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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미학 +25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

김승곤 외 지음, 홍디자인출판부, 2000년 



몇 개의 논문은 읽을 만하다. 가령 최인진의 <사진 수용 단계에 있어서 다게레오타입의 전래 유무에 관한 연구>같은 논문은 이런 논문집이 아니곤 읽을 일이 거의 없다. 특히 3부에 실린 세 편의 논문, 이경률의 <현대미술과 사진적 레디메이드>, 박주석의 <초현실주의 사진과 비평>, 최봉림의 <사진 초상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는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나 대체로 재미없었다. 논문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김승곤 선생 회갑 기념 논문집'이라는 부제에 어울리지 않게 신변잡기적인 에세이가 실려 있기도 했다. 책의 출간년도가 2000년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한국의 사진 비평이나 이론의 수준이 딱 이 정도 수준이라는 걸까. 한국 사진 이론의 변천을 전문적으로 다루지도 못하고 그 때 당시 활발히 활동하던 이들에게서 글을 받아 모은, 그냥 진짜 '기념 논문집'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구입한 이유가 있었는데, 어느 전시 평문에서 어떤 글을 읽고, 그 문장이 있던 이 책을 구입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문장이 무엇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이 책도 구입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으니 ... ... 


사진 이론에 관심 있다면 이 책보다는 다른 책들이 더 나아보이는데, ... ... 아, 사진 이론 관련 책들이 뭐가 있나. 직업적 사진가나 사진 작가, 혹은 사진 애호가는 많지만, 사진에 대한 글/비평에 대해 관심 있는 이는 적거나 거의 없다(이는 문학을 제외한 모든 예술 분야가 똑같다). 그러니 이 책을 추천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다른 책에는 무엇이 있나 하는 생각에 예술 이론 분야에 한글로 된 책들의 부족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 - 6점
김승곤 외 지음/홍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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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입문 Theory of Beauty :  An Introduction to Aesthetics 

H. 오스본(Harold Osborne) 지음, 김광영 옮김, 박우사, 1994



한창 공부할 때 사둔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고 구해 읽을 필요도 없는 책이다. 1952년 영국에서 출판된 책이며 해롤드 오스본의 주저도 아니다. 번역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미학에 대한 충실한 이론서도 아니다. 저자는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아름다움(Beauty)를 가진 예술 작품에 대한 이론적, 미학적 논의를 이 책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름들은 한글로만 표기되어 정확히 누구인지 알기 어렵고 일부는 잘못 표기된 경우도 있어, 제대로 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또한 많은 인용문들은 어느 책에서 발췌한 것인지 알기 어려우며 그 번역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최근의 이론들이나 관점에 기반하지 않아 미학의 기본적인 생각을 다듬을 수 있으며, 특히 예술작품론이나 감상론 부분은 잘 다루어지지 않는 영역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스본은 책의 서두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는 당초 파산적(破産的)인 것'(10쪽)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오스본은 자신만의 과감한 주장을 전개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작품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기술한다.  

 

예술작품이란 이 사람이나 저 사람 또는 여러 사람들에게 때때로 현실화되어 보이는 영원한 가능성인 것이다. 

- 128쪽 


미학 전공자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픈 생각은 없다. 요즘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새 책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냥 습관처럼 읽은 책에 대한 메모를 남기기 위해 이 리뷰를 적는다. 이 책이 궁금하다면 영국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이제서야 인문학 책들이 읽히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없다. 허망하다. 



https://www.amazon.co.uk/dp/B0000CIBJR/ref=cm_sw_r_cp_dp_T2_3GOrzbM9WCK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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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원제 Le Photographique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지음), 위베르 다미슈 Hubert Damisch(불어 옮김), 최봉림(불어를 한글로 옮김), 궁리 (대림이미지총서05) 





Jackson Pollock (1912-1956)

Gelatin silver print, 1950

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Institution

Gift of the Estate of Hans Namuth

Image copyright Estate of Hans Namuth



그러나 분명 나무스는 사진가로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가적 역량으로 촬영 각도, 프레이밍, 흑백 콘트라스트, 그리고 문제가 되는 사진 대상의 모든 구성 요소를 고려했다. (...) 

나무스의 사진 속에서 폴록은 언제나 커다란 화폭 사이에 끼여 있는데, 어떤 화폭은 벽에 세워져 있고, 어떤 화폭은 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 연속 상태 속에서 검은 선과 하얀 선은 뒤얽혀 공격적인 모티브를 형성하며, 또한 아틀리에의 바닥에 보이는 얼룩 반점들 속에서 반복된다. 그리하여 사진은 위아래가 하나로 붙은 공간을 재창조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형상이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인체가 중력과 단단한 바닥과 맺는 관계는 아무래도 애매 모호할 뿐이다. 작업실 공간은 더 능동적이고 더 현란한 또 다른 공간에 의해 포섭되어 진다.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들의 연쇄 결합은 콜라주의 결합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애초의 작업실 벽과 바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보여주는 특수한 평면적 시각 효과에서 기인한다. 

- '텍스트로서의 사진 - 나무스와 폴록의 경우' 중에서, 146쪽 



Jackson Pollock painting in his studio on Long Island, New York, 1950.

Credit: Hans Namuth



한스 나무스의 사진은 잭슨 폴록으로 가는 창과도 같다. 크라우스는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한다. 우리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을 알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탁월한 시각으로 카메라로 잡아 해석해낸 한스 나무스에 대해선 소홀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여기저기 실린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들을 모아 불어로 번역한 위베르 다미슈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사진에 대한 글들의 가치를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에 비해 손색없다며 격찬한다. 이 격찬에 대해서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점만은 분명하다. 잭슨 폴록 대신 한스 나무스에 대해서 설명하듯, 이 책은 온전히 사진에 대해서만, 사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씌여진 책이다. 회화적 전통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진만을 위한 이론적 지평을 만들고 해석하며 독립적 가치를 논한다. 


하지만 이 책 만만치 않다. 거의 한 달 내내 들고 다니며 읽었다. 겨우 다 읽고 정리하는 지금, 이 모음집에 대해서 뭐라고 적어야 할 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흥미로움으로 따지자면, 탁월한 비평집들 못지 않았지만, 책은 쉽지 않았다. 사진 이론서이지만, 인문학 서적이며, 사진에 대한 깊은 이해 뿐만 아니라 현대 인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쩌다가 미술 비평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직접 사진을 찍는 이들 중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러므로 발자크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신체는 일련의 유령들로 구성된다. 유령들은 사방 모두 아주 얇은 막이 무한히 포개어진 잎 모양의 무수한 층들로 이루어지며, 눈은 이를 통해 신체를 인지한다. 

인간은 결코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환영처럼 만질 수 없는 것으로 어떤 단단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또는 무(無)에서 어떤 사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다게레오식 사진 촬영은 사진 찍는 대상의 여러 층 가운데 하나를 급습하여 은판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술한 신체는 다게레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유령, 다시 말해 신체를 구성하는 본질적 부분을 잃어버리는 게 분명하다. 

- 나다르의 회고록 <내가 사진가였을 때> 중에서 (32쪽 재인용) 



거의 읽히지 않는 나다르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위 문장을 읽으면서 '사진적인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진은 인영, 흔적, 자국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어쩌면 이것은 이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크라우스는 퍼스의 '인덱스Index'에 의존하며 사진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Alfred Stieglitz

Equivalent

1930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등가물'에 대해 크라우스는 이렇게 적는다. 



그것은 대기 상태의 각인이다. 빛의 굴절을 통해 가시화된 구름의 형상은 바람의 방향과 습도를 기록하고 가시화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의 흔적을 구름이 고정시키는 한에서, 그것들은 자연의 기호들이다. <등가물>에서 스티글리츠는 이 자연의 기호들을 비자연 기호로 변환시키는 곡예를 수행했다. 다시 말해 구름이라는 자연의 기호를 사진이라는 문화의 언어로 전환시켰다. 

- 209쪽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파울라 또는 햇살, 베를린>, 1889년 



현재(2014년)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도서관에서라도 구해 읽으면 좋을 것이다. 특히 사진, 이미지, 미술사 전공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의 난이도는 상당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롭다. 






사진인덱스현대미술

로잘린드크라우스저 | 최봉림역 | 궁리 | 2003.07.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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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과 예술철학에 관한 성찰 

T. E. 흄(Hulme) 지음, 박상규 옮김, 현대미학사 





위대한 화가란 모든 사람들의 비젼이 되었고, 

또 장차 비젼이 될 어떤 사물의 비젼을 처음으로 가졌던 사람들이다. 

- 133쪽 


 


토마스 어네스트 흄(Thomas Ernest Hulme, 1883 - 1917)이라는 영국의 예술 비평가가 쓴 <<Speculation>>을 번역한 이 책은 다소 의외의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1980년대 초반 박상규 교수(홍익대)가 번역한 문고판 책을 현대미학사에서 관심을 가져 새로 낸 듯하지만,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책은 아니기 때문에 전공자가 아니면 꺼내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2000년대 초반에 구입하였으니, 한창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간 읽지 않고 서가에 꽂아두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평가의 문장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예술론을 이야기하는 흄의 문장은 사색적이면서도 모호하기만 했다. 꼼꼼한 독서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하여 얻는 건 이미 다 논의되었던 내용들이거나,  흄이 기대고 인용하는 저자들의 책을 직접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분명 1900년대 초반에는 최신의 시각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장점이 있다면, 보링거(Wilhelm Worringer)과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예술론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저서로 미술사의 해석에 탁월한 관점을 제시한 보링거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흄은 이 책 전반에서 보링거의 태도 -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예술과 자연주의적이고 감정이입적인 예술의 대비 - 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더욱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베르그송의 충실한 번역자였으며, 베르그송의 추천을 받기도 한 흄은 이 책에서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탁월한 요약을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예술론으로까지 확장시킨다.


보링거의 이론에 기대어 흄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예술에는,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종류가 있다. 첫째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예술, 즉 희랍의 예술과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 예술이 있다. 이러한 예술에 있어서는 선은 부드럽고 생명력이 있다. 그리고 이집트와 인도와 비잔티움의 예술과 같은 예술이 또 하나 있다. 이러한 예술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각을 형성한 경향이 있고, 곡선은 날카롭고 기하학적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예컨대, 인체의 표현은 때로는 아주 비생명적이고 비틀어져서 여러 종류의 딱딱한 선과 입체적인 형태에 알맞게 되어 있다. (79쪽) 



그들은 실존의 여러 가지 혼란과 변덕에도 불구하고 보링거가 말한느 일종의 정신적 '공간 기피'에 좌우되어 있다. 예술에 있어서는 이러한 정신상태는 어떤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창조하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는 인내력이 강하고 영속성이 있으므로 외부 자연의 유동성과 비영속성의 비난처가 될 것이다. (82쪽) 



세잔, <목욕하는 여자들>, 208 × 249 cm, 1906 (출처: 위키피디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세잔느의 최근의 그림의 하나인 <목욕하는 여자들>을 보라. 이 그림에서는 모든 선이 피라미드형으로 나란히 그려져 있고, 여자들은 이 모양에 알맞게 그려져 있다. 만일 하나의 그림에서 만족할 율동적인 구도를 항상 찾아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피라미드형의 구도에는 매력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싫증을 느낄 것이다. 그 형태가 아주 강렬하게 강조되어 있고, 기하학적인 특색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그림은 '생명적인' 예술의 영역으로부터 추상적인 예술의 영역에로 끌어올려진 것이 된다. 그 형태는 르네상스의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라벤나에 있는 (테오도라 황후) 비잔티움의 모자이크에서 보는 구도에 훨씬 더 흡사하다. (94쪽)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화 - 테오도라 황후와 시녀들. (출처: 위키피디아) 



그리고 베르그송의 철학과 예술론에 대한 논문들도 책에 실려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성은 모든 물체란 완전히 분석되어서 개개로 분리될 수 있는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성은 결과로서 모든 변화를 이러한 분자의 단순한 위치의 변화에 귀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지성은 변화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변화를 설명한다. (168쪽) 



즉 그것들은 진정한 시간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은 '주어져' 있다. 진정한 창조는 없다. 그는, 생명의 모든 형태의 특징은 생명의 모든 형태가 뚜렷하게 지속성 속에 존재하여 있고, '시간'이 그것에 대하여 차이를 일으키게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그것을 '깨물고', 그리고 이빨의 흔적을 거기에 남긴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늙어간다. 그런데 물질은 결코 늙어 가지 않는다. 물질은 항상 '불변하는' 것이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178쪽) 



보링거와 베르그송의 예술론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은 그 소개 정도로 읽을 만하다. 다만 깊이 있는 연구 논문이라기 보다는 스케치에 가깝기 때문에 연구자들이라면, 다른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맨 뒤에 실린 <잿더미>라는 글은 단상을 엮어놓은 짧은 노트이나, 두고 읽을만큼 좋다. 






휴머니즘과 예술철학에 관한 성찰

T.E.흡저 | 현대미학사 | 2002.09.1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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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 논문들과 연설 하나 Wirklichkeiten in denen wir leben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지음), 양태종(옮김), 고려대학교 출판부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세계의 독서가능성>>(Die Lesbarkeit der Welt, Suhrkamp, 1981)은 문학동네 모더니티총서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어떤 연유에 의해서인지 몰라도 출간되지 못했다. 나는 이 총서의 목록을 통해 흥미로운 제목인 <<세계의 독서가능성>>으로 그에 대해 흥미를 느꼈고 그의 책이 번역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짧은 책 한 권이 번역되었을 뿐이고, 오늘 내가 리뷰하고자 하는 이 책이다. 그러나 내 리뷰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이 블로그에 자주 오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 나는 직장인이고 전문 학자이거나 학생이 아니기에). 역자인 양태종 교수(동아대 독문학과)는 스스로 ‘비판을 감내해야 할 번역본’이라고 적었으나, 이는 독자인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꼼꼼히 읽고 정리한다면, 1) 철학에서의 ‘기술’, 2) 모방과 예술, 그리고 근대 예술의 자율성, 3)철학과는 다른 수사학의 위치, 4)시적 언어와 진리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할 독자가 몇 명쯤 될까.


