 이후의 예술가들은 산책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분명히 하지만, 외부 세계를 거저 관찰할 뿐, 더 이상 의미나 가치를 구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란 감각 지각에 비친 영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의 작품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연인이나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익명의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공적 공간이다. 이러한 때에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는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공적 공간 속의 개인들의 삶을 드러내는데, 「가면 있는 자화상」에서 예술가의 얼굴만 보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가면을 쓴 형태로 표현하여 공적 공간 속에서의 개인들이란 배우들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예술가인 자신만은 진실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혀지지만, 그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는 이러한 의지의 표현보다는 우리의 삶이 가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절망적 세계 인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앙소르처럼 대부분 현대 예술가들은 외부 세계 속에서 더 이상 삶의 가치나 의미를 구할 수 없다는 니힐리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20세기 추상 예술을 낳은 추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현대의 예술가들이 심각할 정도의 주관주의로 방향을 틀었을 때, 외부 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고 해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이 봉합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갈등은 심해지고 공적 공간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가 저녁 9시에 들어오는 평범한 회사원의 삶은 그 공간의 확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20세기 전반기의 많은 예술가들이 경고하였던 종류의 삶이 20세기 후반에 일반적인 삶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공적 공간을 지배하는 계량적 가치의 태도, 즉 도구적 이성의 위력은 이제 사적 공간마저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개인적 삶이란 아무런 존재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의, 나에게만 고유한 어떤 종류의 인생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나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 절대로 수로 표기될 수 없는 가치를 공적 공간 속에서의 사람들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사적 공간에 있는 사람들마저 공적 공간에서 통용되는 가치 기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했을 때, 한 사소한 개인이 갈 곳이라곤 아무 곳도 없다.
 
 루이지 피란델로는『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라는 소설 속에서 ‘모스카르다’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 세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어느 날 ‘모스카르다’는 자신의 신체 일부분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너무 사소해서 소설은 희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이어지고 결국은 주인공 ‘모스카르다’는 비극적 파국을 맞이한다. 왜냐면 그는 하나의 단일한 존재라기보다는 소설의 제목처럼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마 17세기의 데카르트(Descartes)라면 어처구니 없어했을 이 소설은 현대인들에게 데카르트의 세계가 얼마나 소력이 없는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도대체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셰리 터클은 온라인 공간 속의 삶을 연구하면서 한 개인의 정체성은 하나이기 보다는 다수에 가깝다고 말한다. “정체성이란 ‘다양한 역할들의 집합’이라는 관념이 일반화됐다. 역할들은 서로 섞이고 짝을 이룬다. 때로는 역할별로 터져 나오는 다양한 요구 사항을 조정할 필요가 생기곤 한다. 이런 새로운 정체성 경험을 이론화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나서고 있다. 로버트 제이 립튼은 ‘다중 역할’이라는 개념을 썼고, 케네스 저건은 ‘포화상태의 자아’라는 말로 설명했다. 에밀리 마틴은 ‘유여한 자아의 개념이야말로 각종 유기체와 개인, 조직이 가져야 할 현대적 덕목’이라는 주장을 폈다.”5) 그리고 그녀는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단일한 특성을 이루는 것보다 다양한 특성이 서로 공존하는 정체성을 긍정한다.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그러한 현상을 적절하게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이론들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역사 속에서 단일한 자아 정체성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 듯싶다. 우리는 이미 공적 공간, 사적 공간 가릴 것 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러 역할들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가령 한 아이의 아버지이면서 한 여자의 남자친구, 그리고 어느 부부의 아들이면서 회사에서는 영업 사원, 이런 식으로 이미 삶 속에서 한 개인의 역할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역할마다 그가 보여주어야 하는 행동 양식도 틀리다. 온라인 공간 속의 정체성의 문제란, 실은 이미 온라인 바깥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이다. 아니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논의되는 정체성의 문제보다 오프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문제가 더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그 온라인 공간을 벗어났을 경우에는 대체로 잊혀지기 일쑤이지만, 오프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우리의 직접적인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온라인에서 누구이고 오프라인에서는 누구인가.
 
