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퇴근길, 우연히 마주친, 새로 생긴 동네 더치 커피 전문점, 스테이지 나인. 

그리고 잠깐 동안의 커피 여행. 

짧고 굵은 목넘김, 낮고 은은한 향기, 

초봄 햇살이 빌딩 사이로 사라지고 그 틈새를 물들이는 어둠.  

출렁이는 어두움이 입술에 닿을 때, 살짝 미소를 짓는다. 

아, 나는 역시 예가체프구나. 

우아하고 깊은 시원함. 시큼함. 쓸쓸함. 허전함. 

지난 청춘 깊이 숨겨져 있던, 늙어가는 피부 아래 잠겨있던, 그 기억이 

무심한 거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함께 다가오는 공포여. 내 삶, 미래의 두려움이여. 

쫓기듯 뭉게, 뭉게, 뭉게

위로, 위로, 올라가는 내 삶의 진정성이여,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들뜬 모험이여, 

얼마 남지 않은 내 영혼의 불꽃을 앗아갔던 사랑이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8월 태양은 내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았다. 투명한 대기는 흐릿한 내 미래와 대비해 더욱 무겁게만 느껴졌다. 동대구역은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동대구역은 공사 중이었다. 대학 시절 몇 번 대구엘 갔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내 소심함 탓이었다. 나는 배려한다는 핑계로 내 소심함을 감추었다. 그래서 나 말고 당신이 적극적이길 바랬다. 어긋나는 건 예정되어있었고 나는 일반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 


일 때문에 내려갔다. 일이라는 것도 임시적인 것이라, 적극성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거나 세월 속에 자신의 습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건 나를 오래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만 사는 환경이 달라졌을 뿐. 그래서 내가 적극성을 띄자 당신은 뒷걸음질 치며 떠났다. 



지방 도시의 매력은 낮은 스카이라인이다. 빌딩 숲이 드물고 저 먼 하늘까지 보였다. 유럽 도시는 다들 몇 백년 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고 있는가), 여기는 아니다. 백년 넘어가는 집을 보기 드물다. 내가 살던 그 도시에선 19세기말 20세기초 지어진 개항기의 일식 건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다다미집도 있었는데 ... 하긴 그 전에 지어졌을 법한 초가집이나 기와집들도 다 사라졌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흘러나왔고 사투리를 쓰는 여자가 새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서울 생활에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대구에 알던 사람이 있었던가. 지금 아는 사람이 대구에 살고 있을까. 내가 알았던 그 때 그 사람은 지금 그 사람과 동일한 사람일까. 세월은 균열을 만들고 기억을 어긋나게 한다. 내 기억과 당신의 기억은 다르다. 내가 기억하는 당신과 당신이 기억하는 당신이 다르고, 당신이 알아주었으면 하던 나와 내가 알아주었으면 했던 당신은 다르다. 



조심스럽게 대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른다. 그러면 집 현관이 열리고 마당으로 나오는 인기척과 함께 '누구세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골목길을 질주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대낮 동네를 시끄럽게 한다. 그 때 동네는 아이들의 소리로 요란했다. 지금은 조용하기만 하지만. 아이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대문만 남았다. 무수히 작은 손가락들이 거쳐갔을 초인종은 이미 고장났고 철제 대문은 녹슬었다. 



아무도 상처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무심해진 걸 '쿨'한 걸로 오해했던 90년대를 지나, 근래에 들어선 우리 모두 상처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젠 너도 상처 입었고 나도 상처 입었으니, 그냥 없는 척 살자고 한다. 상처 입지 않은, 입을 일 없는 그들은 우리와 다르고 다른 곳에 살고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른 차를 타고 다른 곳에 놀러가니, 그들은 상처 입은 우리를 보고 너희들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들 중 일부는 그 때 그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 후 골목 어딘가로 사라졌을 텐데. 


서울의 더위와 대구의 더위는 다른데, 그건 대기 때문이다. 자동차 때문이기도 하고, 빌딩의 수 때문이기도 하고, 당신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은 그 때 대구에서 무엇을 했던가. 그 때 더위는 참 지독했는데. 