인문학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인문학이 유행이 아니라 유행뿐인 어떤 것들 - 차마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 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유행을 쫓는 이들에게 이 책은 너무 어렵거니와 현실과는 참 멀리 떨어져 보일 것이다. 하긴 너무 전문적인 철학책이기도 하지만.  


네 개의 논문, <현상학의 양상들에서 본 생활세계와 기술화>,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 <수사학의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 <언어상황과 내재시학>은 다소 어려웠으나, 나에게 매우 유용한 글들이었다. 특히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은  예술의 자율성과 근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으며, 특히 자연의 모방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어떻게 예술 작품이 존재의 세계로 나아가는가에 대한 흥미로움을 안겨주었고, <수사학의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은 철학과는 다른 입장에서 출발한 수사학이 어떻게 스스로의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이것이 ‘철학적 인간학’과 연결되는가를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고대와 근대를 오가며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짧으나, 폭넓은 인용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담긴 논문들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기술(테크네), 수사학, 예술과 언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근대적 입장 - 기술, 예술, 수사학, 시학 등이 자연의 모방이거나 본래 잠재해 있던 어떤 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것인가를 정초해 나가게 되었는가에 대해 분명한 해석을 이 짧은 책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철학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보다 제대로 읽을 수 있고,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한스 블루멘베르크저 | 양태종역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09.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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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하는 수사학 총서 시리즈로 나왔는데, 이는 한스 블루멘베르크가 현대 수사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수사학과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을 읽어본다면 알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의 수사학과 싸우면서 추정한 것은 이들의 수사학이 진리[에]의 [도달] 불가능성 테제에 근거를 두고서, 이로부터 참인 것 대신에 관철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는 권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126쪽)라고 말한다. 이렇게 수사학은 철학과는 적대적인 위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신의 진리가 수사학적 방식의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장식 없이 그 자체로 제공되어 한다는 것’, 그래서 신의 진리를 이야기한 성인들의 말들은 ‘수사규칙을 보호하기 위한 꺼풀 안에서 더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수사학은 자신만의 영역을 차지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신의 세계와 차츰 그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인간적 세계에 대한 긍정, 또는 인정이 시작되는 때와 일치한다. 그리고 '근대 미학에서는 수사학의 함축이, 수사학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진리와 관련이 있다는 함축이, 수사학의 최종 승리를 찬미한다.’(126쪽) ‘심지어 예술과 진리가 동일시된다. 플라톤이 정립한 철학과 수사학 사이의 적대감은 철학 자체에서, 최소한 철학의 언어에서, 철학에 대항하는 미학으로 명백히 나타난다’(127쪽)고 말한다. 


이 논문 속에서 블루멘베르크는 수사학의 철학적 근거가 어덯게 마련되고 있는가를 서술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기술 - 자연의 모방이거나 이미 자연, 혹은 재료에 내재된 어떤 형상(잠재태)의 의지로 구현되는 현실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창조/발명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설명, 그리고 예술의 창조성, 자율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예술은 그 자체가 곧 인간의 가능성들에게 모범적인 존재이다. 예술 작품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의미하려고만 하지 않고, 무언인가로 존재하려 한다’(123쪽)고 말한다. 그는 고대/중세적 세계를 벗어나 근/현대 예술의 입장, 즉 존재로서의 예술을 분명히 드러낸다. 파울 클레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최종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연한 것을 본질로 만드는 일”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수사학 총서의 한 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실은 철학 전문 서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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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레비나스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문장을 옮겨적는다. 아련한 느낌이 든다.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가 함께 하는 실존이라는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 ...)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에게로 떨어져서 우리를 엄습하고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 안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 <<시간과 타자>> 




죽음이 확실함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무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 ...) 현존보다 더 영향을 미치는 파열, 선험성보다 더 선험적인 선험성, 죽을 수 밖에 없음, 이것은 예측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의 양상이며, 비록 수동적이지만 경험으로, 무의 이해로 환원될 수 없는 시간의 양상이다.

- <<신, 죽음 그리고 시간>> 




 나이가 들수록 '현 미래는 적대적이다'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나만 그런 것일까. 어제 하루 종일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고 울적하기만 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퇴근하고 난 뒤, 집에 오자마자 식사를 하고 바로 뻗었다. 하긴 그 시간도 오후 10시를 넘겼더라.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하고, 내 인생의 열차는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듯하기만 하다. 


이번 겨울, 레비나스의 책 몇 권을 읽어야 겠다. 




시간과 타자

엠마누엘레비나스저 | 문예출판사 | 1996.0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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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미술 잡지에서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고 되새겨볼 만한 문장들을 읽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옮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발적이며 능동적이고 탈식민화된 예술적 실천이다. 그런데 나도, 우리도 그걸 자주 잊는다. 다시 이 블로그가 거기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겠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현명하다. 이 때 현실이란 혼종성, 디아스포라, 그리고 상호교환적인 네트워크가 점차 강해지는 상황이 영속화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전체 구조를 바꾸는 것은 힘든 일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사회, 현실을 위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경쟁력 있는 기관을 설립해야 하고, 가치 중심적 시스템 하에 더 많은 지식인들을 양성해야 한다. 나아가 억측하기를 그만 두고 우리 현실과 관련된 증거들을 생산해야 한다. 이 증거들은 강력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가져올 것이다. 

- 슈시 술라이만 (말레이시아 12Art Space 디렉터) (경향 아티클, 2013년 4월호에서 인용) 




Playing for Dying Mother, 2009

After Puvis de Chavannes’ “Jean Cavalier jouant le choral de Luther devant sa mere mourante,” 1851

Wong Hoy Cheong



The Charity Lady, 2009

After Jean-Baptiste Greuze’s “La Dame de Charite,” 1775

Wong Hoy Cheong






앨버트 허쉬만의 '반동의 수사학'에서 빌어 와 말하자면, 그것은 개선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반동의 미사여구를 기만적인 것으로 만든다. 가치 밑바닥에 숨어 개선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만약 당신이 그런 수사적인 논쟁을 하게 된다면, 당신의 결론은 '무반응'일 것이다. 당신은 어떤 개선 가능한 행동들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행동도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역효과를 낳거나 혹은 성취된 것들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동의 수사학은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삶을 점유하고 있다. 경제적인 인플레이션과 핵무기, 노동자 착취, 도시 개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거짓말 등. 만약 아시아 예술가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서구의 시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적인 게 아닌 자기 식민화일 뿐이다. 당신이 스스로 원하는 바대로 할 지, 아니면 남들이 무얼 하라고 얘기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난 믿는다. 

- 우 따건 (대만 콴두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경향 아티클, 2013년 4월호에서 인용) 








Tu Wei-Cheng

Happy Valentine’s Day

installation

http://collabcubed.com/2012/08/27/tu-wei-cheng-happy-valentine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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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epthestyle 2013.06.18 14:36 신고

    '만약 아시아 예술가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서구의 시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적인 게 아닌 자기 식민화일 뿐이다'
    멋집니다.

    제가 작년에 국내 모 예술제에 다녀왔는데 엄청나게 실망하고 왔다죠.
    솔직히 한국작가들이 창조해 낸 거라면
    그래도 작품속에 타국의 작가들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느낌이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팔기위한 작품을 내놓는 자리의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 예술제를 한국전체의 작가들의 작품에 확대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거의 70%는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만 담고 있더군요.
    (다행이 30%정도는 한국의 미가 물씬 느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굳이 한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게다가... 앤디워홀 모작은 왜 그리도 많던지,,

    여튼 그 이후로 음악이나, 옷이나 주변에 모든 것들을 접할 때마다,
    서구사회와는 구분되는, 그리도 중국과 일본과는 구분된 한국적인 특성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 편협한 시야로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발행하신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 정체성identity가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는 소극적인 듯 합니다. 그리고 타인들과 뚜렷하게 두른 '개성적인 자기'를 드러내면 도리어 소외를 당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요. 미술 사회(일종의 장 champ)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 곳도 한국 사회의 일부인지라... 막상 부딪혀보니,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개성적인 작품을 그린 것도, 그 작품으로 인정 받는 것도 ...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헤쳐나가야 되는데, ... 여튼 대중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 순수 미술 분야인 듯합니다. ~.. ^^
      댓글 감사합니다.!!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10점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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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점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지음, 김진화 옮김/눌와


벽 - 건축으로의 여행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지음), 김진화(옮김), 눌와 



벽에 대한 짧은 에세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건축물로서, 우리가 마주 보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벽에 대한 여행과 생각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가 '벽'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의 밑바닥에는 늘 '사랑'이 깔려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얻게 되는 벽에 대한 지각은 차라리 감각적으로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벽의 든든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곧게 서 있는 벽,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벽을 지각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꼭 침대나 땅 위에 길게 누웠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11쪽 


벽의 온기... 아마 이런 기억.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한참 동안 기대고 있었던 담벼락. 또는 여자아이가 살던 집 옆 골목길 담벼락에 숨겨져 있던 따뜻했던 느낌같은 것. 

책의 초반은 벽의 재료나 건축적 의미를 묻지만, 책의 후반은 문학적 해석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초반은 딱딱하고 다소 지루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후반은 흥미롭고 재미있다. 

기억이나 꿈, 상상은 벽의 정신적 이미지를, 다시 말해 벽이라는 물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상징적 가치를 가지는 벽을 재현시킨다. 이런 상징적 기능을 통하여 벽은 또 다른 존재성을 가진다. 즉, 벽은 인간과 직접 맺은 물질, 도구적 관계를 떠나 자신을 생각하는 주체를 밖에서 자신을 실현하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상상과 실제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107쪽 


우리가 매일 만나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벽.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면서도, 마음 속으로 뻗어나가는 상상적 공간이기도 한 벽. 두껍고 무거운 벽에서부터 현대 건축물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유리로 된 벽까지. 

이 책은 벽에 대한 짧고 매혹적인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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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는 광주비엔날레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큐레이터이다. 그는 지난 2009년 니콜라스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기획한 '얼터 모던 Altermodern' 전(영국 런던 테이트미술관)의 카탈로그에서 네 개의 모더니티를 제안하였고 그 내용을 오늘 읽은 '시선의 반격' 도록에서 김현진의 글에서 확인했다. 간단하게 인용하자면 이렇다. 



오쿠이 엔위저는 모더니티를 서구 1세계의 supermodernity, 아시아의 고속개발국가들의 andromodernity, 이슬람권의 speciousmodernity, 아프리카의 aftermodernity로 분류.



큐레이터 오쿠이 엔위저는 자신의 글에서 네 개의 서로 다른 모더니티의 모델을 규정하면서 한국, 중국, 인도와 같은 나라들의 모더니티를 '앤드로 모더니티'andromodernity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서구의 supermodernity를 모델로 받아들여 발전과 선진화에 방점을 두는 개발적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개발의 대안적 모델들을 고민하면서도 일종의 고속 개발을 통해 성취되는 이 하이브리드형 모더니티라고 설명하면서도 남자를 뜻하는 andro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우고 부수면서 건설하고 전진해 나가는 남성적인 속성이 여기에 잠재해있다. 


- 김현진(큐레이터) 




내가 위 내용이 무척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아직도 '모던modern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고, 그 모던-유럽에서 시작된-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변형되는 것을 오쿠이 엔위저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엔위저가 설명하고 구분한 네 개의 모더니티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각기 다른 모더니티임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시각에서 각 로컬 모더니티를 바라보고자 하는 일반적 접근에 대해 그의 구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9년 12월에 진행된 전시 도록이다. 아트선재 센터에서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한 권 사서 서재에 놔두었다가 오늘 펼쳐보았다. 


위에서 언급된 오쿠이 엔위저의 의견을 볼 수 있는 글은 'Modernity and Postcolonial Ambivalence'이다. 전자 논문으로 확인할 수 있고 잘 검색하면 복사본 pdf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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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탐(探)하다

이재효 1991-2012 

성곡미술관, 2012.3.30 - 5. 27 







"작업 모티브가 그러하듯 대부분의 작업은 자연에서 구한 재료를 사용한다. 나무와 나뭇가지, 떨어진 이파리, 크고 작은 돌, 풀 등이 그것이다. 못이나 볼트, 철제와이어와 철근, 용접술 등도 일부 개입한다." - 전시 설명 중에서 



한참 지난 전시 소개를 이제서야 올린다. 전시가 일상의 뒤로 밀려나가고 있지만, 가끔 만나는 좋은 작품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재효. 그는 자연 속에 손을 넣어 인위적인 세계를 구성해내었다. 자연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아름다운 방해를 보여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를 지나, 사람의 손이 닿은 자연. 


작가가 선보이는 자연은 붙이고 깎고 문지르고 구부린 자연이었다. 그 속에서 현대적 조형물을 창조한다. 





"이재효의 설치 작업은 자연의 내적/외적 구조를 원과 직선을 중심으로 포괄하고 있다. 자연의 순환구조와 반복양상을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으로 반영한다. 자연의 원만함과 무한함, 생성과 소멸,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는 속성을 현대적 파노라마 시점으로 담았다. 강가에서 주운 돌과 버려진 나뭇가지 등 자연의 풍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재료들 그리고 바람, 빛, 공기, 소리 등과 같은 비물질적인 기운들을 머금고 있는 여러 오브제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 전시 설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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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n 1호 - 10점
Noon 편집부 엮음/GB(월간지)



2009년에 창간호가 나온 후 소식이 없는 잡지 ‘noon -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and visual culutre’를 읽었다. 주제는 violence of the spectacle이다. 아마 몇 명은 바로 예상하겠지만, 이 주제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언급된 그 스펙타클에 대한 것이다. 기 드보르는 이 놀라운 저작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스펙타클을 새롭게 정의 내린다.


