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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체의 녹색노트

구광렬 엮고 옮김, 문학동네 



음유시인 


             니콜라스 기옌 




알갱이가 빽빽한 옥수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부하들이 

그란마에서 내릴 때,

격정의 바다는

그들이 난폭한 걸음으로 출발하는 걸 본다 

턱수염 없는 근엄한 얼굴,

이마엔 나비들을,

구두엔 수렁, 늪을,

죽음, 군인처럼 노란 유니폼에 미제 총을 한 

죽음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으며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손가락 수보다 조금 더 많은 수가 

희망과 피로로 다시 영광을 향해 출발했다 

깨어난 길에선 주먹을 움켜쥐고 

양귀비를 따 노래를 불렀다 

칼날은 빛났으며 총은 번쩍거렸다 

마침내 산속으로 먼저 들어간 

피델 카스트로는 병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에서 내려간다.

평원은 총들의 바다가 될 것이다."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 사망 당시 그가 메고 다녔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연필로 덧칠이 된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두 권의 비망록은 사후 '체 게바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는데, 나머지 노트 한 권은 시가 빼곡히 적혀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40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노트 속의 시 69편이 밝혀졌다. 바로 체 게바라가 좋아했던 네 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 니콜라스 기옌Nicolas Guillen, 레온 펠리페Leon Felipe의 시들이었다. - 6쪽 


번역자인 구광렬 교수는 체 게바라의 노트에 빠졌겠지만, 나는 세사르 바예호 때문에 이 책을 샀다. 


예전, 어느 프랑스 소설에서 '세자르 발레조'로 옮겨진 그를 읽었고 그 페루 시인의 시를 읽고 싶었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은 흐릿해지고 시집은 일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시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할까. 특히 영미시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그리고 잊고 있던 세사르 바예호를 떠올렸다. 혹시 싶어 찾아보았으나, 한 권은 절판되었고 구할 수 있는 건 이 책이 유일했다. 



XV

-<<트릴세>>에서 



세사르 바예호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저 모퉁이,

하지만 지금 나, 걷기 위해 앉아 있네.

죽은 연인들의 침대는 누가 빼버렸을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넌 조금 전 다른 일로 여기 도착했지.

지금은 없구나. 네 곁에서,

네 허벅지 사이에서 밤을 읽고 

알퐁스 도데의 이야기를 읽었건만.

혼동하지 마, 

이 사랑하는 모퉁에서였잖아.


지난 여름날을 생각해,

작고 창백한 얼굴로

이 방 저 방 드나들던 너를.


비 내리는 이 밤, 

우리 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열렸다 닫히는 두 개의 문,

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그리고 그림자 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안목으로 선택된 네 명의 시인을 우리는 새로, 다시 만난다. 쿠바를 떠나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남미의 숲 속에서 노트를 꺼내 이 시들을 읽었을 체 게바라를 떠올리면, ... 어떤 시들은 가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같다고 할까.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지금, 무참하게 내려누르는 일상의 공포, 책임, 무모함 속에서 시집은 작지만 강한 위로가 된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너무 아름다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이 겨울의 아침, 언어가 가진 슬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쓸쓸한 마음을 잠시 스스로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에게나 추천해도 좋을 시집이다. 


** 


2015/03/04 - [책들의 우주/문학] - 죽은 전원시, 세자르 바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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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

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동일한 테마를 가진 여행의 기록(기억),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되는 이유이면서 제발트가 가지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떠나는 것, 낯선 곳(혹은 잊혀졌던 곳)에서 머무는 것, 그 곳에서 자고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며 얇고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깊숙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해내는 것, 기록하는 것, ... 소설은 이렇게 구성되어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흰 염주비둘기 한 쌍을 지켜보았다. 비둘기들은 여러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날개짓 몇 번으로 나무 꼭대기 높은 가지로 위로 급격하게 떠올랐다가, 짧고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 동안 고요히 창공에 머문 다음 다시 앞으로 쏟아질 듯한 자세로 하강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구르륵 소리를 냈고, 그 중 몇 그루는 이 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키프로스 나무들 주변에서 날개를 고정시킨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70쪽) 


나로선 이 여행들(의 기록)을 따라가기엔 참 힘들었다. 서술은 빽빽하고 무거우며, 한 번 표현된 감정은 곧바로 사물이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독자의 시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따라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을 읽었다 싶지만, 고작 몇 페이지를 지났을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감정을 서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딱딱하고 즉물적이다. 독자는 제발트의 서술을 따라가지만, 그 곳으로 감정이입되어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늙어간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제발트식 여행(의 기록)이란 그런 걸까. 낯선 나와 마주하거나 잊고 있던 나를, 혹은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억들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타자화, 사물화하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지워나가는 걸까, 그리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걸까.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쪽)


