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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르네상스 +22


The Knight, Death and Devil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1513, Copperplate 동판화

 

 

기사 옆으로 죽음과 악마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이 명료한 동판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까. 인간이 가는 길을 과거의 유물들 - 죽음, 악마 - 이 훼방 놓으며 가지 못하게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종종 후기 고딕적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 만큼은 근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도상학적으로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해석된다. 과거 종교인이 가졌던 역할을 이제 기사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를 문예부흥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혼돈기였음을 짐작케한다. 결국 고딕적 신앙이 뒤로 물러나고 기하학적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본격적으로 서구의 근대(modern)이 시작되고, 그 이후 거친 풍랑 속에서도 이성을 버리지 않는다. 


거의 1세기 후에야 철학에서 근대적 이성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예술에서의 이러한 선취(先取)는 놀랍기만 하다. 이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예술사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예술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짐작하고 예견할 수 있다. 


까뮈의 <이방인>이 나왔을 때, 그 충격은 대단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선 이 소설을 도덕 교과서로 읽히곤 한다. 이유없는 살인은 용서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유없는 살인을 너무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까뮈도 자신의 '뫼르소'가 그토록 많이, 현실 속에 등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양식(style) 상, 뒤러의 모든 작품들이 근대적이진 않다. 그는 양식적으로는 후기 고딕과 하이 르네상스(르네상스 고전주의)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가 외부 세계와 마주했던 태도는 르네상스 시기 그 어느 예술가들보다도 근대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뒤러가 끊임없이 연구되며 후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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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도중, 베로니카는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아 준다. 그리고 그 수건 위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새겨진다. 아래 작품은 그 기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전형적인 이콘화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엘 그레코가 비잔틴의 이콘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스 태생의 엘 그레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 후기(매너리즘)의 화풍을 배웠고 이후 스페인 톨레도로 가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는다. 




엘 그레코, <<수건을 든 베로니카>>, 캔버스에 유채, 84 cm * 91 cm, 1580년경, 톨레도, 산타쿠루즈 성당



슬픔에 젖은 베로니카가 수건을 펼쳐 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줄 때, 어떤 비장미까지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수건과 뒤 배경 사이의 묘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실제로 보면 아래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 사진 한 장을 더 올린다. 무표정해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슬픔을 억누르는 듯한 베로니카, 두 손 사이의 수건, 주름진 천 위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16세기 후반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받는 엘 그레코. 이 작품은 보면 볼 수록 빨려든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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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더구나 꼼꼼한 연구서의 면모까지 지닌 이 책은 아비 부르부르크 생애 뿐만 아니라 주요 연구 성과, 그것에 대한 평가, 그리고 '미술사 연구'의 시작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두서없는 리뷰를 양해해주길 바란다. 다나카 준의 꼼꼼한 서술을 따라 읽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겨우 다 읽은 후 쓰는 이 리뷰는 바르부르크의 주된 테마를 언급하는 데 그칠 것이고, 이 소개가 비전공자에겐 다소 재미없고 전문적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이 책은 전문 서적이다. 


인문학의 꽃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이며, 역사학 중에서도 미술사학이 가지는 흥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지만, 책읽기 좋아하는 직장인이 하기엔 주제 넘는 짓이다. 다만 신화나 종교에 대한 편협한 도상학적 이해만을 바탕으로 미술 작품을 평하는 국내 필자들에게 하나의 도상을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흐름, 그 속에서 벌어지는 정신들의 결투 같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사유공간을 만들어내는 분리 운동과 마술적인 결합 강박은 언어와 도상의 한가운데 양극적인 긴장 상태를 유발한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펼쳐진 세계를 '유럽'이라고 부른다면, 양극성을 유발하는 언어와 이미지 속에 응결되는 것은 유럽 정신의 무시간적 심층이다. 다시 말하면 유럽이란 이 무시간적인 구조가 강요하는 마신들의 회귀라는 반복운동에 의해 지배받는 시공간이다. (67쪽) 



바르부르크는 '무시간적 심층'이라고 표현한다. 즉 도상들은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이동하고 번역되면서 끊임없이 되돌아오고 잔존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두고 '무시간적'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그에게 르네상스란 고대, 특히 마신적 고대의 부활이었다. 


기들란다요의 초상화를 봉납 밀랍인형과 똑같은 수준에 놓는다는 것은 그것을 이른바 역사인류학적인 시선 아래에서 물신숭배의 측면을 지닌 종교의례의 일부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209쪽) 



Domenico Ghirlandaio (1449-1494) 

Adoration of the Shepherds

1485

Cappella Sassetti(Santa Trinita, Florence)  


그 당시 교회에는 실제 인물과 동일한 밀랍인형이 가득했으며, 일종의 풍습이었으며, '도상마술(圖像魔術)'이 된다. 


"이교적인 미신을 믿는 에트루리아인의 자손인 피렌체인들은 극단적인 형식의 이러한 도상 마술을 발전시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세련되게 다듬었다. (...)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도상 마술'은 자신과 비슷한 밀랍제 인형, 은제 인형을 성스러운 화상의 봉납품으로 바치는 풍습이다. 피렌체의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은 권력자나 신분이 높은 이국인에게 실물크기로 자신의 형상을 밀랍인형(봉납물, voti 피렌체 방언으로는 boti)을 생전부터 성당 안에 전시하는 특권을 부여했다."(206쪽 - 207쪽)



기를란다요의 작품이 지니는 과도한 사실성은 이런 밀랍 인형과 같은 역할을 회화가 수행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봉납물의 신비한 힘을 믿고 있었던 피렌체인들은 여전히 '원시적'이었으며, 봉납물은 반드시 본인과 확실히 비슷해야 했다'(213쪽) 



Cappella Sassetti(Santa Trinita, Florence)   



바르부르크가 보는 르네상스의 모습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세계로부터 고대가 어떻게 부활하는가를 도상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셈이다. 


바르부르크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고대의 부흥과 함께 '훌륭한 유럽인'이 열어놓은 점성술을 비롯한 마술적 행위 속에서 고대 그리스적인 '인간성Humanitat'을 재발견하려는 계몽을 위한 싸움에 있었다' (46쪽) 




Achilles at the court of King Lycomedes. 

Early 3rd century AD. marble

H. 1.08 m (42 ½ in.), W. 2.3 m (90 ½ in.), D. 0.8 m (31 ¼ in.)

출처: commons.wikimedia.org


책에서는 스킬로스 섬의 아킬레스 도판이 실려있으나, 이를 구하지 못한 관계로 다른 아킬레스 도판을 실는다. 위 로마 후기의 부조 작품의 유려한 표현을 감상해보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시나 부조, 회화에서 조형적으로 처리된 운동의 표현이다. 그들은 그 표현을 위해 종종 고대의 시나 미술 작품을 모방했다. 그들은 고대적인 것으로서 발견하고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고대 예술에 나타난 격렬하게 움직이는 부속물의 세부적인 형태이다. 고대 예술에 대한 관심 자체가 부속물의 운동에 대한 흥미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움직임을 나타내는 부속물이야말로 고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고대의 부조를 모방한 소묘에는 원작에는 없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그려진 것이다. (161쪽-162쪽)


그리고 아래 보티첼리의 '봄'을 보자. 보티첼레 작품에서 옷의 주름이나 머리 장식이나 스타일 등 부속물에 주목해 보면, ... 


보티첼리가 위치하고 있던 곳은 '고대'를 둘러싼 판타즘과 각성 사이, 15세기 피렌체의 현실에 대한 '개입'과 고대 예술이라는 꿈에 사로잡힌 '방심'의 틈새였다. 그것은 합리적인 '사려 깊은 생각'과 '상상력'에 의한 감정이입이 서로 부대끼는 공존 상태다. 이 '너무나 유약한' 화가에게 현저하게 나타난 '고대'라는 판타즘에 관심이 없었다면, 바르부르크가 박사학위 논문을 보티첼리론으로 썼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175쪽)  



Sandro Botticelli (1445-1510) 

Primavera 

1482, tempera

203 × 314 cm (79.9 × 123.6 in)

출처: commons.wikimedia.org


베버가 바르부르크의 논문에서 읽어낸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업자본주의에 있어서 '경제 형식과 윤리적 생활양식'의 어긋남이었다. 이 모순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에 의해 통합된다. 베버는 모순을 극복한 후, 자본주의적 에토스가 성립하는 메커니즘에 관심을 가진다. 이에 비해서 바르부르크는 상업자본주의라는 경제형식과 기독교적 생활양식의 긴장 관계를 고전 고대와 기독교의 대립 관계로 상징한 다음에, 이것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합불가능한 이 양자의 분열 상태의 한복판에서 찾으려고 한다. (238쪽) 


도상 연구자로서의 바르부르크의 연구 방향은 분명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몇 선배들 - 뵐플린, 부르크하르트 등 - 이 존재했지만, 바르부르크의 연구 방식은 거의 최초였다.  그는 서양미술 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일상 생활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무시간적 심층에 속해 있는 '고대 도상들의 이동과 흐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연구의 최종판은 '도상 아틀라스 - 므네모시네' 기획으로 이어졌다. 


마신적 고대의 부활은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감정이입적인 이미지 기억이 지닌 어떤 양극적인 기능에 의해 생긴다. 우리는 파우스트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서 근대의 과학자들은 - 마술적 실천과 우주론적 수학 사이에서 - 자기와 대상과의 사이에 '진지한 생각'의 '사유 공간'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아테네는 확실히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재탈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0년 (65쪽) 




- 일본 원서.  



- 아비 바르부르크 




Aby Warburg, Mnemosyne Atlas, Panel 79 (“The Eucharist”), 1929



"시간의 거울에 비친 '고대'를 재현한 이미지의 다양함은 각 시대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선택경향을 보여주며, 그것에 의해서 소망이 형성되고 이상을 설정하는 집합적인 영혼이 세상에 명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은 구체화로부터 추상화로, 또는 그 반대로 향하는 주기적 왕복운동으로 인간이 절제Sophrosyne를 추구하며 벌여야 하는 싸움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309쪽) 



"고대풍의 역동적인 형태는 최대의 긴장상태에서 전승되는 것인데, 그것을 모방하고 흉내(상기)내는 자의 수동적 또는 능동적 에너지와의 관계에서 무극화된다. 시대와 접촉하고 나서야 비로소 양극화가 형성된다. 이것은 본래의, 고대에 있어 의미의 근본적인 역전(전도)에 이르는 것일 수도 있다." (309쪽) 


1929년 1월 19일 로마에서 므네모시네의 일부를 이루는 도상들로 바르부르크는 '기를란다요 공방에 있어서 고대 로마'를 테마로 강연을 했다. 아마 그의 논문이나 글보다 그의 강연은 수 배는 더 흥미진진하고 놀라웠을 것이다. 실제 도상을 앞에 두고 이루어지는 강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서로 얽히고 교차되면서 몇 가지의 주제나 이야기로 순식간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바르부르크에게 개인 지도를 받듯이 강연을 들었던 케네스 클라크는 그 체험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회상한다.'(314쪽) 



점성술 그림과 정념정형은 고대의 재생을 경유한 변화의 기록이며, 바르부르크는 평생동안 탐구한 이 두 가지 테마를 도상 아틀라스의 계획으로 집대성하고자 한 것이다. (310쪽) 


*  *


한 때 미술사학자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진 바 있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아비 바르부르크는 평생 아마추어(*) 연구자였다. 다만 그의 집안이, 그의 형제들이 세계적인 은행을 가진 유대인 가문이었고, 그는 형제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했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는 어려움이 없이 이루어졌고, 한동안 정신병으로 고생했지만. 한국에서의 아마추어 연구자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긴 요즘 같은 시기에, 국내든 해외든 석사나 박사로 미술사학을 전공하는 것은 스스로 백수가 되겠어요 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으니. 