골목은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기억은 골목을 가지고 있다. 골목길 끝은 늘 이야기로 넘쳐났고 쓸쓸했지만 따뜻했다. 아니 지나간 세월로 인해 이제 온기를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 


다시 대구에 내려갈 예정이다. 그리곤 다시 내려갈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맡은 일이 끝날 테니. 대구에서 술 한 잔 하고 올라오면 좋을 텐데, 그럴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구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iam1969 2016.09.21 20:06 신고

    오래된 대구 중구 서야동 토박이라 이 골목길을 단박에 알아보고 아는척 해봅니다. 사람이 빠져나가고 냄새만 남아 있는 그런 저안 골목이라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 네. 중구 서야동입니다. ^^ 지방 도시의 골목은 다 그럴 것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가끔 어렸을 때 뛰어놀던 그 골목길들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골목길이 이젠 많이 남아있지 않더라고요.




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

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동일한 테마를 가진 여행의 기록(기억),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되는 이유이면서 제발트가 가지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떠나는 것, 낯선 곳(혹은 잊혀졌던 곳)에서 머무는 것, 그 곳에서 자고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며 얇고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깊숙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해내는 것, 기록하는 것, ... 소설은 이렇게 구성되어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흰 염주비둘기 한 쌍을 지켜보았다. 비둘기들은 여러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날개짓 몇 번으로 나무 꼭대기 높은 가지로 위로 급격하게 떠올랐다가, 짧고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 동안 고요히 창공에 머문 다음 다시 앞으로 쏟아질 듯한 자세로 하강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구르륵 소리를 냈고, 그 중 몇 그루는 이 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키프로스 나무들 주변에서 날개를 고정시킨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70쪽) 


나로선 이 여행들(의 기록)을 따라가기엔 참 힘들었다. 서술은 빽빽하고 무거우며, 한 번 표현된 감정은 곧바로 사물이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독자의 시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따라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을 읽었다 싶지만, 고작 몇 페이지를 지났을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감정을 서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딱딱하고 즉물적이다. 독자는 제발트의 서술을 따라가지만, 그 곳으로 감정이입되어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늙어간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제발트식 여행(의 기록)이란 그런 걸까. 낯선 나와 마주하거나 잊고 있던 나를, 혹은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억들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타자화, 사물화하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지워나가는 걸까, 그리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걸까.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쪽)


우리는 외부를 끝내 알 수 없다. 실은 내부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은 텅 비었고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다. 신념은 조각났고 소설은 의미 찾기를 그만 두었다. 고작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제발트의 문장이 갖는 독일어의 밀도는, 역자로서의 경험이 참으로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치밀한 종류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텍스처texture의 성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52쪽) 


배수아의 의견대로, 너무 빽빽하고 무거워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제발디언'은, 글쎄다.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는 매우 사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일반 독자가 읽기엔 어렵고 재미없고 문장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할까. 마치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하긴 나도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피사넬로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딕 양식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15세기 초반에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작품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일부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을 하다니... 


St. George Liberating the Princess of Trebizond

Pisanello (1395 - 1455), fresco, 223 × 620 cm (87.8 × 244.1 in)

from 1436 until 1438

Church of Saint Anastasia (독일어 - Pellegrini-Kapelle)  


과감하게 읽으라는 권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제발트가 살아있었다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만한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가끔 한국 문학판에 대해 아쉬운 건 번역된(혹은 번역되지 않더라도) 동시대 외국 문학이 어떻게 한국 작가들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초기 작품들을 읽고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오에 겐자부로가 십 수년 전 하루키를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고 말했듯이, 그녀의 최근 작들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제발트를 읽고 흔들렸다면 말이다. 



영어 번역판 표지



* 제발트의 다른 소설. 