우리는 외부를 끝내 알 수 없다. 실은 내부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은 텅 비었고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다. 신념은 조각났고 소설은 의미 찾기를 그만 두었다. 고작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제발트의 문장이 갖는 독일어의 밀도는, 역자로서의 경험이 참으로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치밀한 종류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텍스처texture의 성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52쪽) 


배수아의 의견대로, 너무 빽빽하고 무거워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제발디언'은, 글쎄다.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는 매우 사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일반 독자가 읽기엔 어렵고 재미없고 문장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할까. 마치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하긴 나도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피사넬로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딕 양식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15세기 초반에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작품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일부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을 하다니... 


St. George Liberating the Princess of Trebizond

Pisanello (1395 - 1455), fresco, 223 × 620 cm (87.8 × 244.1 in)

from 1436 until 1438

Church of Saint Anastasia (독일어 - Pellegrini-Kapelle)  


과감하게 읽으라는 권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제발트가 살아있었다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만한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가끔 한국 문학판에 대해 아쉬운 건 번역된(혹은 번역되지 않더라도) 동시대 외국 문학이 어떻게 한국 작가들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초기 작품들을 읽고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오에 겐자부로가 십 수년 전 하루키를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고 말했듯이, 그녀의 최근 작들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제발트를 읽고 흔들렸다면 말이다. 



영어 번역판 표지



* 제발트의 다른 소설. 

2016/05/07 - [책들의 우주/문학]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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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La Carte Et Le Territoire)

미셸 우엘벡(지음), 장소미(옮김), 문학동네 





매우 선명하다. 이 소설을 읽은 지 네다섯달이 지났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도 선명하고 사건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란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대미술에 대해 이렇게 박식할 수 있다니, 감탄을 했다. 소설을 쓸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문장, 인물, 사건의 선명함을 너머 어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진 않았다. 도리어 씁쓸하기만 할 뿐. 



친구들도 이미 모두 죽고 어떤 의미로는 이미 과거에 속하게 된, 실질적으로 삶이 끝나버린 노인의 감정을, 형제나 친구처럼, 곧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처럼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을 프란츠 리스트가 말년에 작곡한 실내악 소품들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은 아마 없으리라. <수호천사에게 올리는 기도>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슬랭은 젊은 시절을, 학생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351쪽 



지금 독자는 그 자신과 어떤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읽는다. 고작 책값, 조금의 시간, 그리고 감정의 동요나 사소한 몰입 정도만 가지고. 그런데 미셸 우엘벡도 그렇게 소설을 적는 듯하다. 너무 차갑다고 할까. 마치 얼음처럼. 아무런 가치 평가도 없다. 심지어 주장마저도 없다. 제드나 우엘벡, 혹은 자슬랭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그 속에서 작가는 어떤 주장이나 가치판단을 내리는 듯 싶지만, 이마저도 차갑기만 하여 호소력을 지닌 주장이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기사처럼 읽힌다. 


결국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와도 같은 문장과 서술로 인해 소설은 선명하고 직선들로만 연결되는 구조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그림자는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이미 움직인 후라, 그 어떤 후회나 반성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최대한 감정이 억제된 인물들로만, 아니 미셸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즉물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의미한 스틸사진들이 병렬적으로 구성되다가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건 제드의 죽음이다. 그것도 담담하게 서술될 뿐이다. 


어떤 이는 현대 미술의 뒷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할 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 아마 이 소설 <<지도와 영토>>를 지배하는 감정일 게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 펑펑 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 


서평을 다 적고 다시 업데이트를 하다 보니,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떠오른다. 묘한 동질감이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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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저자라면... '복종'이란 책을 썼던 저자 아닌가요... 이슬람 문화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서 소설에 기술해서 논란이 되었던...