바르부르크가 연구하고 수집했던 책들이 있었던 도서관은 현재 바르부르크 연구소가 되었다.  


이 책은 전문 연구서이며 평전이다. 다만 르네상스 미술이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흥미로울 수 있다.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꽤 난이도 있을 지 모르는 책이니,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다만 이 정도의 평전이 일본 연구자에 의해, 일본어로 씌여졌다는 점에서 일본 인문학의 수준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새삼 부러움을 금할 수 없다. 



* 혹시 '아마추어'라는 단어에 대해 오해가 있을까 덧붙인다. 여기에서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가 학교에 적을 두지 않고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했다는 데에 강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아마추어가 자칫 바르부르크의 학문 세계를 낮게 평가하는 듯 하기도 하다. 하지만 바르부르크는 서양미술사에 있어 도상학적 연구의 시초를 닦았으며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술사학자들을 바르부르크 학파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작슬(Fritz Saxl), 빈트(E.Wind) 등이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네 번째 소장을 지냈던 이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였다. 다소 비약하자면, 20세기 거의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이 아비 바르부르크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학교에 적을 두지 않고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아비 바르부르크와 달리 한국에서의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실은 이를 드러내고 싶어서 나는 의도적으로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 지도 모르겠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는 그 상황이 더 열악해지는 듯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로라는 의식으로 인한 지적 불성실함보다는 아마추어적인 지적 열망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뭐, 해답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 ㅡ_ㅡ;; 





- 곰브리치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 평전. 


* 바르부르크 연구소 : http://warburg.sas.ac.uk/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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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가 요새.... 지하련님 추천 서적 읽다가 그지가 될판이긴한데 ㅋㅋㅋ 이 책도 땡기네여

  • 라보엠 2015.07.29 20:39 신고

    일본인 학자의 시각으로 본 바르부르크의 생애도 궁금하군요. 제가 지내는 곳에선 이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먼저 곰브리치가 쓴 책을 찾아봐야겠습니다.

    • 저자는 곰브리치가 쓴 평전이 지니는 약점을 이야기하며 그 부분부터 서술해 내갑니다. 그래서 두 권 다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므네모시네 관련 책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일본에선 므네모시네 전시를 했더라고요. 이런 걸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곰브리치의 평전을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았으나, 언제 읽게 될지.. ㅎㅎ

바티칸 박물관 전 Musei Vaticani - 르네상스의 천재화가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12. 12. 08 - 2013. 03. 31 




대체로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는 실망스럽다. 일반에게 잘 알려진 대중적인 소재- 인상주의나 바로크, 르네상스 등과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 로 진행되는 기획 전시의 대부분은 복제화임을 밝히지 않는 작품들과 해외 미술관에서 대여하기 쉬운 유명 작가의 평범한 작품들로만 구성되고, 떠들썩한 매스미디어 홍보와 강남이라는 지리적 장점을 살린다. 


그러나 이는 미술 전문가의 입장일 뿐, 일반 대중의 입장은 아닐 것이다.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모든 전시를 본 것이 아니기에 전시를 보러가지 말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좀 더 좋은 전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상업적인 전시로만 흐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혼잣말: 그런데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몇몇 전시들은 너무 형편없어!!) 


2012년의 한국 사람이 15세기 경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을 보고 감동받는다면, 그건 한 마디로 오버다. 우리의 마음은 몇 세기를 횡단하며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예술가의 마음을. 실은 현대 예술가의 마음도 잘 알지 못하면서 15세기 이탈리아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한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다만 감동받기 위해 적절한 자기 기만 - ‘나는 15세기 르네상스 사람이야’ - 과 15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의 일상생활, 그리고 그 당시의 철학이나 문학 등 시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전시를 보러 가는 목적은 예술 작품을 보고 즐기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적긴 하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이 전시는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웠으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역시 오래된 대리석 건물 안에서 봐야 제 맛이다. 실제로는 우리 눈 높이가 아니라 보다 높은 곳에서 우러러 보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은 르네상스 세밀화가 어떤 작품인가를 알게 해준다. 그의 화사한 색채와 정교한 표현은 르네상스 시대의 건강한 신앙심이 만드는 위대한 작품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Fra Angelico, 

The Annunciation, the interior reproduces that of the cell in which it is located.

1437-1446, fresco, Museo San Marco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



복자(Beato) 안젤리코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는 구이도 디 피에트로는 예술과 도덕 자질이 빼어났고,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가 조반니 수사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수도원에서 세밀화나 그림을 그리는 데 헌신했다. "그리스도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신념으로 한평생 성화를 그린 천사 같은 수도자를 사람들은 '프라 안젤리코'(천사와 같은 수사)라고 불렀고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그를 시복하고, 1984년 카톨리 예술가들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하얀 장미를 들고 있는 인자한 성모와 천진하기 그지 없는 아기 예술의 모습. 성인들과 천사들의 선한 표정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성모와 아기 예수>는 프라 안젤리코의 혼과 영성이 깃든 걸작 가운데 하나다. (전시 설명 중에서) 




Fra Angelico, Madonna With Angels And The Saints Dominic And Catherine, C 1437 Tempera On Panel, 23 X 18 Cm Pinacoteca Vaticana, Vaticano, Rome (전시 작품)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fabien-moulin/4152765254/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이 목판에는 바람에 잔뜩 부풀어 오른 하얀 돛단배가 폭풍에 휩싸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어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을 퍼내고 있고, 한 사람은 돛대에 매달려 있으며, 또 한 사람은 기도하듯 손을 모아 하늘을 우러르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 위에서는 성 니콜라스가 구해주려고 나타난다. 성 니콜라스는 3세기와 4세기 사이에 소아시아에서 살았고 리키라 지방 미라(오늘날의 터키)의 주교였다.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이 성인은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과 선원들의 수호자로 여겨져 왔다. 성인의 무덤이 있었던 곳에서 시작된 성인 공경 신심은 비잔틴 세계에 퍼져나갔고, 그 후 서방에 이르기까지 큰 공경을 받았다.이탈리아, 독일, 북아메리카 민간 전통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라는 착한 인물은 성 니콜라스에게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이제는 그리스도교 세상 밖에도 알려져 성탄절이면 어린이들이 선물과 과자를 기다리며 양말을 걸어 두기도 한다. (전시 설명 중에서) 



난파하는 배를 구하는 성 니콜라스_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1425 (전시작품)

출처: http://www.font.co.kr/typostory/typonews_view.asp?search_idx=29


15세기 초에 활동하던 젠텔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1370/80-1437)는  중기 르네상스 작가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딱딱하다. 아마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동적이며 유려한 '난파하는 배를 구하는 성 니콜라스'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작품들의 일부분은 고딕적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보자면,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는 전성기 르네상스를 예감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Gentile da Fabriano. The Presentation at the Temple. From the predella of the alterpiece in the Strozzi Chapel at the Church of Santa Trinita in Florence. Tempera on wood. Louvre, Paris, France.



그리고 채 100년도 지나기 전에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본다면, 예술에 있어서의 혁신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미술사에 매혹되는 건 이런 비약적 발전의 원동력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때이다. 갑자기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갈 수 없다. 다만 둑이 무너지듯이 어떤 물결이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며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 순 있었을 것이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에서 라파엘로 사이에는 이러한 광폭한 물결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후대사가들은 작은 범선의 부풀어 오른 하얀 돛의 자연스러움에서 앞으로 전개될 예술 양식 상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Raffaello Sanzio, Theological Virtues1507

oil on panel, Height: 16 cm (6.3 in). Width: 44 cm (17.3 in). (each) (일부 전시)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




오래 전에 본 전시 리뷰를 새삼스럽게 올리다 보니, 르네상스 작품들을 보지 않은 지도 꽤 되었음을 깨닫는다. 저녁에는 몇 년만에 르네상스 화집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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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소생'(The Raising of Lazarus)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lbastiano del Piombo, 1485 - 1547)

Oil on canvas, 1517-1519

381cm * 299cm, National Gallery, London




시기적으로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매너리즘에 속하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는 그의 고향 베네치아의 색채와 그가 화가로의 삶을 살았던 로마의 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나사로의 소생'은 저명한 미술사가인 케네스 클라크로 하여금 '로마적인 형태와 베니치아적인 색채의 조합을 보면, 피옴보가 17세기 고전적 풍경의 진정한 창시자였음을 알 수 있다'는 언급을 하게 하였다. 특히 인물들 뒤로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니콜라스 푸생의 바로크적 풍경을 보는 듯하다. 


후일 친구가 되는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이 이 작품에 사용되기도 했는데, 아래가 바로 그 드로잉이다. 부활한 나자로와 그를 부축하는 이들을 그린 작품이다. 



Lazarus and attendant

Michelangelo, 1516 



나자로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치유들과 달리 이미 죽어 육체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죽은 후 나흘이 되던 때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데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화되었고 쉽게 작품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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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fectory with the Last Supper after restoration
1498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498
Mixed technique, 460 x 880 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종교적인 것들과 무관한 행위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시기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14C-16C)였다. 세속화되던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지도 모른다.

유럽의 고딕 시대가 종교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이 평행선을 달리는 시기라면, 르네상스 시대는 종교적 권력도 세속적 권력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문예부흥’이라는 르네상스의 뜻은 과거 역사학자들의 편견이며 실제 르네상스의 본질은 세속화(secularization)에 더 가깝다. 문예가 부흥하는 시기는 12세기 고딕 시대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이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한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예술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종교적인 소재나 주제는 세속적 태도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주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카라바지오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후세에 편집된 다빈치의 <<회화론>>에는 ‘‘회화’는 언어나 문자 이상의 진실함과 정확함을 가지고 자연의 모든 사물을 감각을 통해 표현한다’고 적혀있다. 그에게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세계는 ‘회화’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시체 해부도 이러한 근대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세계를 감각적 세계 속에서 보여주기 위해 말년에는 추상적인 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의 과도한 신앙심과 여기에서 비롯된 종교적이며 반-근대적인 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두 예술가는 확실하게 반대되는 지점에 서 있었던 셈이다.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최후의 만찬>에 예수 옆에 있는 이가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는 소설가의 상상일 뿐이다. 여기에 대한 진위가 논쟁이라니, 좀 우스운 풍경이다. 만약 그가 마리아 막달레나라면, 다빈치의 <세례자 요한 St John the Baptist>도 여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그만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남성을 여성적으로 그렸다. 그가 결혼도 하지 않았고 남색(男色) 혐의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던 걸 보면, 어쩌면 그가 동성애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래 세례자 요한은 남성적이라기 보다는 너무 여성적이지 않은가. 하긴 19세기의 파리의 데카당(de’cadent)들이 이 여성적인 미소에 매혹당했을 정도이니.