“스펙타클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기 드보르는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들의 구성체로서의 스펙타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스펙타클 환경(상황)에 주목하고 과감하게 이것을 스펙타클이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측면에서 히사시 무로이의 아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오늘날 인간은 각종 매체를 통해 조성된 ‘현실의 연장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의 연장세계란 인간이 ‘현실’이라고 믿는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호와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기 드보르의 책을 번역본으로 두 번 정도 읽었지만, 그 땐 - 벌써 십수년 전의 학부시절 -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잡지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는 실베르 로트랑제와 배영달은 기 드보르 -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 르페브르Henri Lefebvre -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를 연결 지으며 스펙타클 사회의 비극을 학구적 언어로, 아주 건조하고 논리적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보드리야르 사상이 가지는 비극성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이론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의 참혹함과 그 이론의 무책임함에 주목하지 않은 채 열광하는 철부지 인문학 수입상들을 경멸해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은 보드리야르의 문제가 아니라 보드리야르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들 탓이겠지만.


“사람들은 유희 속으로 들어가는 한, 스펙터클 속에서 가짜인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 보드리야르



그리고 21세기 초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분간하지 못하는 뉴미디어 시대가 펼쳐졌다. 이는 미디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스펙터클에 현혹된 우리들의 문제이다. 미디어가 감각을 기만하고 기만당한 감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감각이란 없다. 대신 비판적 이성이 있을 뿐이지만, 이미 그 이성은 탐욕적 금융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 만드는(making money) 도구적 이성이 된 지 오래다(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21세기 초를 경험했다면 어떠했을까?).

이런 올드-뉴미디어들의 총체적 문제가 바로 21세기적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이 ‘재현’으로 물러난다.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어떤 것 속에 우리들의 삶이, 일상이 퍼즐처럼 끼어 맞춰지는 형국이다. 실베르 로트랑제는 폴 비릴리오을 이렇게 인용한다.


사회적-정치적 공간의 동질화 - 원격 현전(telepresense), 편재성 환영(illusion of ubiquity) - 는 속도로 생산된다. 속도가 폭력의 형식인 것이다. 즉석 응답은 공간을 폐기하며, 즉석의 시간성은 실재의 일반화된 탈실재화를 유발하면서 기억과 역사를 말소한다. (The homogeneisation of the socio-political space - telepresence, the illusion of ubiquity - was produced by speed, and speed is a form of violence. lnstant response abolishes space, instantaneity cancels memory and history, provoking a generalized derealization of reality.)


다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공간의 거리는 무의미하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간은 동질화된다. 이 동질화란 하나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이 거의 동시에 전 세계를 휘감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9.11 사태가 터졌을 때 모든 미디어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SNS는 내 물리적 존재가 가지는 공간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편재하는 가상의 실재가 되며, 인터넷 상의 프로파일과 히스토리로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은 바로바로 수정, 삭제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건 구글Google 서버에 저장된 기록이 전부일 것이다. 동질화된 공간의 무자비한 속도는 축적되는 기억과 지나간 역사를 지우며, 브레이크가 상실된 가속패달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진짜와 가짜가 사라진 액체 형태의 스펙터클 시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술로 더욱 강력하게 무장하고 확장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미술 잡지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못하고 있다. 다만 잡지 서두에 실린 니콜라 부리요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볼까 한다.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 형식은 단연 얼터모던의 중심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호연결된 단수성을 정의한다. 오늘날의 모더니티는 독립된 소군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론을 통합한다기보다는 아이디어와 형식, 인물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통로이며, 표준화되거나 동질화된 영역이라기 보다는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서 제시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은, 니콜라 부리요의 언급처럼 상호연결된 단수성으로 저항하고 있지 않을까. 스펙터클의 분석과 해체야 말로 21세기 예술가들의 사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 부리요의 저 언급은 짧지만, 무자비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예술 실천의 단초로 해석될 수 있다. 



* 아래는 위 본문에서 언급한 책들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한 리스트다. 읽기 쉬운 책들은 아니지만.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옮김) 현실문화연구(* 현재 절판)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적인 저서. 그러나 현재 절판이고 번역에 대해서도 다소 말이 있었던 책. 아래는 영역본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역본)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그리고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기 드보르의 Comments!


토탈 스크린
장 보드리야르 저/배영달

장 보드리야르의 토탈 스크린! 보드리야르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겐 읽어봐도 좋으리라.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저/박정자

앙리 르페브르의 이 책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실은 그만큼 번역이 어려운 책이었던 셈이지만, 박정자 교수의 노고가 안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Classics in Communication and Mass Culture)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영역본)


관계의 미학
니꼴라 부리요 저/현지연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 번역본이다. 번역된다는 소문만 전해들었고, 실제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오늘 검색해보고 알게 되었다. 니콜라 부리요는 미술계에선 꽤나 유명한 이론가이며, 그의 관계 미학은 한 때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기도 했다. 학문의 세계 종사자들과의 인연이 사라진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독서가 전부다.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저/이재원 역

폴 비릴리오. 아직 읽지 않은 비릴리오. 한 번 읽어봐야 겠다.


noon은 창간호를 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낸 책인데, 반응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론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미술 전문 잡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사례를 다시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아르코에서 나왔던 '볼'은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고(황당한 사건들 중의 하나), ... ...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듯 싶지만, 그건 호사가들의 수다에 지나지 않고 진지한 관심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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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린 칼스텐 해리스의 글에 이어, 다시 한 편 더 올린다. 전문 잡지에 오래 전에 실린 글은 구하기 어렵다. 좋은 글들이 많지만, 누군가 꺼집어 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찾아보지 않게 된다. 블로그에 누군가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드문데, 자주 그래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된 일인지 좋은 글 보기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느낌 때문이다. (내 게으름이 한 몫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래 글은 월간미술 2002년 2월호에 실린 글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적절한 시각과 평가를 가진 칼스턴 해리스의 인터뷰이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필독을 권한다.


- 2002년 2월 월간미술 게재.


독일 철학, 미술사, 건축 이론, 그리고 현대 과학의 역사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와 그것의 약점에 대해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논의로 유명한 칼스텐 해리스 예일대 교수가 최근 건축철학서 《무한과 원근법(Infinity and Perspective)》을 펴냈다.

원근법을 중심으로 보는 것과 그것의 인식론적인 뿌리를 통해 건축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모든 사람에게 예술의 가치를 설파한 그를 본지 이건수 편집장이 이메일로 인터뷰를 나누었다.


- 2년 전 당신은 《월간미술》에 소개된 특별기고문에서 ‘테크놀러지 사회에서 인간 정신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을 밀레니엄의 예술적 지표로 설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동안 예술의 최신 흐름과 발달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날의 예술세계는 ‘개방성’이 특징이다. 뚜렷한 목표 없이도 오늘날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정작 작가가 자신의 작업의 의미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 대다수 젊은 작가들은 최근 예술경향에 흽쓸려 방황하는 것 같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을 향한 접근방식에 깔린 불만족은 예술의 윤리적 기능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인종, 성(性), 그리고 성적 경향 등 오늘날 주요 문제에 대해 여전히 미숙한 생각을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 같다.

이는 곧 ‘몸’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우리의 인식과 함께 얘기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무한한 가능성이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을 조작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몸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정말 혼란스럽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미래’를 향한 주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책임감이 결여된 무분별한 자유는 그 자신을 전복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 존재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어떤 책임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몸, 즉 물질 안에서 구체화된 정신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과학과 테크놀러지를 통해 가정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구체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물질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과학 밖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정한다.

예술이 오늘날 직면한 하나의 - 아마 가장 중요한 - 임무는 과학이 세운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여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각각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경험하는 것은 존중을 전제로 하며, 그러한 창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에 관해 예술은 그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 그 기준이 요구하는 것을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으며,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위에서 언급한 것을 성취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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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또한 그 인터뷰에서 테크놀러지가 하나의 ‘수단(tool)’으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로 상징되는 테크놀러지가 현대예술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따른 인문학과 예술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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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가 주장했던 것은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수단이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주인, 즉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독재자가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테크놀러지가 인간 본성과 대립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테크놀러지의 전제인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와 지배하고 위협할 때 그 테크놀러지를 거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오늘날 예술의 중요한 기능은 객관화된 이성이 만든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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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는 하나의 거대한 참사에 그치지 않고 ‘인류’와 ‘문명’이라는 틀 아래 다양한 의견을 양산했다. 예술철학자로서 당신은 9.11테러를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그것이 향후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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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이후 ‘테러’는 뉴스와 우리 마음속에 너무 많이 언급되어 왔다. 그날 아름다운 아침에 멋진 건축작품이 테러의 목표물이 된 것이다. 어쩌면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리스트의 마음속에 테러의 목표물이 되도록 유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테러리스트는 세계무역센터가 갖는 상징성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과는 모순된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파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세계무역센터의 부재는 이제 미국도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상징이 되었다. 테러리스트가 남긴 이 ‘빈 공터’는 우리 삶을 불안하고 공허한 창문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테러리스트를 겁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헌신하는 명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수천 명의 삶을 희생하는 행위가 비겁함이란 말로 이해되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죽음은 어떤 공포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경험이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쉽게 포기할 만큼 의미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까? 우리는 그러한 부정적인 확신에 대해 논의해야 하고, 그 파괴된 자리에 세계무역센터를 대신할 어떤 기념탑을 세움으로써 그런 확신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테러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인정해야 한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뉴욕커(The New Yorker)》라는 잡지는 9월 11일의 참사에 대하여 아담 자가제스키(Adam Zagajewski)의 시로 끝맺었다.

파괴된 세상을 찬미하려고 노력하라 / 6월의 해가 길던 날들과 / 와일드 스트로베리와 몇 방울의 와인과 이슬을 기억하라 / 그리고 망명자들의 버려진 집을 뒤덮은 쐐기풀도 / 파괴된 세상을 찬미해야만 한다

나는 《뉴욕커》가 9.11테러 기사를 실으면서 잡지 중앙에 파괴되기 전, 석양 속에서 빛나던 세계무역센터의 이미지를 실은 그들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잡지의 표지를 검은색으로 처리한 그들의 결정 역시 높이 산다. 왜냐하면 그 검은색 속에서 세계무역센터의 실루엣을 더 검게 했기 때문이다. 그 검은 실루엣은 《뉴요커》의 중심에 있는 빛을 더욱 강조해 주었다. 다시 말해, 어떤 기념물이 들어서든지 그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나는 세계무역센터의 잔해를 보존하여 쐐기풀들이 그것을 덮은 채 자라길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테러에 직면하여 예술은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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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학을 연구하는 버클리대의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 교수는 ‘정보화시대’에 관한 그의 연작 《네트워크사회의 출현》, 《정체성의 힘》, 《천년의 종언》에서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정치, 경제 논리와 문화적 정체성이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맞아 그 힘을 잃고, ‘네트워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로 옮겨간다고 지적했다. 당신은 21세기를 주도할 가장 중심적인 흐름을 무엇으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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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지만, 새로운 정보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정보와 테크놀러지가 자유를 가져왔으며 다가오는 시대에도 변함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성(性)을 갖고, 자신의 언어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어떠한 출구도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생각하지 못했던 물리적, 정신적인 자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없거나 우리의 성을 바꿀 수 없다면 이것이 하나의 짐처럼 여겨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누가 이런 조작을 하는 것인가? 아직도 본질적인 자아가 남아 있는가? 무엇보다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유를 약속할 수도 있지만, 자아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위협이 예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정보의 충격과 네트워킹과 같은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오면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예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테크놀러지의 도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최근 출간된 당신의 저서 《무한과 원근법》을 직접 보내 주어 잘 읽어 보았다. 책을 살펴 보면 독일 철학과 이론, 미술사, 건축 이론, 과학 등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의 르네상스 신학적인 뿌리와 철학에 대해 깊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알베르토 페레즈-고메즈 맥길대학 교수는 쿠사너스부터 갈릴레오까지 초기 모던 사상가를 연구해 우리 시대를 위한 희망과 가능성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극찬했다. 한스 브루멘버그와 알렉산더 코이레 같은 과학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비평적인 자세를 취하며 모더니티의 숨겨진 가능성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최근 당신의 연구 분야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미술의 철학적 의미를 찾기 시작했던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당신의 철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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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출간된 《무한과 원근법》은 작가에게 유용한 책이 되기를 바라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책에서 나는 몇몇 포스트모던 비평가에 반대하며 ‘모더니즘’을 변호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가 니힐리즘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졌던 사실을 이해하고, 그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과학과 테크놀러지가 가정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고찰했고, 그것이 중세 기독교 문화의 자기 발전의 산물임을 증명했다. 우리가 이런 발달의 합리성을 이해할 때, 과학이 가정하는 현실 자체와 동일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성이 지은 체제의 창을 모든 의미의 근원으로 ‘여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발표된 논문 <이방세계에서. 니힐리즘의 탐험(In a Strange Land, An Exploration of Nihilism)> (19 61)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역시 예술의 문제도 다룬 바 있다. 그 논문에서 나는 최근 저서에서 더 자세히 다룬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Nicholas)의 작품을 언급했고, 현대예술의 의미를 논의했다. 새로운 리얼리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리얼리티의 의미와 세계와 예술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그 논문을 통해 나는 예술을 ‘객관화하는 이성으로 세워진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았다.

또한 이것은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믿음과 탐미주의 사이(The Bavarian Rococo Chu-rch:Between Faith and Aestheticism)》(1983)에서도 쟁점이 되었다. 철학을 전공한 내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아카데믹한 철학을 참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하이데거와 르네상스에 관해 다룬 나의 다른 철학 저서와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고 본다. 책의 대부분이 18세기 교회를 다루고 있지만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는 모더니티의 합리성과 한계에 관해 중요한 얘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 세계의 건축의 창을 지금 세계가 무시하려는 리얼리티의 차원으로 다시 열려는 시도였다. 뿐만 아니라 《부서진 프레임, 세 개의 강의(The Bro-ken Frame, Three Lectures)》(1989)와 중국어로도 번역된 《건축의 윤리적 기능(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1997)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재 쓰고 있는 책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왜 예술가인가(Why Art)?》라는 가제를 붙인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와 현대 예술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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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평소 즐겨 보는 책은 무엇인가? 또한 당신은 어떻게 정보를 섭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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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질문이다. 역사를 통해 뛰어난 철학가의 책을 포함해 수많은 책이 내게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하이데거(Heidegger)는 특히 중요하다. 또한 《무한과 원근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도 내게 각별하다.