    • 말 많은 작가예요. "우엘벡이 누구인가? 1958년생, 보수적 정치성향에 극단주의자, 쓰는 글마다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도발적 싸움꾼. 프랑스 태생이지만 테러위협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 중."(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39) 시인 이장욱은 이렇게 적고 있네요. ~ 하지만 논란만큼 매우 중요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도정일(지음), 문학동네 





도정일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다. 다소(혹은 매우) 실망이다. 여러 일간지와 저널에, 마치 마감 시간에 쫓겨 쓴 듯한 짧은 글들의 모음이기 때문이고 대부분 지면에 실린 지 꽤 지났다. 다만 저자가 워낙 유명한 지라, 글 읽는 재미가 없다거나 형편없진 않다. 도리어 다른 책들보다 훨씬 낫다. 글들 대부분 짧고 금방 읽힌다. 대신 깊이 있는 통찰을 느끼기엔 글들이 너무 짧고 그 때 그 당시에 읽어야 하는 시평時評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90년대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2015년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떠나 서글픔마저 느끼게 만든다. 옛날 글 읽는 느낌이 이런 걸까. 몇몇 인용문들은 기억해둘 만했고 다소 긴 분량을 가진 몇 편의 글은 충분히 읽을 만했다. 


그러나 도정일 교수의 진면목을 느끼기엔 아쉬움이 많은 책이다. 아니면 나같은 독자가 읽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글들의 편차가 너무 심하고 밋밋한 칼럼들이 많았다. 글을 읽으면서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편집이 아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8점
도정일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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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앗, 그런가요?
    제목이 참 좋아서 언젠간 읽어야지, 싶었는데 말이죠..

    • 1990년 중반부터 쓴 신문 칼럼 모음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글들이 나쁘다기 보다는 잡지 기고글인지라 지금 읽기엔 철 지난 글들이기도 하고,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산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것도 아니고 ... 재미없다고 할 순 없으나, 저자가 워낙 유명한 분인지라, 그 명성에 책은 미치지 못했다고 할까요. ~ ^^; (아니면 제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城 

김화영(지음), 문학동네 






여행은 나의 삶이 남의 삶이나 공간을 만나는 감촉이며 공명(共鳴)이다. - 7쪽 




'예술기행'이라는 부제를 읽곤 프랑스의 여러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대부분 프랑스 문학 작품과 연관된 기행 산문집이다. 예술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미술이나 조각, 음악에 대한 다채로운 내용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대를 했다. 


김화영, 그는 1974년에 이미 카뮈 연구로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카뮈에 있어선 국내 최고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년 그는 어느 형편없는 출판사의 노이즈 마케팅에 휘말렸다. 그 때 나온 기사들이나 광고를 거의 읽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번역 문제는 늘 있어왔던 것이고 해석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불어를 한글로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며, 김화영 교수의 번역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는 있기에. 하지만 내가 그 기사들이나 광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예의 없고 버릇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성실한 프랑스 문학 연구자이며 한국 독자들에게 프랑스 문학을 소개해왔으며 카뮈 전집을 한국에서 읽을 수 있게 한 老교수에 대해 '엉터리 번역'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마케팅을 했고,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형편없음을 여러 기사들을 통해 증명하고 있던 여러 일간지의 기자들마저도 앵무새처럼 '엉터리 번역'이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런 상황에 독자들은 자신들의 무지몽맹함을 뽐내며, '엉터리 번역'에 동조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실은 지금도 인터넷 서점 리뷰들을 보면 그 때 올라간 많은 리뷰들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영어 번역본을 한글로 번역했고 이를 프랑스어 원문과 대조했음이 드러났다. (관련 사항은 엔하위키 미러 - 이방인 항목 참조) 더구나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indifference님 블로그 참조) 하지만 그래서? 일은 이미 벌어졌고 새움출판사는 자랑스레 이 책을 팔았고 지금도 팔고 있다. 세상은 이렇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상처를 낸 사람은 잘 살아갈 것이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서두에 나오는 여러 성들의 모습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성만 남거나 그 성을 가지고 있던 귀족은 없고 그 후손도 없고 관리인만 남아있거나 ... ... 그런데 성마다 남모를 사연들이 있어서 하나하나 놓칠 수 없다. 아마 지금 프랑스에 가서 그 성들을 보는 것과 이 산문집에서 표현된 성들과는 벌써 거의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책은 젊은 불문학자의 글에서부터 노년에 이른 불문학자의 글이 한 곳에 담긴 것이다. 첫 장 '예술의 성'은 이미 1980년에 열화당을 통해 문고판으로 나온 바 있었지만, 책 후반부의 여행 산문들은 1990년대 이후의 흔적들이다. 


