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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모더니즘 +39


리퀴드 러브 Liquid Love 

지그문트 바우만(지음), 권태우, 조형준(옮김), 새물결 




예전같지 않다(그런데 이 문장은 식상하면서도 낯설다. 여기서 '예전'이란 언제를 뜻하는 것인가, 정작 나 자신도 그 때를 지정할 수 없는). 나도, 이 세계도. 


세상이 바우만이 바라보는 바대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변한 세상을 정확하게 바우만은 읽어내는 것일까. 이 책을 읽기 전에 이토록 절망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리라곤 생각치 않았다. 적당하게 우울할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곤. 


우리 시대에 아이는 무엇보다 정서적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부모가 되는 기쁨은 자기 희생의 슬픔 그리고 예견할 수 없는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과의 일괄 거래 속에서 온다.  - 113쪽 



그는 모든 것을 소비 사회라는 필터를 통해 해석하고 재배열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로 그렇게 해석하고 이제 관계가 아닌, 언제나 연결/단절을 선택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에 사람들이 놓인다고 진단한다. 더 큰 문제는 현대인들이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소비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Louise France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외로운 사람들에게 디스코텍이나 싱글 바는 아득한 추억"이라고 그녀는 결론 짓는다. 그들은 그러한 곳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 필요한 친교술을 충분히 배우지 않았다(그렇다고 해도 걱정하지는 않는다).  - 161쪽 


사람들, 아니 우리들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유대를 맺었던 예전 관계가 무너지고 파편화되었는가를 담담하게 말한다. 마치 마트에서 소비 생활을 하듯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맺고 성도 사랑도 그렇게 소비된다. 이제 사람들은 직접적 친밀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가상적 인접성의 테두리 안에서 휴대폰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방으로 들어가 혼자 지낸다.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다. 


소비 생활은 가벼움과 속도를 좋아한다. 또한 그것들이 조장하고 촉진키켜 줄 새로움과 다양성을, 소비하는 인간의 삶에서 성공의 척도는 구매량이 아니라 구매 빈도이다. - 131쪽 


소비사회와 도시는 함께 성장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즐거운 소비 생활로 위로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공동체(커뮤니티)는 가상의 의미로, 상상된 채로 머물고, 어쩌면 현대인들 대부분은 불법체류자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현대국가는 '무국적자들 stateless persons', 불법체류자들 sans papiers 그리고 살 가치가 없는 삶unwert Laben이라는 이념과 동시에 등장했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homo sacre' 즉,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한계 밖으로 내던져진 인간은 누구든 면제시키고 배제할 수 있으며, 어떤 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의미도 없기 때문에 목숨을 빼앗아온 어떤 벌도 받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주권자의 권리를 궁극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자들이다. 바로 이들이 후대에 환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8쪽 


현대 소비 사회의 사랑, 성, 가족, 사회와 도시를 절망적으로 진단하고 있지만, 그 지점에서 딱 멈춘다. 대안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뿐, 그저 절망할 뿐이다. 책 후반 칸트를 언급하지만, 칸트에 관심을 기울일 정도가 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터뷰 기사를 여러 번 읽었으나, 그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초반 잘 읽히지 않았으나, 중반이 지나자 술술 읽혔다. 대체로 어딘가가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 현대 사회를 진단하는 어조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은 아닐까. 리처드 세넷의 초기 저작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후반부에서 칸트를 인용하는 건, 다소 의외였다. 하버마스에 대해선 이상주의적이라 여기는 듯하다.


책을 읽고 난 다음 바우만의 주저인 <<액체근대>>를 구하긴 했으나, 글쎄다. 도리어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와 세넷의 <<공적 인간의 몰락>>을 다시 읽을까 생각했다. '러브'라는 단어로 인해 사랑에 대한 철학적 이론적 분석이라고 오해하지 말자. 책은 읽을 만 한데, 이 책보다는 바우만의 다른 책을 먼저 읽는 것이 바우만을 아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 드는 기분은 꽤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리퀴드 러브 - 10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 & 조형준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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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88458 



잠을 자고 있는 두상이라는 주제에 대해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거의 20년 이상 몰두했다. '잠자는 뮤즈'를 구상하고 작업할 때, 그는 근본적인 형태와 단순화된 세부를 위해 개념들(ideas)을 줄여나갔으며, 이를 위해 극적인 요소와 디테일을 피했다. 그는 관성으로 인해 무겁게 내려앉은, 그러면서 평화롭게 쉬는, 바닥에 엎드린 머리의 모습으로, 나른함(languor)의 본질을 만들었다.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설명을 번역함. 


 

*     * 


저런 잠이라면, 영원할 것만 같다. 1910년, 브랑쿠시는 왜 저런 잠을 꿈꾸었을까. 잠은 죽음과 맞닿아있고 꿈과 연결된다. 삶은 멈추고 운동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 네 태양은 지고 내 어둠은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은 잠시 숨을 고르고 떠나간 연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본다. 어쩌면서 우리의 모든 착오, 실수, 잘못, 그리고 실패한 사랑까지도 저 무거운 잠은 가지고 갈 것이다. 가지고 가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단순화되면서 명료해지고 매끈해지면서 상처는 사라진다. 


그것은 어떤 종결이면서 시작이다. 우리를 아프게 했던 드라마는 흐릿해지고 그 날의 고통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브랑쿠시의 저 우아한 모더니즘이 향하는 위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소란스러운 시절이 가고 고요하고 안정된 평화가 온 것이다. 적어도 저 잠자는 뮤즈 옆에서라면, 그런 평화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www.eroiiromanieichic.ro/constantin-brancusi-i/ 

잠자는 뮤즈의 실제 모델인 Baroness Rene Irana Franc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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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1928 ~ 1984) 




현대 도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가 있다면, 그건 사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적절한 작가가 있다면 바로 게리 위노그랜드가 될 터. 





예술에서의 모더니즘Modernism은 도시와 함께 시작한다. 보들레르는 근대 도시 파리를 걸어다니며 모더니티를 이야기하고 익명성에 주목했다. 그 도시의 산책자는 파리를 지나 뉴욕에 와 자리잡는다. 





거대 도시에서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전화를 거는 사소한 일상도 드라마가 되고 어떤 사건의 시작이거나 종결, 또는 클라이맥스가 되기도 한다.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며 의미들 속에서 한 없이 가벼워진다. 거리에 나서면 발가벗겨지는 기분과 함께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희열에 들뜬다. 





길을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건 매우 드문 일이다. 정해진 길로만 다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도시에서는 모든 것들이 모험이 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도시적 삶이 익숙한 당신은 천성적으로 모험가이면서 탐험가다. 

 



이제 안전한 사랑이란 없다. 도시에서는 사랑마저도 모험이며 탐험이 되고, 사랑을 찾기 위해 도시에서의 밤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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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번역자인 김혜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이우환의 글들은 주로 1960년대 말 쓰여졌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출간된 이 책을 2000년에 일본에서 재 출간하였고, 2011년에 한국의 학고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책은 일본 미술계의 ‘태풍이면서 바이블’이었다. 


우리는 이우환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며 일본 현대 미술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그의 일부 글은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 받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우환은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다음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그런 다음 한국 미술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1960년대 말 이우환은 현상학에서 바라보는 바,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시각을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모노하(もの派)라는 미술 운동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술 이론가 이우환을 제대로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탄탄함과 생생함이 가시질 않는데, 60년대 말, 70년대 초 메를로 퐁티,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현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를 질투했을까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1960년대 말의 이우환만큼 탁월한 식견으로 뛰어난 글을 쓰는 미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를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테이블이나 의자, 풍경 자체는 아무런 시각적인 원근법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다. 실재는 인간의 가치 조정 없이 스스로의 거리를 가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 쪽이 중심이 되어 저 쪽을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표상 관념에 의해 시야의 세계를 원근법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110쪽)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한다. 그는 근대 철학은 실제 세계와는 무관한, 우리 관념의 표상을 상정하고 그 표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고 말한다. 즉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념으로 해석, 투영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바 외부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현상학자들, 특히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는 바이며, 그 외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메를로 퐁티에서 출발해 니시다 기타로에 이른다. 



우리의 신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미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행위하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표현 행위인 것이다. … … 행위하는 것과 보는 것이 결합하는 곳에 신체가 있다. 행위적-직관적으로 사물이 보이는 곳에 신체가 있는 것이다. 

- 니시다 기타로, <인간의 존재> 중에서(227쪽 재인용) 



… …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온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 니시다 기타로, <무의 자각적 한정> 중에서(228쪽 재인용) 



관계항2007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이우환은 이미 1960년대 근대 철학, 근대성(Modernity)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방향이나 실천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그 전에는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뭐지?)


그가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 활동은 이런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공간인 동시에 시간인 지점이 열리는 순간, 시간은 동시성의 장소로서 만남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오는 시간도 가는 시간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의 안과 밖이 상호매개되는 열린 만남의 세계라는 점에서, 비대상적 차원인 것이다. (231쪽)



이런 측면에서 그는 상당히 관념적인 작가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특히 그가 지향하는 미니멀한 표현 방식과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나는 니시다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삼아, ‘무의 장소’를 관계성의 표현을 통한 무한한 울림-여백으로 전개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 

(… …)

예술의 과제는 인간이 더욱 직접적인 세계로 해방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어떻게 열어 제시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의 상태성으로부터 그것의 현재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242쪽) 



딱딱한 미술 이론서인 관계로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술 전공자에게 추천하기에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 어렵다. 실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무안하게 여겨질 정도다. 1960년대 말 쓰여져, 그 당시 일본 미술계의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을 두고 '어렵다'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직까지 한국 문화, 예술계의 지적 토양은 1960년대 말 일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근대 철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거칠게 나누고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다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실은 그의 목적, 원근법적인 서양 근대 미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하긴 이 책은 전문 철학 서적은 아니니... 


미술 이론 전공자이거나 비평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만남을 찾아서 - 10점
이우환 지음, 김혜신 옮김/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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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에 대한 세잔의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바가 없었다. 현대미술에 대한 세잔의 영향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큐비즘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현대 미술가들은 세잔의 후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 내가 현대 미술에 대한 긴 글을 쓴다면, 뒤샹과 세잔만으로 글의 초반을 장식할 것이다. 뒤샹은 현대 미술을 난장판으로 만든 이라면, 세잔은 현대 미술을 견고하게 만든 이다. 과거와 단절하고 현대 미술이 끊임없는 혁신을 감행하게 된 계기는 뒤샹이고, 현대 미술이 과거의 역사와 단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현대 미술 또한 서양 미술사의 한 챕터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에 한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세잔이 될 것이다. 


그는 현대 문화의 내향성을 최초로 들어내 보이며, 우리 마음 속의 기하학에 주목했다. 고전적 현대, 혹은 모더니즘을 새로운 고전주의라고 불리게 만든 예술가이다. 그리스 고전주의,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외부에 존재하는 기하학을 찾았다면, 세잔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임을 드러냈다. 


큐비즘은 세잔의 직접적 영향 속에서 기하학주의를 전면에 드러낸다. 세잔 이후 모더니즘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하학주의로 예술을 지배한다. 아마 연구자들은 프랑스의 누보 로망이라든가, 전후 실존주의 문학이라 이후의 문학들 속에서도 기하학주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래 피카소와 세잔의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나에게 여유가 된다면, 이와 비슷한 음악과 문학 작품을 찾아 나열해볼 수 있을 텐데.. 아직 그럴 여유가 없구나.) 