그러나 나는 내 사유의 전개가 책보다 미술작품이나 건축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무엇이 그림 그리기에 집착하게 했는지 잘 모르나, 그림은 나의 수많은 생각과 늘 함께해 왔다.

건축에 대한 관심도 일찍 시작되었다. 7세 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공습이 계속되는 베를린에서 쾨니쇼펜으로 이주했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파괴된 건물과 사이렌이 울린 뒤 다락방에서 보았던 불타는 베를린, 그리고 나와 함께 놀던 친구와 그의 집이 폭탄에 맞아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 이런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을 떠나 피난처로 찾았던 쾨니쇼펜, 그 작은 도시에서 즐거웠던 경험을 말하고 싶다. 그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작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

그 작은 교회는 나에게 전쟁 중 베를린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하이데거가 지구를 표현함에 있어 고대 그리스 신전이 세계를 확립했다고 주장하며, 그 신전에 윤리적 기능을 부여했던 것과 같이 나 역시 그 교회에 대하여 미학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때 나는 이 교회가 세운 세상이 나를 배제시켰을지라도 그 교회가 제시하는 지구에 내가 속해 있음을 깨달았다. 지구와 사람들은 교회나 책보다 내게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지난 1월 24일 타계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지적한 대로 세계화를 위한 테크놀러지, 경제 등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 과거 인류의 문화유산을 생성해 오던 교육, 교양, 사회활동이 미국이 주도하는 영화, 엔터테인먼트, 오락산업에 흡수되고 있는 게 대표적인 경우다. 이렇듯 세계화에 따른 문화단일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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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발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의 등장에 적지 않은 우려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예술을 위하여 ‘본질’을 회피하고자 하는 엔터테인먼트를 반대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안감은 근본주의와 파시즘을 더욱 잘 받아들이게 했다.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인해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다른 가치체계와 그것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문화적 가치는 변화한다.

그러나 그런 가치의 어떤 변화도 그저 주어지지는 않으며, 거기에는 매우 사려 깊은 숙고와 저항이 요구된다. 작가들이야말로 그러한 심사숙고와 저항에 많은 기여를 해야 하며, 철학자 역시 의미 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 철학자는 무분별한 철학 용어를 남발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방식을 지킬 수 있으므로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철학을 연계하는 것에 쉽게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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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변화하는가? 만약 변화한다면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세기를 거칠수록 예술,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변화하고 있다. 유럽에서 18세기는 중요한 시작을 의미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종교적?윤리적 기능의 예술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예술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가장 중요한 발단은 1960년대일 것이다.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예술의 죽음(종말)’에 대해 말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의 절정이 예술의 종말이라고 말했던 단토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다. 단토의 주장처럼, 지난 40년간 예술(세계)에 어떤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담론은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이런 현상을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해방’으로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자유’란 방향 상실을 의미한다. 예술은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 쿤데라는 예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가벼움이 헤겔이 예술의 최고 기능으로 간주한 인간의 심오한 관심사에 대한 예술의 참여를 되찾으려는 갈망을 품게 하는 것이다. 헤겔은 예술을 보지 않고 그에 대한 관심을 언급하는 학문이 내놓는 견해를 들으려는 것이 ‘모더니티’의 특징이라고 했다. 사고와 숙고가 예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성(性)?인종 같은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관한 언급을 예술이 다시 감당할 수 없다. 미숙한 철학적 개념을 품고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과거 예술이 갖고 있던 최고의 기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의 최고 기능을 되찾음으로써 헤겔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예술을 중시하는 하이데거와 의견을 같이한다. 다만 오늘날 한 명의 뛰어난 작가에게 이러한 예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애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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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미 지적한 대로 현대미술은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힘을 상실한 채 공허한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여전히 현대미술은 종결되어야 하는 것인가? 현대미술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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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성이 세운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가 이런 창을 열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비유를 들어 답을 얘기한다면, 15세기 서양에서 미술은 원근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근법은 부르넬레스키(Brunelleschi)와 알베르티(Alberti) 때의 작가에게 마술과도 같았던 세계의 모습을 재현하는 인위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예견했듯이 이러한 마술의 대가는 리얼리티의 상실, 초월성의 상실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리얼리티는 그것의 연극적인 재현으로 대치되었다. 미술 자체가 시뮬라크라의 창조물임을 인지한 미술이 어떻게 관람객을 리얼리티로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내 대답은 이렇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육체에서 분리된 눈 이상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관람객이 자신의 물질성, 물감?캔버스?종이의 물질성, 그리고 종이 위의 붓자국을 통해 물질 속에 정신을 구체화하는 경험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인간을 보는 것은 물질이 지닌 의미의 구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만나 겪는 것과 기계를 경험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 등은 ‘초월성’으로 창을 열 수 있으나 단지 우리가 관심을 갖는 작품의 ‘인공성’을 깨닫는 데 쓰일 뿐이다. 이러한 인공성을 깨닫는 방법은 르네상스 작가가 원근법적 재현의 기교를 물감과 캔버스의 물질성을 비교하여 그 인공성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뉴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시뮬라크라(simulacra)와 진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 동양과 서양이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서구의 문화를 기준으로 동양의 문화를 바라본 게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동양과 서양 미술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예술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양 예술에 대한 나의 지식이 매우 부족하기에 이 질문에 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 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동양 예술은 내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친숙한 서구 역사에서 동양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의 본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의 예술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본질적인 인간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차이는 서양이 동양에 비해 혁신과 발전에 가치를 두어 왔다는 점이다. 테크놀러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경제학자의 생각 속에 자리한 발전에 관한 수치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것은 현대미술에서 매우 흥미롭게 나타난다. 뒤샹이 보통 변기를 전시하고 그것을 작품이라 불렀을 때, 변기와 작품의 분류에 대한 고의적인 혼란은 분명 아름답지 않았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오래 전 키에르케고르가 보여 주었듯이, 흥미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종말로 끝나기 마련이다. 지금 현대미술은 그 종말에 다다른 것이다.

따라서 창의성과 혁신, 그리고 발달을 별로 중시하지 않던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자원이 한정된 지구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발전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아직 멀게 느껴지나 자연의 재앙을 대비하는 일에 작가들도 참여해야 한다. 동양, 특히 동양의 작가들은 이런 문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전은 때로 유익한 것이나 종종 그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 동시대 예술과 관련하여 반미학 또는 탈예술 논의는 이제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숭고’와 ‘아우라’를 향한 논의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만약 의미를 갖는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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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은 현대 회화나 조각보다 내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 금년에 탄생 150주년을 맞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와 수많은 현대 건축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특히 가우디의 건축물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의 건축물은 현대 세계로의 창을 열어 주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일본의 안도 타다오(Ando Tadao)가 있고, 핀란드인인 주하 레이비스카(Juha Leivisk?도 있다. 그의 작품 미르마크(Myrmakk) 교회는 핀란드의 우울한 겨울에도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베를린에 있는 다니엘 리베스킨드(Daniel Libeskind)의 유대인 박물관은 완성되기도 전에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이러한 건축가들로부터 빛이 물체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 감동을 안겨 준 미술작가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에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작품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세잔(Cezanne), 드가(Degas) 혹은 멘제(Menzel)에 감동했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헤겔의 주장처럼 ‘예술이 죽었다’는 가능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자면, 하이데거처럼 나 역시 헤겔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곧 출간될 책에서 오늘날 예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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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동시대 예술은 대중문화와의 상관성 속에서 이해되고 논의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스펙터클의 사회’ 또는 ‘키치’ 개념이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키치’가 갖는 의의는 무엇이며, 키치가 동시대 미술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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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잘 정의되지 않은 현상 혹은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는 현상이다. 나는 최근 저서에서 이런 적대감에 잠재된 가설을 고찰했다. 우리는 아직 모더니스트의 프로젝트도 이루지 못했고 모더니즘의 도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건축에서 모더니즘의 표현방식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현대의 건축가 대부분은 후기 모더니스트의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화가와 조각가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더니즘의 초기 단계부터 키치와의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을 제쳐두고 현대미술을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키치는 스스로 윤리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또는 살바도르 달리(Sal -vador Dali)를 보자. 아니면 안젤름 키퍼는 어떨까? 그 역시 키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저서 《건축의 윤리적 기능》에도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키치라고 불리는 작품을 경멸하는가? 여기에는 무언가 부정적인 것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는 키치가 주장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치가 리얼리티로 향한 창을 여는 대신 단지 시뮬라크라 혹은 폐허가 된 가치체계의 단편으로 그저 세계를 치장하는 생각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이 키치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금송아지 우화’의 교훈처럼, 신(神)이 부재하면 인간은 시뮬라크라를 만든다. 그러나 시뮬라크라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시뮬라크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키치에 대한 논쟁과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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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를 즐겨 보는가? 만약 미술전문지를 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미국 등 각국의 미술전문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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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에 큰 관심은 없으나 내 아내가 미술사학자인 관계로 정기적으로 꽤 많은 잡지를 구독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술전문지는 현재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미술이 발전하는 양상을 계속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미술전문지는 현재 이루어지는 비평과 이론을 더 많이 소개해야 한다. 그러한 이론과 사고가 예술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전문지는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국한해서는 안 되고, 미술 관련자만을 독자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미술전문지는 미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 즉 왜 미술이 중요한가, 왜 미술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미술이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 - 윤동희 기자 | 번역 - 김민아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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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는 1937년에 태어나 예일대에서 박사학위(1962)를 받았다. 저서로 《Ba -varian Rococo Church》, 《The Broken Frame : Three Lectures》, 《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 등이 있으며, 《The Meaing of Modern Art》는 《현대미술 - 그 철학적 의미》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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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예일대 칼스턴 해리스 교수가 2000년 월간미술에 기고한 글이다. 독자들에게 현대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글이 될 것이다.

칼스턴 해리스 교수는 국내에서는 '현대 미술, 그 철학적 의미'(서광사)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책의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현대 미술에 대해 인문학적 견지에서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겐 내가
강권하는 책이다. 나 또한 이 책 이후로 현대 미술에 대한 뚜렷한 시각이 생겼을 정도이니까.

현대미술
K. 해리스 저/오병남,최연희 공역


월간미술 2000.2 특별기고



세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본지에서는 지난 호에 미술계의 주요 담론인 ‘예술의 죽음’에 대한 세계 석학들의 의견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에는 예일대에서 예술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해리스의 글을 통해 21세기 세계 예술을 예견해본다. 현대 예술의 범주와 역할을 헤겔, 하이데거, 단토의 미학적 논의로부터 이끌어내는 그는 테크놀러지 사회에서 인간 정신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을 새 천년의 예술적 지표로 설정하고 있다.



예술의 죽음에 대한 소고
- 칼스턴 해리스(Karsten Harries, 예일대 교수 Brooks and Suzanne Ragen Professor of Philosophy)   



수의 신비(mysticism)는 지금까지 나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이 다가오면서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혹시 내가 세기가 넘어가는 그 순간에 잠들어 인류가 세 번째로 맞이하는 밀레니엄을 깨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하게 되지나 않을까였다. 인류 전체가 흥분하는 그 시간대에, 폭죽과 흥분이 나의 주위에서 역력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세기가 교차하는 그 순간에 만에 하나 잠이 들어 있다고 한다면 조금은 무책임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의 문화 전체를 바꾸거나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 진행과정에서, 연도를 쓰는 자리에 0이 세 개나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우리들이 진정으로 가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또는 무작정 무언가에 이끌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앞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할 때다.

나는 작가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예술 역시 문화의 다른 측면들과 같이 그 형태가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도전을 받고 있으며,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위협적일 정도의 힘찬 진행과정에 잡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은 가끔은 우리들에게, 과연 이 모든 프로세스가 끝났을 때 그 결과물을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더 단토(Arthur Danto)는 이러한 이유에서 ‘예술의 종말(End of Art)’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또 자칭 예술이라고 하는 여러 부류의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현재 세계의 미술시장이 호황을 거듭하며 번창하고 있을 때 예술의 종말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번창하고 있는 오늘날 미술세계의 지표는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미술의 단면도들이 그 종말을 예고하거나, 벌써 죽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토는 현재 평론가로서 활동하며, 유동적인 미술시장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도 미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는 헤겔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겔 역시 미술의 종말론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이론과 단토의 이론은 비교해볼 만하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헤겔의 세 가지 입장을 밝히고 있다.
a. 예술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진리라는 이름하에 형상을 가진 가장 높은 형식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b. 혹자는 예술이 계속 발전하고 완벽한 형태를 취하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영혼이 애타게 찾는 것이 아닐 것이다.
c.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예술은 우리들에게 그 역할이 주는 의미에 한해서 과거의 것으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 헤겔이 이 말을 한 것은 1820년대의 일이다. 그 이후에도 많은 컬렉터들을 만족시켜주었던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말이 근거 없는 이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볼 만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술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과연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역할을 충족시켜주는 예술이 있다고 하다면 과연 그것은 우리들에게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헤겔의 이론은 19세기 초반에 씌여진 것이고 단토가 자신의 예술 종말론에 대해서 생각을 펼친 것은 20세기의 예술 전반을 관찰한 후였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예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말은 했지만 서로 다른 이해 속에서 그 이론을 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현재 우리의 생각에 가장 큰 도전장을 내는 것은, 현재의 예술시장이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전보다 더 생동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다.

예술시장은 다른 어떤 때보다 현대에 와서 번성하면서 거대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론과 이렇게 번창하는 예술시장의 거대한 사업들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를 캐묻는다면 현재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말할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예술이 죽었다’는 것은 현재의 예술시장의 단면도를 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지금 세기를 이끌고 나가고 있는 화랑들이 내보이는 예술 형태들은 우리에게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뒤에 버려둔채 전진하고 있는 것 같은 의구심을 갖게한다. 단토는 현재 미술시장에 놓인 ‘거대한 먹구름’ 에 대해서 말을 한다. 이는 예술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 “과연 예술이 미래가 있을까” 와 같은 비관주의가 퍼져 있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앞시대의 폴록과 로드코, 그리고 칸딘스키와 피카소는 가졌지만 현대 예술가들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먼저 답을 해보면 칸딘스키와 피카소는 그들의 예술세계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narrative)를 완성함으로써 작품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예술 형태로 인식하게 했다. 오늘날 이러한 이야기 방식의 예술은 대부분의 현대 예술가들에 의해서 예술의 진정한 형태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과 단토가 말하였던, 예술이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헤겔은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 작품성 자체보다도 그 작품이 전해줄 수 있는 진리의 형상을 사람들이 읽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예술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은 비록 하나의 물질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가 구현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본 것이다. 지금과 같이 과학적인 이성이 사회 전반에 진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 때에 예술 역시 또 하나의 진리의 형상이라는 말을 할 여력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지 않다. 헤겔이 예술의 가장 높은 가치로 간주했던 ‘예술의 죽음’은 단토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죽었음을 알리는 전주곡(presupposition)이 되었다.