2016/05/07 - [책들의 우주/문학]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아우스터리츠>>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가족의 상처를, 현대의 비극을 다시 꺼내어 보듬고 어루만진다. 대화는 자주 끊어지지만, 기억은 이어지고 소설은 챕터도 없이 그냥 하나다. 시간은 끊김 없고 끊어져 있던 기억들도 그것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듯, 소설은 허구와 사실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아직도 2차 대전의 상처를 드러내며,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아가는 <<아우스터리츠>>를 보며, 요즘 한국 문학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국의 이창래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작가들만 무관심한 듯 싶기도 하고...


<<아우스터리츠>>의 명성은 이 작품을 향하고 있는 문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작법에서부터 전혀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며, 현대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1)이라고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실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중요한 사실들과 이를 연결하여 소설의 중심 뼈대(내러티브)를 만들고 그 뼈대는 다시 사진들, (건축)공간에 대한 서술, 인물들에 대한 탐구와 인터뷰 등으로 형체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법은 소설 감상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전쟁에의 상처, 가족의 비극, 그리고 쓸쓸한 회상 속으로 빨려들게 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완성도를 지닌다.

 


Bigsby(*) suggests that it was out of frustration with the strictures of academic publication that Sebald turned to creative writing (a vague and ungainly term that, by default, winds up being the most accurate generic description of his work). "He'd originally taught German literature," says Bigsby, "and had published the kind of books that academics do. But he got increasingly frustrated, and began to write in what he called an 'elliptical' way, breaching the supposed boundaries between fast and fiction - not what you're supposed to do as an academic." Sebald himself sometimes described his work as "documentary fiction," which goes some way toward capturing its integration of apparently irreconcilable elements. 


제발트는 학술 서적들의 심한 비난들에 대한 불만으로 문학창작(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고 어색한 단어인)의 길로 들었다고 빅스비는 말한다. "그는 원래 독일 문학을 가르쳤어요"라고 빅스비는 말하며, "그는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듯 몇 종의 책들을 출판했죠. 그러나 그의 불만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가 말하는 '생략된(elliptical) 방식'으로이미 가정되어 있던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발트에게 대학 연구자처럼 하라고 제시되어져 있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제발트는 그 스스로 그의 작품을 종종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을 포착하기 위한 어떤 방식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표현했다. 


- Why You Should Read W. G. Sebald BY MARK O’CONNELL 

THE NEW YORKER, DECEMBER 14, 2011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you-should-read-w-g-sebald  


Christopher Bigsby(1941~): 소설가, 비평가, 제발트가 있었던 University of East Anglia의 Colleague. 



'Elliptical'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어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현대 소설, 아니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작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해롤드 블룸은 이를 '시적 영향에의 불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새로운 방식, 일종의 혁신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W.G.제발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에 성공하고 있다.  


-- 



(1) 제발트가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2015년 실제로 다큐멘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발트의 문학과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지만, 제발트를 읽으면서 알렉시예비치를 떠올렸다. 번역된 제발트의 책들을 몇 권 더 챙겨 읽고 자세한 리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알렉시예비치도 읽을 예정이니, 서로 비교해볼까 한다. 



W.G.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 -2001 






* 현대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론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그랬고 미셸 빅토르, 로브-그리예, 오에 겐자부로, 심지어 이우환도 자신만의 예술론을 모아 책을 냈다. 아래 책은 미셸 뷔토르의 소설론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2014/02/10 - [책들의 우주/이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블로그에 작은 글 하나 써서 올릴 틈도 없는, 하루하루가 지난다. 낮엔 잠시 비가 왔고 우산을 챙겨나온 걸 다행스러워 했으며, 저녁엔 비가 그쳤고 손에 든 우산이 거추장스러웠다. 내 과거는 다행스러웠고 내 현재는 거추장스럽다. 


집에 와서 페이스북에 한 줄 메모를 남겼다. 


*   *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을 현실로 만든다는 건 ... ... 반대로 현실을 꿈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현실을 꿈으로 만들겠다. ... ... 거참, 힘든 일이다.


*   * 


십수 년전부터 선배들을 따라 간 호텔 바를 얼마 전에도 갔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와인을 마셨다. 한창 와인 마실 때가 그립다. 그 땐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세상이 엉망이 되었다.