나에게 이 책은 여러 성들의 모습과 이야기가 좋았다. 서양미술사에서 언급되는 성들은 그리 많지 않고 조형적 혁신을 이룬 대표적인 작품 위주이지, 그 성에 담긴 사연 위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몇 명의 작가들, 특히 샤토브리앙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샤토브리앙에 대해선 포스팅했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거나 기행 산문집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하지만 우리가 요즘 흔히 접하는 그런 기행 산문집 - 글을 거의 없고 사진들로만 가득찬 - 이 아니다. 보기 좋은 사진들 대신 프랑스 소설가나 시인의, 기억하고 노트해 둘만한 글들이 인용된다. 그러니 이 책의 독자들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이방인>> 번역을 언급한 것은 그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몇몇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태가 바로 잡히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바 기자나 학자가 아니라 이름 없는 블로거가 실질적인 대응을 했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자주 접하게 되는 역자들이 있다. 이휘영, 김현, 민희식, 김화영, 이재룡 ... 그들의 노고를 잊지 말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8점
김화영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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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문학동네 




아직도 갈리마르에서 일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이 책이 나오고 난 다음 문학동네 초청으로 한국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던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소문을 듣고 이 책을 읽던 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류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이도 얼마 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가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최고의 데뷰작을 쓰는 것이 아닐까. 꼭 르 클레지오가 <<조서>>로 데뷰했듯이. 이 소설을 안 읽었다면 서점 가서 사서 꼭 읽어보길. (2005년 11월)



--


원제 "Annam"은 베트남의 옛 이름이다. 베트남은 한 때 프랑스 식민지였고, 그 때의 명칭이 '안남'이다. 실은 중국이 베트남을 부를 때, '안남'이라고 하는데, 이를 프랑스가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쌀을 '안남미'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래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식민지 베트남 출신이고, 알베르 까뮈나 자끄 데리다의 고향이 식민지 알제리 출신이라는 것은 늘 흥미를 끈다. 


이 소설은 그런 식민지 풍경을 그린다. 문장은 서정적이다 못해, 부드러운 꿈결 같고 동남아시아 특유의 하늘과 대기가 소설 속에 녹아든 듯하다.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길어서, 이 책을 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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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바타이유다. 오래 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김정란 교수와의 인터뷰다. 현재 그라세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라세는 갈리마르 출판 그룹의 계열사로 알고 있다.  http://blog.aladin.co.kr/urblue/529249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유저 | 김화영역 | 문학동네 | 2006.09.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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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 - 6점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문학동네



밀어 密語 
김경주(지음), 문학동네 





육체는 선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詩가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언어에게서 태어나는 하나의 육체라면, 뛰어난 散文은 그 육체를 감싸며 겉도는 하나의 선이다. 몸의 선은 그 자체로 숨 쉬는 비율이며 튀어오르는 정밀한 뼈들을 감추고 있는 이미지다. 쇄골은 육체가 기적적으로 이루어낸 선線의 풍경이다. 



오래 이 책을 읽었다. 기대되었다. 김경주 시인의 산문. 그것도 몸의 은밀함에 대한 글이라니.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책들과 작가들이 인용되고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그의 산문은 깊이를 더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독서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고 두서없는 그의 상념들은 그의 우아한 언어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의 시적 감각은 질서없이 흩어지는 봄날 벚꽃처럼 내 눈 앞에서 반짝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몇몇 문장들과 인용구, 상념의 편린들은 좋았지만, 책은 전체적으로 내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여러 잡지에서 만났던 그의 산문이 무척 좋았던 탓에, 요즘 젊은 시인들 중에서 탁월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던 시인이었던 탓에, 이 책에 대한 내 평점은 낮다. 이는 이 책에 대한 의도적 깎아내리기가 아니라, 이 책보다는 그의 시집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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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 8점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문학동네



저지대 

헤르타 뮐러(지음), 김인순(옮김), 문학동네




참 오래 이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오래 읽은 만큼 여운이 남을 진 모르겠다. 번역 탓으로 보기엔 뮐러는 너무 멀리 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그녀의 양식이 낯설다. 자주 만나게 되는 탁월한 묘사와 은유는, 도리어 그녀의 처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그녀는 의미의 망 - 단어들을 중첩시키고 시각적 이미지를 사건 속에 밀어넣어 사건을 애매하게 만들었으며, 상처 입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인물들 마저도 꿈과 현실 사이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그녀의 작법은 시적이며 함축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답답하고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얼굴의 모든 낱말은

악순환에 대해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사물들이 물질을 통해 속이고, 감정들이 몸짓을 통해 속이기 때문에, 낱말의 소리는 자신 역시 속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물질의 속임과 몸짓의 속임이 마주치는 접점에서, 말의 소리는 자신이 꾸며낸 진실을 가지고 둥지를 틉니다. 글을 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느냐 보다는 거짓이 얼마만큼 성실하느냐 입니다. 