‘예술은 죽은 것’이라는 생각의 시초는, 예술가들이 철학적인 사고의 바탕 위에서 예술의 정수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 것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단토는 여기에서 포스트 모던 예술의 개념을 처음 시작했던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오늘도 여러 형태의 작품들이 제작되면서 예술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있으며 또한 작업을 하면서도 자신들 내에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캐묻고 있다. 현대 예술은 가끔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면서 ‘미’ 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며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예술이 이제는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미학적인 오브제로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은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단토는 워홀이 제작했던 브릴로 박스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브릴로 박스는 추상회화를 추구했던 스티브 하비라는 작가가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던 것임을 지적한다. 하지만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그 진짜 제품보다 올덴버그나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들과 더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단토가 지적하는 이 두 개, 즉 우리가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브릴로 박스와 작품안에 있는 브릴로 박스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다른 관점으로 이것을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단토가 지적하였던, “왜 상점에 있는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워홀이 만든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고 불리는가”에 대해 더이상 예술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사고가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들은 또한 헤겔과 같이 진정한 예술은 정신과 영혼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토의 이론과 맞지 않게 된다. 물질 속에서 정신은 느껴져야 한다. 위대한 예술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문점은, 어떻게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호소하여 하나의 정신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그 궁금증을 자극한데서 시작한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품들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예술을 이해하게 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관객들이 그 작품을 작가 아이디어의 한 도면으로만 인식하게 되어 그 예술작품은 언젠가 버려질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이름하의 작품 대부분은 이렇게 하나의 이슈가 아이디어가 되어서 기호화된 것이다. 성과 인종, 건강, 그리고 테크놀러지 등의 이슈들을 내걸고 세계를 자극하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은 그 의미가 가벼워졌다. 작품들은 생각의 이미지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식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예술이 이렇게 작가의 생각과 이론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식적인 도구가 되었을 때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예술은 물질 안에서의 의미의 화신이 되어야 함을 가정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손실 없이 다른 표현방법에 의해 해석될 수 없는 의미다.

단토는 뒤샹과 워홀이 - 그리고 현대의 앞서가는 예술가들이 - 철학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해시켜준다. 이렇게 예술을 ‘철학적인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곧 하나의 역사가 단락될 것을 말한다. 예술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하는 객관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이론을 예술이 아닌 다른 측면을 설명할 때 펼치기도 하였다. 즉, 영혼에 대해서다.

헤겔은 정신적인 세계는 그 발전과정에서 감각적인 것과 예술의 영역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헤겔에 의하면 우리 현대인들은, 이보다 진화가 덜 되었던 문명보다도 예술의 필요성을 더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헤겔이 예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말을 했을 때에는, 이른바 발달하는 정신세계의 단면과 연관지어서 설명 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이렇게 예술이 그 진정한 의미를 잃고 죽어 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다만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일 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은 현대의 예술을 심사숙고하면서도 과연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러한 예술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는 단토의 이론 속에서, 우리들은 죽음 뒤에 승화된 새로운 예술형태, 즉 헤겔이 밝힌 가장 긍정적인 결과물에 대해서 가능성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예술을 다시 이해한다. 즉 “진리가 그 형상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식”으로. 하이데거는 이렇게 예술이 참된 존재로 남겨지기를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사회 형태, 즉 이성적인 사고,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이데거 역시 헤겔이 밝혔듯이 사람들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하며, 그 전환점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물질을 통한 정신적인 승화를 줄 때, 그 경험을 통하여 진리의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겔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극단적인 이론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이성 쪽에 서 있었다. 즉, 헤겔은 예술이 죽음으로써 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결과물로 승화된 정신성이 재현될 것이며 인간이 발전하는 데 정신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단토 역시 이 이론을 따르고 있다. 단토는 현대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했다.

단토가 어둡고 신화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리처드 바그너의 전통을 따르고, 헤겔의 분명한 논리를 가지면서 계몽적인 사고방식과 이성적 힘을 소유한 작가 안젤름 키퍼에 대해서 말하며 그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하이데거 : 키퍼 = 헤겔 : 워홀’ 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키퍼를 저버릴 준비가 안되어 있다.

나의 최근 저서 《건축의 윤리적인 기능에 대하여》에서 나는 물질이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의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책에서 나는 ‘물질의 리얼리즘’ 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즉, 건물들이 유리?콘크리트, 그리고 돌과 벽돌 및 나무들로 지어지지만 건물의 완성된 형태 속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로 새로 태어나며 그 물질들이 시각적으로 의미를 지원해 줄 때, 다양한 물질들이 줄 수 있는 다양한 예술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결코 의미가 물질을 완전히 떠난 것이라는 이해는 피해야 한다.

이러한 예술 형태와 건축물은 물질 속에서 같이 공존하는 의미를 더 나타내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헤겔과 단토를 반박하며 하이데거의 이론에 동감하게 된다. 나는 물질에 대한 진정한 탐구 안에서 의미있는 진수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세계의 실제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나의 첫 저서인 《현대예술의 의미》로 시각을 돌리게 한다. 나는 그 책에서 당시 프랭크 스텔라에 의하여 대표되었던 미적 이론을 반박하였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내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의미들을 직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실주의, 즉 ‘새로운 사실주의’ 에 대한 필요성을 말하며 결론을 내린바 있다.

스텔라는 당시 다른 현대의 작가들과 함께 현재성을 강조한 예술을 하였었다. “나의 작품들에서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것은, 그리고 내가 내 작품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작품을 대했을 때 혼돈스러운 잡음없이 바로 작품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당신의 앞에 놓인 것을 보는 것이 바로 당신이 얻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 곧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지 다른 이중적인 의미나 그 너머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없애버리자는 사고였다.

즉, 예술은 더 이상 하나의 암시적인 의미를 표현하거나 수수께끼가 되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물질’은 ‘정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미술품은 의미를 버린 채 다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 자체의 존재성을 위하여 작가는 의미에 등을 돌리게 된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누군가는 새로운 물질주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물질주의는 의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이렇게 의미를 찾으려 하다가는 그 물질의 현존적인 의미가 가려질 수 있다는 이론도 나올 수 있다. 가령 글자가 인쇄된 한 장의 인쇄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신이 매일 읽는 신문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 심취되어 당신은 그 문자들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도 잊고 있을 것이다. 문자들은 이렇듯 물질로서 올바르게 작용하였을 때에 투명한 물질이 되어 그것이 처음에 하려고 하였던 역할을 완수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문자들을 통과하여 그것들이 주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문자들은 카메라나 혹은 작가들에 의해서 크게 키워지기도 한다. 그것들은 처음에 맡았던 역할에서 벗어나 브루수 나우먼이 작업에 사용했던 것같이 AH HA 라는 문자들로 재현되기도 한다.

작가의 손에 의해서 한때 의미가 충분하였던 문자들은 문자 그 자체가 하나의 물체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었을 때는 반전이 일어난다. 문자들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사람들이 보통 놀랐을 때에 드러내는 단순한 표현이 갑자기 부풀려져 소리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침묵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끝없는 대화들은 곧 침묵을 덮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나우먼의 작품을 화랑에서 본다면 그들은 쉽게 그곳에 의미를 부여해버릴 것이다. 그것을 현대예술의 한 측면으로 이해하고 아우라를 통하여 신성함을 나타내줄 수 있는 추상회화로 판정할 것이다. 어떻게 벤야민과 보들리에를 읽으면서 성장한 현대 평론가가 현존에 대한 찬미를 할 수 있을까?

나우먼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아우라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한다. 나우먼은 말레비치가 그의 신비로운 작품 〈아하 - 체험(Aha-Erlebnis)〉을 통하여 추구한 바 있던, 즉 거의 아무런 형상도 그려지지 않는 캔버스의 침묵이 줄 수 있는 의미를 관객들이 그 빈 공간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우먼의 ‘AH HA’ 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말레비치의 의문점을 더 심도있게 경험하게 해준다.

나는 이 상황에서 아주 자신만만한 관객이 자신있게 “Aha!” 하면서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임금님은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추상회화의 흐름으로 간주함에 따라 나우먼의 작품은 존 발데사리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2차원의 화면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다〉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크 로센탈은 나우먼의 그 작품을 〈순수 추상 비판전〉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다른 점에 착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발데사리의 작품 제목이 도리어 그의 작품을 더 실감나게 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그 검은 마크들은 하얀 캔버스의 침묵을 깨고 있다. 말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그 제목은 우리들을 점점 더 의미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들은 그 검은 마크들에 쏠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작품에 있어서 의미를 모두 버리게 한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하고 의미없는 작품을 우리들로 하여금 보게 하듯이. 여기에서 물질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게 된다. 우리들은 도리어 더 분명해져야 하는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텔라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물질적 현전에 대한 모더니스트들의 찬미는 “작품은 존재하는 정신성의 현존”이라고 말하는 비평가들의 이론과 대비된다. 하지만 이 이론 역시 의미와 물질의 관계를 엮어주지는 못한다. 이렇게 불분명한 관계는 도리어 우리들에게 의미를 줄 수 없는 물질들, 그러나 종국에는 의미를 완전히 저버리게 하는, 즉 의미가 있음에도 의미를 보지못하게 하는 물질들을 남겨준다.

이렇게 분리된 의미와 물질 사이의 공백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 분석 방법을 필요로 한다. 의미가 계속 발견되려면 의미는 물질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물질은 그 안에 의미를 가득 담고 있어야 한다. 그 둘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될 때까지. 현대에 들어와서 얼마나 많은 물질 안에서 새로 승화되는 의미에 대한 논란이 많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지금 행해지고 있는 자연과 물질에 대한 연구와도 흡사한 것이다. 이 연구 안에서 물질은 그 순위에서 뒤로 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이론들이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에게는 예술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이성이 지어 놓은 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창문이 필요하다. 창문을 열어서 우리들을 초월적인 세계로 인도해줄 예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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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Karsten Harries

“인간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이어야 ”

당신은 헤겔과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을 두고,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술의 역할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물질에 대한 진정한 탐구”는, 곧 테크놀러지의 본질은 인간의 도움없이 그 자신의 변화를 이끌 수도 없고 또 인간적으로 극복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예술과 철학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쟁점은 테크놀러지 전반에 대한 사회적 이해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는 테크놀러지 가능 영역이 갖는 힘과 그 한계를 인지하는 일이다. 테크놀러지가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과학의 여러 영역을 빠른 시일 내에 분석하여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찍이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테크놀러지가 우리들의 삶을 위협할 때에는 그 합법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과학 그 자체의 지적 능력에는 가치라는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테크놀러지가 사회내에서 좀 더 확대된다면 우리를 니힐리즘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런 사실로 우리들은 테크놀러지가 가치를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tool)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테크놀러지가 하나의 자율적 인격체로 승격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과 동일한 지능을 가진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반면 이런 노력의 무모함을 지적하는 논변 또한 제출되고 있다.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테크놀러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공적인 지적 능력과 인간의 지적 능력 사이에는 도저히 연관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나보다 인간 뇌의 구조를 더 잘 아는 학자들은 이렇듯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불확실성 이론’이 적용될 수 없음을 밝히며, 이러한 마이크로 스케일의 작업을 컴퓨터가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과 기계가 가질 수 있는 이러한 지적 능력에 대한 차이점이 끝까지 넘어서면 안되는 벽이라고 생각하며 예술이 테크놀러지의 한계점을 밝혀주는 가운데 인간 존위의 가치를 보존하는데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 예술의 주된 흐름이라 할 수 있는 ‘테크놀러지 아트’를 둘러싼 논의는 문화적 맥락에서 복합적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역시 테크놀러지 아트가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사실에는 동감한다. 테크놀러지 아트가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매혹적인 힘에 반하겠지만, 또한 그것이 주는 한계에도 싫증을 느끼리라 예견된다. 현실은 점점 더 불가능한 일들이 없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세계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와 함께 이 모든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도 더 깊어질 것이다. 테크놀러지 미디어 아트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시도한다. 그 주요 수단은 디지털 시스템일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시스템과 다르게
제공하는 예술적 소통체계의 변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뉴미디어 테크놀러지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도구(tool chara - cter)라는 생각은 이러한 부류의 예술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강해질 것이다. 즉, 테크놀러지 예술은 자신만의 강하고 자유로운 힘을 발휘하는 과정 속에서 ‘빈곤함’또한 눈에 띄게 될 것임을 예견한다. 이런 진행과정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한다는 탈출구로 다시 의미를 찾을 것이다. 본문에서 말했듯이, 인간을 초월적인 세계로 인도해줄 창문은 열려야 한다.

