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16

낮술

대낮에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난다. 그렇게 걷고 나면 쉬이 지친다. 이젠 뭘 해도 지칠 나이가 되었다. 지쳐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떤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단 전제가 있기는 하다. 그렇게 영영 의식이 없어야 한다. 사후 세계라든가 이런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생명의 입장에서야 살고자 하는 의지가 크지만, 우주의 입장에서는 생명이란 우연스러운 사소한 사건일 뿐이며, 생과 사는 일종의 반복이며, 등가(等價)다. 내 의식에겐 죽음이며, 사라짐이지만, 우주의 입장에서는 변화란 없다. 어차피 우주 전체적으로는 고정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냥 소주를 마시다 보니, 내 손이 빨라졌고 취한다는 생각 없이 그냥 마셨을 뿐이다. 최근 나는 너무 급하게 술을 마시고 순식간에 취하고 그렇..

모던 로즈, 남서울미술관

모던 로즈 2019.10.15 - 2020.03.01. 남서울미술관 참여작가 - 고재욱, 곽이브, 금혜원, 김영글, 김익현, 이종건, 임흥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에 갔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따로 시간을 내어 미술관에 가는 일상이 저 멀리 떠나간 지 오래된 터라, 이런 시간마저 귀중하게 여겨진다. 남서울분관이 '구한말 건물'이라는 건 알았지만, 벨기에 영사관이었음을 저 전시를 보고 난 다음에서야 알았다. 전시 설명들 중 일부를 옮긴다. 건물을 다시 읽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전시라, 작품에 집중하기 보다는 건물에 집중하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꽤 있었고 전시는 나쁘지 않았다. 일종의 (남서울미술관 건물에 대한) 메타적인 접근이었고 이런 측면에서 전시된 작품들은 상당히 좋았다. (이 전시를 ..

이상원 미술관 방문기

이상원 미술관 http://www.lswmuseum.com 외진 산골의 미술관이라, 다소 낯설었다. 실은 이상원 미술관라고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 외진 곳에 위치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미술관의 중요한 점들 중 하나가 접근성인데, 이상원 미술관은 이것과는 관련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불편함은 여러모로 장점이다. 공기가 좋았고 조용했으며, 직원들은 친절했고, 건물과 시설은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했다. 여러 잡지들의 기사를 통해, 아는 이의 말을 통해 이상원 미술관을 이미 몇 해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굳이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상원의 작품이 내가 선호하는 작품 스타일도 아니고,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지나치게 사실적인 이상원의 스타일은 동시대 미술이 추구하는 방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La Collection De La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2017. 5. 30 - 8. 15, 서울시립미술관 현대미술의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준 전시였다. 특히 차이 구어치앙(Cai Guo-Qiang)의 거대한 작품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화약을 이용하여 제작된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가들이 어느 정도까지 매체와 표현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가를 정직하게 보여 주었으며, 그러한 고민이 현대미술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음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되었다. (아래 동영상은 차이 구어치앙의 작업 방식에 대한 영상물이다) 이불의 작품 는 구시대의 흔적을 드러내면서 그 당시의 고문, 억압, 자유의 박탈 같은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점에서 상..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차문성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 유럽편 - 차문성(지음), 책문(성안당), 2013년 초판/2015년 장정개정판 좋은 책이다. 비전문가인 저자가 전문가가 되어간 과정이 녹아있다. 성실한 내용과 애정이 담긴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박물관학 석사 과정을 마쳤으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특히 유럽 주요 도시에서 가기 쉬운 미술관/박물관을 선정해 보여주었다는 점도 이 책이 꽤 실용적임을 증명한다. 내가 이 책을 읽은 목적은 유럽의 여러 도시에 흩어진 미술관, 박물관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 책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책 제목 그대로 예술기행이다.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생페테르부르그 등의 도시에 있는 미술관/박물관..

래디컬 뮤지엄 Radical Museology, 클래어 비숍(지음)

래디컬 뮤지엄 - 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클래어 비숍 Claire Bishop (지음), 구정연 외 (옮김), 현실문화 (저자의 website: http://clairebishopresearch.blogspot.kr/) 지난 가을, 키아프(Korea International Art Fair)를 갔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을 관람했다. 이 두 이벤트의 묘한 대비는 무척 흥미로웠고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 뿐이었다. 키아프만 간 사람들과 국립현대미술관에만 간 사람들 사이의, 두 경향의 현대미술전시가 보여주는 간극이 메워지지 않을 듯 느껴졌다면, 심한 비약일까. 아트페어와 미술관의 전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같은 미술관 공간이라도 비엔날레같은 행..

가나아트 컬렉션 앤솔러지,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가나아트 컬렉션 앤솔러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어느 대담에서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과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 감상을 하고 나온 후, 거리 가로수 이파리의 색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세상 풍경이 더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졌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을 둘러보고 나오는 일상이 우리들의 삶과 얼마나 멀리 동떨어져 있는가를 생각할 때면, 참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일반인들의 그런 일상을 무너뜨리고 미술 - 순수 미술 - 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한 때 고민하고 실천하기도 했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가람미술관에서 가끔, 인상주의전을 하기만 하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길게 줄을 서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더 절망..

몸의 말 Body Speaking Words, 한미사진미술관

몸의 말 Body Speaking Words2015. 10. 17 ~ 12. 31한미사진미술관 작년 겨울, 온 몸이 지쳐있었을 때, 한미사진미술관엘 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그 인근에 간 틈을 타, 잠시 미술관에 갔다 왔다. 미술관 안은 조용했다. 미술관의 조용함은,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탓에 나를 거친 현실로부터 떨어지게 한다. 하지만 이 낯설고 편안한 조용함은 반대로, 사람들이 좀 더 미술에 가까워지면, 미술시장 활성화나 예술가의 생계에 도움이 될 텐데라는 생각과 만나면, 조용함이 깨진 미술관이 어쩌면 우리 미래를 위해선 더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이 전시는 한미사진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들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몸을 주제로 하여 소장품들을 모아 전시하였고, 작품들의 수준 또한..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대척점의 항구(Port of Reflections)

Leandro Erlich 레안드로 에를리치Port of Reflections 대척점의 항구2014. 11. 4 - 2015. 9. 1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박스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2014 2012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의 전시 이후 다시 만나는 레안드로 에를리치다. 197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인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2001년에 이미 베니스 비엔날레에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했다. 이십대 후반에 이미 그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 셈이다. 2005년에 다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2000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 2001년에는 이스탄불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이른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번 국립 현대 미술관에 전시된 는 그간 그가 보여주었던 공간의 착..

권총과 반 고흐 :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http://www.metmuseum.org/collection/metcollects/feature http://www.metmuseum.org/collection/objects?pkgids=279&feature=nineteenth-century-exhibition-pistols 사진 이미지를 확대해서 보면, 그 장식의 정교함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이는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 권총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데, ~ 왜 요즘에는 이런 물건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인건비 때문일까. 하긴 이 권총을 주문하여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재력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는 건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긴 하지만. RosesVincent van Gogh (Dutch, 1853–1890)1890 반 고흐의 작품을 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