- 262쪽 - 263쪽

'모든 낱말은 악순환에 대해 알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연설 중에서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대단히 매력적이며, 한 번은 읽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대신 이 소설을 읽을 땐 한 번에 다 읽는 것이 좋을 지도. 나는 너무 띄엄띄엄 읽은 탓에, 제대로 읽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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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아직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펼치면서 마치 비밀스러운 과거 - 문학이 모든 것이었던 시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시선(視線)들은 문장이 풍기는 향기에 숨겨져 모호해지기만 하니 말이다. 


시선 -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원근법이다. 데카르트적이거나 반-데카르트적이고, 무언가(어떤 대상)를 궁금해하거나 원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적이거나 반-플라톤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글들은 원근법을 아름다운 안개 - 결국은 모호할 뿐인! -로 숨기고 우리를 이끈다. 


종종 아름다운 글들은 우리들은 아프게 한다. 그건 아름답기만 할 뿐이기에. 


문학 비평은 문학 작품에 기생하고 결국 작품 속에 묻힌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비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비평이 기생하는 작품에 따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에서 시작했지만 문학에 가 닿지 못한 이유도 이 탓일까. 


오늘 신형철의 책을 펼치면서 그가 소개하는 여러 작가와 작품들, 나에게 대부분 생소하기만 한 이들 - 몇 명은 술자리에서 만나기도 했고 몇 명은 같이 학교를 다니고 했지만 - 속에서 그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산문집,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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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현대와 그 이후 - 10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지음, 김경식 옮김/문학동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미적 현대와 그 이후』, 김경식 옮김, 문학동네, 1999.

 


서가에서 책을 꺼냈다. 책 표지를 펼치자, 1999년에 내가 이 책을 읽었음을 드러내는 메모가 보였다. 한창 공부를 할 때였고, 벌써 십 여 년이 지난 일이다. 내가 읽었던 문학 이론, 혹은 미학 관련 책들 중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이 책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거의 없었다. 놀랍도록 선명한 입장으로 미적 현대 이후의 탈근대를 설명해 나가는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에 대한 연구는 일부의 독문학 전공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인 듯 보인다. 그의 주저 중의 한 권은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된 듯, 문학과지성사에서는 절판을 시켰다. 이런 상황을 보면, 학문의 세계에도 트렌드와 패션이 있고, 학문의 진정성이나 깊이, 통찰과는 상관없이 트렌드와 패션에 민감하느냐, 민감하지 않느냐가 중요해진 세태를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는 ‘수용미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한국에서 이해하고 있는 바 ‘수용미학’ 이상의 깊이와 통찰을 지닌 학자이다. 이젠 절판된 ‘미적 현대와 그 이후’는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가 ‘연구했던 현대성의 개념사를 계몽주의에서 진척시키기 위해 쓴 논문들을 한 곳에 묶은 것’이다. 특히 미적이고 예술 수용적인 관점에서 미적 현대성(aesthetische Moderne)에 대해 살펴보고 되짚고 있다. 특히 ‘반(反) 자연으로서의 예술: 1789년 이후의 미적 전환에 관하여’든가 ‘이탈로 칼비노: 만약 어느 겨울밤에 한 여행자가 - 탈현대적 미학의 변호’는 흥미진진한 독서의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1999년에 읽었고 그 이후 한 번 더 읽었던 이 책에 대한 독서 경험이 아직도 선명한 것은 그만큼 이 책이 가지는 호소력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문학 이론이나 미학 전공자가 있다면, 이 책은 반드시 필독서이다.

아래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이 책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서가에서 책을 꺼냈으니, 당분간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 오래된 감상 -


누군가가 속물적으로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고 그것을 찬양하거나 그것을 배격한다면, 찬양하는 자에겐 ‘당신이 얼마나 근대적인 줄 아시오?’라고 물을 것이며 배격하는 자에겐 ‘당신이 얼마나 포스트모던적인 줄 아시오?’라고 물을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아무런 확신도 던져주지 못하고 우리의 이성이 고작 인간 이성의 한계 만을 드러낼 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 순간을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시작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러니 ‘포스트모던’은 ‘흄’부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한국의 그 어느 것도 포스트모던적이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포스트모던을 떠들고 있는 나는 ‘시대착오’이며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은 한결같이 얼치기 패러디이거나 미숙아, 혹은 무뇌아적 산물일 뿐이다. 아마 이것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보자면 지배계급의 농간에 의한 미적 탈근대의 수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80년대를 무겁게 짓눌렀던 정치경제학적 거대담론을 몰아내기 위한 전술이었고 지식인들의 자포자기적 반응들이 한국적인 탈근대적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상업주의에 대한 찬양이었으며(역겨운 문화담론들을 보라!) 허풍만 심한 (상업)영화르네상스를 불러왔고 돈에 혈안이 될 것이 뻔한 문화산업들에게로 대중의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지금 포스트모던을 향해가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가 ‘아직 근대를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몇 명의 근대주의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탈근대를 옹호하고 있는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가치있는 저작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책의 세부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 ‘루소에서 칼비노까지’라는 부제를 붙인 이 책의 세부를 다룬다면 이 글은 꽤 길어질 것이다.