이미 마샬 멕루한은 구텐베르그식 활자문화의 종언을 선언하지 않았는가. 이른바 멀티미디어 시대에 예술가에게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는 예술 창작의 개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한때 구텐베르그의 프린팅 프레스가 예술의 전통적인 개념을 깨버렸다고 말했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자혁명도 마찬가지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본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 현실은 점점 더 우리들에게 현실 그 자체보다 더 다가온다. 이런 위협 속에서 예술이 한번 더 현실의 진정한 의미, 즉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줄 것이라고나는 믿고 있다. 가상은 가상으로밖에 끝날 수 없다. 가상 음식은 우리들에게 어디까지나 먹을 수 없는 음식인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 자연과 인간의 합일, 인간과 기계 혹은 예술과 테크놀러지의 조화는 21세기의 주요 관심사다. 이에 따라 이미 하이데거의 관심사였던 ‘진리를 밝히는 예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 같은데 …

뉴 테크놀러지 아트가 나타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예술의 형태들을 마치 과거의 것으로 간주하며 그 생명력마저 없어질 것이라고 예견들을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런 위협은 전에도 있었다. 프린팅 프레스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그랬고,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에도 예술은 마치 커다란 위협을 받은 것만 같았다. 이제 프린팅 프레스와 사진의 자리에 컴퓨터가 들어선 것뿐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된다. 이렇게 예술의 형태가 완전히 변형될 것이라고 위협받을 때마다 예술은 다만 그 기능의 일부를 잃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본문에서 밝혔듯이, 물질 내에서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공한 예술작품은 흡사 사람의 얼굴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이 구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을 과연 테크놀러지 아트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궁금하다. 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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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 1937년 출생. 예일대학 박사학위(Ph.D) 취득(1962년). 주요 저서로는 《Bavarian Rococo Church》 《The Broken Frame:Three Lectures》 《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 등이 있으며, 《The Meaning of Modern Art》는 《현대미술 - 그 철학적 의미》로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있다.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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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현대와 그 이후 - 10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지음, 김경식 옮김/문학동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미적 현대와 그 이후』, 김경식 옮김, 문학동네, 1999.

 


서가에서 책을 꺼냈다. 책 표지를 펼치자, 1999년에 내가 이 책을 읽었음을 드러내는 메모가 보였다. 한창 공부를 할 때였고, 벌써 십 여 년이 지난 일이다. 내가 읽었던 문학 이론, 혹은 미학 관련 책들 중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이 책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거의 없었다. 놀랍도록 선명한 입장으로 미적 현대 이후의 탈근대를 설명해 나가는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에 대한 연구는 일부의 독문학 전공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인 듯 보인다. 그의 주저 중의 한 권은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된 듯, 문학과지성사에서는 절판을 시켰다. 이런 상황을 보면, 학문의 세계에도 트렌드와 패션이 있고, 학문의 진정성이나 깊이, 통찰과는 상관없이 트렌드와 패션에 민감하느냐, 민감하지 않느냐가 중요해진 세태를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는 ‘수용미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한국에서 이해하고 있는 바 ‘수용미학’ 이상의 깊이와 통찰을 지닌 학자이다. 이젠 절판된 ‘미적 현대와 그 이후’는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가 ‘연구했던 현대성의 개념사를 계몽주의에서 진척시키기 위해 쓴 논문들을 한 곳에 묶은 것’이다. 특히 미적이고 예술 수용적인 관점에서 미적 현대성(aesthetische Moderne)에 대해 살펴보고 되짚고 있다. 특히 ‘반(反) 자연으로서의 예술: 1789년 이후의 미적 전환에 관하여’든가 ‘이탈로 칼비노: 만약 어느 겨울밤에 한 여행자가 - 탈현대적 미학의 변호’는 흥미진진한 독서의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1999년에 읽었고 그 이후 한 번 더 읽었던 이 책에 대한 독서 경험이 아직도 선명한 것은 그만큼 이 책이 가지는 호소력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문학 이론이나 미학 전공자가 있다면, 이 책은 반드시 필독서이다.

아래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이 책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서가에서 책을 꺼냈으니, 당분간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 오래된 감상 -


누군가가 속물적으로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고 그것을 찬양하거나 그것을 배격한다면, 찬양하는 자에겐 ‘당신이 얼마나 근대적인 줄 아시오?’라고 물을 것이며 배격하는 자에겐 ‘당신이 얼마나 포스트모던적인 줄 아시오?’라고 물을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아무런 확신도 던져주지 못하고 우리의 이성이 고작 인간 이성의 한계 만을 드러낼 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 순간을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시작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러니 ‘포스트모던’은 ‘흄’부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한국의 그 어느 것도 포스트모던적이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포스트모던을 떠들고 있는 나는 ‘시대착오’이며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은 한결같이 얼치기 패러디이거나 미숙아, 혹은 무뇌아적 산물일 뿐이다. 아마 이것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보자면 지배계급의 농간에 의한 미적 탈근대의 수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80년대를 무겁게 짓눌렀던 정치경제학적 거대담론을 몰아내기 위한 전술이었고 지식인들의 자포자기적 반응들이 한국적인 탈근대적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상업주의에 대한 찬양이었으며(역겨운 문화담론들을 보라!) 허풍만 심한 (상업)영화르네상스를 불러왔고 돈에 혈안이 될 것이 뻔한 문화산업들에게로 대중의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지금 포스트모던을 향해가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가 ‘아직 근대를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몇 명의 근대주의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탈근대를 옹호하고 있는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가치있는 저작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책의 세부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 ‘루소에서 칼비노까지’라는 부제를 붙인 이 책의 세부를 다룬다면 이 글은 꽤 길어질 것이다.

참고로 누군가가 ‘주체가 죽었다’라고 단언했을 때, <‘주체가 죽었다’라고 말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되묻는다면 그 물음은 포스트모던의 딜레마를 지적하는 매우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할 때, 그것이 ‘20세기판 허무주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문학비평’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매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적어도 문학비평가라는 수식어를 가지려면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 책 표지에 실린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의 소개를 옮긴다.

수용 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야우스는 1921년 독일에서 출생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프루스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중세 문학 연구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뮌스터 대학과 기센 대학을 거쳐 1966년부터 콘스탄츠 대학에 재직하면서 대학 개혁 프로그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문예학 분야에서 이른바 '콘스탄츠 학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연구 집단인 '시학과 해석학'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수용미학의 선언문'으로 불리는 '문예학의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는 16개국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커다란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때부터 그는 '수용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8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도전으로서의 문학사'(1970), '중세 문학의 고대성과 현대성'(1977), '미적 경험과 문학적 해석학'(1977/1982) 등 일련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퇴임 후에도 왕성한 연구 활동을 통해 '미적 현대와 그 이후 - 루소에서 칼비노까지'(1989), '이해의 길들'(1994) 등 수준 높은 연구물들을 발간했다. 1997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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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모리스 메를로 퐁티 지음, 김화자 옮김, 책세상


1.
1년 전의 메모를 꺼내 읽는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두 세 번 읽어야 할 책이었으나, 한 번 읽었고 읽은 것을 정리하다가 그만 두었다. 결국 그 정리는 포기하고 읽은 지 1년 만에 간단하게 읽은 바를 적어본다.

메를로 퐁티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로, 현상학에 있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였다. 특히 그의 예술론은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 영향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아래는 그 메모의 일부분이다. 내가 쓴 것보다 인용한 것이 많다. 원래는 더 많았다. 퐁티의 글이 짧고 압축된 것이라, 어설픈 리뷰도, 상세한 설명도 어려웠다.

2.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다는 것, 느낀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의식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의식은 내가 경험한 세계를 다만 정리하고 배치해서 ‘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의식하기에 앞서서 세계에의 체험과 감각이 있고 우리의 실존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이며, 매순간적인 체험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서 이미 존재하는 세계 속에 사는 ‘나’는 의식과 반성의 결과로 나타난 의미와 관념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정확한 범위 내에 이루어지는 ‘학문의 세계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계 속의 ‘나’는 바로 신체를 가진 나로서, 몸 전체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는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순수 의식 대신에 신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신체적 실존을 말하며, 신체가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세계를 ‘지각된 세계’라고 부른다.
신체는 감각을 통해서 외부에 있는 것들을 지각하고 세계와 교류하며 관계를 맺는다. 이에 따르면 신체는 세계를 향한 통로이며, 지각은 곧 세계와의 소통 방식이다.
- '철학 용어 용례 사전', 박해용, 심옥숙 지음, 돌기둥출판사, 2004. 176-177.



3.
책에서 몇 문장을 옮긴다.

사유라는 것은, 사유에 적합한 단어를 찾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문장이 옮기려고 애쓰는 일종의 관념적인 텍스트로 존재하고 있다. (23쪽)

언어는 기호와 의미 간의 대조표를 전제하지 않고 세상의 어린아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비밀들을 드러내어 가르쳐주는, 완전한 드러냄monstration이다. 언어의 애매함, 집요한 자기 지시, 스스로를 향한 방향 전환과 회귀 등은 언어에 정신적인 힘을 불어넣어준다. 언어는 차례로 사물을 의미로 바꾼 후, 그 안에 사물이 머물 수 있도록 하나의 우주처럼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한 표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게 될 것이고, 결국 모든 언어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소위 침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25쪽)

왜냐하면 기호는 자신의 의미가 드러남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고, 사유는 사유들 - 기호를 통해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유와, 지극히 명확한 언어로 형성하려는 사유 - 외에는 다른 어떤 것과도 만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6쪽)

회화처럼 인간과 세계와의 생생한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를 무언으로 표현하고, 수많은 해석을 내포해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못하는 침묵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19쪽)



4.

이 짧은 책은 퐁티 철학에 대한 충분한 개론서이면서 퐁티의 예술론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하지만 한 번 읽기에는 부적합한 책이었으며, 두 세 번 읽고 노트해야 하는 책이었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10점
메를로 퐁티 지음, 김화자 옮김/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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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된 카오스 - 6점
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문예출판사





Das Kontrollierte Chaos
Norbert Bolz
1995. (번역본은 2000년)


전선 속에 결박당한 번갯불, 즉 붙잡혀 있는 전기는 이교도들과 더불어 창궐하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폭력들은 더 이상 인간 형질적 또는 생물형질적 접촉 속에서 관찰되지 않고, 버튼 하나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무한한 파동으로 관찰된다. 그러한 파동들을 매개로 기계 시대의 문화는 신화에서 성장한 자연 과학이 힘들게 쟁취했던 것 ? 즉 사고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던 경건한 안식처 ? 을 파괴했다. 모던의 프로메테우스와 모던의 이카루스, 프랭클린과 라이트형제는 지구를 또 다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가려고 위협하는 그런 음모를 꾸민, 외계에서 밀파된 파괴자이다. 진보와 진화가 코스모스를 파괴하고 있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3년 4월 21일 ‘푸에블로-인디언 지역의 그림들’이라는 강연 중에서), 279쪽에서 재인용 (밑줄은 필자가 함)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라는 부제가 붙은, 노르베르트 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는 현대 사회 위로 물결치는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환경 속에서 우리 일상의 변화와 문화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역자의 기대(1)대로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의도는 분명하다. 현대 문명의 여러 변화를 ‘카오스’로 받아들이며 이 카오스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휴머니즘적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으로부터 작별하고 뉴미디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아비 바르부르크의 표현대로 1923년의 카오스와 1990년대 후반의 카오스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볼츠는 ‘정신은 단지 관계들-상호작용들-상황들 그리고 콘텍스트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말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미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계속 떠오르게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책들 중의 한 권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특히 잡다하게 나열된 사례들과 인용문들은 어떤 구심점을 갖고 기술되었다기 보다는 수집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볼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류의 문명은 계속 카오스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번도 코스모스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가 급변하여 갑자기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중세 세계로의 전환도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또한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속에 볼츠의 책처럼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자 한 저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이 되기에 볼츠의 이 책은 저자만의 뚜렷한 목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이 책의 장점으로 오해될 여러 인용과 사례들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 다양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도리어 이런 데이터들을 줄이고 자신의 주장을 보다 뚜렷하게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볼츠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현재 우리 일상의 변화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변화가 앞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이나 세계관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삶은 총체적 예술이 된다’(355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술이란 뉴미디어의 예술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가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1) 이 책은 비전문적인 일반 독자를 겨냥해 복잡한 문화 현상들을 풍부한 사례와 비유를 들어 마치 백과사전처럼 서술하고 있어 사전 이해가 충분치 못한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역자 머리말 중에서,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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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lling Players
1793
Oil on tinplate, 43 x 32 cm
Museo del Prado, Madrid


고야의 작품은 언제나 흥미롭고 격조있지만, 비극적이고 끔찍한 우울과 절망을 가리고 있다. 몇 년 전(2004년 6월), 어딘가에 올렸던 글을 다시 여기에 옮긴다.
 

낭만주의 시대(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최고의 예술가는 "프란시스코 고야"다. 그는 계몽주의가 남긴 혁명의 그림자 속에서 삶의 허무와 거짓된 역사를 뚜렷하게 목격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보통의 낭만주의자들이 이야기하곤 하는 사랑이라든가 환상, 또는 매혹의 도피 따윈 다 허위이거나 기만이고, 도리어 그 세계 속에서조차 우리는 삶의 허무나 죽음,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래서 자끄 루이 다비드와 동시대인이면서 다비드가 계몽주의 신념 속에서 자만과 오만의 성을 쌓았다면 고야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계몽주의 세계가 만들어놓은 거짓, 그리고 우리가 끝내는 굴복하고 말 어떤 허무와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고야의 세계를 느끼게 될 때 그 이후의 모든 낭만주의자들이 시시해지고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자들을 다시 보게 된다. (2004년 6월)


내가 스페인 마드리드를 가게 된다면, 아마 그것은 프라도 미술관 때문일 것이다. 여튼 이 짤막한 글을 올리고 난 다음, 아는 분의 긴 리플이 이어졌다. 여기에도 옮긴다. 미뇽님께선 어떻게 사시는지 무척 궁금하다. 건강하게 잘 계신지. 


미뇽 (2004/06/28 13:53)

프랑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비하여 서정성이 부각되고 주제에 있어서 다양화되면서 어떤 것도 주제가 될 수 있었지만 대부분 사랑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자기 목소리로 시를 쓸 수 있었겠죠.
그러나 위고를 비롯해서 역사성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독특하죠.
그래서 서사시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두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미술에서는 계몽주의와 대비가 되어 낭만주의가 상관관계 속에 놓임으로써 그 특징이 비교되는 것이 일반적인가 봐요. 문학에서 낭만주의는 보통 고전주의와의 대비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지하련 (
2004/06/28 13:54)

빅토르 위고는 '후기 낭만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진보에 대한 열정이 일어나기 시작하죠. 이 때부터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논의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좀더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한 계급갈등. 도시의 급성장과 농촌의 피폐화.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편입된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혼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19세기 초의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은 18세기 계몽주의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곧바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특히 칸트에게서 두드러지는데, 칸트의 철학은 계몽주의이며 그의 미학은 낭만주의 미학입니다. 다른 관점으로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예술사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도 마찬가지이구요.