 자기 진실성(authenticity)
 
 나에게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고 좋은 일일까. 도리어 나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어느 누가 보아도 나를 동일한 성격을 가진 존재로 파악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가족 내의 내 모습과 직장 내에서의 내 모습이 판이하게 다를 때, 과연 나는 누구일까.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갈등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과 겹쳐져 사적 공간 속의 자아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내가 나라고 믿는 어떤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그러한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 도구적 이성의 태도로 재단되지 않으며 공적 공간과는 무관한 어떤 사적인 공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적인 공간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던 가족이나 친구의 관계를 지나 더욱 폐쇄적인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공적 공간의 질서가 사적 공간까지 침범할 때, 공적 공간의 역할이 더욱 강화될수록 개인의 사적 공간은 더욱 비밀스러워지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은 『성실성과 진실성』(Sincerity and Authenticity)를 통해, 성실성은 사적 생활 속에서 느끼진 것을 공적 생활 속에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확실성이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느끼려는 시도를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현대인은 끊임없는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이 믿음과 진실의 보편적인 척도라고 생각하게 되며 언제나 자기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노출을 감행하게 된다. 즉 현대인들은 다양한 정체성의 집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 대신 사람들은 늘 단일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고자 하며 이를 위해 자기 노출의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라는 트릴링의 견해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지배적인 윤리적 경향이 되었다. 꼭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감동하는 나르시스처럼, 이질적인 다양한 것들의 복합체로서의 자아가 아닌 온전히 하나의 자아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꿈은 끊임없는 자기 노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트릴링의 견해대로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자기 노출은 이러한 자기 진실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필사적인 노력이다. 공적 공간 속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떠나, 도리어 그 역할 수행의 이면에 숨겨진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서 온전한 자아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적 공간 속에서 위축당하고 있는 사적 공간의 영역을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개인적인 일상, 비밀스러운 생각까지 노출시킴으로써 개인들은 사적 공간을 지키고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온라인 속에서만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며 그 이외의 공간 속에서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게 한다든지, 또는 도리어 온라인 공간 속에서마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의 소설 『질투』는 삶에서 상처 입은 한 개인이 어떻게 소설 속에서 사라지는가를 양식적으로 표현해낸다. 알랭 로브그리예는 소설 속에서 말하는 주인공 화자를 지워버리고 문장을 구성해낸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만 있고 생각되어지는 것만 있을 뿐, 그 속에 화자는 없다. 이러한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이라면, 온라인 공간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트릴링의 격언은 실현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왜냐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패, 잘못, 무능력까지도 가져가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한 달 동안 우리가 어느 누군가와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몇 시간쯤 될까. 온라인 공간이 현대인에게 줄 수 있는 혜택 중에 이것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누군가에게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건네는 것.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온라인 공간을 마련했다고 해서 영원히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의 사적인 글쓰기는 확장된 공적 공간 속에서 지친 현대인들의 적극적인 ‘자기 노출’이면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열망의 반영이다.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끼워맞추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여러 개로 나누어진 역할들 중에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실존적 노력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열망과 노력이 치열할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어떤 이는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어떤 사람이 그녀의 직업, 사는 곳, 나이, 모든 것을 속였다는 것에 분노했고 도리어 그녀가 자신의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슬퍼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도 온라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 상심한 탓일까.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면 좋을 텐데, 나의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바라지만, 알아준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를 알아주기 바라듯이 타인도 나에게 그러한 몸짓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고 그 중에서 온라인 속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이해받지 못하자, 대저택의 침실로, 욕실로, 또는 저 꿈 속 세계로 도망쳤다. 이것이 로코코의 세계다. 나를 알아주지 못하자, 나를 알아주는 어떤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내가 오해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남을 속이기 위한 양식적인 행동과 말투와 적절한 자기 노출을 병행한다. 가끔 직장 생활에서만 나를 알던 어떤 이에게 내 홈페이지나 내 블로그를 보여주면 놀라곤 한다. 적절한 공적 공간 속에서의 역할 수행과 적절한 자기 노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지고 사적 공간 속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공적 공간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선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다. 나의 경우엔 공적 공간 속에서 내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존에의 요구와 그러면서도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열망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상황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본 바, 그마나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이게 결론이라면 너무 허망하지만,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을 봉합할 힘이 우리에게 없고 도구적 이성을 능가할 힘도, 생각하는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알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것만 알 뿐, 내 감각지각에 비추어진 외부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고작 내 자신에나마 진실하고자 노력할 뿐.?
 
 
 
 
 
 
 
 ---------------------------------------------------------------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를 위한 가이드
 
 난데없이 ‘가이드’가 튀어나와 어색할 지도 모르겠다. 온라인 공간 속에서 개인적 글쓰기를 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잡지 편집진들의 의견을 존중하였고 온라인 공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개인적 글쓰기가 자신의 심리 상태나 공적인 삶을 수행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이다.
 