이젠 술을 마시기도 힘든 시절이 되었다. 내 몸도, 내 마음도, 이 시절도, 이 도시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고 난 다음,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사실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우리에겐 구조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그 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끔 할 수 있었다.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잘못 엮어져,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그리고 승객들은 전화통화를 하다가, 구조를 기다리다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서 이 나라는 한 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했다. 유가족들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가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일이 왜 일어났고, 왜 구조 작업은 그 따위로 진행되었으며, 구조 과정 속에서 일어난 어수선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들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 기사를 보다가 희안한 광경을 목격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096502 


댓글들을 한 번 보라. 국민 대다수가 유가족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적어도 그들의 슬픔을 공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댓글들은 너무 편파적이지 않은가? 이는 다음도 마찬가지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40831162506171  


도대체 이런 댓글은 왜 달리는 것일까? 도대체 지금 정부와 여당은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얼마나 많은 조직들이 달라붙어서 이런 댓글 작업을 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댓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음이 흔들릴 것이라고 믿는 걸까? 


이미 언론은 장악했고, 이제 댓글까지 장악할 심산인 듯 싶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인가? 권력과 부인가, 아니면 상식을 가진 국민들인가? 어쩌다가 나라 꼬라지가 이렇게 변한 것인가? 


**


가끔 정치 관련을 올리긴 했지만, 세월호 이야기를 거의 적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슬프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글마저 쓰는 것도 미안하고 죄송했다. 그런데 최근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니, 황당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구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10점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지음, 김진화 옮김/눌와


벽 - 건축으로의 여행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지음), 김진화(옮김), 눌와 



벽에 대한 짧은 에세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건축물로서, 우리가 마주 보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벽에 대한 여행과 생각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가 '벽'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의 밑바닥에는 늘 '사랑'이 깔려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얻게 되는 벽에 대한 지각은 차라리 감각적으로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벽의 든든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곧게 서 있는 벽,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벽을 지각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꼭 침대나 땅 위에 길게 누웠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11쪽 


벽의 온기... 아마 이런 기억.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한참 동안 기대고 있었던 담벼락. 또는 여자아이가 살던 집 옆 골목길 담벼락에 숨겨져 있던 따뜻했던 느낌같은 것. 

책의 초반은 벽의 재료나 건축적 의미를 묻지만, 책의 후반은 문학적 해석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초반은 딱딱하고 다소 지루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후반은 흥미롭고 재미있다. 

기억이나 꿈, 상상은 벽의 정신적 이미지를, 다시 말해 벽이라는 물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상징적 가치를 가지는 벽을 재현시킨다. 이런 상징적 기능을 통하여 벽은 또 다른 존재성을 가진다. 즉, 벽은 인간과 직접 맺은 물질, 도구적 관계를 떠나 자신을 생각하는 주체를 밖에서 자신을 실현하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상상과 실제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107쪽 


우리가 매일 만나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벽.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면서도, 마음 속으로 뻗어나가는 상상적 공간이기도 한 벽. 두껍고 무거운 벽에서부터 현대 건축물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유리로 된 벽까지. 

이 책은 벽에 대한 짧고 매혹적인 찬사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어떤 기억은 신선한 사과에 묻은 누런 빛깔 먼지 같았다. 그래서 그 사과가 누런 흙 알갱이로 가득했던 맑은 하늘 아래의, 어느 과수원에서 익숙한 손길의, 적당히 성의 없이 포장되어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스테인리스 특유의 무심한 빛깔을 뽐내는 주방 앞의 아내 손길에 그 먼지는 씻겨져 흘러 내려갔다. 그렇게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다.


문득 내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15세기 중세 서유럽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한 편으론 감사하고 한 편으론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만한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어떤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시간의 틈에 끼어 오래되어 지쳐 잠들 뿐이다.그 잠든 모습을 스스로는 돌이켜보지 못하는 탓에, 예상치 못하는 사건들, 가령 거대한 도심의 새벽 거리에서 1980년대 후반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맡았던, 낡은 먼지 냄새같은 걸 느끼게 될 때, 불현듯 떠올라, 그 사이 힘들게 먹어온 나이를 무색케 만든다. 