세례자 요한(St John the Baptist)
1513-16
Oil on panel, 69 x 57 cm
Musee du Louvre, Paris





(*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
* 예수의 12 제자 중 한 명인 요한과 세례자 요한은 다른 인물이다. 일부러 영문 표기를 명기하였다.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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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ian. The Young Englishman. c.1540-1545. Oil on canvas. Palazzo Pitti, Galleria Palatina, Florence, Italy


이 오래된 초상화는 16세기에 제작된 초상화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들 중의 하나에 속하리라. 16세기 베네치아 최고의 예술가였던 티치아노는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영혼의 숨결까지 담아내는 듯 보인다. 르네상스 시기, 일군의 화가들의 붓에서 시작된 위대한 초상화 양식들은 새로운 시대의 한 획을 그으며, 20세기까지 이어진다. 양식의 변용과 혁신을 거듭하면서.

초상화 양식의 역사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아래 초상화를 보자. 이 흥미로운 초상화는 티치아노가 교황 파울루스 3세(재위 1534 - 49)의 손자를 그린 작품이다.



Titian. Portrait of Ranuccio Farnese. 1542.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권세가의 자제라서 그런 걸까. 고종희의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에서 한 문장을 인용해본다. "아이의 경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12세에 기사가 되었고, 베네치아에 거주하면서 어린 나이에 산조반니푸르라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는가 하면 14세에는 나폴리의 대주교가 되었고, 1년 후인 15세에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긴 하다. 이 때 교황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종교 권력이 세속 권력과 한 판 전쟁을 벌이는 시기였던 16세기의 그리스도교는 현대와는 많이 달랐다. (종교, 또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이므로, 다양한 변화를 겪어 왔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종교와 신앙이 없다. 무한자의 세계를 유한자가 알 수 없으므로 무한자의 세계란 결국 철부지 같은 유한자들의 입맛에 맞게 편성된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윌리엄 오캄의 세계가 아직도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은 신앙인들은 윌리엄 오캄의 극적인 신앙에 대해 그 어떤 감동이나 전율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결국 초상화라는 양식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양식으로 시작되었다. 작품의 완성도 후대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지만,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프로퍼갠더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예술 양식의 자율성에 대한 추구라는 것이 지극히 현대적인 태도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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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일찍 들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가라 앉고 까닭 없이 끝 간 데 모를 슬픔으로 가득 찰 때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거나 글을 읽거나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악기 하나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지만, 지방 중소 도시에서 자란 터라 학원도 많지 않았고 여유도 되지 못했다. 그 흔한 기타 하나를 사놓긴 했지만, 몇 곡 연습하다 그만 두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기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버린 적이 없는데.)

 

우울할 때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지난 연말부터 무너진 마음이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 쫓기듯 살아온 걸까. 아니면 게을러져서. 그것도 아니라면, 판도라의 상자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인터넷 서점에서 슈베르트와 고흐, 아르보 페르트와 나쓰메 소세키를 주문했다.

 

오늘은 일정이 빠듯하다. 오전에는 여의도 근처, 오후에는 삼성동 코엑스, 청담동, 압구정동을 거쳐야 한다.

 

당분간 말을 줄이고 침묵을 즐겨야겠다.

 

1505년에 그린 조반니 벨리니의 피에타. 16세기 초반 베네치아. 막 세기말이 지났으므로 세기말의 어수선함이 아직도 남아있으나, 세기 초의 열광적인 기분은 느끼지 못하고 고작 불투명한 안도감 정도. 논리적으로는 신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종교적 미덕과 가치가 세속화되는 세계 앞에서 무너지고 세속적 가치로 대체되던 시대. 마치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수작을 거는 남자에게, 아니면 이미 바람난 아내의 부도덕함에 격분하여 바람 피운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자신의 도덕적 정당함은 증명하지 못한 채, 결국 죽어버리고 마는 생의 역설마냥, 벨리니의 피에타는 한없이 쓸쓸하고 슬프다. 과거는 이미 잊어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고 믿었으나, 마음이 낸 상처로 인해 모든 인지를 상실한 시대. 쓸쓸함과 슬픔이 지나치면 혁명이 도래하는 걸까. 아니면 광포한 현실정치가 도래하는 걸까. 아니면 다락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쓸쓸히 죽어가는 걸까(폰토로모는 그렇게 죽었다). 오늘 종일 조반니 벨리니의 이 작품이 떠오를 것 같다. 하지만 내 생이 이토록 쓸쓸하고 슬프지 않기를 바란다.

 

조반니 벨리니, '피에타', 패널에 유채, 65*90, 1505, 이탈리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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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어느 문화센터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이지 못한 강의였고 다소 어려운 주제를 다루었던 관계로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만, 그 때 정리해놓은 강의 노트가 있습니다. 여러 참고 문헌, 그리고 제가 배웠던 서양미술사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제 이력이 유별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인문학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양미술사는 인문학의 꽃입니다. 철학사(혹은 지성사)와 비슷하게 움직이며, 언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들의 정신적 세계를 보여주며, 그 시대의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동시의 철학 책이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 경우, 16세기 미술사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마키아벨리, 세르반테스, 세익스피어, 에라스무스, 루터 등을 이야기하지만, 서양미술사를 배우는 학생에게나 이를 가르치는 선생에게나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시대가 게을러지고 편한 것만을 찾기 때문에 온 것이지, 인문학이 더 이상 필요 없거나 그 가치를 상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큰 활자에 예쁜 그림으로 채워진 대중미술서들이 난무하는 요즘, 몇 백 년전의 고리타분한 작품을 앞에 두고,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 그동안 완역되지도 않았던 세르반테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는 다 알려져 있으나, 정작 읽어본 이는 드물고, ‘우신예찬의 에라스무스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도대체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을까요? 인문학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심지어 인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을 마치더라도 우신예찬표지도 보지 못하고 석사 학위 논문을 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말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생기는 것입니다. 서양미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편없는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양식적 설명이나 도상학적 설명만을 주절주절대면서, 정작 그 작품이 왜 형편없는지, 혹은 왜 감동적인지에 대해서 한 마디 설명도 없습니다. 미술 작품은 감상과 감동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서 온전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따져 묻고 작품 속 어떤 형체를 보면서 그 의미를 궁금해 합니다. 천박한 방식입니다.

 

먼저 전체를 보고 감상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훈련은 매우 어렵습니다. 마치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 이에게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듣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나 지루하고 졸리겠습니까. 그러니 선생은 활자 크고 경박스러우면서도 재미 있는 사실들과 일화들로 채워진 다이제스트를 팔아야 학생과 대중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이러면서 천천히 하향평준화가 시작됩니다.

 

작년에 읽은 어느 서양미술사 번역서에는 ‘arete’를 번역할 수 없는 단어라고 하였습니다. 이 번역자는 프랑스에서 역사학까지 전공한 이였습니다. ‘arete’를 번역하지 못한 이라면, 간단하게 말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한 번도 읽지 않았음을 알게 합니다. 역사학 전공자라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다. 읽었다면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virtue’으로 번역하는 arete라는 단어는 군주론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한국어로 번역된 군주론에도 이 단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원래 희랍어에서 유래한 arete의 그리스적 사용은 다소 다릅니다. 영어의 virtue처럼 단독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단어였습니다. 희랍인들에게는 무엇의 arete인가?’ 또는 누구의 arete인가?’라는 표현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arete는 단독으로 불완전한 단어였습니다. 레슬링 선수들의 arte, 말타는 사람의 arete, 장군의 arete, 노예의 arete가 있으며, 정치적인 arete, 가정적인 arete, 군사적인 arete가 있습니다. arete는 어떤 특정의 일에 있어서의 숙달 도는 능함을 의미했고, 따라서 그와 같은 능함은 종사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지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단어가 시간이 흘러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일반화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참조: ‘희랍철학입문’, W.K.C. 거드리 지음, 박종현 옮김, 종로서적)

 

이제는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들도 생겼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는 노릇입니다. 심지어 창의적 경영을 위해 인문학 전공자들이 중요해졌다고 해댑니다. 하향평준화도 이런 하향평준화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문학 전공자들의 수준이 지적으로 무능하고 현실적으로 형편없으며, 인문학 선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요? 하긴 프랑스에서 역사학까지 전공하였으며, 전문번역자라는 이가 ‘arete’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넘어가며, 이를 제대로 교정해줄 출판사 직원도 없는 마당에, 과연 인문학이 제대로 될까요?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젠 주위에 공부하는 이도 드물고 같이 책을 읽을 사람도 없습니다. 매월 말 영업 실적 정리하고 다음 달 마케팅 전략, 영업 계획 세우는 일상 사이로 미술 전시 기획하고 돈과는 무관한 책을 읽습니다. 그러다 보니, 푸념이 길어졌습니다. 매우 사적인 푸념이니, 못 들은 척 하는 배려를 가져주세요.

 

 

이번에 정리할 노트는 근대 미술입니다. 아마 꽤 긴 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그 시작입니다. 제가 그동안 정리해놓은 미술사 강의 노트를 모두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양의 15세기, 16세기는 발명과 발견의 시대로 통칭됩니다. ‘콤파스가 발명되었고 동양으로부터 화약이 전파되어 왔으며, ‘종이가 보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하나가 거대한 역사적 전환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콤파스의 발명은 장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도 이 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화약으로 뭐가 바뀌었을까요? ‘화약으로 인해 기사 계급이 결정적으로 와해됩니다. 이제 전투의 양상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창과 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포와 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기사 계급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종이야 두말 할 필요 없이 인쇄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대는 이렇게 변화합니다. 결국 과거가 물러나고 미래가 다가오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합니다. 종교(구교)의 시대가 물러나고 시민(신교)의 시대가 오게 됩니다. (막스 베버는 한참 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를 이야기합니다만, 실은 이 무렵 시작된 어떤 현상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질문을 해볼까 합니다.

 

진시황은 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을까요? 우리는 분서갱유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진시황은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에 성공한 이입니다. 그는 많은 부문에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사상은 너무 자유로웠습니다. 나라의 모든 것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으나, 사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혼란은 사상이 자유로운 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분서갱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무제는 분서갱유를 거울삼아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냅니다. 그것이 공자 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학을 나라 사상의 근간으로 삼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주류 사상과 비주류 사상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 만나 싸우면서, 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대립하지만, 겉으로는 과학과 예술, 사상의 문제로 포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화형을 당하죠.

 

Ubi materia, ibi geometria. 물질이 있는 곳에 수학도 생겨난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학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중세시대 내내 잊고 있었던 학문입니다. 그 전까지 가치(value)란 질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신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처럼, 가치로 그렇게 유비적(analogical)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초기, 가치를 양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즉 계량화된 가치 체계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르네상스란 바로 이것입니다. 질적 가치 체계에서 양적 가치 체계로의 변화. 르네상스의 이념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질적 가치 체계 속에서 유지되던 것들이 양적 가치 체계로 오면 맥을 추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는 편이 간단할 것입니다.