Pablo Picasso, Bread and dish with fruits on the table, 1909, oil on canvas, 164 x 132.5cm, Kunstmuseum, Basel 





Paul Cezanne, Still Life, oil on canvas, 60*73cm,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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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러한 이념의 회화적 대응물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재현적 요소도 없다. 그것은 서로 단지 네모들의 집합일 뿐이다. 세계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추상적 창조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모방으로써의 예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이제 창조로써의 예술만이 남게 되었다.(307쪽) 



이렇게, 묵시록적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사에 대한 소개나 이해로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 하나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상학적 해석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예술(혹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히 그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고, 그 시대의 생각, 사고, 감정, 웃음과 눈물을 편견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책이 때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시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시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도 못하는데, 어찌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그렇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와는 다소 떨어진 어느 자리 쯤에 위치해 있고 지금의 예술가들이 변방에 있듯이(혹은 소수의 지지 속에서)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나와는, 우리와는 참 멀리 있는 듯 느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이해를 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한 권이 될 것이다. 그것도 한국을 떠나, 세계적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굳이 필요없다. 그냥 사서 읽으면 된다. 비단 예술에 관심있는 이뿐만 아니라 인문학에 관심있는 이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함수의 도입과 바로크baroque 예술의 발생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함수는 이제 근대 세계에 있어서 중시되기 시작한 운동법칙, 곧 인과율의 수학적 표현이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이러한 함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과 X축의 독립변수의 연속적 변화에 따른 종속변수의 운동법칙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 몇 점만 보아도 금방 확인되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 해명이 없는 예술사는 도상학이나 도상학적 연대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필자는 인간의 정신이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형이상학적 해명은 필자의 신념이다. 고딕은 단지 건축적 기법의 문제가 아니며, 다위니즘Dawinism은 하나의 생물학적 가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심미적이거나 학구적인 업적도 동시대의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시대 이념의 선구이거나 반영이다.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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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예찬

지오 폰티(지음), 김원(옮김), 열화당 





너무 늦게 이 책을 읽은 걸까. 나는 지오 폰티가 적어나가는 건축과 예술의 새로운 표현들을 접하며 건축이 왜 예술과 멀리 떨어지게 된 걸까 하는 의심을 했다. 아마 한국에서는 건축 관련 학과가 예술대학과 멀리 떨어진 탓이 클 것이라는 추측만 했고, 예술의 역사에서 건축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이 책, 놀라운 책이다. 지오 폰티는 우아하게 건축과 예술을 찬양하며 현대적 예술이 지향해야 되는 바를 이야기해준다. 



건축 속의 침묵으로 인해 건축을 사랑하라. 그 속에 건축의 목소리와 은밀함과 강한 노래가 감추어진 침묵으로 인해 (17쪽) 



기계는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학의 소산이다. 건축은 꿈의 소산이다. 꿈과 같이, 건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꿈은 제자리에 머물다가 사라질 뿐이다. 건축은 정지해 있다. 정지한 생명, 다시 말해서 희열의 생명을 지닌다. (46쪽) 



건축과 예술에 대한 경구들의 모음집 같은 이 책은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실은 어느 주장은 내 생각과 달랐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도리어 나는 왜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나 후회하고 있었다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건축이 지니는 형이상학적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줄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건축과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깨우치게 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건축은 꿈에 속하는 것이다. 삶은 꿈이다. 예술은 그 꿈의 환영이다. 그 환영은 우리의 진리다. (189쪽) 





건축예찬

지오폰티저 | 김원역 | 열화당 | 2008.05.07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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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ppy Lovers 

Gustave Courbet, oil on canvas, 77*60cm

1844 



외근 후 바로 퇴근하는 길, 서점에 들려, 참 오랜만에 미술 잡지 한 권을 샀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은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 하나. 행복한 연인.


... 뭔가 작위적인 느낌을 풍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사랑하고 있다, 혹은 있을 것이다. 적당히 흥분해 있으며 이미 마주 잡은 두 손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음악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내 사랑의 단어가 그녀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갔음을 기뻐하고 여자는 이 남자를 가졌구나 하며 안도의 미소를 띈다. 그들 뒤 배경은 먼 듯 가까운 듯 흐릿하고 군데군데 보이는 붉은 빛은 화창하던 오후가 끝나는 어느 무렵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포도주를 마시러 갔을 것이다. 쌉싸리하게 입 안을 풍요롭게 하는 메독 지방 포도주를. 


하지만 쿠르베는 이들이 헤어질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절정의 순간에 묘한 표정으로 쟁취한 듯한 그들의 미소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어, 이게 사랑이야? 진짜 그래? 


마주 잡았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고, 서로 껴안고 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다. 아마 쿠르베도, 나도, 그도, 그녀도 모르겠지만. 


아마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내'가 있듯이, 

사랑은 없고 사랑하는 내가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개념이나 정의는 뒤로 밀리고 오직 행동하고 실행하는 내(moi)가 있는 세상. 

쿠르베는 다시 묻는다.

이 연인은 정말 행복한 것일까? 



* 쿠르베가 언급된 다른 글들. 


2007/07/29 - [예술의 우주] -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쿠르베

2005/08/30 - [책들의 우주/예술] - 명화를 보는 눈, 다카시나 슈지

2002/10/06 - [책들의 우주/예술] - 클라시커 50 회화, 롤프H.요한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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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Tiempo de Silencio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Luis Martine-Santos(지음), 박채연(옮김), 책세상 



스페인 원서. 주인공 페드로는 실험쥐를 통해 암을 연구한다. 실은 페드로가 현실 세계 속의 실험쥐였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이 책을 번역한 박채연 교수(서울디지털대학교)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 보낸다. 그녀의 번역이 정확한지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을 번역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번역을 했고 출판까지 이룬 것에 대해 독자로서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대 스페인 소설의 기원’이라는 찬사를 받는 소설이지만, 실은 한국 독자에게 동시대 스페인 소설가는 낯설기만 하다. 소설은 현대적 서술 기법들이 망라되었으며, 게으른 독자를 쉽게 무시하고(그런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지도 않겠지만), 종종 문장 하나는 너무 길어져 독자의 집중을 요하기까지 하니(아니 번역된 소설이 이래서야!), 이런 소설을 읽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바라건대, 이 소설은 반드시 읽혀야 한다. 산토스의 ‘침묵의 시간’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시사점을 가진다. 


첫째는 소설 기법의 측면에서 현대 소설이 가져야 하는 여러 가지 미덕을 한 눈에 보여준다고 할까. 산토스 스스로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은 ‘의식의 흐름’ 뿐만 아니다. 서술의 강약이 적절하게 조절되어 있어, 어느 경우에는 장황하다 싶을 정도의 서술과 묘사가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 문장들은 짧게 끊어지며 소설 속 인물의 심리를 드러낸다. 자주 화자가 바뀌지만, 어색하지 않고 독자는 인물들의 심리를 자신의 마음처럼 읽고 지나가며 사건이 아닌 실재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두 번째 시사점은 서사적 측면에서의 시사점이다.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여러 번의 투옥 경험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현실 참여적인 작가였고, 이 소설 또한 대놓고 박제화된 지식인-주인공 페드로-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현실적 무능함을 극대화시킨다. 결국 아무런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현대 스페인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며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역설한다고 할까. 페드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너무 현실 세계를 쉽게 보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였으나, 그 행동이 잘못 되었을 경우를 고려하지 않는 유아적인 태도, 그리고 심지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만 하는 그의 행위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모른 체 하고 그것에 대해 그 어떤 개입이나 참여를 하지 않고 용기 없고 무책임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이 소설은 형식적 측면에서도 전위적이며, 서사적 측면에서도 전위적인 셈이다. 



1986년 스페인에서 영화로도 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은 참 슬프다. 페드로는 암 연구를 하는 젊은 의학 연구자일 뿐이다. 그가 우연히 휘말린 어떤 사건은 그의 인생을 정반대로 이끈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외부 세계는 그와 적대적이었으나, 심지어 그는 그가 외부 세계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마저도 모른다. 너무 선량해서 어리석고 무능하며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자까지도 잃어버린다. 그래서 문장은 종종 감상적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추악한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동정과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다. 어쩌면 산토스 스스로는 자신이 버리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겨울, 진짜 소설에 도전해보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한다. 적어도 현대 소설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순 있을 테니까 말이다. 






침묵의시간

루이스마르틴산토스저 | 박채연역 | 책세상 | 2005.12.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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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가에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을 보았다. 여기서 '보았다'는 그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의미이지, 그 책을 다시 읽었다는 건 아니다. 반가웠다. 대학 시절 한 번 읽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또 한 번 읽었다. 이번 가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루쉰(노신)의 마음도 요즘 내 마음 같았을까. 대학시절 '아큐정전'을 읽었으면, 그 짧은 소설이 가진 거대한 힘 앞에서 나는 절대 이런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 시대는 루쉰의 시대가 아니므로, 그런 소설을 쓸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도는 법. 우리 시대가 다시 이렇게 어두워지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잘못된 것일지라도 과거는 흐릿해지며 아름다워지기 마련이고, 그 과거 화려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겐 끔찍했고 비합리적이었으며 심지어 절망적으로 죽음을 불렀던 그 때 그 시절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고 말없고 무관심하고 심지어 자신의 일로 닥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지금 당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손사레를 치는 대중은 오직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요즘, 루쉰(노신)은 다시 읽을 만한 작가가 되는 셈이다. 





*** 

2005년 1월 15일 메모한 글. 



노신의 여러 글들을 모아 옮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욱연 편역, 도서출판 창)를 읽었다. 노신의 글들을 벗 삼아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중문학을 전공하신 백원담 교수에게 강의를 들은 이후, 노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다가 최근 홍대 앞 헌책방에서 이 책이 눈에 띄어 구입하여 읽게 되었는데, 대학 때나 지금이나 역시 거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현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가는 이다. 페어플레이도 그만한 상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추근(秋槿: 중화민국의 여성혁명가)여사가 바로 밀고로 죽었다. 혁명 후 잠시 <여걸>이라고 불리더니,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혁명이 일어나고, 그녀의 고향에 도독(都督: 군사 책임자)이 부임했는데, 그녀의 동지인 왕금발(王金發)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주모자를 체포하고, 밀고 서류를 수집?조사하여 복수를 하려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 주모자를 석방하였다. 듣자니, 이미 민국이 된 마당에 구원(舊怨)을 새삼스레 다시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그 왕금발은 원세개의 앞잡이에게 총살을 당하였다. 여기에 힘을 도운 자는 바로 그가 석방해주었던 사람, 추근을 살해한 그 주모자였다.

그 자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는 자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중에서, 143쪽


혹자는 문학은 궁할 때 탄생한다고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궁할 때는 문학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만 해도 곤궁해지면 사방으로 돈 구하러 다니느라 글이라곤 한 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월급을 받게 된 다음에야 책상에 앉아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바쁠 때 역시 문학은 나오지 않습니다. 짐을 진 사람은 짐을 내리고서야 글을 쓸 수 있고,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놓고서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 <혁명시대의 문학>중에서, 213쪽


여기서 조금만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생계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공산당의 특기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큰 착오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것을 실행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입니다. 둘째, 애인을 위로해 주십시오. 그런 것은 혁명으로의 길과는 정반대라는 게 세상의 여론인 듯하나, 이는 개의할 바가 못 됩니다.