미뇽 (2004/06/29 18:16)

초기 낭만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물이라는 말은 개인의 해방과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혁명의 이념과 낭만주의의 모토가 같은 뿌리라는 말로 이해되며 그 점은 저도 동감을 해요. 그러나 초기 낭만주의의 경우 이상한 점은 혁명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적어도 프랑스 낭만주의의 경우에는요.
왜냐하면 혁명기의 격동은 도리어 18세기의 낭만주의 예고자인 루소가 대표적으로 보여 준 새로운 감수성의 맥을 끊어 놓았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복고주의가 대두하고 문학의 모든 쟝르에 있어서 옛 형식이 그대로 지배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폴레옹의 정권은 신 고전주의의 틀 속에 문학을 가두어 두려고 했으니까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새로운 감수성의 작가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차라리 고립적, 예외적 존재들이었다할 수 있었어요. 이들(샤토브리앙, 스탈부인, 콩스탕, 세낭쿠르)을 소위 전기 낭만주의자들로 명명합니다.

지하련님이 위에서 지적하신 대로 고야에게서 초기 낭만주의 자들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이들 모두가 18세기 이성이 약속해준 듯이 보였던 새로운 사회는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낭만주의는 크게 보수적, 진보적 낭만주의로 나누어지나, 이들의 고통된 점은 현실에 대한 혐오와 고전주의에 해단 반감으로 합결된다는 점에서 볼때, 외적으로는 대혁명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지만 내적으로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하련 (
2004/06/29 18:43)

흠. 제 리플에 오해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있군요.
19세기 낭만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이라고 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 속에서 낭만주의가 생겼다는 뜻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미뇽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는..)

프랑스 혁명의 귀결은 이성주의가 아니라 감정주의였으며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의 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몽주의가 내세웠던 이성의 결과라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낭만주의는 반합리주의, 비이성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의 반발이라고 볼 수 있죠. 즉 혁명 실패에 대한 결과인 셈이죠.

제가 프랑스 대혁명이나 계몽주의를 이야기한 것은 19세기 낭만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두 계기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나 연구자들이 낭만주의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그 당시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혁명의 열기, 그리고 그 혁명이 가져다 준 절망감, 공포, 독재에 대해선 별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속에 자신의 성을 쌓고 안주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경우 사태가 좀더 심각하여 독일이라는 나라에는 아예 혁명이 가능하지도 않는 곳이라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의 이러한 고립감은 더욱 심각했으며 이것이 독일 이상주의를 만들게 됩니다.
루소의 경우 18세기, 19세기 초반을 지배했던 인물입니다. 이는 루소라는 인물 자체가 서로 모순되는 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루소에게서는 이성주의적 성격과 비이성주의적 성격을 동시에 파악해낼 수 있습니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으로 연결되지만, 후자의 경우 로코코 양식이나 낭만주의 양식으로 연결됩니다. 미뇽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고야의 경우에는 보통의 낭만주의자들이 도피한 곳을 보여주면서 그 곳마저도 현실의 절망이나 비극, 삶의 허무가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야는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만큼 현대는 절망적인 인식을 하기 시작하는 시대이니깐요.

***
요즘 포스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실은 글을 쓸 시간이 없다. 집중할 시간이 없다.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다. 꽤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예전에 올렸던 글을 새로 올리면서 사소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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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 10점
앙투안 콩파뇽 지음, 이재룡 옮김/현대문학




지난 가을에 두 번이나 정독한 책이다. 국내에 출판된 책들 중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참고서로 읽힐 이 책은, 불행하게도 아무런 주목도 못 받은 것처럼 보인다(일일이 신문이나 잡지 서평을 찾아보지 못했지만). 두 번이나 읽었지만, 그간 서평을 쓰지 못했던 것은, 서평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서평이라는 낯익은 접근방식은 이 책이 가지는 유용함을 깎아 먹을 가능성이 더 높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문 - 현대적 전통, 현대적 배반
새로운 것의 권위: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 보들레르, 마네
미래에 대한 종교: 전위주의자들과 정통주의
이론과 공포: 추상파와 초현실주의
바보들의 시장: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막바지: 포스트모더니즘과 개영시(改詠詩)
결론 - 다시 보들레르로


이 책의 미덕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 논쟁적인 부분들을 풍부한 인용과 사례로 예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설득력 있는 저자의 논리는 모더니즘의 탄생에 주목하면서, 나아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까지 아우른다.


그러나 단절의 전통은 필연적으로 전통의 부정인 동시에 단절의 부정이 아닐까? 옥타비오 파스는 '수렴점.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에서 현대적 전통이란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뒤집어진 전통이며, 이 역설이 그 자체로 모순인 미학적 모더니티의 숙명을 예고한다고 했다. 현대적 전통은 예술을 긍정함과 동시에 부정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 자신의 위대성과 퇴락을 한꺼번에 선포한다. 반대되는 것들끼리의 결합은 현대적인 것이 전통의 부정, 다시 말해 필연적으로 부정의 전통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의 논리적 모순 혹은 논리적 막다른 골목을 고발한다. (8쪽)


그의 시선은 모더니즘에 향해 있으며, 모더니즘의 시작부터 논쟁거리였음을 예증한다. 인문학 전공자이거나 현대 예술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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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련님의 리뷰를 읽고 이책을 구입했습니다.
    한국에서 공수해오느라 시간이 조금 걸려서 이제야 읽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좋은책 만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술 비평의 역사
A. 리샤르(지음), 백기수, 최민(옮김), 열화당



‘미술 비평의 역사’같은 책을 읽는 이가 몇 명쯤 될까(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수록 이런 시니컬한 반응부터 먼저 보이게 되는 것은 정직한 미술사 연구자의 수만큼이나 미술사, 또는 미술 비평의 학술적 영역과 대중적 영역과의 괴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매우 좋은 책이다. 짧고 간결하게, 그러나 풍부한 인용들을 통해 미술사에 있었던 여러 비평적 태도에 대해 그 장점과 한계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상학적 미술사 연구가 주된 경향으로 자리 잡은 이 때, 리샤르는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비평을 위한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은 미학, 또는 미술 비평에 있어서 거의 권력을 상실한 헤겔에 대해, 드니 위스망과 벤투리의 말을 인용하며 치켜세운다.


헤겔주의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미학으로서, 처음에는 낭만주의 세대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가 그 다음 세대로부터는 의문시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비평을 보고 있으며, 그 비상한 힘을 높이 평가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헤겔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위대한 미학자이다.”라고 드니 위스망(Denis Huisman)은 쓰고 있으며, 벤투리는 “예술사와 예술 비평을 정립하는 모든 미래의 시도는 헤겔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 p. 73


이 책의 출판은 추측컨대 1950년대 이전이라 여겨진다(* 역서에는 아무런 서지 사항도 없다). 리샤르는 미술 비평의 방향을 크게 5 가지, 기술적 비평, 이념적 비평, 역사적 비평, 심리학적 비평, 형식주의적 비평으로 나누고 이에 해당되는 비평가들의 견해를 소개하며 요약한다.


리샤르에 의하면, 기술적 비평에서는 미술작품을 기법이나 주제/소재의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비평이며, 이념적 비평은 미술작품 속에 담긴 가치, 이념을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비평, 역사적 비평은 미술작품을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 해석하고, 심리학적 비평은 미술작품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나 미술작품을 제작하였을 때의 예술가의 반응, 또는 심리적 태도에 주목하는 비평, 형식주의 비평은 근대 미술 아카데미에서 내세웠던 바 고전적 미술의 규범에 따라 바라보는 비평이다. 각각의 구분은 현대 미술 비평에서 이야기하는 방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며, 심리학적 비평의 경우에는 리샤르의 구분이 다소 애매한 부분도 존재한다. 그러나 때때로 리샤르는 현대 연구자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통찰을 보여주기도 한다. 관련 연구자들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미술비평의 역사
앙드레 리샤르 지음, 백기수 외 옮김/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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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서울에서 딱 일주일만 살면서 매일 아침 일간지를 챙겨 읽으며, 출근길 지하철, 퇴근길 버스를 타보자. 어떤 기분이 들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에 대해선 숙고할 틈도 없이, 생각하는 것을 꼭 죄악이라는 듯 여기며, 현재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진 않을까. 하긴 그렇게 채찍질해서 현대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승승장구하며 살아남았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으니(아니, 많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살아야된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왜 이렇게 되었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예술과 미학에 경도된 채, 실존주의적 체념을 가슴 한 곳에 묻고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무심하게 흔들리는 나에게, 데이비드 하비는 주옥같은 인용들과 함께, 혼돈스러운 현재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꼿꼿하게 서있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은 아직도 유효하다!

테리 이글턴의 ‘압도적이다!’라는 찬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본질을 드러내며, 그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와 문화와 예술, 미학, 그리고 일상생활, 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엄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는다(1970년대 이후). 가령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뉴욕 주식 시장이 곧바로 한국 증시에 영향을 주는 것’ 따위는 불과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즉 이는 원래 당연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적용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여러 현상들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를,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향해가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데이비드 하비의 ‘시공간 압축’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다는 것에 강조점이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빨리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러한 속도로 인해 우리 인간의 인식 및 삶의 유형을 예상치 못할 정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에 강조점이 찍혀져야 된다(시공간 압축은 새로운 개념이라기 보다는 고대 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에 가깝다). 사회학자인 그가 문화예술과 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환경의 변화로서의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이 체제의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변화. 그러면서 그는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분석해낸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듯이, 우리 인간도 과거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현재와 미래만을 바라볼 뿐이다. 최근의 급속한 기술 발달은 과거는 지나간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 이미 폐기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압도적 현재와 미래를 만들고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폐기되고 지나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찾지 않는다. 그런데 하비는 그 속에서 현재의 우리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나는 딱 한 번 이 책을 추천받았다. 꽤나 많은 인문잡지를 읽었고 많은 지식인들을 만났지만 말이다. 한국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내가 읽은 몇 권 되지 않는 책들 중에서, 마샬 버먼의 책 ‘현대성의 경험’ 이후로 좌파적 시각에서 현대를 통찰력 있게 분석해 낸 거의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은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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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련님, 안녕하세요.
    저는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김현선이라고 합니다.

    저희 반디앤루니스는 이번 다음 View와의 제휴를 통해 <반디 & View 어워드>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매주 '다음 VIEW'에 노출되는 블로그 중 좋은 글을 선정하여, 선정된 블로거분들께 반디앤루니스 적립금을 지급하여 시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지하련님의 리뷰가 <반디 & View 어워드>에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리며, 적립금 지급을 위한 반디앤루니스 아이디와 다음뷰 발행 닉네임을 담당자 메일(anejsgkrp@bandinlunis.com)로 6월 3일까지 보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또한 앞으로도 <반디 & View 어워드>를 매개로 지하련님과 좋은 인연 계속 이어가길 소망합니다. 그 밖에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담당자 메일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매주 <반디 & View 어워드> 선정작은 반디앤루니스 책과 사람 페이지(http://www.bandinlunis.com/front/bookPeople/awardReview.do?awardType=02)와 다음 파트너 view 베스트 페이지(http://v.daum.net/news/award/weekly)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김현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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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지음), 이성훈/김광우(옮김), 미술문화, 2004년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다 읽고 난 다음 돈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더구나 꽤 저명한 사람의 책이라, 내심 기대를 했는데, 거참, 한심하지.

예술의 종말이란 낯선 주제가 아냐. 이건 헤겔 미학의 주제야. 여기에서 ‘종말(End)’는 곧잘 근대성에 반대하는 후기 근대주의자들의 어투이기도 해. 그런데 여기에서 약간 유머러스한 건 단토는 헤겔을 끔직하게 좋아하는데, 후기 근대주의자들 대부분이 지독하게 헤겔을 싫어한다는 점이지. 대체로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후기 근대주의가 실은 코제브의 헤겔 해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해. 바자리식의 미술 이해의 역사가 끝났고 그린버그식의 미술 이해도 끝났다, 그러니 이제 기존 방식으로 이해되던 예술은 끝났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아무리 읽어도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좋아하는 라캉이라면 ‘대문자 A의 예술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했을 꺼야. 여기에 대해서 단토의 주장이 틀렸다고 보는 건 아냐.

애초부터 예술은 진보하는 게 아니었거든.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변화한다고 할까. 우리 삶같이. 여하튼 단토는 이런 식으로 기존 방식으로 이해되던 예술은 종말을 고했고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예술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지.

문제는 이게 다라는 데 있어. 뒤라스의 마지막 책 제목을 흉내 내려고 한 건 아니야. 그런데 정말 C’est Tout야. 내가 보기엔 아서 단토는 그가 이야기하는 ‘탈역사적 미술’에 대해서 좀더 충실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게 무엇인지 말이지. 왜 말레비치의 사각형과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어야만 했어. 그런데 그런 설명은 없거든. 또는 이런 식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을 해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모방의 시대에서 모던의 시대로의 이행에서 일어난 단절이나 모던의 시대에서 포스트모던의 시대로의 이행에서 일어난 단절이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에서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의 이행에서 일어난 변화와 어떻게 틀린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가 전자의 두 이행을 ‘단절’이라고 파악한다면, 전성기 르네상스와 후기 르네상스도 ‘단절’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또한 종말은 너무 식상한 방식이야. 그리고 단토의 이해는 너무 표면적이고. 그는 그저 기존의 역사는 끝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예술이 철학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식인데, 뽈 발레리가 생각나는군. 뽈 발레리가 <<드가, 춤, 데생>>이라는 뛰어난 책에서 ‘회화만큼 지적인 예술을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했던 거 말이야. 발레리가 보기에도 회화는 지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고 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했거든. 실은 오래 전부터 예술은 철학의 문제를 고민해왔다고 할 수 있어. 결국 단토의 생각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 식상한 것들의 반복인 셈이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대단한지 난 잘 모르겠거든. 누가 나에게 설명해줄 사람 없을까. 단토의 다른 글이나 책을 읽어볼까, 하긴 단토가 여기저기 인용되고 인정을 받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숨어있겠지. 아마. 다시 단토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 책은 사지 말고 뒤에 실린 역자의 해설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단토의 글보다 역자의 해설이 더 이해하기도 쉽고 단토의 생각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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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성(지음), 박물관의 탄생, 살림, 2004. 초판


알튀세르가 강압적 국가 기구(Repressive State Apparatus)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우리의 삶 전체가 정치적인 기구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 전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알튀세르에게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가족, 학교, 미디어 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 어쩌면 군대, 경찰 제도보다도 더 위험한 기구들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은 분명 알튀세르의 기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아미앵에서의 주장'(솔출판사, 현재 절판)에서 여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언급을 확인할 수 있다).