 

나에게 네 사랑을 증명해줘?’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세인과 근대인의 태도는 극명하게 다릅니다. 중세인이라면,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삶에서 하나하나씩 소박하게 행위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인이라면 사랑한다는 사실을 계량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몇 번 사랑한다고 말을 했으며, 몇 번 데이트를 하고, 몇 번 같이 식사를 했으며, 몇 번 선물을 하고, 몇 번 성행위를 했는가 표현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모든 가치를 수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튼 것입니다. 콤파스를 든 신의 모습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시인이자 화가인 베이컨의 그림을 떠올리면 쉬울 것입니다.) (기하학)으로 이루어진 신이 등장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기하학으로 풀 수 있으니, 이 세상 모든 것에 신이 편재해있다는 믿음으로 달려나갑니다. 이것이 르네상스적 범신론입니다.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우리는 일정 불변의 자연법칙 또는 이 법칙 속에서 호흡을 같이 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고 경건한 느낌을 통해서만 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수학적 법칙이 있고 그 법칙 속에서 경건해질 때 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합니다.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표현입니다. 마치 교회를 무시하고 성직자의 밥벌이를 빼앗기 위해 작정한 듯한 표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화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직 세상은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고 성실했던 수사가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교회는 필요 없는 곳이 되며, 독실한 기도와 성경이 자기 신앙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종교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르네상스적 이념과도 결탁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요즘의 한국 기독교는 과연 마르틴 루터와 칼뱅이 이야기했던 그 기독교가 맞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의 개신교는 루터와 칼뱅을 버리고 중세적 마인드로 복귀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 탓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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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시대의 역사 서문 외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성철 옮김, 책세상

 

 

이 책은 역사학자이자 문화사학자인 야콥 크리스토프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1818~1897)의 글을 우리말로 옮긴 책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학자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르네상스Renaissance’로 더 알려진 학자일 것이다. (여기에서 일반인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지지만)

 

그리스 문화사 서문’, ‘여행 안내서의 16세기 회화 중에서’, ‘혁명시대의 역사 서문’, ‘세계사적 고찰 서문등이 실린 이 책은 부르크하르트의 학문적 태도에 대해 알 수 있기에 매우 유용하다.

 

 

문화사는 과거 인류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그들이 어떻게 존재했고, 원했고, 생각했고, 관찰했고, 할 수 있었는지 말해준다. 문화사는 이와 함께 변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 변하지 않는 것이 순간적인 것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하게 보이고, 하나의 특성이 하나의 행위보다 더 위대하고 교훈적으로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행위들은 해당하는 내적 능력의 개별적 표현에 불과하고, 내적 능력이야말로 그 행위들을 언제나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원했던 것과 의도했던 것은 발생했던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관조 또한 그 어떤 행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일정한 순간에 관조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핵심적 내면을 연구하면,

그가 원하는 것과 그가 행동하는 것 또한 알게 된다네.


-
 
19



부르크하르트는 과거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연구를 이어나간 역사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기존 역사학이 문헌적 사료에 기초해 있었다면, 그는 문헌적 사료 너머에까지 이른다. 예술에 대한 그의 연구는 직관적인 방식이 등장하기도 하여, 마치 작품(문화적 유물)을 보고 자신의 감상을 적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다.


모든 방식에서 제한적인 것이 완전히 무조건적인 것,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 것 자체가 바로 이 작품에서는 일종의 신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매우 강력한 정신이 자신의 모든 귀중한 것을 우리 앞에 열어 보이면서, 각각의 표현과 육체적 조형의 각 단계를 경이로울만치 균형을 이루는 원칙들 안에서 하나의 조화로 통일시킨다.
-  49

 

특히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인식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가 오래된 과거(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보다 못하다는 태도는 그가 역사학적 방법에서 새로운 것과는 반대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음을 드러낸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이런 보수적인 태도는 다소 낯설게 여겨졌다. 100년 이상의 시간들이 가로 놓여져 있고 그만큼 세계가 변화한 탓이리라.

역사학에 관심 있거나 부르크하르트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꽤 흥미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혁명 시대의 역사 서문 외 - 8점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성철 옮김/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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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 6점
제라르 르그랑 지음, 정숙현 옮김/생각의나무


아마 서양 역사에 대한 책들 중 가장 많이 번역되거나 국내 저자에 의해 책으로 나온 시대를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20세기(근현대)와 르네상스가 될 것이다. 서양 미술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정도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텐데, 이 3명의 예술가도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었다. 출판된 책들이나 우리들에게 알려진 인물들로 보나, 르네상스는 서양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이 책은 그 시대 예술에 대한 입문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대체로 재미가 없고 난삽하기 십상이다(그래서 쓰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천연색 도판이 책을 꺼내던 이들을 유혹하지만, 도판은 도판일 뿐이다. 또한 성의없어 보이는 번역 문장은 르네상스를 알고자 하는 독자를 실망시키고 화나게 한다.

책은 13세기 고딕 후반에서 르네상스의 시작, 그리고 16세기 후반 매너리즘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연대 순으로 배열하였으나, 르네상스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보다는 개별 작가와 작품에 대해 언급하며 스쳐지나간다. 문제는 너무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고 각 작가에 대한 설명은 한 페이지를 넘기는 법이 없다. 그래서 독자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다고 생각하나, 기억나는 이름은 없고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에 대해서 읽기는 했으나, 그것이, 그 시대에 현재의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도판이 있으나, 도판의 선정 기준도 모호하다. 체계적인 구도를 가지고 지어진 책이라기 보다는 그냥 편하게 시간 순서대로 병렬적으로 나열해버린 책이다. 그래서 저자는 쓰기 쉬웠겠지만, 독자는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되어버렸다.

* * *

이 책에 나왔던 몇몇 작품들의 도판을 인터넷에서 구해 올린다.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지 모르겠다.


Luca Della Robbia(1400-1482) - 이탈리아 조각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미술관에 소장된 루카 델라 로비아의 칸토리아(Cantoria, 성가대석) 부조다. 15세기(콰트로첸토) 초반 르네상스 자연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어린 아이의 풍부한 표정, 물결치는 듯한 몸의 움직임과 옷주름의 섬세한 표현이 특징적이다. 


아래의 두 작품은 위 칸토리아에 있는 부조들의 일부다. 중세 시대의 부조 작품들이 다소 경직되어 있다면(고딕 성당의 부조작품들), 확실히 르네상스 미술은 우리의 감정에 충실하고 자연스럽다.




Antonello de Messine(1430 - 1479) - 이탈리아의 화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생김새에 대한 의견들도 자연스럽게 오간다. 그리고 결국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대부분의 서양 미술 작품들이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린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바, 혹은 자신들과 함께 살던 동시대 사람들의 얼굴에서 영향받은 것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실은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지만, 종교적인 것에 대한 논의는 늘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15세기 대단한 성공을 거둔 안토넬로 데 메시나의 이 작품은 이후 무수한 작가들에 의해 리바이벌되었다.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1446년, 루브르박물관


안토넬로 데 메시나는 인물들의 표정 처리에 탁월한 감각을 가졌음에 분명해 보인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서 우리는 신중함과 사려깊음, 동시에 결단력을 동시에 느낀다. 이는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수태고지(Virgin Annunciate), 1476년, 팔레르모 국립 미술관, 피렌체


Enguerran Quarton(1420-1466) - 프랑스의 화가

1454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앙게랑 카르통의 '피에타'를 위의 루카 델라 루비아나 안토넬로 데 메시나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카르통의 작품이 딱딱하고 다소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지역에 따른 시대차이다. 동일한 시대라고 하더라도 이탈리아와 나머지 유럽 대륙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제라르 르그랑는 위 책에서는 이 피에타 작품이 안토넬로 데 메시나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실제 그랬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더구나 이 당시에 이탈리아의 화가이 프랑스의 화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 도판은 위키피디아와 http://www.artcyclopedia.com 등에서 가지고 왔으며, 상업적 목적으로는 이용할 수 없는 도판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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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tormo (Jacopo Carrucci)
Visitation, 1528-29
Oil on wood, 202 x 156 cm
San Michele, Carmignano (Florence)


야코포 폰토르모의 작품이다. 슬프고 우울하면서 왠지 몽환적인 느낌을 풍긴다. 매너리즘의 대표적인 화가인 폰토르모는 부드럽고 화려한 색채 속에서 마치 비현실적이거나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처럼, 달콤하고 유려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슬픔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실제로 보았던 폰토르모의 작품은 너무 연약해서 불쾌할 지경이었다.  

바야흐로 시대는 본격적으로 현대를 향해 간다. 16세기 후반 일군의 예술가들이 불러들인 세계는 바로 '꿈'이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유령을 불러들이듯,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그랬다. 현실과는 무관한 자족적인 세계를 구성하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대치하면서,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던 르네상스 사람들 사이로, 현실이 아닌 이론에, 규칙에 안주하려는 일군의 예술가들을 우리는 매너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주의 다음에는 언제나 낭만주의가 오듯, 르네상스가 물러나자 한동안 비난을 면치 못하는 매너리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시대는 예술의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퇴행의 시기였다. 밝고 활기차며 규범적인 세계가 낯설고 화려하면서 우울한 세계로 이행하는 것이다.

폰트로모는 다락방 작업실에서 내려오는 법이 없었고 결국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미켈란젤로와 경쟁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그는 반듯하게 보이는 질서들(고전주의) 사이에 숨은 우울한 개인주의를 드러낸 최초의 예술가들 중의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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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사진을 찍었다. 며칠 날이 흐리다가 화창하게 해가 났다. 걸어 루브르에 갔다.
 

예술의 다리 위에서 세느강 동쪽으로 보면서 찍었다.

잠볼노랴의 '헤르메스'다. 날아갈 듯한 가벼움. 매너리즘 조각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각작품이다.

폰토르모의 작품이다. 화사한 색감의 무너지는 듯한 라인들은 16세기 후반의 심리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성 제롬이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종교적 황홀경을 표현한 작품들은 많다. 이들 작품들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아도 무척 재미있는 스토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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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읽는 서양 문화의 역사 2 - 6점
로버트 램 지음, 이희재 옮김/사군자


깔끔하게 요약된 이 책은 혼자 읽기에는 다소 적당하지 않다. 나같은 독자는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많은 정보에 비해 짧은 설명이 서양 문화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빠져든 서양 문화사는 너무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가슴 아프고 현대 사회나 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로버트 램의 이 시리즈는 혼자 읽기 보다는 대학 교양 수업의 교재로 적당하다.