- <미래를 지나치게 밝게 본 잘못>중에서, 176쪽


                                       *                                         *

 

노신을 읽고 느낀 바를 조금 적어보려다가 그만 둔다. 차라리 노신의 산문집을 한 번 더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소설가를 이웃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쉬지 않고 욕을 해대다가 어떻게 운 좋게 그 소설가가 베스트셀러라도 만들면 '그러게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칭찬해대는 게 사람들이니. 그러면 그 소설가가 대단한 걸까? 나는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확실하게 고전주의자이다. 먹여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그는 돈을 벌어야한다. 어떻게든. 예술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독재자가 한 사람을 죽일까, 아니면 <모나리자>를 태울까 할 때,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모나리자>를 선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나이가 들고 보니, 만 년 전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죽게 될 것을 조금씩만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산다면 이 세상은 분명 좋은 세상이 될 터인데.

 

희망을 만드는 것은 현실의 고통 때문이지, 미래에 대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애초부터 미래란 없어도 무방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루쉰문고 6

루쉰저 | 김하림역 | 그린비 | 2011.07.1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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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 8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인디북(인디아이)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지음), 육후연(옮김), 인디북 


- 이 소설에 대해 간단한 평을 쓰려고 인터넷서점을 검색해보았더니,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었다. 그 전집을 보고 있으니, 이젠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오에 겐자부로 소설 전집이 떠오른다. 그 때 그, 오에 전집을 다 사둘 걸,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살 생각은 없다. 이미 소세키의 소설 다수를 구입한 터라, 소세키를 읽을 때마다 사서 읽는 편이 좋을 게다. 


이 책은 소세키의 소설들 중 가장 대중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꽤 유쾌하고 작은 소극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주었던 바, 지식인의 고뇌, 현대적 삶의 쓸쓸함, 정적인 서술과 표현 속에 담긴 감정의 섬세한 포착 등은 보여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전혀 소세키스럽지 않다.  

집중해 읽으면 두 세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냥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합리적이며 억지스러운 선생들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있으나, 나는 도리어 '도쿄와 지방 사이의 차별'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러한 지역 차별에 대해서는 패트릭 스미스의 '일본의 재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독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시간 안에 나쓰메 소세키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하진 않겠다. 




*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 대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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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망각 - 10점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쇼가 마주 했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자, 연애담, 그리고 이론적 방향에 대한 개요이다. 그래서 연구자에겐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연애 아포리즘이 될 수 있다. 

책은 읽기 편하고 내용은 어렵지 않다. 연구자에겐 어려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리스 블랑쇼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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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10점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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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10점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새물결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지음), 김덕영, 윤미애(옮김), 새물결 



국내에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 ~ 1918)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였으며(신칸트주의자이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다), 사회학, 미학, 문화비평을 아우르며, 동시에 그의 글들은 대부분은 현대 문명이나 문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정신, 일상, 태도, 형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고, 그의 문장은 짧으면서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런 글을 썼다는 점에서 놀라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발터 벤야민 이전에, 그 누구도 이런 식의 글을 본격적으로 선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57쪽)이고, 이 형식 밑에는 ‘모방’이라는 태도가 흐르고 있다. ‘모방은 우선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투자되는 에너지가 헛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56쪽).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이 거의 없는, 쓸모 없는 개인적 차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게오르그 짐멜을 읽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확실히 그는 한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새벽에 읽어나, 지난 몇 주간 읽었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끝냈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번뜩이는 짐멜의 통찰력은 놀라웠지만, 전체적으로 '짐멜의 사회학이란 배부른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쓸모없는 지적 유희'라는 주류 학계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부분적 동의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짐멜은 그의 지적 재능을 낭비한 경향이 심했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은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역자가 고르고 고른 글이었을 텐데 말이다. (2013. 4. 8) 


적어도 그는 전통적 인문학이 원하는 바의 '어떤 체계'를 벗어나 인상적이고 표피적인 일상의 현상을 분석하였다. 그는 편지, 식사, 유행, 손잡이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글을 썼다. 그의 글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시도 자체가 마치 유행과도 같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어떤 것에 대한 감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감상이 아무리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도 하더라도 그는 짧은 글들을 적었고 학문의 체계를 향하던 그 당시 다른 학자들 - 뒤르켐, 베버 등 - 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력하게 짐멜 읽기를 권하는 것은, 내일 아침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무너져 저 깊은 아래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가지고, 돈과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불편한 타협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게오르그 짐멜 만한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짐멜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험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삶의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형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전체성이란 개별적인 내용들이 아무리 뚜렷하고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를 지라도, 그 안에는 통일적인 삶의 과정이 관통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 외부는 내부의 형식이 된다. 비록 멀고 친숙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적 삶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 때문에 모험에 대한 기억은 쉽게 꿈과 같은 색채를 띤다. 
(204쪽) 


20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게오르그 짐멜의 전체를 알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짐멜이 어떤 사상가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래는 20개의 글 제목이다. 

- 현대 문화에서의 돈
- 대도시와 정신적 삶
- 유행의 심리학. 사회학적 연구
- 장신구의 심리학
- 이방인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손잡이, 미학적 접근
- 얼굴의 미학적 의미
- 양식의 문제
- 알프스 여행
- 식사의 사회학
- 감각의 사회학
- 감사. 사회학적 접근
- 신의. 사회학적 접근
- 편지. 비밀의 사회학
- 모험
-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
- 비밀, 사회심리학적 스케치
- 분별의 심리학
- 다리와 문 

특히 몇 편의 글들은 놀라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현대 문명/문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미학적 분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분한 호소력을 가진다.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경건함, 곧 신에 대한 열망을 인간 영혼의 항구적인 상태로 만든 최초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서 그 이전의 신앙 형식들은 종교적 분위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연결시켰다.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돈이 바로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사람들이 빈번히 탄식하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물론 거기에서 돈에 대한 표상과 신에 대한 표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관련성들을 밝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심층적인 본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과 대립은 신을 통해서 통일성에 도달하게 되며, 또한 신은, 중세 말기의 저 특기할 만한 근대정신인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sa,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순의 지양 - 또는 대립의 지양 - 이라는 사실이다. 존재의 모든 낯섦과 화해 불가능성은 신에서 통일성과 화해를 발견한다는 이 이념으로부터 평화, 안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 유래하는데, 이 감정은 신에 대한 표상 및 우리가 신을 소유한다는 표상과 결부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돈이 자극하는 감정들은 이것과 심리학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27쪽- 28쪽) 


그의 돈(화폐)를 둘러싼 현대 문명에 대한 분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 분석은 철학적이며 문화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역자는 짐멜의 이러한 넓은 관심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다소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한 편 짐멜을 사회학자만으로 보기에는 그의 지적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원래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학 이외에도 철학, 미학,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인식 도구와 수단을 구사하면서 방대한 모더니티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거장이다. 우리는 아마도 짐멜의 지적 세계를 인식의 다신주의, 아니 어쩌면 인식의 범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85쪽) 


두서없는 서평이지만,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권한다. 이 책 이외에도 짐멜 선집 2권이 더 번역되어 있으니, 다른 책을 구해서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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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Hopper
Summer Interior
1909, Oil on canvas, 24 x 29 inch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따갑고 건조한 여름 햇살이 방 한 가운데로 내리꽂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울 정신적 의지는 지난 밤에 사라져버렸다. 꿈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환상이거나. 만일의 경우 그것은 최악의 현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이며 앞으로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다. 너무 가지런한 실내가 도리어 비현실적이다.

뜨거운 여름날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비현실적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신에게 오래 전부터 빈혈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잠시 후 세찬 소나기가 달구어진 대지를 식힐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두렵다. 이 순간이 지나는 것이.

교묘하게 환상과 현실 사이에 육체를 걸치고 있는 그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딱딱한 유화 물감에 자신의 영혼을 붙이고 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어느 공간 속으로 들어가, 멈추어 버렸다. 어쩌면 시간의 틈새로 들어가, 공간의 틈새로 들어가 영원히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삶이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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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문예출판사



마음, 나쓰메 소세키(지음), 김성기(옮김), 이레 



1.
나쓰메 소세키, 무려 1세기 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동시대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근대성(modernity)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리라.  

이번 소설도, 내가 이전에 읽었던 소설과 비슷하게, 큰 사건이 없이 한 편의 풍경화처럼 이야기는 조용히 흘러간다. 소설의 전반부는 나와 선생님이 만나고 가깝게 되는 과정을, 소설의 후반부는 선생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한 부분은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머지 한 부분은 독백에 가까운 편지로만 구성된다. 

그런데 누군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대화가 아닌 '글로 씌어진 편지'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고 오래 전에 상처 입었던 마음이, 누군가에 그 마음의 속내를 드러내자마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게 되는 건, 과연 올바른 방식일까 하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윤리적 질문까지 던지게 되는 건, 그 극단적인 선택- 죽음, 자살- 을 비정상적이라고 하기엔 이미 우리의 마음은 너무 닫혀있고 상처입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절벽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더군. 만족할 만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좀 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을 테지. 하지만 ... ... 자네, 알고 있나. 사랑은 죄악이야." 
- 42쪽 


2.
사랑하는 마음은 죄악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일방적이고 소통하지 않으며 오직 내 마음을 알아주길 상대방에게 호소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선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만 하고, 그 죽음 위로 사랑을 수놓아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걸까?  

그런데 결국 사랑을 해도 쓸쓸하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해도 마음은 위로받지 못한다. 마음은 혼자이고 고독하고 이해받지 못한 채 (똑같은) 죽음을 향해 간다. 마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근대의 개인주의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고, 그 근대의 끄트머리에 선 우리들에게 자살이란 너무 일상적이 된 셈이다. 


3. 
강상중 교수의 최근 두 권,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나쓰메 소세키의 충분한 해설서가 될 수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를 기초로 하여 현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위로가 될 순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두고 아래와 같이 평한다. 


그리고 '개인적 공명'이라는 말에서 저는 소세키를 떠올립니다. 개인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시대에 고독한 영혼끼리 공명하는 무언가는 <<마음>>에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오고간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친척'과도 인연을 끊었으며, 고등유민이기 때문에 '사회'와도 접점이 없고, 단 한 명인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가족'인 '아내'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게 되어 버린, 세계 어디와도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우주로 튕겨 나간 공 같은 궁극의 개인입니다. 
아울러 선생님은 이름조차 없습니다. 이름 없는 공空입니다. 그 선생님은 최종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외에 길이 없었습니다만, 그때 작품의 절반에 이르는 길고 긴 고백인 '나'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는 테일러가 말하는 개인적 공명을 찾는, 세대를 초월한 이야기의 시도가 아니었을까요. 
강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146쪽 - 147쪽 
(* 개인적 공명: 찰스 테일러가 주장하는 바로, '흩어진 개인들이 새로운 차원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개인적 공명'이라고 해야 할 새로운 공통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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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는 광주비엔날레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큐레이터이다. 그는 지난 2009년 니콜라스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기획한 '얼터 모던 Altermodern' 전(영국 런던 테이트미술관)의 카탈로그에서 네 개의 모더니티를 제안하였고 그 내용을 오늘 읽은 '시선의 반격' 도록에서 김현진의 글에서 확인했다. 간단하게 인용하자면 이렇다. 