너무 많은 생각은 정해져있는 일상의 행동마저 더디게 하고, 앞만 보고 향하던, 몇 분 전만 해도 냉정하게 빛나던 두 눈을 둔하게 하며, 축축하게 하며, 멍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저 우주는 내 앞에서 침묵으로 강요하고, 할 말 많던 나는 그 말들의 미로 속에 갇혀 혀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어느 목요일이 지나고, 라틴 풍으로 몸 단장을 한 '춘천 가는 기차'를 듣는다. 


아주 사소한 위안이 될테지. 혼자 술 마신 지도 참 오래 되었어. 음악 들으며... 



 나희경 - 춘천 가는 기차



나희경 - 흩어진 나날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느티 2015.06.11 21:20 신고

    존 버거를 아시겠지요? 벤투의 스케치북이랑 책을 읽다가 안토넬로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검색하다가 여기에 닿았 습니다. 비슷한 시대를 비슷한 책을 읽으며 비슷한 음악을 들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읽던 책 놓아 두고 여러 글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희경의 음악들에서 그만 왔다 간 것을 들키기로 합니다. 그대 내 맘에 들어 오면은, 나희경이 부른 그 노래. 강물처럼 그대 곁에 흐르리, 그 부분의 가사와 음색.
    세상에 진 게 아니라 세상 같은 거 더러워서 버린다고 했던 백석처럼 저는 십오년 전에 서울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 왔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나니 살기 위해 또 다른 무엇을 선택해야 하긴 했지만 자본주의에 나를 상품으로 팔면서 사는 것보단 낫다고 아직은 제 선택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재미나게 읽을 글들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몇 몇 책들은 주문해 두었습니다. 이것 역시 감사!

    • '나를 상품으로' 만들어 팔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요. 한 때 '사람은 상품이 아니다'라며 경멸하던 터라, ... 나이 들수록 세상의 무서움과 세상 사람들의 무책임함과 무관심함에 경악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럴 수록 세상에 무슨 미련을 가진 것인지, 더 악착같아지는 제 자신이 놀랍고 때로는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희경, ... 보싸다방 노래를 듣고 찾아 링크를 걸어두었는데, 잊고 있던 이름이었네요. 요즘엔 1년이 수만년같고 어제 만난 사람도 기억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도시에서의 나이 들어감은, 나빠지는 건강만큼 핑계가 늘고 정겨운 술자리는 반대로 줄어드는 듯하여 슬프기만 합니다. 하긴 이런 거대한 도시에서 인간이 얼마나 오래 살았다고 익숙해지길 바라는 제 자신이 이상한 것이겠지요. 한국사람들은 이제 수십년밖에 되지 않았는걸요. 댓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긴 댓글이 달리고 산골로 들어간 느티님을 보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버릴 수 있을 때 확실히 버려야 하는데, 저는 그러질 못했네요. ㅎㅎ ~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싶어. 아버지는 죽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잖아." 
- '서쪽부두'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희곡)의 샤를르의 대사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이제 내년이면 나도 마흔이 된다. 서른부터 마흔까지 너무 길었다. 스물부터 서른까지는 무척 짧았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스물까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슬픈 플라톤보다 현실적인 헤라클레이토스가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왜일까.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현대 프랑스 최고의 희곡 작가.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 부산 앞 바다 어딘가에서


상반기 워크샵, 그리고 하반기 워크샵.

이번에는 부산으로 다녀왔다. 부산 출신들이 많고 이번에는 좀 멀리 가보자는 의견에...

하지만 나는 새벽 첫 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야 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그냥 술 마신 기억밖에 없구나. 술에 취한 채 탄 첫 기차.

부산에 도착하니, 밤이라 바다 사진 한 장 못 찍고 올라왔다.

그래서 대신 지난 여름 사진 한 장 올린다.


- 일본 후쿠오카 어딘가에서


시간은 흘러, 흘러 나도 내년이면 마흔이 된다.
기적 같은 일이다.
나이 마흔이 된다는 건. 그렇게 늙을 수 있다는 것은.