'후기 중세: 확장과 종합'라는 챕터 제목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면 일종의 발전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문화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교의 위축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보상으로서의 확장과 종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후기 중세에 있어, 심리적 보상은 크게 문화예술의 측면(고딕 양식과 초기 르네상스)와 도시 자본주의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표면상으로는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며, 반대로 이 둘의 협력이 종교 권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실은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이 이 두 가지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러 사실/정보들의 평면적 나열에 그치며 깊이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장점은 있다. 이 평면적 나열이 역사, 미술, 건축, 음악, 무용, 문학에 걸쳐 있으며, 매우 잘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의 교재(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강사나 이에 도전해 볼 강사가 있다면)으로는 매우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가 혼자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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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하인리히 코흐(지음), 안규철(옮김), 한길사


하인리히 고흐의 전기는 미켈란젤로의 일부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이 책 서두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라는 챕터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전기의 일부는 이 논란에 대한 반박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책 속에서 미켈란젤로는 예술가이면서도 피렌체 장사꾼처럼, 자기 스스로는 검소하게 살았지만 은행과 부동산 투자로 대단한 부를 가진 이로,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했던 이로 묘사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술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매우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그려질 뿐이다.

예술(조각)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번뇌와 고민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다른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저자의 독특한 관점이 반영되었다거나 미켈란젤로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얻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이 책의 장점으로는 예술가 미켈란젤로보다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고수하면서 절도 있고 절제된 삶, 그러면서도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인 기반까지도 걱정했던 미켈란젤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부분들을 옮겨놓는다.
 

“나의 예술이 나의 여자다.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것이 나를 평생 동안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자식들은 내가 남기는 작품들이다. 비록 그들이 별로 신통치 않을지라도, 한동안 그것들은 살아갈 것이다. 로렌초 디 바르톨루치오 기베르티(Lorenzo Ghiberti)가 산조바니의 문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가련했을까! 자손들이 그가 물려준 모든 것을 팔아치우거나 쇠락하도록 방치해두었지만 그 문들만은 아직 거기 남아있다.”


미켈란젤로가 독신으로 살았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독신으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종종 동성애자로 오해받는다. 하지만 그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는 언제나 예술 창작에만 몰두해 있었고 그것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에게 이성과의 사랑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연애시를 적기도 하였으며, 후일 한 여성과의 우정을 쌓기도 하였지만, 그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예술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결혼한 여성들보다 훨씬 더 신선하게 자신을 유지한다는 것을 자네는 모르는가? 더구나 음란한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해본 적이 없는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지. 음란한 생각은 그 육체를 왜곡시킬 수 있었을 것이네. 그렇지, 나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자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네. 만약 이러한 신선함과 젊음이, 이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신체에서 나타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의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면, 그것은 성모의 동정과 영원한 순결을 세상에 증언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일세.
반면에 그녀의 아들, 예수에게는 이런 것이 불필요했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드러나야 할 것은 신의 아들이 실제로도 그러했듯이 정말로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네. 그가 보통 사람이 굴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죄업에 대해서조차도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연약했으므로, 신성(神性)은 예수 속의 인간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환과 질서를 인간적인 것에 맡겨야 했네. 그 때문에 예수가 그가 가졌던 바로 그 나이를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이네. 그러므로 나로서는 성스런 동정녀이자 신의 어머니를 그 아들과 비교할 때 나이보다 훨씬 젊게 만들고, 아들이 자기 나이에 맞도록 만든 것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네.”


젊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너무 젊은 동정녀 마리아와 자신의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예수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그리고 위 인용문은 이 의문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설명이다.



나는 죄를 살고 나는 죽음을 살아,
더 이상 삶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해악으로만 사노라.
하늘은 선(善)을, 그 은총을 내어놓는데,
나는 악을 취하네. 탐욕은 나의 빵이 되었고,
자유는 나의 하녀가, 덧없음은 나의 신이 되었네.
저주받은 나! 격정의 오솔길에서
이제 나는 어떤 인생 속으로 흘러들었는가!


우울한 미켈란젤로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대부분의 책에서 언급되는 주제이다. 음침하고 음울하며 사람들과의 교제보다는 혼자 있기를 즐기며, 화를 잘 내고 자기중심적인 미켈란젤로. 하인리히 코흐의 전기에서는 이러한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코흐의 생각이다. 하지만 예술에 몰입했을 때의 미켈란젤로는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위의 시구처럼. 그러나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치명적인 지장을 준 것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 - 10점
하인리히 코흐 지음, 안규철 옮김/한길사
- 절판이라니. 오프라인 서점에서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성 미켈란젤로 - 10점
제임스 H. 벡 지음, 박혜수 옮김/이룸
- 이 책은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미켈란젤로와 일상인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균형있게 담아내고 있다.

르네상스 - 10점
폴 존슨 지음, 한은경 옮김/을유문화사
- 르네상스 예술의 전반적인 것에 대해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당시 미켈란젤로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알기에도 충분하다(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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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i 2007.12.12 21:17 신고

    말씀하신 책들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로스 킹이 지은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은 몇년 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마에 여행가기전에 열심히 읽고 갔는데 정작 시스티나는 못봤다는..ㅠㅠ 국내에는 다다북스에서 올해 낸 모양이던데 번역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못 보셨다면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하는 전반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미켈란젤로라는 인간의 수완과 성격이 잘 드러나는 책입니다. 후진양성 내지 가르치는 걸 그렇게 싫어했다는군요..자기일만 좋아하고. 여자도 싫고 제자도 싫고 오직 일만 좋아하는 일벌레였나봐요. 지하련님도...?^^

    참, 잘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깜빡할뻔 했네요^^

    •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 재미있을 것같네요. 로스 킹이 쓴 <브루넬네스키의 돔>을 읽었습니다.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몇 권의 책들 중 한 권이죠. 약간의(?) 에고이스트적 경향이 있죠. 좀 심하다고 해야 하나. 흐.

      이스탄불에 갔다온 건 무척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내년에는 독일 칼스루헤에 갈 예정입니다. art Karlsruhe에 참가하러. ^^

    • noi 2007.12.15 21:58 신고

      예 저도 <브루넬레스키의 돔> 읽었어요. 저자가 읽기 어렵지 않게 잘 쓰는 사람인거 같아요. 책을 읽고 나니깐 브루넬레스키가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 돔이 완전 달라보이더라구요.. 그게 책을 읽는 즐거움일까요^^

      칼스루헤라.. 일로 다니시는 건줄은 알지만 부럽네요^^

전미숙, ‘인간성과 신성의 조화, Trecento’, 미학-예술학연구, 1992, 2권


논문의 초반과 후반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르네상스의 인간 존엄 사상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으나, 이를 작품 해석으로 연결짓지 못하며 고대, 중세와도 연결짓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다듬어서 발표했다면 참 좋은 논문이 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보라색 글은 내가 부연설명을 한 부분이다.


페트라르카

현세의 경험과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며 세속적 욕망과 종교적 양심 사이에서 갈등함

: 낡은 요소(중세적)와 새로운 요소(르네상스)의 공존.


고딕과 르네상스는 서로 별개의 시대가 아닌, 동일한 감수성 위에서 형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인들이 경멸했던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과 스콜라철학은 르네상스시대와 똑같이 경험적 세계(세속적 욕망)의 부상 위에서 그것을 종교적 세계 속에서 다스리기 위한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종교적 세계를 우위에 두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이 두 세계의 갈등 속에서 경험적 세계를 우위에 두기 시작한다. 즉 동일한 갈등 속에서 어느 것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하나는 고딕, 하나는 르네상스로 나누어진다.



'De Secretos conflictu curarummearum: Decontemptu mundi, 1342~3'

영혼의 자유 또는 정신의 자유의 실현으로서 천상생활의 지복과 지상생활의 매력이라는 두 가지 이상 사이를 방황하는 그의 심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음.


인간의 의지가 육신에 사로잡히면 인간 자신의 근원인 창조주를 잊고 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의 의지가 천국을 향할 때 육신의 욕망이 사라져 고귀한 영혼에 도달하게 되며, 이 끊임없는 정신운동이 영혼의 내면적이며 인간의 계속적인 자기 창조의 과정임. 의지란 동적인 힘.


‘영혼의 갈등’의 제 1부는 진리의 망각을 다룬다. 즉 인간의 도덕적 진리, 덕성과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망각함으로써 야기되는 인간의 불행과 비참한 생활을 다룬 것으로, 인간의 비참은 인간 자유의지의 결과이다. 이 영혼의 병에 대한 치유책은 명상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깨닫고 마음의 평정과 구원의 내먼적 확신을 얻는 것이고 이를 위해 자신의 도덕적 생활을 엄격히 반성하는 일이다. 제 2부는 영혼의 병인 아키디아(accidia)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기독교의 덕성과 신앙으로 귀의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고 했다. 모든 사물과 인간에 내재한 영원한 불안정,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난 뒤 오는 우울감, 그렇지만 그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숙명, 이런 지적 이원성과 영혼의 반복되는 갈등, 세속적 경향 등이 잘 드러나며, 이는 페트라르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르네상스 인간의 공통된 문제였다. 제 3부는 가장 힘든 영혼의 병인 ‘사랑과 명예’의 추구에 대한 참회이며 결국 그는 진정한 명예와 자유를 위해 세속인으로서의 야심을 포기하고 명상에 몰두하라는 어거스틴에게 굴북한다. 이 책에서 어거스틴은 도덕적, 종교적 진리로서 인간이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할 진리이고, 베리타스 여신은 인간의 경험 세계의 진리를 상징한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신의 은총과 천상의 지복을 향유할 수 있는 경건한 생활에 두면서도 사실 그가 강조한 것은 현세에서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은 학문 연구를 통해 덕을 쌓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가능함. 인간은 인간 정신의 한계 내에서 자기 영혼의 설계자이며 자기 세계의 창조자임을 밝힘


인간 중심의 사상은 인간을 신과 동일시 하거나 신의 위치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이다. 신의 세계를 몰아내고 인간 위주의 세계로 만들기 위한.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신의 세계를 천천히 줄어들어 19세기는 무신론자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된다. 우리가 흔히 '모던'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유신론의 세계가 아닌 무신론의 세계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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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ous Persons: Francesco Petrarca
c. 1450
Fresco transferred to wood, 247 x 153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ANDREA DEL CASTAGNO
(b. 1423, Castagno, d. 1457, Firenze)



르네상스인들에게 ‘신은 인간에게 무엇이나 스스로 선택한 바를 갖고 스스로 원하는 바가 되기를 허락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율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


인간 존엄의 사상

‘인간성이란 말은 역사적으로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인간과 인간 이하의 것과의 대비에서 생기는 의미이고 둘째는 인간과 그 이상의 것과의 대비에서 생기는 의미이다. 전자의 경우 인간성은 가치를 의미하고, 후자는 그 한계를 의미한다.’
- 파노프스키


페트라르카와 살루타티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견해는 모두 초자연적인 은총으로서의 구원을, 인간이 파국을 피하기 위해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즉 의지는 자유이며 이것은 신의 섭리와 조화된다. 한편 로렌조 발라는 신의 이미지와 닮은 인간은 삼위일체적 정신(또는 영혼에너지, 지성, 정서)을 가진 실체로 보고, 인간이 신과 경쟁하며 그의 이미지를 닮음으로서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을 성취하게 되는 인간 행위의 열정과 섭리를 강조한다. 이러한 인문주의자들의 인간 존엄에 대한 입장은 첫째, 인간의 존엄성은 신의 이미지와 닮음에서 나왔고 완전한 동화를 위한 진보에 의해 궁극적으로 신성화된다는 점과 둘째, 인간 본성의 지배, 이용 및 지도안에서 신과 같은 태도로 사고하고, 느끼고, 행위함으로써 결국 신성화된다는 두 입장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기반 위에 인간 존엄성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했던 피치노와 피코에서 인간 존엄 사상의 정점을 볼 수 있다.


