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23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미셸 포르트(지음), 신유진(옮김), 1984북스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더듬어 보니 그녀의 소설은 딱 한 권 읽었다. 더 있을 듯한데, 기록된 것은 뿐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내 평가도 평범해서 금세 잊혀진 소설이었다. 그 당시 읽었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투르니에와 비교한다면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소설은 아니 에르노에게 있어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린 작품이었음을 이 인터뷰집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글이에요. 글은 하나의 장소이죠. 비물질적인 장소. 제가 상상의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과 현실의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피방식이에요. 다른 곳에 ..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Le petit livre de la subversion hors de soupcon)에드몽 자베스Edmond Jabes(지음), 최성웅(옮김), 읻다 글은 무엇이고 책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의 시작은 어디이며 그 끝은 언제일까. 이 형이상학적 질문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끌어당기지만, 우리는 금세 그 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어쩌면 포기일지도, 혹은 도망이거나, 실질적인 결론 없는 무의미에 대한 경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드몽 자베스에게서 이 질문들은 글쓰기의 원천이며 삶의 의지이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향기다.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죽게 되는 미완 속에 우리를 내버려둔다. 우리에게 남은 공백은, 무언가를 쏟아야 할 곳이 아닌 견뎌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자..

비오는 토요일의 근황, 단상, 잡담

2019년 봄부터 2020년 2월까지 일 외에 다른 것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10억원이 넘어가는 프로젝트의 PM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Agile 방법론으로 다수의 소규모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시켜야하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책 읽기나 글 쓰기가 예전만 못했다. 다행(?)히 다시 연장된 프로젝트에 괜찮은 멤버들도 다시 셋팅할 수 있었기 망정이지, 계속 그 생활이 이어질 뻔했다. 그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시 IT 영업과 컨설팅, 제안서 작성과 발표의 업무로 돌아왔지만, 역시 이 업무들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도 들고 대단한 미래가 보장되는 일상을 누리는 것도 아닌 탓에, 이런저런 준비도 같이 병행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코로나 시대, 외출이 부자연스러운 지금, 간만에 내리는 비소리를..

주제, 강유원

주제 - 강유원 서평집강유원(지음), 뿌리와 이파리 이 책은 2005년 겨울에 나왔으니, 이 땐 나도 적절한 시간을 책 읽기와 글쓰기에 투자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행동이나 태도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으나,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저 빈둥거릴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이 끝났던 무렵니다. 사랑이랄까, 미래랄까, 꿈이랄까. 그리고 2020년에, 2005년, 혹은 2006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실은 다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부는 기억 나지만,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저 때가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14년이 지났다. 그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나도 변했..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슬아(지음), 헤엄, 2018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추천했다. 나와는 참 멀리 있는, 그러나 어쩌면 나와 비슷한 꿈을 꾸는, 그러면서 당돌하고도 비현실적인 도전 , 한 달에 스무편의 수필, 월 구독료 만원, 이메일로 배달되었던 , 우리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접근이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독자를 모으며 급기야 책을 내어, 여기저기서 찬사를 받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쉽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슬아는 스스로 자신을, 자신의 친구들을, 그리고 가족들을 드러내며, 천연덕스럽게 글을 쓴다. 그렇다고 일본의 사소설적인, 그런 게 아니다. 일기도 아니다. 수필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이야기다.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같기도 하고 이슬아만의 렌즈 - 기막히게 매력..

최근

1. 최근 블로그 상에서 바로 글을 써서 올린다. 그랬더니, 글이 엉망이다. 최근 올린 몇 편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읽어보니, 문장의 호흡은 끊어지고 단어들이 사라지고 불필요한 반복과 매끄럽지 못한 형용어들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몇 번의 프린트와 펜으로 줄을 긋고 새로 쓰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끼인 세대인 셈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끼인 세대.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지만, 읽기는 무조건 종이로만 읽어야 하는. 그래서 최근 올렸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쓰고 고쳐 새로 올릴 계획이다. 얼마나 좋아질 진 모르겠지만. 2. 헤밍웨이의 를 읽고 있다. 무척 좋다. 번역된 문장들이 가지는 태도가 마음에 드는데, 원문은 얼마나 더 좋을까. 영어 공부를 열심해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된 셰익스피..

얼음의 책, 한유주

얼음의 책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렇다고 긴 문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호흡은 한결같이 짧고 반복적이며, 작가 한효주의 숨소리가 문장들에 어김없이 들어가거나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던 '있다'와 '없다' 사이 어디쯤 자리잡고 앉아있었다. 그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는 이 소설집을 읽는다. 그리고 읽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지나, 작년을 지나 올해 봄까지. 그 사이 아이는 자라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자기 주장을 펼쳤고,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이가 상처 입으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늙어가는 우리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 혼자 웅크리고 말을 잃어버..

(회사에서의) 글쓰기의 중요성

회사에 신입이든 경력이든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1) 회사는 당신에게 비전이나 동기를 주지 않습니다. 비전이나 동기는 자기 스스로 만들고 이를 이루기 위해 회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하기 바랍니다. 2) 글쓰기는 업무 능력의 모든 것입니다. 이메일도 글쓰기의 연장이고, 보고서, 회의록, 제안서, 모든 것들이 글쓰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맞춤법은 기본이요 문장은 깔끔해야 합니다. 3) 요약, 정리는 글쓰기의 핵심입니다. 잘못된 의사결정의 70%가 잘못된 보고서에서 나온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요약, 정리의 시작은 제대로 들었는가, 제대로 읽었는가, 제대로 대화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잘 듣습니까? 잘 읽을 수 있습니까?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나요? (그러면서 읽기, 듣기의 중요성을 강..

데리다Derrida: 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 H.키멜레

데리다: 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 Jacques Derrida zur EinführungH. 키멜레(Heinz Kimmerle) 지음, 박상선 옮김, 서광사, 1996 데리다에 대해선 대학 시절부터 많은 논문과 책을 읽었지만, 늘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지만, 결론은 같다. 그의 방법론 - 미국에선 흔히 '해체'라고 부르는 - 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늘 남는다. 물론 "차연의 철학"이라는 명칭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명칭은 - 아도르노에 의해 발전된 동일화하는 사유(identifizierendes Denken)에 대한 비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차연[다름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일화시키지 않음, 즉 다른 것 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