오쿠이 엔위저는 모더니티를 서구 1세계의 supermodernity, 아시아의 고속개발국가들의 andromodernity, 이슬람권의 speciousmodernity, 아프리카의 aftermodernity로 분류.



큐레이터 오쿠이 엔위저는 자신의 글에서 네 개의 서로 다른 모더니티의 모델을 규정하면서 한국, 중국, 인도와 같은 나라들의 모더니티를 '앤드로 모더니티'andromodernity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서구의 supermodernity를 모델로 받아들여 발전과 선진화에 방점을 두는 개발적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개발의 대안적 모델들을 고민하면서도 일종의 고속 개발을 통해 성취되는 이 하이브리드형 모더니티라고 설명하면서도 남자를 뜻하는 andro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우고 부수면서 건설하고 전진해 나가는 남성적인 속성이 여기에 잠재해있다. 


- 김현진(큐레이터) 




내가 위 내용이 무척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아직도 '모던modern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고, 그 모던-유럽에서 시작된-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변형되는 것을 오쿠이 엔위저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엔위저가 설명하고 구분한 네 개의 모더니티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각기 다른 모더니티임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시각에서 각 로컬 모더니티를 바라보고자 하는 일반적 접근에 대해 그의 구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9년 12월에 진행된 전시 도록이다. 아트선재 센터에서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한 권 사서 서재에 놔두었다가 오늘 펼쳐보았다. 


위에서 언급된 오쿠이 엔위저의 의견을 볼 수 있는 글은 'Modernity and Postcolonial Ambivalence'이다. 전자 논문으로 확인할 수 있고 잘 검색하면 복사본 pdf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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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이 많아도, 계속 새 책에 손이 가는 건 예전부터 읽어온 습관 탓이다. 1주일에 1권 이상은 읽어왔는데, 올해 들어 한 달에 2권 이상 읽지 못하고 있으니. 하지만 손의 습관은 1주일에 1-2권씩 새로운 책 표지에 살갗이 닿아야만 손의 마음은 놓이는 것일까. 





바람은 무척 차고 일은 많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들 중의 하나가, '비밀 없는 사람이 되자'였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강상중의 신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 ... 참, 일본은 대단하기도 하면서 신기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미 백 년 전에 20세기 후반에 최초로 마주하게 되는 현대적 모더니즘(contemporary modernism)을 보여주고 있고, 그 옆에서 재일한국인 강상중은 현대인의 마음과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 현대 일본을 지배하는 것은 그런 모더니즘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한국도 마찬가지리라) 


바람은 차고, 마음 속에 비밀만 늘어나는 것이 매우 싫어지는 화요일 오후 사각의 사무실 안 방황은 끝이 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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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건축 - 상 - 10점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다빈치

 

 

 

 정통 현대건축의 금욕적인 표현에 건축가들이 이제 더는 주눅들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순수한 것'보다는 이것저것 뒤섞인 혼성품이, '정확하고 깔끔한' 것보다는 적절히 타협한 것이, '쉽고 단순한' 것보다는 한 번 비튼 것이, '분명하게 표현된' 것보다는 애매한 것이, (... ...)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보다는 관습적인 평범한 것이, 배제하는 것보다는 수용하는 것이, 혁신적이면서도 남겨진 흔적을 지닌 것이, 직접적이고 명쾌한 것보다는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며 불분명한 것이 좋다. 나는 명확한 통일감보다는 너저분해도 생동감 있는 것을 중시한다. 나는 불합리성을 인정하고 이중성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나는 의미가 명료한 것보다는 의미가 풍부한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기능만큼이나 내부에 감춰진 기능이 좋다. 그리고 둘 중 어느 하나를 고르기보다는 둘 모두를, 즉 흑이냐 백이냐 선택하기보다는 흑과 백 모두, 때로는 회색을 택한다.

- 로버트 벤투리, "건축의 다양성과 대립성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1966) 중에서 (<<내 마음의 건축>>, 상권 67쪽에서 재인용)

 

 

 

출처: http://www.paperny.com/venturi.html

 

 

1월에 읽은 책을 이제서야 블로그에 옮긴다. 하지만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 상하권으로 나누어진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내 마음의 건축'은 잔잔하고 서정적이면서도 현대 건축이 우리에게, 혹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어느 새 우리 주변에는 딱딱하고 건조하기만 한 건물들로 빼곡하게 둘러쳐져 있다. 획일화된 아파트들, 사무용 빌딩들, 도시는 딱딱해져가고 사람들은 대화보다 침묵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풍경의 일부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풍경과 건축은 별도의 영역을 가지며, 즉물적인 풍경마저도 도시 안에선 무의미하게 방치되었다.

 

이런 세태에, 요시후미의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우리가 생활하는 - 잠 자고 먹고 마시며, 책을 읽기도 하고 잠시 앉아서 쉬기도 하는 공간으로서의 건축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해준다. 

 

특히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의 '어머니의 집Mother's House'는 현대 건축, 혹은 기하학적인 공간이 어떻게 우리 일상과 만나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요시후미는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을 소개하며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공간에 대해 사색하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에 등장한 폐허가 된 성당 - 산 갈가노 성당 Abbazia di San Galgano 을 찾아가기도 하고, 안동 하회 마을에서 지내면서, 정작 우리는 잊고 지내던 옛 조선 건축에 대해 칭찬하기도 한다.

 

책은 도판을 위해 크고 양장으로 제작되었으나, 글은 짧고 여유로우며 진솔하다. 도판은 풍부해서 저자가 소개하는 물의 다양한 면면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하권에 대한 리뷰

2012/03/11 - [책들의 우주/예술] - 내 마음의 건축 - 하, 나카무라 요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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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 나오는 주석인데, 바로크Baroque 문화, 혹은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렇게 메모해 둔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화사나 지성사에 있어서도 바로크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 그리고 현대적 삶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근대, 그리고 바로크는 그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는 루이 뒤프레(Louis Dupre')에 기대어 바로크에 대해 언급하였고, 아래 내용은 그 각주이다. 그리고 이 글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저장이다. 이 각주에서 엿보이는 뒤프레는 바로크에 와서야 중세적 질서가 근대적 질서 속에 종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합의 긴장이 바로크 양식을 이룬다는 것.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너무 중세적 질서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닐까 싶다.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있듯이 어쩌면 중세적 질서(창조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질서와 이 질서에 유비된 현실적 질서)마저도 바로크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진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슬쩍 지나가는 언급 뒤에는 거창하고 복잡한 명제가 놓여 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바로크 문화란 일종의 종합명제라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내면적이고 창조적인(poietic) 존재라는 근대적 이해방식과 형상(Form)에 의해 틀 지어진 우주(cosmos)로서의 세계라는 더 오래된 이해 방식 간의 종합 말이다. 나중에야 우리는 이 종합 명제를 불완전한 것이며 교체될 운명을 지닌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바로크 문화 속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긴장을 볼 수 있다. 그 긴장은 질서와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즉 거기에 이미 존재하는 위계적인 질서 그리고 자신들의 구성적 활동을 통해 그 질서를 지속시키고 완성하는 행위자들 사이의 긴장인 것이다. 이 행위자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위계 질서의 바깥에 있고 평등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그와 필적한 것의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루이 14세의 말과 같은 혼성적 정식화는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뒤프레(Dupre)의 책에 제시된 바로크 예술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Dupre, Passage to Modernity, pp. 237 ~ 248. 뒤프레는 바로크가 인간 행위주체성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세계 사이의 "최후의 포괄적인 종합 명제"라고 말한다. 거기서 이 행위주체성에 의해 발생한 의미들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발견한 의미들에서는 어떤 관계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찬 종합명제이다.

바로크 교회는 정적인 질서로서의 우주보다는 신에 이러한 긴장의 초점을 맞춘다. 이 신의 힘과 신성은 우주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하향성의 힘은 인간의 행위주체성에 의해 취해지며 또 앞으로 나아간다. "따로 떨어진 권력의 중심으로 개념화된, 신적인 질서와 인간적인 질서 사이에서 근대적인 긴장을 빚어내면서"(226) 말이다.

뒤프레는 바로크 문화가 "포괄적이며 영적인 비전"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발생 중인 세계에 형식과 구조를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개인이 있다. 하지만 - 그리고 여기에 그것의 종교적 의미가 있다 - 그 중심은 여전히 초월적인 근원과 수직적으로 연결된 채 남아 있다. 인간 창조자는 매개체들이 하강하는 단계를 거침으로써 그 근원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 인간적이며 신적인 - 이중의 중심이 바로크의 세계상을 중세의 수직적인 세계상과 구별 짓는다. 중세의 세계상에서는 실재가 단일한 초월적 지점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몇몇 특색 안에서 미리 나타난 바 있는, 이후의 근대성이 지닌 확실하게 수평적인 세계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중심 사이의 긴장이야 말로 바로크에 복잡적이고 불안정하면서도 역동적인 특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237)
-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128 -129


아래 관련 글 2개를 올린다. 하나는 찰스 테일러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이고, 하나는 바로크 예술에 대한 글이다. 서양미술사 책을 내기 전에 요약, 메모해놓은 글이다. 이젠 미술 관련 글을 쓸 시간조차 없이 바쁘니...





뒤프레의 책도 꽤 재미있을 것같은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ㅡ_ㅡ;;


 
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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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린 칼스텐 해리스의 글에 이어, 다시 한 편 더 올린다. 전문 잡지에 오래 전에 실린 글은 구하기 어렵다. 좋은 글들이 많지만, 누군가 꺼집어 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찾아보지 않게 된다. 블로그에 누군가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드문데, 자주 그래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된 일인지 좋은 글 보기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느낌 때문이다. (내 게으름이 한 몫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래 글은 월간미술 2002년 2월호에 실린 글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적절한 시각과 평가를 가진 칼스턴 해리스의 인터뷰이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필독을 권한다.


- 2002년 2월 월간미술 게재.


독일 철학, 미술사, 건축 이론, 그리고 현대 과학의 역사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와 그것의 약점에 대해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논의로 유명한 칼스텐 해리스 예일대 교수가 최근 건축철학서 《무한과 원근법(Infinity and Perspective)》을 펴냈다.

원근법을 중심으로 보는 것과 그것의 인식론적인 뿌리를 통해 건축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모든 사람에게 예술의 가치를 설파한 그를 본지 이건수 편집장이 이메일로 인터뷰를 나누었다.


- 2년 전 당신은 《월간미술》에 소개된 특별기고문에서 ‘테크놀러지 사회에서 인간 정신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을 밀레니엄의 예술적 지표로 설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동안 예술의 최신 흐름과 발달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날의 예술세계는 ‘개방성’이 특징이다. 뚜렷한 목표 없이도 오늘날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정작 작가가 자신의 작업의 의미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 대다수 젊은 작가들은 최근 예술경향에 흽쓸려 방황하는 것 같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을 향한 접근방식에 깔린 불만족은 예술의 윤리적 기능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인종, 성(性), 그리고 성적 경향 등 오늘날 주요 문제에 대해 여전히 미숙한 생각을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 같다.