 1. 글쓰기를 위한 준비
 개인적인 글을 쓰기 위해 개인정보를 노출시켜야만 한다는 건 다소 불합리해보이지만,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갈등은 온라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즉 웹사이트 회원 가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악의적인 누군가에 의해 개인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온라인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는 대부분의 포탈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 블로그 사이트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사이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면, 포탈 사이트의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따로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리스트를 제시하지는 않겠다. 왜냐면 지금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은 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2. 개인적 글쓰기 시작
 
 글쓰기에 대해서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다. 글짓기 시간에 영 점을 받았다고 해서, 글이라곤 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이 폭력적인 시대 속에서 글쓰기가 자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성공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온라인 공간 속에서 글을 쓰는 두 세 가지의 방법을 설명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된다. 곧바로 자신의 온라인 공간을 개인적 생각이나 관심사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2.1. 감정적인 일기 쓰기
 
 모 커뮤니티 사이트 미니홈피의 모든 게시판을 폐쇄하고 다이어리 기능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00자 이내의 일기를 종종 남긴다. 가령 이런 식이다. ‘피곤했다. 그래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슬퍼졌다.’ 이렇게 하루의 특정한 시간대에 내가 움직인 행동들만 모아 서술해보는 것이다. ‘OO역에 갔다. K를 만났다. 그와 두 시간 동안 쓸데없는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왔다. 잠을 잤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마지막에 ‘꿈 속에서 K를 만나 두들겨 팼다’라든가 ‘악몽을 꾸었다’라는 문장을 하나 더 첨가하면 더욱 좋겠다.?
 
 길게 적는 건 좋지 않다. 길게 적으려고 노력할수록 글쓰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길게 적으려고 할 경우,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개인적 글쓰기의 재미를 느껴보지도 못한 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짧게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시시콜콜한 모든 이야기를 적으려고 하지 말고 특징적인 몇 개의 행동들만 문장으로 옮기면 된다. 그 뿐이다.
 ?
 2.2. 디지털 사진을 올리면서 글쓰기
 디지털 카메라와 핸드폰 카메라로 인해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올리는 것이 매우 쉬워졌다. 나는 사진을 올리면서 사진 밑에 몇 문장을 붙인다. 어디서 찍은 사진임을 알리는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적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년 여름 사무실에서 저녁 늦게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외롭다’는 표현을 함께 올렸다. 그러자 사진이 외로운 사진이 되어버렸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때 기분을 몇 문장으로 적어 올리는 게 낫다. 이쁜 여자 연애인 스틸 사진을 올리고 ‘그녀는 왜 이렇게 못 생겼을까’라고 한 줄 달아놓으면 별 뜻 없이 쓰인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2.3. 특정 소재를 통한 글쓰기
 
 친구들과 함께 간 술집, 소개로 만난 이성, 오랜만에 읽은 책, 또는 선물 받은 음반에 대한 글을 적는 경우가 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길게 적는 건 육체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짧게 적는 것이 좋다. 이런 경우는 있을 것이다. 가령 1분 동안 겪은 일을 적었는데, 원고지 분량으로 스무 장이 넘고 한 시간 동안 겪은 일인데, 원고지 한 장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소재나 어떤 사연마다 그것에 어울리는 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또 이 길이는 사람마다 틀리다. 억지로 이 길이를 조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짓이다. 아무렇게나 적어도 상관없다. 단지 느낀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책일 경우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좋다. 어떤 이의 경우에는 수십 개의 문장을 올리기도 하는데, 네 다섯 개만 올리면 된다. 한 번도 독후감을 제대로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 독후감을 쓰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다. 차라리 재미있는 책을 읽고 그 책 속의 문장 몇 개를 적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익숙해지면 옮긴 문장 밑에 자신의 의견을 한 줄 정도로 정리하면 된다. 다른 소재의 경우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3. 여행을 떠나기
 
 컴퓨터 인터넷 브라우저 즐겨찾기에는 개인 폴더가 있고 이 속에서 개인홈페이지, 블로그 리스트를 따로 관리한다. 여행 떠나기란 다른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이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방문해 타인의 세계를 훔쳐보는 것이다. 잘 찾아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타인에게도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알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또한 블로그에는 트랙백(Trackback) 기능이 있어 타인의 블로그에 올려진 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릴 수도 있다. 여행을 떠나 만난 어떤 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이다.
 
 이런 식으로 사소하지만, 천천히 온라인 공간 속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시작하였다. 살아가다가 적절할 때에 개인적 글쓰기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주석.

1) 보들레르, 「현대적 삶의 화가」, 박기현 옮김, 계간『세계의 문학』2002년 봄, 민음사 pp.31-32
2) 위의 책, p.35
3) 리차드 세네트, 『The Fall of Public Man』(번역제목: <현대의 침몰>), 김영일 옮김, 일월서각, p.41
4) 장 자끄 루소, 『사회계약론』,이태일(외) 옮김, 범우사, p.16
5) 셰리 터클, 『스크린 위의 삶』, 최유식 옮김, 민음사, pp.271-272
 
 

* 이 글은 무크지 '북페뎀'에 실렸던 글입니다.