청년실업의 '착각'이다. 아주 가끔, 이런 좋은 노래를 만나기도 하는 마흔이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사진은 참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렇게 사진 속에 숨어 세월은 사라진다. 사진은 미완의 기억이며 흔적이다. 사진은 미학적 매체이기 이전에 어떤 상처이다. 그래서 예술가들 중 일부는 사진 속에 깃들어 사고하고 행위하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인상주의자들은 사진의 친구였으며 동지였다. 그렇게 사진은 평범한 우리들 손으로 들어왔고,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오늘도, 내일도. 

그래서 사진은 참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침묵 속에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만난 이는 도시를 흐르는 대기의 흐름이었다. 가을 아침 바람. 강남구청역 1번 출구. 내가 아침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곳.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기 틈새로 비가 내렸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어버린 중년의 감각 세포들.

거리는 어수선한 지난 밤 속을 헤매는 듯 보였고, 상기된 표정의 행인들은 가져온 우산을 힘없게 펼쳤다. 그 때 마침 문을 연 커피숍에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참 멀리 걸었다. 걸으면서 낡은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데이비드 린치, 스매싱 펌킨스의 EYE를 떠올렸다. 기억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 내 몸도 따라 휘말려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어디까지 걸어온(혹은 걸어간) 것일까? 기억은 길을 잃었고 의식은 희미해진다. 아주 길게.

커피숍에서 커피를 가지고 난 순간, 빌딩 지하 고급스러운 술집에서 나오는 젊은 여자와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남자와 만났다. 그러자 테이크아웃 종이컵 위로 갈색 커피 향이 밀려들었다. 기억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게, 추억은 고통스럽게 한다. 어느새 2011년도 채 네 달이 남지 않았고, 그렇게 내 삼 십대도 지나고 있다. 멀리 돌아온 커피 한 잔과 함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밤에 마시는 커피가.. 참.. 향이 좋아요..ㅎㅎ 이상하게 낮에 먹는 커피보다도..

    • 저도 밤에 커피를 내려마셨는데, ... 요즘은 거의 마시질 않아요. 다음 날 출근이 힘들더라고요. ㅎㅎ.. 조용한 밤의 커피 향기 참 좋죠~. ^^


기억의 정치 - 10점
권귀숙 지음/문학과지성사


현재 진행형이다. 아마 그렇게 '현재 진행형'으로 있다가 묻혀질 것이다. 현대 한국 내에서 끊임없이 권력에 의해 자행되어 온 대량학살이 이야기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하긴 대량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 것도 채 100년이 되지 않으니(일제, 광복 후 미군정,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와 군사정권들에 이르기까지), 젊은 세대로 속하는 우리들에게 대량학살은 아주 먼 이야기일 뿐이다. 직간접적으로 강요된 침묵 속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은 아주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기억'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이젠 증언을 할 사람들마저 불합리했던 과거 속으로 사라져갈 때, 슬프고 고통스런 과거이지만,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처럼 여겨진다. 

4.3 사건, 너무나도 끔찍했던 이 사건은 그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이 사건은 오직 먼 소문과 깊은 침묵으로만 전해져 왔다. .


권귀숙이 이 책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기억들을 모으고 분석하며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묻고 있다. 책은 얇고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마치 기억을 통해 현재적 의미를 묻기 시작하는 도입부로 읽혔다.