이는 곧 ‘몸’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우리의 인식과 함께 얘기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무한한 가능성이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을 조작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몸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정말 혼란스럽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미래’를 향한 주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책임감이 결여된 무분별한 자유는 그 자신을 전복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 존재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어떤 책임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몸, 즉 물질 안에서 구체화된 정신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과학과 테크놀러지를 통해 가정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구체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물질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과학 밖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정한다.

예술이 오늘날 직면한 하나의 - 아마 가장 중요한 - 임무는 과학이 세운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여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각각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경험하는 것은 존중을 전제로 하며, 그러한 창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에 관해 예술은 그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 그 기준이 요구하는 것을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으며,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위에서 언급한 것을 성취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은 확실하다."

-
당신은 또한 그 인터뷰에서 테크놀러지가 하나의 ‘수단(tool)’으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로 상징되는 테크놀러지가 현대예술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따른 인문학과 예술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당시 내가 주장했던 것은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수단이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주인, 즉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독재자가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테크놀러지가 인간 본성과 대립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테크놀러지의 전제인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와 지배하고 위협할 때 그 테크놀러지를 거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오늘날 예술의 중요한 기능은 객관화된 이성이 만든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
9.11테러는 하나의 거대한 참사에 그치지 않고 ‘인류’와 ‘문명’이라는 틀 아래 다양한 의견을 양산했다. 예술철학자로서 당신은 9.11테러를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그것이 향후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하는가?

"
9월 11일 이후 ‘테러’는 뉴스와 우리 마음속에 너무 많이 언급되어 왔다. 그날 아름다운 아침에 멋진 건축작품이 테러의 목표물이 된 것이다. 어쩌면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리스트의 마음속에 테러의 목표물이 되도록 유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테러리스트는 세계무역센터가 갖는 상징성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과는 모순된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파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세계무역센터의 부재는 이제 미국도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상징이 되었다. 테러리스트가 남긴 이 ‘빈 공터’는 우리 삶을 불안하고 공허한 창문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테러리스트를 겁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헌신하는 명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수천 명의 삶을 희생하는 행위가 비겁함이란 말로 이해되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죽음은 어떤 공포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경험이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쉽게 포기할 만큼 의미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까? 우리는 그러한 부정적인 확신에 대해 논의해야 하고, 그 파괴된 자리에 세계무역센터를 대신할 어떤 기념탑을 세움으로써 그런 확신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테러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인정해야 한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뉴욕커(The New Yorker)》라는 잡지는 9월 11일의 참사에 대하여 아담 자가제스키(Adam Zagajewski)의 시로 끝맺었다.

파괴된 세상을 찬미하려고 노력하라 / 6월의 해가 길던 날들과 / 와일드 스트로베리와 몇 방울의 와인과 이슬을 기억하라 / 그리고 망명자들의 버려진 집을 뒤덮은 쐐기풀도 / 파괴된 세상을 찬미해야만 한다

나는 《뉴욕커》가 9.11테러 기사를 실으면서 잡지 중앙에 파괴되기 전, 석양 속에서 빛나던 세계무역센터의 이미지를 실은 그들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잡지의 표지를 검은색으로 처리한 그들의 결정 역시 높이 산다. 왜냐하면 그 검은색 속에서 세계무역센터의 실루엣을 더 검게 했기 때문이다. 그 검은 실루엣은 《뉴요커》의 중심에 있는 빛을 더욱 강조해 주었다. 다시 말해, 어떤 기념물이 들어서든지 그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나는 세계무역센터의 잔해를 보존하여 쐐기풀들이 그것을 덮은 채 자라길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테러에 직면하여 예술은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
정보사회학을 연구하는 버클리대의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 교수는 ‘정보화시대’에 관한 그의 연작 《네트워크사회의 출현》, 《정체성의 힘》, 《천년의 종언》에서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정치, 경제 논리와 문화적 정체성이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맞아 그 힘을 잃고, ‘네트워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로 옮겨간다고 지적했다. 당신은 21세기를 주도할 가장 중심적인 흐름을 무엇으로 보는가?

"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지만, 새로운 정보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정보와 테크놀러지가 자유를 가져왔으며 다가오는 시대에도 변함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성(性)을 갖고, 자신의 언어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어떠한 출구도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생각하지 못했던 물리적, 정신적인 자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없거나 우리의 성을 바꿀 수 없다면 이것이 하나의 짐처럼 여겨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누가 이런 조작을 하는 것인가? 아직도 본질적인 자아가 남아 있는가? 무엇보다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유를 약속할 수도 있지만, 자아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위협이 예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정보의 충격과 네트워킹과 같은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오면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예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테크놀러지의 도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최근 출간된 당신의 저서 《무한과 원근법》을 직접 보내 주어 잘 읽어 보았다. 책을 살펴 보면 독일 철학과 이론, 미술사, 건축 이론, 과학 등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의 르네상스 신학적인 뿌리와 철학에 대해 깊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알베르토 페레즈-고메즈 맥길대학 교수는 쿠사너스부터 갈릴레오까지 초기 모던 사상가를 연구해 우리 시대를 위한 희망과 가능성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극찬했다. 한스 브루멘버그와 알렉산더 코이레 같은 과학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비평적인 자세를 취하며 모더니티의 숨겨진 가능성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최근 당신의 연구 분야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미술의 철학적 의미를 찾기 시작했던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당신의 철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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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출간된 《무한과 원근법》은 작가에게 유용한 책이 되기를 바라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책에서 나는 몇몇 포스트모던 비평가에 반대하며 ‘모더니즘’을 변호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가 니힐리즘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졌던 사실을 이해하고, 그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과학과 테크놀러지가 가정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고찰했고, 그것이 중세 기독교 문화의 자기 발전의 산물임을 증명했다. 우리가 이런 발달의 합리성을 이해할 때, 과학이 가정하는 현실 자체와 동일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성이 지은 체제의 창을 모든 의미의 근원으로 ‘여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발표된 논문 <이방세계에서. 니힐리즘의 탐험(In a Strange Land, An Exploration of Nihilism)> (19 61)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역시 예술의 문제도 다룬 바 있다. 그 논문에서 나는 최근 저서에서 더 자세히 다룬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Nicholas)의 작품을 언급했고, 현대예술의 의미를 논의했다. 새로운 리얼리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리얼리티의 의미와 세계와 예술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그 논문을 통해 나는 예술을 ‘객관화하는 이성으로 세워진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았다.

또한 이것은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믿음과 탐미주의 사이(The Bavarian Rococo Chu-rch:Between Faith and Aestheticism)》(1983)에서도 쟁점이 되었다. 철학을 전공한 내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아카데믹한 철학을 참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하이데거와 르네상스에 관해 다룬 나의 다른 철학 저서와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고 본다. 책의 대부분이 18세기 교회를 다루고 있지만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는 모더니티의 합리성과 한계에 관해 중요한 얘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 세계의 건축의 창을 지금 세계가 무시하려는 리얼리티의 차원으로 다시 열려는 시도였다. 뿐만 아니라 《부서진 프레임, 세 개의 강의(The Bro-ken Frame, Three Lectures)》(1989)와 중국어로도 번역된 《건축의 윤리적 기능(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1997)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재 쓰고 있는 책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왜 예술가인가(Why Art)?》라는 가제를 붙인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와 현대 예술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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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평소 즐겨 보는 책은 무엇인가? 또한 당신은 어떻게 정보를 섭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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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질문이다. 역사를 통해 뛰어난 철학가의 책을 포함해 수많은 책이 내게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하이데거(Heidegger)는 특히 중요하다. 또한 《무한과 원근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도 내게 각별하다.

그러나 나는 내 사유의 전개가 책보다 미술작품이나 건축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무엇이 그림 그리기에 집착하게 했는지 잘 모르나, 그림은 나의 수많은 생각과 늘 함께해 왔다.

건축에 대한 관심도 일찍 시작되었다. 7세 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공습이 계속되는 베를린에서 쾨니쇼펜으로 이주했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파괴된 건물과 사이렌이 울린 뒤 다락방에서 보았던 불타는 베를린, 그리고 나와 함께 놀던 친구와 그의 집이 폭탄에 맞아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 이런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을 떠나 피난처로 찾았던 쾨니쇼펜, 그 작은 도시에서 즐거웠던 경험을 말하고 싶다. 그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작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

그 작은 교회는 나에게 전쟁 중 베를린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하이데거가 지구를 표현함에 있어 고대 그리스 신전이 세계를 확립했다고 주장하며, 그 신전에 윤리적 기능을 부여했던 것과 같이 나 역시 그 교회에 대하여 미학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때 나는 이 교회가 세운 세상이 나를 배제시켰을지라도 그 교회가 제시하는 지구에 내가 속해 있음을 깨달았다. 지구와 사람들은 교회나 책보다 내게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지난 1월 24일 타계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지적한 대로 세계화를 위한 테크놀러지, 경제 등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 과거 인류의 문화유산을 생성해 오던 교육, 교양, 사회활동이 미국이 주도하는 영화, 엔터테인먼트, 오락산업에 흡수되고 있는 게 대표적인 경우다. 이렇듯 세계화에 따른 문화단일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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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발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의 등장에 적지 않은 우려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예술을 위하여 ‘본질’을 회피하고자 하는 엔터테인먼트를 반대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안감은 근본주의와 파시즘을 더욱 잘 받아들이게 했다.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인해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다른 가치체계와 그것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문화적 가치는 변화한다.

