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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2015년, 기억해둘 만한 해가 되었다. 2016년, 아직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고 주말에 쉰 적이 없다. 스트레스로 인한 폭음 뒤, 몸져 누워 나가지 않은 때를 제외하곤. WLB(Work & Life Balance)라는 단어를 이야기했던 때가 부끄러워졌다. 


일요일 출근 전, 르 클레지오를 짧게 읽었다.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동떨어진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스물 여덟 무렵, 자신만만하게 젊은 날의 르 클레지오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놀라웠던 데뷔작, <<조서>>, 그 이후의 슬프고 감미로웠던 <<홍수>>, <<사랑하는 대지>>, <<물질적 황홀>> ... 십 수년이 지나고 노년의 르 클레지오는 서울에 와서 살기도 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제 르 클레지오는 내 일상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내 탓도, 세상 탓도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거대한 인과율 속에 우리는 잠겨 있고, 그 체계가 실재하는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꿈 속에 있으면 그것이 실재라고 믿듯, 우리는 새장을 벗어날 수 없고 언어를 버릴 수 없다. 쓸쓸한 1월이고 슬픈 겨울이다.  



모든 것은 자리를 바꾸고 움직이고 서로 침투하며 수정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존재하며 모든 것은 명백하다. 만약 죽음이 한 인간이기를 그치는 것을 뜻한다면 세계의 이 모든 광경은 죽음의 광경이다. 사실적이며, 실제로 있는, 효과적 죽음, 지울 수 없고 단단하고 정확한 죽음, 저항할 수 없고 바꿀 수 없으며 떼어낼 수 없는 죽음의 광경, 바라보는 수백만 개의 눈, 무한히 많은 눈들의 비전이요, 또 그 눈들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시선인 죽음의 광경이다. 

- 르 끌레지오, '침묵' 중에서 (김화영 옮김, 세계사)




J.M.G. Le Clézio, portraits (1963 à gauche, 2011 à droite). Sourcing images : "L'Express", 1963. "Le Monde", 2011 (archives Vert et Plume) 

출처: www.the-plumebook-cafe.com/jusqua-la-fin-du-mond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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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나를 알고 있었던 이 대상들은 더이상 나를 증오하지 않게 되겠지. 나의 내부에 있는 내 생명이 꺼져버릴 때, 내게 주어졌던 이 통일성을 내가 마침내 흩어버리게 될 때, 소용돌이는 중심을 바꿀 것이며 세계는 그 자체의 존재 방식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대결, 소란, 빠른 움직임, 압박들이 이제는 더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시선의 차디차고 불타는 흐름이 멈추게 될 때,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하던 저 숨은 목소리가 말하기를 그치게 될 때, 흉물스럽고 고통스러운 이 모든 소란이 잠잠해질 때, 세계는 간단하게 이 상처를 되아무릴 것이며, 부드럽고 한가한 세상의 층을 넓혀갈 것이다. 더이상 과거의 잠재적 나를 초월하여 가기 위한 무슨 상처자국도 추억도 그 무엇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여행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제 현실의 천을 찢는 일을 그만둘 것이며 내 의식의 충동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새울음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이 문득 잊혀져 버릴 것이다. 촘촘하고 검은 상보는 툭 떨어져버릴 것이고, 나는 그게 떨어지는 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이기도록 생겨먹지 않았다. 나는 지탱하기에 너무나 센 전류를 받아서 버쩍 달아오른 줄, 사물의 모서리를 비치고자 하다가 스스로 타버리는 가는 줄에 지나지 않는다."
- 르 끌레지오, <<침묵>> 중에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에게 침묵은 죽음 이후에만 허용되는 어떤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저주 받은 채로 낙인찍혀 태어난 우리들은 한 시라도 누군가의 저주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겠끔 생겨 먹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누군가의 증오 어린 시선을 피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선량하게 보이는 내 웃음을 내 저주받은 생을 숨기고 위한 위장막이며, 내 부드러운 눈빛은 누군가의 증오어린 시선을 피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거대한 도시의 탁한 공기로 오염된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끈적이는 땀이 지쳐가는 육체를 지나, 버림받은 마음마저 적시고 있는 8월 오후 ... 어수선한 나라, 어긋나는 대화들, 서로의 이익을 따지기 시작하는 세계 앞에서 어쩌지 못하며, 고작 허용된 건 침묵 뿐이라고 위안할 때, 그것마저도 불가능함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번 주말엔 르 클레지오의 '침묵'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복사해와야 겠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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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우연, 앙골라 말라, 문학동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르 클레지오는 그러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 어떤 매혹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비와 매혹이 현대 문명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까지도 시적인 풍경으로 묘사한다.

무척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르 클레지오의 화법이나 문장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꽤나 지루해할 만한 소설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긴 하지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고 프랑스에서도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일 것이다. 다음 기회에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를 다룬 글을 올릴까 한다. 따지고 보면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아마 이삼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난 무척 재미없어 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나이에 따라 읽히는 소설이 틀리다고 했는데,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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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水Le De'luge』, 르 클레지오 지음(* 이휘영  옮김), 동문선.
     1988.

           

        * 그대들은 죽음을 모르고 있다 *


        익명성: 이것은 누구나 혼잡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현대 도시의
     비극적 특성들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소와 베송은  이
     익명성 속에 자신을 파묻는다. 그래서, 소설은 프랑소와  베송의 뒤를
     따라다니며 전개되지만, 프랑소와 베송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그가 보는 사람들, 거리들, 풍경들만 독자의  눈동자 속
     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주인공 대신 독자의 눈동자 속에  들어온 사람
     들, 거리들, 풍경들에서 독자는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
     를 제외하곤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줄거
     리도, 특별한 인물도 없으며, 아무 것도 특별하지 않은 공간 속을, 특
     별하지 않은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홍수'뿐. '홍수' 속에선 그대도
     나도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나무조각이라도 잡아야  하건만, 물살이
     너무나 세차기 때문에 난 이미 지쳤고,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프랑소와 베송은 그런 나이다. 오, 저주스런 오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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