기억은 한 개의 고유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적 기억'도 사회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기억의 사회성을 처음 지적한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한 사회에서 '무엇이 기억할 만한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기억되는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집합기억 collective memory'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이는 한 집단의 성원들이 서로 공유하는 기억을 의미한다. (중략)
여기에서 개인적 기억의 사회화 과정과 집합기억의 개별화 과정에 보다 관심을 둔 '사회적 기억'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집합기억을 한 "사회의 기억 memory of society"로 본다면 사회적 기억은 "사회 내의 기억 memory in society"이다. 즉 사회적 기억이란 기억이 형성되는 사회적 과정으로 기억이 실천되는 장이라 볼 수 있다. 기억들이 형성되고 여러 기억들이 갈등하며 혼재하는 기억들의 장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억은 다중적이고 일시적이고 컨텍스트적인 성격을 띤다. (35쪽)


그런데 이런 도입부가 필요한 대량학살이 현대 한국에서 다수였다는 사실은 너무 가슴 아프고 슬프기만 하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늘 후대의 몫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겨진 기억들의 분석을 통해 저자는 그 때 그 일을 보듬고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어떤 꿈은 너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은 실제 기억과 융합되면서 자연스럽게 현실의 기억이 된다. 아마 다수의 사람들에게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일은 사소하지만, 사람들에겐 견딜 수 없는 정도로 깊이 패인 정신의 상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가지게 되는 기억의 일부는 아주 오래전 선명하게 남겨진 꿈에게서 연유한 것. 종종 우리가 눈 앞의 현실에게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특히 젊은 날의 열정과 꿈이 흐린 눈가나 입가의 주름 사이로 숨어버리는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반의 남자에게 더욱더 위험한 이 사건. 이 무렵의 남자들이란 대개 길거리에서, 직장에서 마주 하게 되는 젊음들에 대한 공포,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힘주어 고백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아내, 번번히 대화의 미끄러짐을 경험하게 해주는 냉담한 그의 아이들, 하루하루 정해진 일과로 짜여진 그의 모던 타임즈, 정기적으로 바뀌는 계절의 수상한 향기 속에서 그들의 영혼은 천천히 주눅 들고 지쳐가고, 그러다가 소리없이, 혹은 과감하게 오래 전 꿈을 군데군데 조각난 과거 현실의 기억 사이에 집어넣게 되는 것이다.

신고

Comment +0


HAESUN
HWANG
기억의 창 황혜선
2007.9.12 - 10.2
이화익갤러리 www.leehwaikgallery.com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아파하고 숨을 쉬며 움직인다. 이러한 운동이 끊김 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놀랍다. 황혜선의 비디오 아트는 시간과 운동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지만, 그 전에 그녀의 시선은 디테일한 일상의 무미건조함에 대한 반발로 구성된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비디오 아트를 넘어선 낯선 즐거움을 안겨준다.

‘기억의 창’이라는 제목에서 환기하듯이, 그녀의 이번 전시의 주된 테마는 일상의 기억들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다양한 매체와 작업 속에서 우리에게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인해 그녀의 작업을 보는 이들은 기분 좋게 웃음 지을 수 있다. 그녀가 궁금해지는 전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 Look Back, A Look Forward, 영상가변설치, 2007 



* 작품 이미지는 이화익갤러리 웹사이트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저에게 저작권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대신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져왔음을 알리며, 문제가 있을 시에는 바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 위 작품은 비디오 작품이므로, 실제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 위 전시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이화익갤러리도 추천합니다.


신고

Comment +0



마산 창동거리에서 어시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 동성동인가, 남성동 어디쯤 있었던 레코드점에 들어가 구한 음반이 쳇 베이커였다. 그게 94년 가을이거나 그 이듬해 봄이었을 게다. 그 때 우연히 구한 LP로 인해 나는 재즈에 빠져들고 있었고 수중에 조금의 돈이라도 들어오면 곧장 음반가게로 가선 음반을 사곤 했다.


어제 종일 쳇 베이커 시디를 틀어놓고 방 안을 뒹굴었다. 뒹굴거리면서 스물두 살이 되기 전 세 번 정도 손목을 그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삶의 치열함이라든가 진정성 같은 거라든가.


스무살 가득 나를 아프게 했던 이들 탓일까. 아직까지 인생이 어떤 무늬와 질감을 가지고 있는지 도통 아무 것도 모르겠다. 문학도, 예술도 마찬가지다. 이집트 예술가의 진정성과 현대 예술가의 진정성은 전적으로 다른 양식을 향해 간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고 내가 누군가에게 탓함을 당할 이유도 없다. 나라는 개별자만 있을 뿐, 보편적인 개념으로 날 구속할 순 없다.