그러나 그런 가치의 어떤 변화도 그저 주어지지는 않으며, 거기에는 매우 사려 깊은 숙고와 저항이 요구된다. 작가들이야말로 그러한 심사숙고와 저항에 많은 기여를 해야 하며, 철학자 역시 의미 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 철학자는 무분별한 철학 용어를 남발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방식을 지킬 수 있으므로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철학을 연계하는 것에 쉽게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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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변화하는가? 만약 변화한다면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세기를 거칠수록 예술,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변화하고 있다. 유럽에서 18세기는 중요한 시작을 의미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종교적?윤리적 기능의 예술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예술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가장 중요한 발단은 1960년대일 것이다.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예술의 죽음(종말)’에 대해 말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의 절정이 예술의 종말이라고 말했던 단토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다. 단토의 주장처럼, 지난 40년간 예술(세계)에 어떤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담론은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이런 현상을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해방’으로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자유’란 방향 상실을 의미한다. 예술은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 쿤데라는 예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가벼움이 헤겔이 예술의 최고 기능으로 간주한 인간의 심오한 관심사에 대한 예술의 참여를 되찾으려는 갈망을 품게 하는 것이다. 헤겔은 예술을 보지 않고 그에 대한 관심을 언급하는 학문이 내놓는 견해를 들으려는 것이 ‘모더니티’의 특징이라고 했다. 사고와 숙고가 예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성(性)?인종 같은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관한 언급을 예술이 다시 감당할 수 없다. 미숙한 철학적 개념을 품고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과거 예술이 갖고 있던 최고의 기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의 최고 기능을 되찾음으로써 헤겔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예술을 중시하는 하이데거와 의견을 같이한다. 다만 오늘날 한 명의 뛰어난 작가에게 이러한 예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애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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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미 지적한 대로 현대미술은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힘을 상실한 채 공허한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여전히 현대미술은 종결되어야 하는 것인가? 현대미술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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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성이 세운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가 이런 창을 열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비유를 들어 답을 얘기한다면, 15세기 서양에서 미술은 원근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근법은 부르넬레스키(Brunelleschi)와 알베르티(Alberti) 때의 작가에게 마술과도 같았던 세계의 모습을 재현하는 인위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예견했듯이 이러한 마술의 대가는 리얼리티의 상실, 초월성의 상실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리얼리티는 그것의 연극적인 재현으로 대치되었다. 미술 자체가 시뮬라크라의 창조물임을 인지한 미술이 어떻게 관람객을 리얼리티로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내 대답은 이렇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육체에서 분리된 눈 이상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관람객이 자신의 물질성, 물감?캔버스?종이의 물질성, 그리고 종이 위의 붓자국을 통해 물질 속에 정신을 구체화하는 경험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인간을 보는 것은 물질이 지닌 의미의 구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만나 겪는 것과 기계를 경험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 등은 ‘초월성’으로 창을 열 수 있으나 단지 우리가 관심을 갖는 작품의 ‘인공성’을 깨닫는 데 쓰일 뿐이다. 이러한 인공성을 깨닫는 방법은 르네상스 작가가 원근법적 재현의 기교를 물감과 캔버스의 물질성을 비교하여 그 인공성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뉴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시뮬라크라(simulacra)와 진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 동양과 서양이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서구의 문화를 기준으로 동양의 문화를 바라본 게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동양과 서양 미술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예술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양 예술에 대한 나의 지식이 매우 부족하기에 이 질문에 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 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동양 예술은 내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친숙한 서구 역사에서 동양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의 본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의 예술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본질적인 인간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차이는 서양이 동양에 비해 혁신과 발전에 가치를 두어 왔다는 점이다. 테크놀러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경제학자의 생각 속에 자리한 발전에 관한 수치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것은 현대미술에서 매우 흥미롭게 나타난다. 뒤샹이 보통 변기를 전시하고 그것을 작품이라 불렀을 때, 변기와 작품의 분류에 대한 고의적인 혼란은 분명 아름답지 않았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오래 전 키에르케고르가 보여 주었듯이, 흥미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종말로 끝나기 마련이다. 지금 현대미술은 그 종말에 다다른 것이다.

따라서 창의성과 혁신, 그리고 발달을 별로 중시하지 않던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자원이 한정된 지구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발전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아직 멀게 느껴지나 자연의 재앙을 대비하는 일에 작가들도 참여해야 한다. 동양, 특히 동양의 작가들은 이런 문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전은 때로 유익한 것이나 종종 그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 동시대 예술과 관련하여 반미학 또는 탈예술 논의는 이제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숭고’와 ‘아우라’를 향한 논의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만약 의미를 갖는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현대 건축은 현대 회화나 조각보다 내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 금년에 탄생 150주년을 맞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와 수많은 현대 건축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특히 가우디의 건축물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의 건축물은 현대 세계로의 창을 열어 주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일본의 안도 타다오(Ando Tadao)가 있고, 핀란드인인 주하 레이비스카(Juha Leivisk?도 있다. 그의 작품 미르마크(Myrmakk) 교회는 핀란드의 우울한 겨울에도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베를린에 있는 다니엘 리베스킨드(Daniel Libeskind)의 유대인 박물관은 완성되기도 전에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이러한 건축가들로부터 빛이 물체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 감동을 안겨 준 미술작가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에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작품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세잔(Cezanne), 드가(Degas) 혹은 멘제(Menzel)에 감동했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헤겔의 주장처럼 ‘예술이 죽었다’는 가능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자면, 하이데거처럼 나 역시 헤겔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곧 출간될 책에서 오늘날 예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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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동시대 예술은 대중문화와의 상관성 속에서 이해되고 논의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스펙터클의 사회’ 또는 ‘키치’ 개념이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키치’가 갖는 의의는 무엇이며, 키치가 동시대 미술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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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잘 정의되지 않은 현상 혹은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는 현상이다. 나는 최근 저서에서 이런 적대감에 잠재된 가설을 고찰했다. 우리는 아직 모더니스트의 프로젝트도 이루지 못했고 모더니즘의 도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건축에서 모더니즘의 표현방식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현대의 건축가 대부분은 후기 모더니스트의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화가와 조각가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더니즘의 초기 단계부터 키치와의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을 제쳐두고 현대미술을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키치는 스스로 윤리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또는 살바도르 달리(Sal -vador Dali)를 보자. 아니면 안젤름 키퍼는 어떨까? 그 역시 키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저서 《건축의 윤리적 기능》에도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키치라고 불리는 작품을 경멸하는가? 여기에는 무언가 부정적인 것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는 키치가 주장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치가 리얼리티로 향한 창을 여는 대신 단지 시뮬라크라 혹은 폐허가 된 가치체계의 단편으로 그저 세계를 치장하는 생각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이 키치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금송아지 우화’의 교훈처럼, 신(神)이 부재하면 인간은 시뮬라크라를 만든다. 그러나 시뮬라크라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시뮬라크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키치에 대한 논쟁과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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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를 즐겨 보는가? 만약 미술전문지를 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미국 등 각국의 미술전문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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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에 큰 관심은 없으나 내 아내가 미술사학자인 관계로 정기적으로 꽤 많은 잡지를 구독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술전문지는 현재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미술이 발전하는 양상을 계속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미술전문지는 현재 이루어지는 비평과 이론을 더 많이 소개해야 한다. 그러한 이론과 사고가 예술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전문지는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국한해서는 안 되고, 미술 관련자만을 독자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미술전문지는 미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 즉 왜 미술이 중요한가, 왜 미술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미술이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 - 윤동희 기자 | 번역 - 김민아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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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는 1937년에 태어나 예일대에서 박사학위(1962)를 받았다. 저서로 《Ba -varian Rococo Church》, 《The Broken Frame : Three Lectures》, 《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 등이 있으며, 《The Meaing of Modern Art》는 《현대미술 - 그 철학적 의미》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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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ot Le Fou 미치광이 삐에로

(France-Italy 1965)

 

감독: Jean-Luc Godard

주연: Jean-Paul Belmondo, Anna Karina




영화가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벨라스케즈Velazquez 대한 엘리 포레Elie Faure 해석으로 시작해서 이브 클랭Yves Klein으로 끝나는 영화는 고다르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영화가 글쓰기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1965년도의 영화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장르적 실험으로 채워져 있으며 랭보와 셀린느를 오가며 글과 영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감독의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의 자의식이 용납되지 않는 작금의 영화들 속에서 누벨 바그의 놀라움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영화가 예술이라면, 고다르의 영화는 모더니즘 예술의 극점을 떠올리게 한다. 스토리는 부서진 대사들 밑에서 징검다리처럼 관객의 시선에 의해 붙여져야만 온전해지고, 배우는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고 이미지와 소리, 분절화된 단어들 속에서 숨쉬며, 마치 시대를 너무 앞서가, 오래된 혼성모방처럼 영화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다른 매체를 꿈꾼다.

고다르는 이는 마치 조절되고 관리된 일종의 해프닝happening이며, 그와 동시에 완전히 무의식적인 영화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Velazquez, past the age of fifty, no longer painted specific objects. He drifted around things like the air, like twilight, catching unawares in the shimmering shadows the nuances of color that he transformed into the invisible core of his silent symphony. (벨라스케즈는 50 이후로, 이상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반짝이는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고요한 교향곡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변화시켰던 색의 미묘한 차이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잡아내면서, 공기, 황혼이나 여명 같은 것들의 주위를 떠돌아다녔다.)



영화는 일종의 Meta-Essay. 고다르는 페르디낭( 벨몽도) 대사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Not to write about people’s lives anymore, but only about life-life itself. What lies in between people: space, sound, and color. I’d like to accomplish that. Joyce gave it a try, but it should be possible to do better.

범죄 영화의 형식에 기대어 있지만, 장르적 특성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영화의 글쓰기를 보여주며, 그것이 얼마나 현대적 방식인가를 증명한다. 결국 그것이 모던 예술이 가지게 되는 자의식 과잉의 막다른 골목을 향하게 지라도.



참고: Pierrot le fou: Self-Portrait in a Shattered Lens by Richard Brody (www.criterion.com)
(불어 대사의 영어 번역은 아티클에서 인용하였음)



Pierrot le fou Trailer (Jean-Luc Godard, 1965) - Subti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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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누벨바그는 언제나 가까이 다가가기엔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영화라는 것은 어때야 한다는 전형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일까요..
    좀더 많이 보고 느껴야 겠단 생각이 드네요

    • 누벨 바그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은 언제나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요. 요즘 영화들이 대규모 물량 투자로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들을 말이죠. ~. 댓글 감사합니다. ^^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 10점
앙투안 콩파뇽 지음, 이재룡 옮김/현대문학




지난 가을에 두 번이나 정독한 책이다. 국내에 출판된 책들 중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참고서로 읽힐 이 책은, 불행하게도 아무런 주목도 못 받은 것처럼 보인다(일일이 신문이나 잡지 서평을 찾아보지 못했지만). 두 번이나 읽었지만, 그간 서평을 쓰지 못했던 것은, 서평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서평이라는 낯익은 접근방식은 이 책이 가지는 유용함을 깎아 먹을 가능성이 더 높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문 - 현대적 전통, 현대적 배반
새로운 것의 권위: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 보들레르, 마네
미래에 대한 종교: 전위주의자들과 정통주의
이론과 공포: 추상파와 초현실주의
바보들의 시장: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막바지: 포스트모더니즘과 개영시(改詠詩)
결론 - 다시 보들레르로


이 책의 미덕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 논쟁적인 부분들을 풍부한 인용과 사례로 예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설득력 있는 저자의 논리는 모더니즘의 탄생에 주목하면서, 나아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까지 아우른다.


그러나 단절의 전통은 필연적으로 전통의 부정인 동시에 단절의 부정이 아닐까? 옥타비오 파스는 '수렴점.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에서 현대적 전통이란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뒤집어진 전통이며, 이 역설이 그 자체로 모순인 미학적 모더니티의 숙명을 예고한다고 했다. 현대적 전통은 예술을 긍정함과 동시에 부정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 자신의 위대성과 퇴락을 한꺼번에 선포한다. 반대되는 것들끼리의 결합은 현대적인 것이 전통의 부정, 다시 말해 필연적으로 부정의 전통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의 논리적 모순 혹은 논리적 막다른 골목을 고발한다. (8쪽)


그의 시선은 모더니즘에 향해 있으며, 모더니즘의 시작부터 논쟁거리였음을 예증한다. 인문학 전공자이거나 현대 예술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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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련님의 리뷰를 읽고 이책을 구입했습니다.
    한국에서 공수해오느라 시간이 조금 걸려서 이제야 읽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좋은책 만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네케 딕스트라.
1959년 네덜란드 Sittard에서 출생한 사진 작가.