참고로 누군가가 ‘주체가 죽었다’라고 단언했을 때, <‘주체가 죽었다’라고 말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되묻는다면 그 물음은 포스트모던의 딜레마를 지적하는 매우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할 때, 그것이 ‘20세기판 허무주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문학비평’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매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적어도 문학비평가라는 수식어를 가지려면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 책 표지에 실린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의 소개를 옮긴다.

수용 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야우스는 1921년 독일에서 출생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프루스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중세 문학 연구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뮌스터 대학과 기센 대학을 거쳐 1966년부터 콘스탄츠 대학에 재직하면서 대학 개혁 프로그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문예학 분야에서 이른바 '콘스탄츠 학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연구 집단인 '시학과 해석학'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수용미학의 선언문'으로 불리는 '문예학의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는 16개국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커다란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때부터 그는 '수용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8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도전으로서의 문학사'(1970), '중세 문학의 고대성과 현대성'(1977), '미적 경험과 문학적 해석학'(1977/1982) 등 일련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퇴임 후에도 왕성한 연구 활동을 통해 '미적 현대와 그 이후 - 루소에서 칼비노까지'(1989), '이해의 길들'(1994) 등 수준 높은 연구물들을 발간했다. 1997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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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6점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캐비닛>>, 김언수(지음), 문학동네, 2006


쉽게, 아주 짧은 시간에, 힘을 거의 들이지 않고 다 읽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히고 종종 흥미 있는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신기하고 낯선 스토리였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스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단지 이러한 스토리로 소설을 쓸 생각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확실히 나라면, 이런 소설을 쓰지도, 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책 뒤에 실린 심사평의 일부는 동의할 수 있었고 일부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의 높은 평가과 찬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평가들이 많았고, (심각하게)스스로 내가 이상한 독자나 평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특별하거나 흥미진진한 인과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병렬적으로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라는 것이, 카프카의 여러 소설에서처럼 현대 세계의 불길하고 암울한 슬픈 모습의 반영이나 은유라기 보다는 그저 신기한 이야기 수준에서 멈추어 있었다. 한 번 진지하게 따져보자. 일요일 오전 MBC에서 방영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신기함의 수준에서? 정보 전달 방식의 차이에서?

나의 평가를 너무 야박하게 여길 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다음, <<캐비닛>>은 속이 텅 빈 채로, 낯선 별나라에서 수입된 과자 포장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구에 사는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별나라에서 수입되었다는 이유로 주목은 받았지만, 포장지를 벗겨내면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소설을 다 읽은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분명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이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정적 여운도, 감정적 흔들림도 남기지 않는다. 진지한 세계나 질문은 거세되어 있으며, 현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너무 보수적이고 심각한 독자이다. 나는 현대 소설이야 말로, 위대한 서사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이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고 가치있는 발언을 계속 해야 된다고 믿는 골치 아픈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고 찬사를 거듭한 평자들의 눈에 나같은 독자는 당장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테마들로 가득 찬 도서관 서가 구석으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치부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왜, 어떤 이유로, 소설의 진정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소설이 가진 힘에 대해서 논하는 소설가나 평론가들이 사라져 가는 것일까? 무엇이 포스트모던 사상가로 분류되는 가라타니 고진으로 하여금,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르트르의 낡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꺼내들게 만드는 것일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 독서 행위는 이제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나 한국의 조폭 코메디 영화를 보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며, 이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은 이런 영화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영화(또는 TV 드라마)와의 거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옆에서 평론가들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느라 정신 없다.

꼭 'PC방 Vs. 비디오대여점'을 보는 것 같다. PC방의 성공으로,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듯이, 영화나 TV 드라마로 인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사라진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그래서 소설은 영화나 TV 드라마보다 나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소설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소설의 가치와 위상을 절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영화, 또는 TV 드라마와는 전적으로 다른 장르이며, 매체다. 소설가라면, 절대로 영화화, TV 드라마화, 심지어는 희곡으로도 만들 수 없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소설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해야 되지 않을까.