Comment +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츠 폰 베르더/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 (지음), 김동희(옮김), <<즐거운 글쓰기>>, 들녘, 2004년 초판 3쇄
스티븐 킹(지음), 김진준(옮김),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2004년 10쇄(2002년 초판)




책을 읽을 땐 반드시 옆에 노트를 두고 필요한 문장을 적는다. 책을 읽고 난 뒤에는 꼭 서평을 쓴다. 특히 서평을 쓰지 않을 땐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읽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어 매우 불편하다. 가끔 서평을 쓸 수 없는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피터 버크의 <<이미지의 문화사>>(심산)같은 책은 매우 좋은 책이며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지만, 서평을 쓴다는 것이 꽤 부담스러운 책이다. 교과서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에. 실은 쟈크 르 고프의 <<서양 중세 문명>>(문학과 지성사)같은 책도 이와 비슷하다. 이런 유의 책에 대한 서평은 쓰지 않거나 쓴다 하더라도 ‘무척 좋은 책이다’정도로 끝난다.

<<즐거운 글쓰기>>는 몇 년 전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구입한 책이다. 구입하고 난 뒤, 후회하긴 했지만. 글쓰기가 가지는 치료 효과에 대한 설명이 있는 듯해 구했지만, 그 설명은 별로 없고 글쓰기 아이디어만 가득한 책이라 몇 페이지 읽고 서가 구석에 꽂아두었다. 그 때 원고 청탁 때문에 들어간 책값만 십 만원이 넘는다. 무리해서 원서도 샀다면 확실히 적자였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대체로 원고 청탁 같은 걸 받으면 고료보다 책값이 더 들어간다. 잡지 같은 곳에 실리는 글은 본질적인 내용을 시의 적절한 그릇에 담아내야한다. 하지만 시의 적절하다는 단어는 쉬울지 모르겠지만, 이를 글로 표현하는 건 다소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때 알게 된 것이지만 잡지에 글을 실을 땐, 편집자에게 반드시 이야기해할 것이다. 글의 성격, 주제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볼 것. 그래야만 잡지의 방향과 맞는 글을 쓸 수 없거나 쓰기 싫은 종류의 글임을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을 편집하지 말 것. 이는 글의 품질에 대해서 저자가 책임진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그 편집자의 행동이 국내에서는 매우 당연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편집할 수밖에 없는 국내 사정도 알게 되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정말 제대로 된 필자가 드물다는 건.

<<즐거운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한 심신의 안정, 사고의 유연성, 정신 치료 등을 위한 교과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반 독자가 사서 읽기에는 적당치 않으며 학교나 병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책이다. 아, 나도 제대로 된 글이란 걸 쓰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은 적당치 않다. 그런 경우엔 <<유혹하는 글쓰기>>가 좋겠다.

가끔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비결은 없다. 운동선수가 매일 운동하듯이 글쓰기도 그렇게 매일 하면 된다. 스티븐 킹도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고 주문한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대단하거나 놀라운 비결이 숨어있지 않았다는 것이 나에겐 놀랍게 느껴졌다. 대중 소설을 쓰는 스티븐 킹마저 글의 기본을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장차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유혹하는 글쓰기>>는 추천할 만하지만, 너무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만 명심하자. 그리고 실은 스티븐 킹의 창작론보다는 그의 고향, 가족,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더 재미있다.

Comment +0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경쟁 우위의 종말The End of Competitive Advantage, 리타 맥그레이스

경쟁 우위의 종말 The End of Competitive Advantage 리타 군터 맥그레이스(지음), 정선양, 김경희(옮김), 경문사 "소니는 스스로 경쟁우위의 함정에.....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지음), 강주헌(옮김), 아르테, 2015 누구나 자신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야만적인 것.....

요즘 근황과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안경을 바꿔야 할 시기가 지났다. 나를,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신경쓰이게 한다. 글자가 흐릿해지는 만큼 새 책이 쌓이고 잠이 줄어드는 .....

반듯이 누워

반듯이 누워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얇게 흔들리는 콘크리트 건물의 건조함에 묻혀 아주 짧게 내 삶을 되새기며 슬퍼한다. 이름 모를 바람이 들어와 잠시 내 몸 위에 살짝 앉았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장영준(옮김), 그린비 노엄 촘스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지음), 권진아(옮김), 마음산책 헤밍웨이가 너무 유명했던 탓에, 내가 그를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이것이 세계문학전집의 폐해다. 헤밍웨이의 소설들.....

지식인의 표상, 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의 표상, 에드워드 사이드
유현경, <은주>
비 오는 날
데이비드 밴 David Vann 인터뷰 중에서 (Axt 2017.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