Evgenya, Induction-Centre Tel Hashomer, Israel, March 6, 2002
Evgenya, North Court Base Pikud Tzafon, Israel, December 9, 2002


삶은 늘 변화하고 우리도 변한다. 성격이 변하기도 하고 외모도 변하고 사는 것도 바뀌고 심지어는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는 이들마저 있다. 성형 수술을 하여 얼굴 뜯어 고치고 이민을 가, 모든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이들마저.  ... ... 하지만 변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모더니티의 특징 중의 하나는 '변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존재(Being)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생성(Becoming)의 세계로 진입을 시도한다(*해리스의 '현대미술: 그 철학적 의미'의 처음도 이런 맥락에서 시작된다. ). 그리고 현대의 베르그송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이, 모네, 세잔 이후의 많은 예술가들이 이 변하는 세계를 해석하려고 정의내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일까. 20세기 후반의 예술은 너무 혼란스럽고 방황의 연속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정처없는 것이고, 가련한 것인가. 마음의 문을 닫는다고 해서 외부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상처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그렇다고 그것을 이겨낼 그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했음을 진지하고 사려깊은 현대 예술가들은 알고 있다.

일견 모더니즘적 전통 속에 있는 듯한 리네케 딕스트라의 작품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땅 위에 있는가를 여실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의 삶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력한가를 증명한다. 그녀는 이를 정체성과 통일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이를 시각화해낸다.

 "I am interested in the paradox between identity and uniformity, in the power and vulnerability of each individual and each group. It is this paradox that I try to visualise by concentrating on poses, attitudes, gestures and gazes."

삶의 굴절이란 우리가 의도한 바대로 움직이는 경우란 드물다. 그 굴절 속에서 한 개인의 정체성도 변한다. 그러니 아예 한 개인의 정체성이란 불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변하는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Olivier Silva, June 2, 2002

Olivier, Les Guersea, France, November 1, 2000

Olivier, Quartier Vienot, Marseille, July 21, 2000

군복을 입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 예비군 훈련장에만 가봐도 알 수 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말쑥한 정장 차림, 또는 캐주얼 차림으로 있었을 어떤 이들이 연병장에 퍼지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아무렇게나 버리는 모습을 보면, '옷은 날개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옷은 개인의 일상을 규정하는 어떤 정체성의 표면'같은 느낌을 받는다. 

일견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보이는 딕스트라의 최근 작업들은 군복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 정체성 혼란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딕스트라는 분열된 현대인의 자화상, 그리고 평화 상태의 젊은이와 전쟁 수행 중인 군인 사이의 먼 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만큼 정체성이 중요한 것일까. 리네케 딕스트라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나도 혼란스럽다. 변하는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그리고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우리에겐 그 실패를 견딜 그 어떤 방패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종종, 때때로, 나는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고 우리의 삶은 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어떤 이들의 시대착오가 부러울 때가 있다. 


* 오래 전에 노트했던 글인데, 조금 수정해서 올립니다.
* 사진들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사진들의 저작권은 리네케 딕스트라에게 있으며, 문제가 될 경우 삭제토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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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10점
조중걸 지음/프로네시스(웅진)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조중걸(지음), 프로네시스

 

키치’(Kitsch)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은 키치를 설명하기에 구체적인 스타일이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어떤 인식론적 태도라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카르스텐 해리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저자들은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인식론적 태도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키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영국 경험론을 이야기하고 현대 물리학과 현대의 추상 미술의 기원을 탐구해야만 한다. 이를 다 설명해야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실은 이 설명을 듣고 있는 (지적으로 무능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대부분의 한국의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수나 강사도 드물다. 

이 책은 ‘키치’라는 단어에 대해 적고 있지만, 실은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허위’에 대한 집요하고도 논리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키치라는 단어 대신 ‘불행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행복을 가지기 위해 받아들이는 허위적 태도’로 표기해도 무방할 정도다. '키치'라는 단어가 일반 독자의 귀에 솔깃하고 흥미로워 보이겠지만, '키치'와 '키치가 뜻하는 바' 사이에는 소쉬르의 의견대로, 자의적 관계가 있을 뿐이다. 아무런 필연적 연관 관계도 없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키치'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몇몇 독자들은 쉽게 이해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정신과 삶 전반에서 키치적 것들을 다 몰아내고 한순간이라도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분투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이가 있을까?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공은 불이 꺼진 무대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너무 아찔하지 않은가? 같은 침대에 누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의 입술이 실은 거짓말이라고 탄로난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신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저 뾰족한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공중 부벽처럼, 두터운 벽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처럼 기괴하고 현란하며 경련적으로 변하게 된다면? 고흐가 미쳐갈 때, 세잔은 자신의 내부에 견고한 기하학의 성을 쌓고 외부세계로 나가지 않는다. 고흐의 터치와 색상이 자신의 삶을 포기했을 때 나오는 것이라면, 세잔의 고전적인 기하학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영혼을 저 불가해한 현실 세계 속에서 지키고자 했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예술가 모두 이 세계 속에서는 이방인이었으며, 침묵했다.

정말로 이 세계에는 아무런 질서도, 원리도 없는 것일까?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으며, 그저 우연하게 왔다가 무의미하게 살다가 죽는 것일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끊임없이 그것을 반복하며, 현대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그렇게 여겼으며, 철저하게 그들의 학문과 예술에 매진했음을 강조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그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현대의 고전주의자들인 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의 내부에 견고한 성을 짓고 고전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가들은 그마저도 거짓과 허위라며 부정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은 도리어 자본주의와 흥미로운 결탁을 만들어내며, 거짓된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어떤 양식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 예술의 문제 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거짓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예술과 세계에 대해 궁금해지듯이, 우리의 정신적 방황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나에게 서양 미술사를 가르쳐 준 분이기도 한) 저자는 지성사(특히 철학과 역사)를 바탕으로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대 철학(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과 데카르트를 구분짓는 방식으로 기하학을 이용한다. 좌표 평면 상에서의 직선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면서 근대에 있어서의 ‘운동’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과 바로크 예술의 연관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인상주의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베르그송의 철학과 드뷔시의 음악, 프루스트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지성사적 이해에 기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우저는 철저하게 유물론적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고딕 양식이나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대해서는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조중걸의 말대로 ‘예술은 기술의 문제라기 보다는 예술의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욕’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예술에 대한 기술은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면, 기술은 철저히 인과적 관계 위에서 예술을 설명할 수 있지만, 예술의욕은 인과적 관계를 무시하며 그 당시의 사람들의 심성, 일상적 삶, 학문과 역사 등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먼저 요구한다. 이 책에서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고 철학과 과학을 가로지르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여러 번 읽기를 권한다. 적어도 현대 예술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그래야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최소한 진실해질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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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심장이 뛰고 내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을 만나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을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걸까?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는 일종의 가상이거나 허위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시뮬라크르일 지도,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란 누군가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생각과 언어에 의해 형성된 어떤 픽션일 지도 모른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내 것이 아닌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늘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어긋나고 내가 한 말은 오해되고 내 글은 무시되고, 내 사랑이 번번히 막다른 골목의 시궁창에 빠지게 될 지라도, 나는 내 인생을, 내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자살하더라도 나라는 가상의 존재는 세상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의 한 문장 처럼, 내가 죽고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때야 비로소 무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가상이든, 허위이든, 살아있는 자는 그 살아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로만 오팔카의 작업이 날 감동시키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의 행위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서 숫자를 적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탐구는 곧바로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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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오팔카는 숫자를 캔버스에 적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의 몇몇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사간동 학고재에서 전시되기도 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숫자를 적는 행위' 자체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단조로운 색채와 병렬적으로 이어져 있는 숫자들의 나열이 가지는 조형적 아름다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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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품과 더불어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 일련의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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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탐구는 현대 미술의 강박증과도 같아 보인다. 하지만 거대해진 세계 앞에서 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지하철 속에서 이 무수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개인주의'가 유행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익명성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긴 개인일 뿐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우리는 실패할 것이고 그렇게 죽을 것이다. 현대의 비관주의는 자신의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즉물적인 방식을 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그 속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주장, 일상이 드러나지 않고 객관적인 소재를 택해 '그저 (살아)있었음'을 표현하도록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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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온 카와라는 로만 오팔카와 비슷한 지점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더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는 날짜를 적는다. 하나의 캔버스에 0시부터 24시까지, 꼬박 하루동안 하나의 날짜 작품을 완성시킨다. 완성시키지 못할 때는 이를 파기한다. 그리고 그 날의 신문을 아래에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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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재미있는 것은 매일 엽서를 보낸다는 것이다. 엽서의 내용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I GOT UP AT 11.10 A.M'

로만 오팔카가 자신의 (시간 위의) 삶을 캔버스와 사진 속으로 넣는다면, 그래서 그 순간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면, 온 카와라는 일정 시간 동안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에서 한 인물이 이야기하듯,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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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제한된 작업 스타일은 '위태위태한 현대인들의 존재 상실의 위기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실은 우리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개성이나 독창성 따위는 날조된 것에 가깝다. 어쩌면 라크스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 패턴은 우리의 물적 토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실제 우리와는 무관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과연 나란 무엇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혹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맞부딪혀야 할 상대는 시간(Ti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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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illion Years  
On Kawara, 1999
2 volumes, each 2.012 pgs., leatherbound  
(EDITION/SET: 500 num & 60 num. & sign.)
h: 14.5 x w: 10.5 cm / h: 5.7 x w: 4.1 in  
http://www.artnet.com/artwork/424415142/424301160/one-million-yea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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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BOURGEOIS : Abstraction 
(루이스 부르주아: 추상)

A P R I L  2 0 - J U N E  2 9,  KUKJE GALLERY



나는 그녀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았지만, 그녀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녀의 작품은 무미건조한 물음표에 가까웠고, 그녀를 향한 찬사와 열광이 되레 이상하게 여겨졌다. 결국 그녀 작품에 대한 비평을 찾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그녀 작품들. 내가 남성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건강해서 그런 것일까. 읽어도 선뜻 그녀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는 매우 건강해서 병적인 나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가 관심을 가졌다는 기하학에서 영향 받았다고 평가되는 ‘The Three Graces'(삼미신, 1947년 작)은 기하학적이기 보다는 원시예술적이었다. 19세기말 20세기초 많은 모더니스트들을 열광시켰던 아프리카의 토속 예술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The Three Graces'는 그러한 원시성을 매우 현대적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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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Exit 출구 없음


‘No Exit'(출구 없음, 1989년 작)은 ’근본적인 불안감과 도피 심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 작품이 불안해 보이지도, 어디로 도피하려는 심리도 엿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근본적인 고립감을 보여주는 듯 했다. ’출구 없음‘이란 갇혀 있다는 의미이고 계단 앞 두 개의 큰 나무공이 성적인 암시라면, 자발적 갇혀 있음에 더 가까워 보였다. 계단은 불안의 상징이나 은유가 되지 못하고 끊어진 계단의 높이와 병풍처럼 둘러쳐진 벽의 높이가 별로 차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곳은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불안하거나 도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단 위로 올라가지 않기 위해 벽도 세우고 계단도 자른 것이다. 더구나 계단 아래에는 성적인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으니, 왜 그 곳에서 나가고 싶어 할까.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을 우아한 방식으로 극복해 내는 건강함의 양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아니면 내가 느끼는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과는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거나. ‘밀실’이라는 작품은 확실히 건축적이다. 그런데 표현 양식에서 ‘건축적’이라는 의미는 그 자체로 고전적 건강함을 의미한다. 역시 루이스 부르주아는 건강한 예술가이다. 이 점에서 그녀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가령 ‘부르주아는 무의식과 내면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욕망, 쾌락, 사랑과 고통, 소외와 고립 등의 경험을 표출하고자 했고 이는 주로 인체를 바탕으로 한 성적인 이미지나 에로틱하거나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일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과 삶의 안정성을 향해 가면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상처, 소외, 고독 등)을 견고한 형태(기하학적이거나 추상화된 양식) 속에 가두거나 욕망의 문제를 신비로운 생명이나 탄생과 결부 짓고, 끊임없이 역동적인 운동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결국 부르주아는 20세기 초 고전적 양식의 모던 화법으로 포스트 모던한 주제들을 소화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후세의 예술사가나 비평가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녀의 작품이 우아해 보이긴 했지만, 열광적인 찬사를 보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는 그녀만큼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국제갤러리 신관은 국제갤러리 옆으로 나 있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있다. 네모반듯한 건물 앞의 공터가 있어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전은 무료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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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르주아는 아직도 과거의 고통과 상처에 묶여 있지만, 자신의 고통을 이겨 내는 방법을 찾았고, 그 방법이 바로 예술인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의 상처와 정면대결해서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합당하겠죠. 적어도 그녀의 "Cell" 연작을 본 후의 저의 생각은 그랬습니다.