그런데 이 얼마나 슬프고 기가 막힌 일인가. 내 삶의 가치나 의미 같은 건 순전히 내 속에서만 존재 가치를 가질 뿐, 이 건조한 도시의 거리에선 아무 가치도,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니.


누군가 내 옆에 누워 자기가 누렸던 사랑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내 사랑의 흔적을 물었던 적이 있었던 것같다. 기억의 아련함. 그 때 내가 한 말은, 사랑은 지나가면 그저 잊혀질 뿐, 그걸 되새기기 위해, 그걸 되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 ..., 그런데 과연 그런 걸까. 하긴 그 때 내 옆에 누워있던 그 이는 바로 떠나버렸고 그 이후 소식을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꿈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쓴 소설 속이었나.


과거는 중첩되어 쌓여져가고 가끔 내 마음 안 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만 되살아날 뿐이다. 그냥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뿐. ‘이제 네가 싫어졌어. 그 뿐이야’라고 말했던, 나에게 청혼했던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가끔 과거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내 폐 깊숙한 곳의 H2O를 사라지게 한다. 금세 호흡곤란을 느끼며 자리에 눕는다. 그렇게 누워 남극의 얼음들처럼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그렇게 잠만 잤으면. 우리 인간이 아는 영원함이란 고작 몇 천 년이거나 몇 만 년 수준이다. 영원함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개념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상상적 개념은 너무 많고 그런 개념에 목을 매는 꼴이라니.


당인리 발전소 안 길에 벚꽃이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하지만 꽃향기는 내 몸에 닿지 못한 채 강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꽃을 입 안 가득 씹어 먹지 않는 한, 순결한 꽃향기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리고 말을 건네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인리 발전소 안의 벚꽃길


오늘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를 타고 행주대교 옆으로 들어가 강을 따라 올라갔다. 계속. 계속. 가양. 양화. 성산. 서강대교를 지나 여의도로 들어갔다. 여의도를 지나가 한강대교까지 올라갔다. 계속 올라가고 싶었다. 계속 올라가면 양수리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양수리를 지나 계속 올라가고 싶었다. 계속 오르고 오르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곳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한강대교를 건너 동부이촌동으로 들어와 다시 김포공항 쪽으로 향했다.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지쳐갔다. 한강을 보면서 오늘 산 자전거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자전거를 ‘풍륜’이라고 부른다는데, 나는 내 자전거를 뭐라고 붙여야할까.


내 자전거의 이름은 ‘머저리’다. 너무 좋은 이름인 것 같다. 머저리. 머저리. 머저리. 이 세상도 머저리고 나도 머저리다.


다시 양화대교에서 강을 건너 행주대교 아래까지 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있었고 방화동으로 들어가기 전 강가 매점에서 맥주캔 하나를 먹었다. 바람에 내 다리가 흔들거렸다. 아, 머저리를 타면 바람에 흔들거릴 정도로 내 몸도 가벼워진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고 나면 일요일 밤도 자정을 향할 것이고 알게 모르게 월요일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고, 그러다 보면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사소한 위안처럼 느껴지는 밤이다. 서글픈 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방화동에서 나오면 있는 강서 한강시민공원. 한강 하구인지라, 좁은 물길을 따라 있는 바다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멀리 보이는 가양대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앞 강물 위의 백조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내 인생의 카아~를 위한 캔 맥주 카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요일 난데없이 자전거 가게를 방문한 이에게 팔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내 머저리.






신고

Comment +0

늦은 봄날의 일상

가끔 내 나이에 놀란다. 때론 내 나이를 두 세살 어리게 말하곤 한다. 내 마음과 달리, 상대방의 나이를 듣곤 새삼스레 나이를 되묻는다. 내 나이에 맞추어 그 수만큼의 단어를.....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쓸쓸한 커피숍

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동네 카페
이제 TV로 영상콘텐츠를 보지 않는다
어느 오후
어느 오후
브랜드 저널리즘의 4가지 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