전진성의 <박물관의 탄생>은 짧지만, 박물관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연대기적으로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museum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는 mouseion(뮤제이온)은 헬레니즘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에 알렉산드리아에 건설된 왕립 연구소였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와선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거머쥔 귀족이나 상인 가문들의 여러 진기한 물건들이 모인 방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galleria는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물건들을 진열했던 ‘ㄷ’자 모양의 회랑을 뜻하는 단어로 현재의 Gallery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세계 각지의 여러 진기한 물건들을 모아두었던 방은 르네상스 시대에 진행되는 문명의 부흥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세속 권력이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독일어 Wunderkammer(분더캄머)는 ‘경이로운 방’으로 세상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을 모아두던 방이었다. 이 때가 16세기임으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기운이 전유럽으로 확대되던 시기였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18세기 혁명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19세기 제국주의의 상징물이다. 전진성은 ‘박물관은 근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다. … 특히 혁명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혁명을 통해 등장한 이 근대적 기관은 우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었고 그 기저에는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주체’라는 세속적이고 능동적인 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은 ‘역사의 이성’을 입증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박물관은 혁명이 몰고 온 거센 풍파 속에서 과거가 머무는 안식처였다’(pp.76-77)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진성의 입장은 다소 애매하다. 박물관이 정치적인 기구로 기능해왔다는 점만 말할 뿐이다. 그 다음의 주장은 이 책에 담겨있지 않다. 박물관의 탄생과 변천에 대한 정리는 잘 되어있지만, 정치적으로만 해석하고자 하여 박물관이 지닌 가치나 효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현대의 박물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김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시점에서 박물관의 의미, 필요성에 대해서는 물음표로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박물관에 대해 알고 싶은 이에게 추천할 만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지만, 다른 두꺼운 책들보다 훨씬 좋은 책이다(실은 살림 시리즈 중에서 몇 권 되지 않은 좋은 책 중의 한 권이다).


박물관의 탄생 - 087

전진성저 | 살림 | 2004.05.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last updated: 2007-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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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계몽주의 시대: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데카르트의 태도만 알아도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그만큼 중요하다. 17세기 바로크 예술이나 그 전 르네상스 고전주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데카르트 철학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종종 미학과 예술이 서로 평행을 유지하며 나란히 가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도리어 미학과 예술이 무관한 경우도 더 많다. 개인적으로 미학은 예술 이해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사상사적 맥락이나 철학사적 맥락을 그 시대의 예술 양식과 서로 연관 지어 이해하는 것은 예술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비어즐리는 데카르트는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데카르트는 본질적으로 단순하고 따라서 매우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들을 분석을 통하여 발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관념은 지식의 기본적 구성요소가 된다. 명제에 관하여 그는 직관과 연역법을 필연적 진리의 원천으로 취하였다. 직관은 “오직 이성의 빛에서 나오는, 청명하고 세심한 마음의 회의 없는 개념작용이고” 연역법은 결국 직관들의 사슬이다.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요청들 가운데 하나는 확실한 보편적 진리를 얻기 위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보편적이라 함은 모든 합리적 존재에 타당할 것과 모든 것, 주어진 탐구분야 내에서의 모든 것에 적용될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방법은 선험적이고 추상적이었다. 그가 추구하였던 종류의 지식은 자연에 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하여는 기대될 수 없었다. 그것은 본유개념과, ‘자연의 빛’에 직접 내맡겨지는 명제에 의존했다. 그리고 지식으로서 그것의 안정성은 명제들을 보다 근본적인 것과 덜 근본적인 것으로 정리하여 그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그 지식의 명백한 명료성과 연역적 체계화에 의해 입증될 것이었다.”

위에서 몇 개의 핵심 개념을 끌어내면, ‘이성’, ‘보편’, ’자연’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기계론적, 인과율적, 기하학적 이성은 보편적인 것이며 이는 다시 자연 탐구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미, 또는 미적 대상에 대한 탐구에까지 확장되는 것이 이 시대 미학자들의 태도인 셈이다.

모방을 하고자 하는 자연 대상을 이성을 통해 정확하게 재현한다면 이는 보편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대 대륙의 미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태도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모방론은 ‘이상적 모방론, 즉 본질적인 것, 특징적인 것, 훌륭한 것을 다양한 비례 가운데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화가이기도 했던 조슈아 레이놀즈는 ‘예술에 관한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이 예술의 미는 그 대상에 근거한다. 이것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그 대상의 미는 보편적이고 지적이다. 그리고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관념뿐이다. 시각은 그것을 보지 않았고, 손은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것은 화가의 가슴 속에 머무는 관념이며, 그는 항상 그것을 전하려 애쓰지만 끝내 그것을 전하지도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사상을 제기하고 관객의 시야를 확장시켜 줄 만큼은 전달 수 있다.”
“그는 철학자처럼 자연을 추상하고 고찰하고 그가 그리는 상 하나하나에서 그 종의 특성을 재현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심리 상태를 어떻게 모방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선 비어즐리의 책에 인용된 한 연구자의 글을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식화, 내지 규범화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예술 모방, 또는 표현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은 이 자연 세계 또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세계를 확실히 드러낼 수 있다는 신념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기계론적 세계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아카데미 미술의 편협함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볼 수 있는 표현으로 정식화함에 있어서 보여주었던 그 범주적 정확성의 배후에는 철저하게 합리적인 데카르트의 방법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물리학의 중심 개념, 즉 전체 우주와 모든 개체는 일종의 기계이며 따라서 모든 동작은 기계적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었다. 따라서 르 브렁의 정념 해부학의 다함 없는 정밀성은 신체를 인간적으로 중요한 정서적 삶의 매체로서보다는 오히려 정서적 충격의 불변적 효과를 기계적인 정확성으로 기록하는 복합적 기구로 취급한다.”


* 비어즐리, <<미학사>>(이론과실천)을 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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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어즐리의 미학사(이론과실천)을 읽고 요약한 글입니다. 오래된 글이네요.)


제 6장 르네상스



비어즐리는 르네상스를 15세기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탄생부터 16세기말 지오다노 브루노의 사망까지로 잡는다. 매우 의미심장한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쿠자누스는 철학사에서는 중세 말기의 철학자로 구분되나, 실제 그가 살았던 시대는 고딕 후기, 또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여기에서 고딕과 르네상스의 시대 구분이 문제로 떠오르는데, 지역적으로 그 사정이 틀리다. 이탈리아의 경우 15세기면 르네상스 중기이고 북유럽의 경우에는 고딕 후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학자들마다 어느 것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구분이 제각각이며 읽는 이가 알아서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술이나 사상에 있어서 시대 구분은 몇 년부터 몇 년까지 확정적으로 나누는 것은 이해의 편의를 그러는 것일 뿐, 정확하게 말한다면 도리어 대략 몇 년 즈음 정도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이탈리아의 경우 스콜라철학의 후퇴가 분명한 사실이었고 이를 대신해 신플라톤주의가 유행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영향을 준 이가 Marsilio Ficino였다. 그는 플로티누스를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플라톤도 번역하였다.

그는 신이 창조한 세계, 즉 "모든 형상과 이데아들의 이 합성체를 라틴어로는 mundus, 희랍어로는 cosmos, 즉 조화체라 부른다. 이 조화체의 매력이 미이다." 이 때 사랑(eros)은 '미에 대한 갈망'으로 정의된다. 사랑은 미의 상 아래에서 선에 끌리는 데 있다. 이제 미의 매력은 여러 요소들의 조화에서, 즉 정신에서는 여러 덕목들의 조화에서, 가시적인 것에서는 색채와 선의 조화에서, 음악에서는 음조의 조화에서 발견된다. "정신의 미는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육체의 미는 눈에 의해, 소리의 미는 오직 귀에 의해 지각된다."

또한 "비례를 잘 갖춘 사람의 그 외모와 자태가, 만물의 창조주로부터 우리 정신이 포착해 가지고 있는 저 인간 개념과 아주 명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인간의 참된 이데아'라는 플라톤적 형상이 있어서, 그것이 현실과 맞아 떨어지고 그래서 그 현실에서 식별되게 된다는 것이다.

지오다노 브루노의 <<영웅적 광신자들에 관하여>>(The Heroic Enthusiasts)도 중요한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감각적 미와 순수 절대적 미 간의 대조를 반영하였고 전자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후자로부터 멀어지고 위험, 저급한 미에 접근하더라도 올바른 정신만 있으면 고차의 미를 사랑하는 디딤돌로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술가는 규칙을 뛰어넘는 특유한 천재, 자유와 활동의 기회를 필요로 하는 영웅으로서 상위의 인간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작품에 스스로의 개성을 각인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혹은 주로) 그의 작품을 그의 것이기 때문에 흥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회화론이 발달하는데, 알베르티, 다 빈치, 뒤러를 통해서 이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은 국내에 번역되어 있으니,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회화는 원래 재현적이라는 개념이 전통적인 데 반해, 알베르티는 시각적 유사성(verisimilitude, 양감과 깊이)을 강조하고 어떤 고차의 상징적 목표에 집착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는데, 새로운 르네상스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즉 그에게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대변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11세기에 지오토, 마사초 같은 화가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마녀사냥을 당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현대의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이렇게 정리한다. "중세기 동안 그림은 삼차원적 대상의 징표나 상징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선이나 색채로 덮인 불투명한 이차원적 평면으로 인식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그림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인용하면, '가시적 세계의 한 단면을 들여다 보는창'으로 인식되었다."

알베르티는 특히 istoria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극적인 주제 혹은 장면'을 뜻하는 단어로 "화가의 가장 위대한 작업은 istoria - 행위, 표현된 정서, 그 과정에 내포된 테마 - 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화가는 다양한 인문 지식이 요구되었으며 동시에 실제로는 깊이가 없는 곳에서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단히 어렵고 특별한 작업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화가는 수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이는 선형 원근법과 비례론으로 연결된다.

알베르티는 '그 본성 상 사물을 아름답게 해 주는 특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아래와 같이 답했을 것이다.

"수, 그리고 내가 마무리와 배열이라고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밖에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다른 부분들의 접속과 결합에서 생겨나서 전체에 미와 우아함을 부여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조화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우아하고 멋진 모든 것들의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조화의 임무는 그 본성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을, 하나의 아름다운 전체를 형성하는 데 힘을 모을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함께 배치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러한 구성이 시각을 통하든 다른 감각을 통하든 우리 마음에 제공될 때마다, 우리는 이 조화를 즉각적으로 지각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예술가이다. 그에게 회화는 학문이었다. 왜냐하면 1. 재현원리는 체계적 정식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며, 2. "회화는 신체의 동작과 행동의 신속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3. 그것은 "명암의 비례 뿐만 아니라 모든 연속적인 양(量)을 다룬다"는 점에서 수학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뿐만 아니라 질까지도 포함하므로 산수와 기하학보다 더 훌륭하기조차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회화는 이 사물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회화를 자연의 손자며 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부르는 것이 옳다." 혹은 화가를 '신의 손자'라 부를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 빈치만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위대한 예술가를 바라보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술가는 장인의 단계를 지나 학자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이는 위대한 천재로서, 신의 영광을 재현하는 이로서 추앙 받았다.

뒤러는, 자신의 두 연구 분야에서 추구하는 수학적 법칙이 회화의 두 가지 근본적 요구, 즉 재현의 정확성과 시각적 질서나 조화 간의 화해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미가 양극단 사이의 중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용성은 미의 일부이며", "어떤 것과 다른 것의 조화는 아름답고 따라서 조화가 결여되면 아름답지 않다. 진정한 조화는 서로 다른 사물들을 결합시킨다."라고 말한다.

“16세기 이래로 음악이 그 영감을 끌어들여 온 두 가지 주요 관념, 즉 표현으로서의, 즉 음의 회화로서의 음악과, 테마에 바탕을 둔 구조로서의 음악이라고 하는 이 두 관념은 르네상스에 그 기원을 두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시와 음악이 긴밀하게 협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개인이 이 두 예술을 결합해서 구사했다는 사실, 그리고 가사와 선율이 합쳐 있는 뮤지케mousike(아우구스티누스의 musika 개념과 유사한)라는 개념이 있었다.

르네상스 음악에서 중요한 미학적 관심사들 중 하나가 음악에 요청되는 정서적, 윤리적 효과가 어떻게 산출될 수 있는가 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한 가지 방법으로 음악적 자원을 증가시키는 것. 즉 보다 풍부한 화성적 언어, 음계의 혼합, 한 음계에서 다른 음계로의 전조, 보다 넓은 음역을 지닌 새로운 악기의 도입 등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방법은 음악을 그 텍스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요세프 짜를리노(Gioseffe Zarlino)의 <>를 인용해보자면, “설명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모방에 의한 것이든 간에 (가사에는 항용이 두 가지가 함께 있다) 가사에서 유쾌하거나 슬픈 제재, 엄숙하거나 엄숙하지 않은 제재, 혹은 점잖거나 음란한 제재가 다루어진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비례에 맞게 결합하여 목적에 부합하는 어떤 멜로디를 산출하기 위하여 그 발화에 담겨진 제재들의 성격에 유사한 어떤 화음과 리듬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의 형식적 특성보다는 그 내용을 형성하는 시에 담겨져 있었다. 이는 알베르티가 istoria를 강조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인 셈이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이후 예술 양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관점들 중 하나이다. (* 철학의 분과학문으로서의 미학에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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