    • 국제갤러리에서 배포한 한 장 짜리 전시 설명문이 제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루이스 부르주아 작품에 대한 대다수의 평(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이 그녀를 '건강함'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정말 '건강한 예술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애님의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매우 고전적인 예술가라고 생각됩니다.

  •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2008.09.02 13:07 신고

    저는 오늘 Louis Bourgeois 를 구겐하임에서 보고 왔습니다.(미국에서 학교를다녀서요;;)다른 사람 이미 저정도 시기에 이르면 Bourgeois의 그녀의 예술적 Ambition이 반영된 시기라고 한다고 써놓았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이미 어느정도 불안은 극복하고 리움에도 있는 대형 작품들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 관심을 쏟는 시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훨씬 그전에 작품들(1940년~50년대) 집과 여성을 주제로 한 연작들을 보시면 Eva Hesse에서 보이는 여성미보다 더 우울한 모습, 여성이 집으로 도피하나 완전히 도피할수없는 그런 작품들이 훨씬 주류를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국제 갤러리에 자금이 부족해서;;;;;;;;;;;;앞에 Series는 안들고왔지 않을까 생각되네요..그러한 여성적인 고민은 후반부에는 많이 사라지는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호르몬의 상실과 곁들여서 말이죠. 그냥 풋생각이네요..!

    • 부르주아의 전체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쓴 글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국제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만 보고 리뷰를 쓴 것이고, 그 점에서 국제 갤러리에서 만든 전시 설명은 저와는 다른 견해였습니다. 도리어 저는 고전주의적인 부르주아를 느꼈으니 말이죠.
      하지만 부르주아의, 초기 작품들이나 전시되지 않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우울한 모습, 여성이 집으로 도피하나 완전히 도피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미술 잡지 등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 다시 루이스 부르주아에 대해 살펴봐야겠군요. 덧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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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이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이들은 바로 인상주의자들이다. 시간 따라 변하는 색채의 현란함, 그 현란함이 가지는 찰라의 쓸쓸함, 그리고 쓸쓸함이 현대인들의 피부를 파고 들어 삶의 양식이 되었음을 깨닫게 해준 이들은 인상주의 이후의 모더니스트들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본래적인 것이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견고한 피부를 만들고자 한 이들이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이라면, 그 쓸쓸함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순간의 희열 속에 온 몸을 던지는 것이 후기(post)의 모더니스트들이 아닐까.

고객사를 가다 오는 길에 어느 집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붉은 잎사귀를 찍는다. 하나는 내 혓바닥 같다. 다른 하나는 누구의 혓바닥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혓바닥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붉은 혓바닥 하나가 붉은 혓바닥 하나를 기다리는 가을 풍경이란, 처참해보인다. 단풍은 원래 그런 빛깔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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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지음), 정덕애(옮김), 솔, 1996년


문학비평가들이 쓴 문학에세이들 대부분이 그들이 가진 편협한 이론적 시야에 갇혀 일방적인 해석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하고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은 반면, 작가들이 쓰는 에세이는 적어도 작품이나 작가를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때로 더 뛰어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산문집 또한 그러하다. 19세기, 20세기 영국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도 그녀의 문장은 독자를 배려하며 독자의 눈길 앞에 순결한 그 하얀 살결을 드러내며 초봄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위장(僞裝)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공손함이 너무나 필수적이기 때문에 전통과 의식을 던져 버리고 마음에 맞는 한두 사람과 ‘가벼운 말’로 대화하는 것은 더운 방의 한 줄기 공기처럼 필수적이다.
- 25쪽


수 차례의 정신병 경력이 있고 빈번한 자살 시도, 그리고 끝내 자신의 생을 자살로 끝냈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글은 감미롭고 때로 냉정하며 격정적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버리지 않는다. 아니면 그녀 스스로 이러한 에세이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그녀의 소설을 꺼내보아야겠다. 세월. 버지니아 울프. 열린 창으로 봄 바람이 들어와 반대편 베란다 창으로 나간다. 그렇게 봄은 지나가고 아직도 영국의 우즈 강은 이승에서의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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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6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Believing is Seeing
마리 앤 스타니스제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연구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두 번 적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적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책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다들 찬사 일변도여서 이건 아닌 것같아 여러 번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라면 원고지 10장 정도의 분량과 슬라이드 20개만 있으면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의 다섯 배 많은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러고 보면 다들 현대 미술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현대 미술을 어렵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째 자기자신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한 관계로 18세기나 19세기의 생각 방식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때문이라고 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현대 미술 비평가들이 잔뜩 어렵게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현대 비평 이론을 몰라도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런 어려운 이론이 왜 필요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작품까지 어려운 이론을 들이밀고 있으니 말이죠.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입니다. '믿는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1+1=2가 맞나요, 아니면 1+1=3이 맞나요?

다들 첫 번째가 맞다고 하겠지만, 몇 분은 왜 저린 질문을 던질까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진 의도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1,+,1,=,2, 3은 다 기호입니다. 추상적인 관념입니다. 원래는 실재하는 사물의 셈을 하기 위해 빗대어 사용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 이젠 관념만 남은 것입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그렇죠. 그러니깐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실제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좀 어렵군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1+1=2가 되고 1+1=3이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고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believing이란 하나의 규범이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입니다. 미술도 하나의 믿음(개념)이며 규범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미술(art)라는 것은'이것은 미술'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했을 때, 보이는 것만 미술로 인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고 이것은 미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저자가 예로 든 모든 것은 다 미술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 우리'가 바라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시스틴 성당 천장화)가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미술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오늘날의 의미로 미술로 인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지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술이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했을 때, 미술의 역사 또한 그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미켈란제로의 후기 걸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지금 우리가 봐도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16세기 중후반의 예술가들, 파르미지아노, 폰토르모, 로소 플로렌티노의 작품들은 무척 현대적입니다. (*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가들입니다.) 오래 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미술의 의미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그들의 작품들은 엄연히 예술 작품입니다. 현대 어느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감동적이죠.

위에서 제가 '믿음은 규범'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미술이라는 제도와 규칙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미술로 인정받기 위한 여러 규칙, 규범, 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현대 미술은 이러한 규칙, 규범, 제도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것은 진보는 아닙니다. 그저 변화일 뿐입니다. 어제 북서풍이 불다가 오늘은 남서풍이 부는 것과 같은 변화일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듯 그런 자연적인 변화입니다. 인위적인 변화도 있지만, 그것도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렇게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죠.

이러한 미술의 변화는 미술 내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미술 자체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실은 모든 예술 이론가들의 꿈이 미적, 예술적 자율성의 확보인데, 웃긴 소리입니다. 왜냐면 예술은 혼자 자족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이 아닙니다. 왜나면 예술은 예술 창작의 대상(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간에)이 필요로 하며 감상자를 필요로 합니다.

미술의 양식 변화는 미술 내의 어떤 동인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더 큰 요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 미술의 변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면 근대 생활은 개인주의 진전으로 이어지듯이 근대 미술도 개인주의화되기 때문입니다. 서명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나쁘지 않습니다. 전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을 뿐이죠.

하지만 미술사와 모더니즘의 발전,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대중매체의 창조, 오늘날의 미술과 문화에서는 순수미술은 물러나고 대중 문화를 차용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듯하여 씁쓰리합니다. 왜냐면 대중문화, 대중매체를 차용한다고 해서 그 미술 작품이 미술관에서 전시되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요. 도리어 그것은 강화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의 저급화'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즉 쓸데없는 소비자본주의적 오브제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짓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정치적 메타포를 집어넣습니다. 이건 요즘에도 통용 가능하는 방식입니다. 정치적 아방가르드 예술이 실제 세상에서 정치적 아방가르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대중들은 그것에 동의할까요? 전 매우 회의적입니다. 차라리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양식적 특징이라고 보기엔 너무 한계가 빤히 보이거든요.

뒤샹이 변기통을 가져다 놓은 이유는, 예술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반 대중에게 야, 니네들이 바로 예술가야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아카데미 미술가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었지만, 도리어 뒤샹의 변기통이 진짜냐, 가짜냐라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극복할 자신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현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여기에 대해선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한참 잘못된 논문입니다. 철저하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작성된 이 논문은 '아우라'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것 이외에는 나머지 것들은 예상을 빗나간 글입니다. 그런데 왜 이 논문을 읽는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예상보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강의 교재로 하긴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식으로 도판 잔뜩 넣은 책을 내고 싶군요. 글은 작고 도판이 많으니, 글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작을 테니 말이죠. 현대 미술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이 책에 대해서 읽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할 것은 저자의 견해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가 아니라, 개념미술과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Comment +2

  • 행인 2013.06.09 13:22 신고

    제가 읽었던 많은 책들을 읽으셨고, 그에 관한 색다른 시각이나 안목을 갖게 해주시는 서평 감사합니다. 비단 몇 권에 책에 관련된 이야기 뿐만이 아닌 많은 아이디어을 얻어갑니다. 우리가 블로깅을 하듯, 이 책 역시 저자의 생각이고 그가 정의내린 개념일 뿐인데 저같은 일반인들은 너무 수직적인 자세로 미술을 대하는 것 부터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확대시킨 비평가들, 또 그들처럼 인식해야지만 '고상한 취향'을 향유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자체가 큰 오류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저 같은 문외한은 그저 읽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만요.. ㅎㅎ 모쪼록 감사합니다. ^_^

    • 거의 10년 전에 쓴 리뷰이네요. 그리고 흥분해서 썼군요. ㅎㅎ 문제 제기만을 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많은 이들이 찬사를 해서 그 때 꽤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현대 미술에 대한 변명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요. 하지만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문제 제기를 위해서 한 번 볼 필요는 있을 꺼예요.
      댓글 감사합니다. ^^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이 현대 미술인데, 사람들은 현대 미술을 어려워만 합니다. 저는 그것이 도리어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의 탓이라 여겨집니다. 실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미술이 현대 미술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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