결국 나는 너무 보수적이거나 심각한 독자이거나, 또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친 무명의 평자일 것이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불행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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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ink-lotus 2008.02.12 13:52 신고

    책에 대한 소개보다는 요즘 글에 관한 글에 깊이 공감하고 갑니다.
    맛있는 글읽기가 사라지는 건 정말 불만이예요.
    영화나 드라마가 보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읽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 소설을 쓰는 것을 수입의 원천으로 삶고자 하는 모든 소설가들에게 불행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진지함' 자체가 사라져가는 사회니까요. 소설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소설을 써야한다는 말씀에 깊이 동감하고 갑니다.

  • 미 섭 2008.08.04 17:34 신고

    (어쩌다 다시 이 공간에 들어왓군요..
    파아란 영혼이란 문구가 어쩐지 낯익다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기대 되어]
    그만 실수를 ...)

    '여러 의미에서 나보다 아래에 속한' 사람이니 선의의 호의를 드립니다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는
    골방에서( 자기자신만의 물리적 공간성) 자판치는 것의 부작용은
    사실 크게 해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얼굴 마주보지 않는 물리적 공간으로의 골방의 익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주체적 본질체의 열린 마음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 혹은 내가 아직 모르는 다른 진실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스스로 존중의 마음을 품고 있느냐의 여부 입니다

    파아란 영혼...
    열린/ 드러난/ 실체성으로의 우주적 색체에 대한 개인적 뉘앙스이기에.

    물론
    우주는 드러난 실체성 이외의
    그 드러난 실체성이 유지(드러날 수 있도록)될 수 있도록, 가능하도록 하는
    드러나지 않은 존재성을 갖고 잇을 것이고
    결국 우리 관용의 범주라는 것조차도
    미비하고 지엽적이고 편협한 것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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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녀, 넬리 아르캉(지음), 성귀수(옮김), 문학동네, 2005.


1. 신시아에게.

신시아, 책에서만 보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어. 나도 너처럼 마른 여자가 좋아. 그러니 네 외모에 대해선 그렇게 많이 이야기할 필요 없어. 그러면 그럴 수록 너는 예쁘지 않으니깐 말이야. 하지만 네 맑은 눈동자는 나에겐 부담스러웠어. 너의 눈동자는 궁지에 처한 17살 소녀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드러낼 때의 그 빛깔을 가지고 있더군. 그러나 소녀는 한없이 사랑하는 어떤 이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기만 하면 금새 풀려버리는 그런 종류야. 신시아. 그러니, 그냥 울어버려. 그게 더 낫지 않을까.

다행이야. 너와 키스만 했다는 게. 아마 너와 관계를 맺었다면 너는 날 공격했을 꺼야. 형편없다면서, 깔깔대며 웃었을 거야. 그건 네가 이해해줘야 해. 요즘 절대적으로 알코올 부족이거든. 그리고 이제 몸이 많이 상해 들어오는 알코올마저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더라고. 네 생각을 하니, 벌써 네 입술이 그리워지는구나. 하긴 그만큼 외로운 탓이겠지.

넌 아마 나보다 훨씬 더 외롭고 힘들 꺼야. 너의 글쓰기엔 그런 게 묻어 나와. 사람들은 네 글에서 문학성을 찾겠지만, 내가 보기엔 네 글쓰기는 너무 서툴러. 문학적 완성도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하지만 도리어 그게 널, 네 글을, 네 영혼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어. 하지만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니. 그런다고 네 삶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 엄마가 네 아빠가 네 기대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네 사랑이 뜻대로 되지도 않을 꺼야.

세상 대부분의 일은 네 뜻대로, 우리 기대대로 되지 않아. 루저(loser)같다고. 그래, 난 루저야. 잘 될 꺼라 생각했는데, 잘 되지 못했어. 어쩌면 네가 나보다 낫구나. 넌 몸이라도 팔아가며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난 그렇게 할 자신마저 없으니 말이야. 어쩌면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너와 술 한 잔 마시지 못한 게 좀 그렇긴 해. 영업 중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은 무안했어. 나라도 혼자 술을 마실까 하다가 그만 두었어. 술을 마셨으면 네 슬픔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야. 도리어 적당량의 네 슬픔과 다수의 내 슬픔이 뭉쳐져 내 몸을 짓눌렀겠지.