피치노
고전적 전통과 성서, 플라톤 사상을 모델로 하여 신성화의 성취라는 골격 내에서 현세 인간 존엄성의 명백성과 어거스틴의 사상을 정교하게 종합한다. 인간은 이성의 의지를 통하여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수용, 거부할 수 있으며 우주의 위계질서 내의 한 부분이지만 또는 그것을 초월, 회피할 수 있다 해서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말했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 힘에 관심을 두었지만 현세의 경험과 성취와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깊이 인식했다.


피코
‘인간 존엄에 대하여’

인간은 진화의 소산이 아닌 창조의 소산이며 인간의 신적 근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에 의하면 인간과 신의 관계는 자리바꿈을 하여 인간이 신격화된다. 쿠사누스가 ‘인간은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을 지라도 신이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적인 신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신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나, 부르노가 기독교적인 인간의 자기 감정이 하나님께 겸손한 복종을 한데 반하여 자율성과 창조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다른 신alter deus'으로 지칭하여 르네상스가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한 사실은 인간 자신의 신격화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신의 특별한 창조물인 인간만이 신적인 특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예술에세 인체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신 안에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적 이념이 존재하고, 이는 모든 피조물의 비례는 신의 지혜에서 유래하고 신적 미 안에 모든 피조물의 비례라고 있다고 해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비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인들은 전지전능하신 신에게로 향하는 점진적 안락함 속에서 신의 모습과 닮은 인간의 형태에서 기쁨을 느끼고 특히 인간의 미를 특별히 취급하였다. 그들은 잘 비례화된 인체는 신의 능력과 이데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며 이성으로 확인된다고 믿었다. 인체의 미는 이데아와 이성과의 조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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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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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지음),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한길사(2004년 초판 1쇄)




오랜만에 국내 저자가 쓴 꽤 좋은 미술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시대로 일컬어지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작품 활동을 했던 여러 화가들의 초상화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많아도 특정 시대나 특정 장르에 대한 책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꽤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르네상스 시기의 초상화는 ‘본질적으로’ 권력의 양식이다. 이는 종교 권력이 물러나고 세속 권력이 이를 대체해 나가는 시기에 일어나는 일로서 연대기적으로 초상화 양식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까지 로마의 영향권 속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그린 산 비탈레 교회의 모자이크화를 떠올린다면, 그 모자이크화 속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신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후 거의 모든 작품들 속에서 예수나 성모 마리아, 또는 성인은 언제나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이러한 중세의 성상화 전통 속에서 르네상스 초상화는 시작한다.

저자는 예술가 별로 정리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연구서적이라고 하기에는 전문적이지 않으며 르네상스 초상화 입문서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이 점에서 불만이 있다면 초상화 양식의 변천이 지니는 사상사나 사회사적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어 초상화 양식에 대한 미술사적 이해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개별 화가, 그가 그린 작품에만 집중하여 서술하는 방식이 미술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한 이들을 위한 우호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초상화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닮아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과연 이런 책을 낼 생각을 가진 서양미술사 연구자가 몇 명쯤 될까. 하긴 출판사가 나설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좀 제대로 된 연구서는 온통 번역서들 밖에 없다. 안타까운 인문학의 현실이다.

이 책 319쪽을 보면 ‘독일의 가톨릭 구교권에 뒤러가 있었다면 프로테스탄트 신교권에는 루카스 크라나흐가 있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뒤러가 루터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에라스무스 전기를 읽어본다면 알브레히트 뒤러와 에라스무스 사이에 오고간 편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뒤러는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반대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루터를 인정하고 추종한 것으로 나온다.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혹시나 싶어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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퀜틴 스키너(지음), 신현승(옮김), <마키아벨리>, 시공사, 2001
니콜로 마키아벨리(지음), 강정인(옮김), <군주론>, 까치, 1994(1판), 2000(9쇄)


최근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찬사가 19세기의 유산임을 알았다. 그간 공부를 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 매우 많은 의구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르네상스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19세기의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편견일 수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된 셈이다.

이런 문예 부흥의 시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은 다분히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여지기도, 높게 평가하기에도 애매하다. 그는 공공연하게 '비열한 권모술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퀜틴 스키너는 여기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450여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도, 교활함과 이중성 그리고 정치 문제에 대한 오도된 신봉의 전형으로 지금껏 생존해 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말마따나 소위 '잔인한 마키아벨리'는 각 종파의 도덕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 및 혁명론자들의 눈에 줄곧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비쳐졌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환경 속에서 마키아벨리가 어떤 점에서 틀리며 <군주론> 이후의 저작들을 통해 그가 '고전적 공화주의자'로서 자신의 사상을 어떻게 피력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스키너는 마키아벨리의 문제성 보다는 그의 사상이 가지는 고전적 인문론자로서의 측면을 부각시키는데, 이는 정치학 연구자로서의 입장일 뿐, 다른 맥락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가지는 중요성은 그의 정치학적 측면이 아니라, 그가 16세기의 현실을 그대로 옮겼다는 '심리학적 폭로주의'의 입장에 서있으며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묘한 심리 상태를 유발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크레인 브린튼 같은 학자는 '마키아벨리는 전도된 이상주의자요, 그 자신 과도한 완전성을 원했기 때문에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제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연구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과거의 인물들로서는 거의 해결 불가능한 과제이다. 마키아벨리는 정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지식인'(<서양사상의 역사>, 371쪽, 을유문화사)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퀜틴 스키너의 책보다는 강정인 교수가 번역한 <군주론>를 읽는 것이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이해하는데 더욱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분히 예술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나로선 마키아벨리는 전형적인 매너리즘 사상가 이며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 속에서 분열적 세계 인식을 드러내는 저자로 볼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서술된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크레인 브린턴의 책이나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소외>(종로서적, 절판)이 좋기는 한데, 안타깝게도 이 두 권의 책은 시중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15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의 경제적 주도권을 상실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지리상의 발견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등장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과 세속 권력과의 대결은 종교 개혁이라는 가면을 쓰고 한 바탕 전쟁을 벌인다. 이 때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느꼈던 감정이란 인간이란 거짓말하기를 일삼고 폭력적이며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자 현실 앞에서는 무력하며 자신의 이상은 지켜야만 하는 분열적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현실 정치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래서 스키너와 같은 현대의 정치학 연구자들은 그를 고전적 공화주의자로 평가하고 싶어하지만, 그 평가는 도리어 보는 이로 하여금 씁쓸함을 자아내게 한다. 왜냐면 마키아벨리는 그리스나 로마의 학자들이 주장했던 견해와는 다른 의견을 밝히고 이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케로의 '덕(virtu')'와 마키아벨리의 '덕'은 틀린 개념이 된다.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키아벨리는 <군주론>과 같은 분열적이며 자기 기만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네가 하면 살인이지만, 내가 하면 군주가 되기 위한 뛰어난 전술이 되는 것이다.



군주론 - 10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까치글방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 10점
퀜틴 스키너 지음, 강정인.김현아 옮김/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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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어즐리의 미학사(이론과실천)을 읽고 요약한 글입니다. 오래된 글이네요.)


제 6장 르네상스



비어즐리는 르네상스를 15세기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탄생부터 16세기말 지오다노 브루노의 사망까지로 잡는다. 매우 의미심장한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쿠자누스는 철학사에서는 중세 말기의 철학자로 구분되나, 실제 그가 살았던 시대는 고딕 후기, 또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여기에서 고딕과 르네상스의 시대 구분이 문제로 떠오르는데, 지역적으로 그 사정이 틀리다. 이탈리아의 경우 15세기면 르네상스 중기이고 북유럽의 경우에는 고딕 후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학자들마다 어느 것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구분이 제각각이며 읽는 이가 알아서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술이나 사상에 있어서 시대 구분은 몇 년부터 몇 년까지 확정적으로 나누는 것은 이해의 편의를 그러는 것일 뿐, 정확하게 말한다면 도리어 대략 몇 년 즈음 정도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이탈리아의 경우 스콜라철학의 후퇴가 분명한 사실이었고 이를 대신해 신플라톤주의가 유행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영향을 준 이가 Marsilio Ficino였다. 그는 플로티누스를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플라톤도 번역하였다.

그는 신이 창조한 세계, 즉 "모든 형상과 이데아들의 이 합성체를 라틴어로는 mundus, 희랍어로는 cosmos, 즉 조화체라 부른다. 이 조화체의 매력이 미이다." 이 때 사랑(eros)은 '미에 대한 갈망'으로 정의된다. 사랑은 미의 상 아래에서 선에 끌리는 데 있다. 이제 미의 매력은 여러 요소들의 조화에서, 즉 정신에서는 여러 덕목들의 조화에서, 가시적인 것에서는 색채와 선의 조화에서, 음악에서는 음조의 조화에서 발견된다. "정신의 미는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육체의 미는 눈에 의해, 소리의 미는 오직 귀에 의해 지각된다."

또한 "비례를 잘 갖춘 사람의 그 외모와 자태가, 만물의 창조주로부터 우리 정신이 포착해 가지고 있는 저 인간 개념과 아주 명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인간의 참된 이데아'라는 플라톤적 형상이 있어서, 그것이 현실과 맞아 떨어지고 그래서 그 현실에서 식별되게 된다는 것이다.

지오다노 브루노의 <<영웅적 광신자들에 관하여>>(The Heroic Enthusiasts)도 중요한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감각적 미와 순수 절대적 미 간의 대조를 반영하였고 전자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후자로부터 멀어지고 위험, 저급한 미에 접근하더라도 올바른 정신만 있으면 고차의 미를 사랑하는 디딤돌로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술가는 규칙을 뛰어넘는 특유한 천재, 자유와 활동의 기회를 필요로 하는 영웅으로서 상위의 인간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작품에 스스로의 개성을 각인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혹은 주로) 그의 작품을 그의 것이기 때문에 흥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회화론이 발달하는데, 알베르티, 다 빈치, 뒤러를 통해서 이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은 국내에 번역되어 있으니,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회화는 원래 재현적이라는 개념이 전통적인 데 반해, 알베르티는 시각적 유사성(verisimilitude, 양감과 깊이)을 강조하고 어떤 고차의 상징적 목표에 집착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는데, 새로운 르네상스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즉 그에게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대변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11세기에 지오토, 마사초 같은 화가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마녀사냥을 당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현대의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이렇게 정리한다. "중세기 동안 그림은 삼차원적 대상의 징표나 상징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선이나 색채로 덮인 불투명한 이차원적 평면으로 인식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그림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인용하면, '가시적 세계의 한 단면을 들여다 보는창'으로 인식되었다."

알베르티는 특히 istoria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극적인 주제 혹은 장면'을 뜻하는 단어로 "화가의 가장 위대한 작업은 istoria - 행위, 표현된 정서, 그 과정에 내포된 테마 - 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화가는 다양한 인문 지식이 요구되었으며 동시에 실제로는 깊이가 없는 곳에서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단히 어렵고 특별한 작업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화가는 수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이는 선형 원근법과 비례론으로 연결된다.

알베르티는 '그 본성 상 사물을 아름답게 해 주는 특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아래와 같이 답했을 것이다.

"수, 그리고 내가 마무리와 배열이라고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밖에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다른 부분들의 접속과 결합에서 생겨나서 전체에 미와 우아함을 부여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조화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우아하고 멋진 모든 것들의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조화의 임무는 그 본성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을, 하나의 아름다운 전체를 형성하는 데 힘을 모을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함께 배치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러한 구성이 시각을 통하든 다른 감각을 통하든 우리 마음에 제공될 때마다, 우리는 이 조화를 즉각적으로 지각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예술가이다. 그에게 회화는 학문이었다. 왜냐하면 1. 재현원리는 체계적 정식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며, 2. "회화는 신체의 동작과 행동의 신속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3. 그것은 "명암의 비례 뿐만 아니라 모든 연속적인 양(量)을 다룬다"는 점에서 수학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뿐만 아니라 질까지도 포함하므로 산수와 기하학보다 더 훌륭하기조차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회화는 이 사물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회화를 자연의 손자며 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부르는 것이 옳다." 혹은 화가를 '신의 손자'라 부를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 빈치만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위대한 예술가를 바라보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술가는 장인의 단계를 지나 학자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이는 위대한 천재로서, 신의 영광을 재현하는 이로서 추앙 받았다.

뒤러는, 자신의 두 연구 분야에서 추구하는 수학적 법칙이 회화의 두 가지 근본적 요구, 즉 재현의 정확성과 시각적 질서나 조화 간의 화해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미가 양극단 사이의 중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용성은 미의 일부이며", "어떤 것과 다른 것의 조화는 아름답고 따라서 조화가 결여되면 아름답지 않다. 진정한 조화는 서로 다른 사물들을 결합시킨다."라고 말한다.

“16세기 이래로 음악이 그 영감을 끌어들여 온 두 가지 주요 관념, 즉 표현으로서의, 즉 음의 회화로서의 음악과, 테마에 바탕을 둔 구조로서의 음악이라고 하는 이 두 관념은 르네상스에 그 기원을 두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시와 음악이 긴밀하게 협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개인이 이 두 예술을 결합해서 구사했다는 사실, 그리고 가사와 선율이 합쳐 있는 뮤지케mousike(아우구스티누스의 musika 개념과 유사한)라는 개념이 있었다.

르네상스 음악에서 중요한 미학적 관심사들 중 하나가 음악에 요청되는 정서적, 윤리적 효과가 어떻게 산출될 수 있는가 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한 가지 방법으로 음악적 자원을 증가시키는 것. 즉 보다 풍부한 화성적 언어, 음계의 혼합, 한 음계에서 다른 음계로의 전조, 보다 넓은 음역을 지닌 새로운 악기의 도입 등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방법은 음악을 그 텍스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요세프 짜를리노(Gioseffe Zarlino)의 <>를 인용해보자면, “설명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모방에 의한 것이든 간에 (가사에는 항용이 두 가지가 함께 있다) 가사에서 유쾌하거나 슬픈 제재, 엄숙하거나 엄숙하지 않은 제재, 혹은 점잖거나 음란한 제재가 다루어진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비례에 맞게 결합하여 목적에 부합하는 어떤 멜로디를 산출하기 위하여 그 발화에 담겨진 제재들의 성격에 유사한 어떤 화음과 리듬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의 형식적 특성보다는 그 내용을 형성하는 시에 담겨져 있었다. 이는 알베르티가 istoria를 강조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인 셈이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이후 예술 양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관점들 중 하나이다. (* 철학의 분과학문으로서의 미학에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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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 10점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학고재


르네상스 Renaissance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 학고재






모든 시대는 동등하다. 그러나 천재는 항상 그의 시대를 초월한다
- 월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는 르네상스 개론서라기 보다는 그의 관심을 끌었던 르네상스적 인물들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배경이나 특징, 주요 사건들이나 인물 등과 같은 르네상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구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19세기 말의 뛰어난 비평가였던 페이터의 심미안이나 그의 비평언어에 대해선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의 서문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평가 지망생들에게는 꼭 읽으라고 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지적인 만족을 위하여 미의 엄밀하고 이론적인 정의를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질적 소질, 즉 아름다운 사물에 깊이 감동 받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9쪽)

요즘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미술/음악 작품에 대한 비평문들-나이든 이의 것이나 젊은이의 것이나-을 보면 단번에 글쓴이가 이 작품에 감동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론을 위해 뛰어나지도 않은 작품들을 인용하고 분석하기도 한다.

쉽게 이런 생각을 해보자. 바로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고정시키며 영혼을 요동치게 만들고 시간을 정지시켜버린다고 치자. 그 속에서 그 아름다운 여자 앞에 선 이는 무슨 말을 할까.

아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영혼의 표면이 잠잠해질 때 한 마디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뛰어난 비평이란 이럴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리뷰를 쓰게 되는 이의 글이 '악평'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깊이 감동 받기란 드문 경우이고 감동 받기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듣게 되는데,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전시/공연 리뷰를 쓰는 일은 대체로 한국에서의 사적/공적 관계를 해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례사비평'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데 사적/공적 관계까지 해치게 되니 어떻게 '악평'을 올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제대로 감상하는 법도 모르는 비평가들이 태반인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월터 페이터는 너무 르네상스에 경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는 '르네상스는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프랑스에서 끝난다'라고 말한다. (* 이도 월터 페이터가 프랑스에 너무 빠져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그는 고딕 시기의 프랑스 이야기 두편에서 시작해 피코 델라 미란돌라, 산드로 보티첼리, 루카 델라 로비아, 미켈란젤로의 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르조네 유파, 조아생 뒤 벨레, 빙켈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빙켈만의 경우 르네상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시기적으로는 바로크 후기에 속한다. 하지만 그리스 고전 문화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르네상스적이다.

중세가 종교 중심적이라면 고딕은 종교와 세속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는 시기이며 르네상스는 세속의 승리가 최초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위대한 이교도들(무신론자들)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여기에 대한 월터 페이터의 찬사는 이 책 내내 반복해서 드러난다. 즉 경건한 신앙과 대비해서 현세에 대한 의욕적인 태도와 세속적 의식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인 셈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신화는 바로 그러한 기이한 꽃과 같아서, 그것은 성스러움과 속됨의 두 가지 전통, 두 가지의 감성이 혼합되어 피어난 것이었다."(49쪽)



* 참고로 르네상스에 전반적인 개론서로는 폴 존슨, <<르네상스>>(을유문화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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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폴 존슨 지음, 한은경 옮김, 을유문화사



간결하면서 압축적이다. 단점이 있다면 도판이 없다는 것인데, 조금의 성의가 있다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겠다.

역사와 경제적 배경, 문학과 학문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조각의 분석, 르네상스의 건축, 르네상스 회화의 사도적인 계승, 르네상스의 확산과 쇠퇴로 구성된 이 책은 르네상스에 대한 짧은 요약서로 읽힌다. 더구나 르네상스의 확산과 쇠퇴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13세기말은 아직 고딕 시대였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기운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딕 자연주의와 르네상스는 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설명이 없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요약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르네상스 - 10점
폴 존슨 지음, 한은경 옮김/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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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98년 예술사 수업 과제물로 제출한 리포트이다. 참고용으로 활용하기 바라며, 인용 시 출처를 밝혀야만 할 것이다.


1.
지금 당장 밖에 나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린다면 그것도 하나의 풍경화(landscape painting)가 될 수 있을까? 가령 건조한 표정으로 서있는 건물들이나 건물 앞 둔탁하게 생긴 구조물과 초췌한 빛깔의 나무들, 혹은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그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해서 풀밭이나 산이나 강을 그린 화가에게 깊은 겨울의 우울함으로 물들어있는 도시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들이밀면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화인가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먼저 우리가 여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우리가 '풍경화'라고 할 때의 그 '풍경'과 철학이나 미학에서 말하는 '자연'-풍경화의 대상이라고 여겨지는-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할 것이다. 철학에서 '자연nature'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세계 바깥의 그 무언가를 의미한다. 그래서 주로 문명이나 문화의 반대를 뜻하며 특히 루소에게는 시원이자 어머니였으며 개인과 사회의 인습을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예술에서의 '풍경'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한 양식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래서 원근법적으로 구성된 자연의 대상도 '풍경'이며 추상적으로 구성된 자연의 대상도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19세기의 보들레르는 지금 우리에게 삭막하게 보이는 도시를 그린 그림도 '풍경화'라고 말했을 것이다. 아니 19세기의 모더니스트라면 모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2.
중세적 의미에서의 '자연'은 신적인 것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장원이나 성채, 혹은 도시 주변에 펼쳐진 자연, 정확히 말해 '숲'은 이교적 정신의 소유자들의 도피처였으며, 은둔자들, 연인들, 방랑 기사들, 산적들, 무법자들이 도피했던 곳이다. 자크 르 고프의 말을 빌면, "동방에서는 나무가 문명을 의미했지만 서양에서는 그것이 야만을 의미했다. (... ...) 서양 중세에 있어서 모든 진보는 가시덤불과 소관목, 또는 만일 불가피하거나 기술과 장비가 허용된다면, 거목과 처녀림, 페르스발의 '황량한 숲', 단체의 작품에 등장하는 '침침한 숲'에 대한 개간과 투쟁과 승리의 결과이다."(『서양중세문명』, 문학과 지성사) 즉 후세 사람들 눈에 중세가 어느 정도의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고 믿어지듯이, 중세인들에게 숲은 신의 찬란한 빛이 닿지 않는 않는 곳이었다(낭만주의시대 부활되는 중세란 이러한 숲의 중세였다).

하지만 이러한 중세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조형예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풍경의 묘사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음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왜냐면 중세의 모든 학예활동이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듯이 예술에 있어서의 중세 '풍경'은 중세의 '유비론(doctrine of analogy)'으로 인해 '상징의 풍경(Landscape of Symbols)'이었기 때문이다. 즉 꽃이나 정원, 나무들 모두 종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신의 권능을 찬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성은 고딕을 지나면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라짐과 함께 고대 그리스 이후 잃어버렸던 양식 상의 자연주의도 천천히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랭부르 형제(Limbourg Brothers)의 <<베리 공의 시력(時曆) 그림>>을 통해서 중세 말의 풍경화가 어떠한 모습을 띄었는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15세기(꽈뜨로첸토)였지만 그 당시 북유럽은 아직 고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정확히 말해 '국제고딕시대'). 이 그림에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묘사가 이전과 달리 매우 자연주의적이며 세련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늘은 본래의 파란빛을 되찾았으며 길과 토지는 섬세하게 표현되어있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 우리는 고딕 말에 이루어진 자연주의의 회복이란 다름아닌 자연에 대한 관심의 회복(또는 증대)임을 알 수 있다. 아마 근대의 자연과학이란 이러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3.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고전적인 자연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카디아(Arcadia)의 이상을 회복하길 원했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현실의 자연은 아르카디아가 아니었고 그 때문에 자연 속에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그러한 이상은 명확하고 항구적이라고 여겨지던 기하학에 기초한 원근법으로 반영되었으며 그리고 당시의 풍경화를 특징지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할 사실은 이 당시에 '풍경화'라는 장르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되는 풍경화란 풍경 그 자체를 주제로 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배경으로 사용되는 풍경이라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언제나 고전적 시대에는 풍경은 그리 중요한 주제나 소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보다 고전적이라 여겨지는 피렌체의 화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고전적이며 색채를 중시했던 베네치아에서 풍경화가 많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 풍경화들은 한결같이 목가적이며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이상화된 상상의 자연을 묘사하였다(조르조네(Giorgione)나 티치아노(Tiziano)의 작품들).