너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난 정말 외로워. 누군가가 날 데려가줘’라고 악을 쓰는 것 같아. 하지만 너는 너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그 남자의 엉덩이를 세차게 네 작고 이쁜 발로 걷어낼 꺼야. 그리고 그 정신분석가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세상이 뒤집힐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야, 그 정신분석가가 너에게 갑자기 나타나,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나와 함께 가줘’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곧장 따라 나서지 않을 거야. 너도 알겠지만, 세상은 그리 허술한 곳이 아니거든. 더구나 너도 나와 비슷한 루저(loser)야. 루저에게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알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성공이야. 빌어먹을 종류의 것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것 말야. 정말 형편없는 짓이지.

더 이상 조각날 것이 없을 정도로 너를 파괴하고 싶었겠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도리어 세상에 대한 오기만 남지. 그리고 그게 한계야. 그래서 난 더욱더 세상이 싫어. 이 세상이. 이 세상은 변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늘 냉정하고 무관심하지. 그런데 그 세상을 보고 읽어대는 사람들이 변했어. 그리곤 자신들이 변한 건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맞다고 우기지.

벌써부터 네가 그립구나. 하지만 너와 난 친구가 되긴 너무 성향이 틀려. 혹시 몰라.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널 둘러싼 세상에 대한 배려를 배운다면 나와 친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너는 너의 그 독특한 매력을 잃어버릴 꺼야. 후후. 다음에 갈 땐 화장품 세트라도 하나 사가지고 갈게. 네 비즈니스를 조금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 조심해. 안녕.


2. 신시아, 그녀는 창녀.

소설 <창녀>는 20대초반의 깡마른 듯 읽히는 어느 창녀가 혼자 거침없이 떠들어대는 독백체의 수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시적인 표현이라든가 우아한 문장이라든가 하는 건 기대하지 않고 읽는 편이 좋다. 도리어 황당할 정도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 세상에 대한 오해와 분노, 가족에 대한 애증의 감정, 그리고 너무 골이 깊은 외로움만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그녀, 신시아는 무릎 꿇지 않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더 상처 입히고 모욕하며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경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도 세상에 대한 공격일까. 온통 자기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 이 소설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이해해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 소설은 삼류의 저급한 고백록이 되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일정 수준 이상의 문학성은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놀랄 만큼의 뛰어난 문학성이라거나 충격적인 작품도 아니다. 이 작품을 읽고 뛰어난 문학성을 읽어내거나 소설 내용에서 충격을 받는다면, 읽는 이 자신이 그만큼 현대적인 어떤 경향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창녀’라는 직업은 그녀 고유의 공격 도구이다. 그리고 궁지에 내몰린 어린 영혼이 선택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녀는 시작부터 일반적인 의미의 ‘창녀’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창녀’를 택했고 ‘창녀로서의 존재’에 대해서 그녀 나름대로의 이해와 해석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고 창녀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시도하거나 창녀에 대한 문학적 환상을 품는 건 대단히 잘못된 방식이다. 그녀는 오히려 남자들의 세계에 속해 있는 창녀를 모욕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로 대변되는 어떤 여성상에 대한 반발과 모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남자들의 세계까지 모욕하고 싶어하고 남자들의 치부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아마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공격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그 공격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 그 누구도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슬퍼할 것이다.

소설 <창녀>는 그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는 어떤 세계, 오직 자신의 이야기만 있는 어떤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자기자신 중심인, 자폐증의 세계를 향해간다. 그리고 결국 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울부짖으며 스스로를 가두어버린다. 스스로 가두어놓고선 세상 탓이라고 우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미성숙의 세계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실은 우리들은 우리들 마음 속에 그 자신만의 ‘신시아’를 남몰래 가두고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간 잘 가두고 숨겨놓은 자기자신의 신시아가 그 모습을 드러내어 소설 <창녀>에서처럼 울부짖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창녀 신시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해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의 신시아를 없앨 수도, 치료할 수도 없다. 그저 잊고 지낼 수 밖에 없다. 우리들 마음 속의 창녀를 숨기고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다만 우리들 마음 속의 창녀 신시아가 나타나지만 않기를 기원하면서. 그럴 때, 신시아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만 조심하면 된다. 그뿐이다.

세상은 원래부터 그랬던 곳이고 우리는 늘 언제나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였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아가면 그뿐이다.


창녀 - 8점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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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렸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알 턱도 없었고 알기도 싫었을 것이며 알려는 의지도 없었다. 이미 선 긋기는 시작되었다. 저 땅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곳.....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쓸쓸한 커피숍

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테슬라의 Market Cap(시가 총액)
음악 소비는 이제 스트리밍이 대세
혼술
스테이지 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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