그러나 북 유럽의 풍경화는 이탈리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즉 고딕의 자연주의가 더 앞으로 나가 북 유럽에서는 실제 풍경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알트도르퍼(Albrect Altdorfer)의 풍경화가 보여주는 사실성은 베네치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우리가 고전적으로 알고 있는 뒤러마저도 매우 사실적인 몇몇 채색풍경화를 남기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화들은 자연에 대한 동경이나 혹은 거부와 같은,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기초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고딕 시대로부터 이어진 자연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할 듯 싶다. 그리고 몇몇 풍경화들은 '풍속화'나 '지도'의 역할도 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바로크 시대에 있어서 가장 고전주의적 면모를 보인 푸생(Nocolas Poussin)에게 있어 풍경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에다 '질서와 영속이라는 풍채'를 부여하고자 시도했다. 가령, <포키온의 장례식>(1648)과 같은 그림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으며, 자연은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평선적 요소와 수직선적 요소가 잘 조화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푸생은 이런 균형을 얻기 위하여 주로 고대 양식에 따른 건축물과 신전등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이상과 영원함에 대한 감정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대 끌로드 로렌(Claude Lorrain)의 그림은 약간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 풍경의 인상을 최초로 표현한 화가였으며(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언제나 대상을 감싸고 빛나게 하는 빛으로 가득차 움직이는 대기를 통해 작품의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로렌과 비교해, 아니 전 바로크의 화가들과 비교해도 푸생은 확실히 고전주의적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고전주의자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에 기초해있으며 그래서 그에게 있어 아르카디아의 이상이란 한낫 허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이상향 속에서도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있다(Et In Arcadia Ego)'라는 작품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양식 상의 유사점을 들어 상이한 시대의 비슷해 보이는 양식을 동일한 심리적 경향의 반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어떤 항구적인 것을 염원하였음은 분명하지만 르네상스의 화가들처럼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5.
바로크가 정지해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 존재보다는 운동에 더 비중을 두었듯이 이 양식에서 보여지는 풍경화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띤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크적 풍경화라고 말했을 때 이 단어에 가장 적당한 그림은 아마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스텐 성이 있는 풍경>(1636)이 될 것이다. 뵐플린은 여기에 대해 "루벤스는 그것(풍경)을 너무도 판이하게 그려내어 우리는 실제 대상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닌가 오해할 정도이다. 지면은 온통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있고 나무줄기는 열정적으로 휘감아 올려져 있는가 하면 잎부분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다루어져 뤼스데일이나 호베마 같은 화가들은 그에 비하면 극도로 꼼꼼한 묘사가로만 느껴진다"(『미술사의 기초개념』, 시공사)고 말한다.

바로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흥미있는 점들 중의 하나는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비교일 것이다. 이는 풍경화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가령 네덜란드의 몇몇 풍경화가들-야콥 반 루이스달(Jacob van Ruisdal),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마인데르트 호베마의 작품들과 루벤스의 작품을 놓고 본다면 확연히 구분된다. 네덜란드 풍경화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선, 그리고 바로 인접해있으면서 양식상 매우 상이한 것에 대한 의문에 대해선 아놀드 하우저의 견해가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즉 플랑드르는 구교의 세계였고 네덜란드는 개신교의 세계였으며 시민계급이 주류인 사회였기 때문에 플랑드르와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범속한 시민계급의 취향을 위해 풍경화가들이 많았으며 편안하고 끝이 확 트인 풍경화를 주로 그렸던 것이다.

대체로 바로크 양식의 후기 경향이라고 여겨지는 로코코 시대에 풍경화가 활발하게 그려진 곳은 베네치아였다. 특히 이 도시의 궁전이나 운하, 베네치아인들의 생생한 삶을 묘사한 풍경화를 베두테(vedute)라고 불려졌고 이 그림들은 전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달리 실제의 공간과 상상의 공간이 혼합된 풍경화를 카프리치오(capriccio)라고 불렀는데, 이 양식은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풍경을 선호하였고, 환상적인 구성과 장식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베두테와 카프리치오만 놓고 비교해본다면 후자가 더 로코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들이 보여준 페트 갈랑트(fe^te galante)류의 그림들 속에서 우리는 로코코의 화가들이 자연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크에서의 보여주던 자연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다분히 후퇴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자연은 그 생동감을 잃어버리고 화려하고 다분히 향락적인 색채로 치장되어 있으며 도피적이면서 이국적이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아르카디아'가 로코코에 와서 어떻게 변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즉 현실의 색채를 잃어버리고 꼭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한없이 몽환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는 로코코의 풍경은 고전적 신념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의 자연 대신 그들은 꿈 속의 자연을 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6.
풍경화가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낭만주의시대부터이다. 특히 영국의 풍경화가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전해주었다. 특히 터너의 경우 인상주의 작품들처럼 대상과 풍경은 구분되지 않는데, 그가 끌로드 로렌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터너는 로렌의 그림이 지니고 있었던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고요함을 버리고 동적이며 화려하고 현란한, 그야말로 자연이 모든 것을 삼킬 듯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존 콘스터블은 언제나 야외로 나가 스케치를 했으며 자신의 눈으로 정직하게 자연을 파악하기를 원했고 그런 그림을 그렸다.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picturesque'라는 단어는 이 당시 영국 풍경화가들의 그림들에게 붙여졌다. 로렌이 상상 속으로 헤매이고 있었다면 콘스터블은 인상주의자들이 했던 방식으로 했던 자신이 바라보는 바의 풍경으로 다가간 것이다. 아마 인상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주석튜브가 만들어졌다면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들이 한결같이 자연을 소재나 주제로 삼았다고 해서 자연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는 중은 아니었다. 도리어 자연은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크롬웰 서문>에서 '인간은 지상을 향하여 몸을 구부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향인 하늘을 몸을 내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를 거부했으며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자연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기보다는 이해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을 의미하였다. 특히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일련의 작품들에서 인간은 보이지 않거나 고작 뒷모습만을 드러낼 뿐이며 언제나 자연풍경은 광대하며 끝없이 이어져 있다.

칸트의 '숭고'는 낭만주의의 풍경화가 무엇을 의도했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단어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숭고의 느낌은 무형이나 기형(광대함 혹은 강력함)에 직면할 때 체험된다. 미가 오성과 관계한다면 숭고는 이성과 관계하며 생명력의 일시적 정지에 따른 감동이며 외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나 낭만주의의 풍경화 속에서 인간은 고전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중심의 자리를 상실하고 풍경 속에 묻히거나 그 일부가 된다.

7.
낭만주의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말한 최초의 거대한 흐름이었다면 인상주의는 그것을 극단까지 밀고간 양식이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영국 풍경화가들가 인상주의를 잇는 19세기 초의 프랑스의 화가들, 으젠느 들라크르와, 장 바띠스트 까미유 꼬로, 사를르 프랑스와 도비니, 나르시스 디아즈, 귀스타브 꾸르베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한다면 이 글은 매우 길어질 것이고 한편으로는 이들이 바라보았던 풍경들은 바로 인상주의의 풍경화로 귀결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듯싶다.

이제 '자연 그 자체'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화가들의 풍경은 인간의 눈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풍경이었지만 인상주의에서의 풍경은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풍경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내가 보는 풍경과 네가 보는 풍경은 다르며, 그래서 진정한 자연주의란 한 개인의 감각 경험에 집중하는 것이며 이제 풍경화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변화에 충실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시대, 19세기 후반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의 이상성이라든지 숭고함, 또는 루소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를 실현하는 인상주의는 자연의 광경을 계속 새롭게 하기 위해서 순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버린다.

발레리가 문학에서 있어서 묘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묘사란 일반적으로, 위치를 바꿔 놓아도 좋은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방을 그 순서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련의 문장으로 묘사할 수 있다. 시선은 원하는 대로 방황한다. 이런 방황보다 더 자연스럽고 더 진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진실은 우연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방식과 똑같이 우리는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행동에 의해 지배되는 행동의 종속물로서, 풍경은 멋있는 것이 있는 장소, 몽상의 거주지, 방심한 눈의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는 인상이 승리한다. 질료와 빛이 지배한다.'(폴 발레리, 『드가, 춤, 데생』, 열화당)

인상주의의 풍경화-모네, 피사로, 드가, 르느와르의 작품들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자연'적이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즉 자연법칙이란 항구적이지도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 그 자체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자연이란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구성해내는 각기 다른 자연들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주의자들이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 대신, 그 반대 급부로 자리잡은 자연에 대해 한없는 경외감을 품었다면 인상주의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마저 무시하고 아예 '자연은 상상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보들레르나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한 오스카 와일드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술가들이 집중하는 것은 외부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내부 세계로서의 자연이며 그 속에서 풍경화는 구체성 대신 추상성을 띄기 시작한다. 세잔느의 기하학주의는 이러한 경향의 최초의 움직임이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세잔느는 '사람의 얼굴도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려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예술가는 이 완벽한 예술작품을 쫓아야만 한다. 모든 것은 자연에서부터 나온다. 즉 우리는 자연을 통해 존재하며,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란 오직 자연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파악한 자연은 외부 세계에 있는 자연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 있는 자연이었다. 그래서 인상주의 이후의 풍경화를 '내면의 풍경화'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 보론 - 자연주의에 대하여

자연주의란 사실주의라는 단어에서 가치나 도덕, 혹은 신념 따위를 뺀 용어이며 이 용어 또한 사실주의와 비슷하여 그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예술사에서 자연주의는 사실주의보다 그 사용이 더욱 빈번하고 위의 글에서는 나는 '자연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이 글 내에서 자연주의가 어떤 용례로 쓰였는가를 말해야 옳을 듯 싶다.

자연주의란 이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기 보다는 다분히 심리적인 그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 용어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보다 인상주의의 그림을 더 자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딕의 조각들이 로마네스크의 조각보다 더 자연주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자연주의적이라고 말할 때 그 기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의 기초는 우리의 지각에 있다. 우리가 보는 바 우리의 감각에 더 충실한다면(매우 모호한 표현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에게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이 더 자연주의적인 양식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반자연적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감각으로 받아들였던 자연을, 그들의 작품들을 통해 도리어 자연을 부정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의 '자연'과 '자연주의'를 혼동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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