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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데미한 허스트의 작품



제프 쿤스도 그렇고 데미안 허스트도 그렇고 현대 미술에서 잘 나가는 스타 예술가들을 보면, 진지함보다는 번뜩이는 재치와 탁월한 유머와 놀라운 비즈니스 감각과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풍부한 비평적 언어와 적절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재/주제를 제시하고 어느 공간에서나 어울리면서 그 중심에 예술 작품이 위치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궁금하게 한다. 예술작품 앞에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사람이 무조건 한 두 마디를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실패하지 않는 작가가 된다. 다른, 심각하고 진지한 예술가 앞에 서서 현대 미술을 주도하는 예술가가 되는 셈이다. 


현대를 가벼움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 현대의 공기일 것이다. 느린 속도는 태도의 진지함을 부르고 빠른 속도는 사고의 가벼움을 부른다. 연예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만남도 그렇다. 현대는 본질적으로 허무함이 극에 이른 시대다. 이는 보들레르가 진단한 바, 덧없는 모더니티의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백년 전에는 그것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면 지금은 삶의 일부로 허무함이 내려앉아 익숙해진 시대라, 그 체감 온도는 다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현대의 허무함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장 보드리야르처럼 그 덧없는 허무함에 삶과 인생을 기대고 그 속으로 사뿐하게 내려앉는 꿈을 꾼다. 아니면 기존의 모든 것들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거나 해체하며 새로운 것을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미 가고 아직 오지 않는 시대'가 현대가 된다. 종종 현대를 고전적 현대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짧은 순간, 20세기 초반 세잔, 젊은 피카소,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등에게서 언뜻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결국 저 허무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연인이라는 존재는 결국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연인이며, 뜨겁던 사랑은 결국 차갑게 식어갈 것이기 때문에 사랑인 것이다. 


프로젝트 초반부터 삐걱대는 곳에 와서 뭔가 해결 책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어느 프로젝트에선 예상했던 것보다 품질 수준이 높고 난관이 예상된다. 다행인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 그런데 그 시간이 흘러서 뭘 할까. 결국 허무할 것을. 


내가 바로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허무함을 인지하면서도 고전적 태도로 직진했기 때문이다. 바니타스 작품들이 나왔으나,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삶의 반성이거나 도리어 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였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17세기 유럽이 아니고 나 또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래서 뭘....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상황도 여의치 못해 술마저 줄이고 있는데...아, 디오니소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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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en.wikipedia.org/wiki/Andy_Warhol






20세기 후반 미술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코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될 것이다. 심지어 미술 시장(Art Market)의 측면에서도 앤디 워홀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앤디 워홀을 대중적인 팝 아티스트로 여기겠지만, 실은 그는 팝 아트(Pop Art)를 넘어서 현대 미술 뿐만 아니라 현대 대중문화가 가지는 숨겨진 의미를 온 몸으로 보여주며,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환기시켜 주었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매혹, 아우라(Aura)와 복제, 현대적 바니타스(Vanitas)와 죽음, 차용과 반복, 가면과 진실. 앤디 워홀과 그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여러 주제들을 거쳐 가야만 하고, 심지어 현대 미학(Aesthetics)의 근본적인 의문과도 마주할 수 있다. 그 의문이란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짧지만, 앤디 워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작은 지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출처: http://www.hometowninvasion.com/photo/wisconsin/brillo-box-by-andy-warhol




「브릴로 상자」에 담긴 철학


아서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의 종말 이후After The End of Art』에서 ‘「브릴로 상자」가 예술임을 확신했으며, 나를 흥분시킨 물음, 진정으로 심원한 물음은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수퍼마켓의 저장실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의 어떠한 (지각적인) 차이도 사물과 예술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할 때, 양자 사이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적는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단토는 이제 작품의 외형이나 표현 양식이 아니라 작품이 지향하고 묻는 의미가, 그 작품이 예술 작품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를 갤러리 공간에 옮겨놓는 행위만으로도 그 상자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철학적 접근은 우리에겐 매우 난처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예술 작품이라고 하면, 어떤 예술가가 고통스러운 창작의 과정을 거쳐, 노련한 솜씨로 만든 어떤 물질적인 대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앤디 워홀은 가게에 있는 비누 박스를 가지고 와서 갤러리에 예술 작품으로 전시하고, 더구나 이를 비싼 가격에 컬렉터에게 팔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 갤러리들과 컬렉터들 사이에서 이 비누 박스-브릴로 상자-는 놀라운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믿는 그 예술 작품은 이제 없어진 것일까? 작품 외형만으로는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판단내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일이 작품의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고 난 뒤에야 ‘이것은 예술 작품이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이 유쾌한 「브릴로 상자」는 기존 예술계를 향해 앤디 워홀은 던진 수수께끼이면서 냉소적인 반어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진 않으니까. 그리고 단토의 의견대로 철학적 의미로만 작품 감상을 한다면, 이미 (현대) 미술은 끝났을 것이다.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by oddsock 저작자 표시



스타가 되고 싶었던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의 꿈은 언제나 스타였다(그 스스로 고백한 적 없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도 순수 미술계의 스타. 모든 이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원했다. 그리고 그는 스타가 되었고 스타들의 친구가 되었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Factory, 공장)’는 그의 작업실 이전에, 뉴욕 예술계의 사교 공간이었고 그 곳에서 앤디 워홀은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하며, 자신을 추종한다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하지만 클라우스 호네프(Klaus Honnef)의 지적대로 ‘가면은 보호를 의미’한다(『Andy Warhol』, TASCHEN). 앤디 워홀은 자신이 만든 가면-앤디 워홀은 스스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며 끊임없이 그에 대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었다-뒤로 숨었다. 그는 “나는 미스테리로 남기를 바란다. 나는 결코 나의 배경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로 다른 답변을 한다”, “만약 당신이 앤디 워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의 그림의 표면과 영화, 그리고 나를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내가 있다. 그 배후엔 아무 것도 없다”라고 이야기하며 진짜 자신을 숨긴다(실은 ‘진짜 자신’이라는 것도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앤디 워홀에게 있어 ‘진짜 나’란 없는 것이고, 끝까지 숨겨야 하는 것이거나 미스테리한 것으로 남기고 싶은 어떤 것이다. 마치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한 자끄 라캉(Jacques Lacan)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는 누군가이듯, 앤디 워홀은 한껏 꾸며진 스타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 미디어에 담긴 나, 그리고 작품이 전부다. 내가 만날 수 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란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앤디 워홀은 이 사실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앤디 워홀은 그의 작품을 생산해내듯, 그의 언어, 패션, 몸짓, 이야기를 생산해냈다.


NYC - MoMA: Andy Warhol's Double Elvis
NYC - MoMA: Andy Warhol's Double Elvis by wally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반복과 복제, 새로운 아우라


현대 미술에 끼친 앤디 워홀의 영향은 치명적이었다. 실은 앤디 워홀에 와서 제대로 된 미국 미술이 시작되었다. 미국 미술이라고 이야기하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는 유럽적 기원을 가진다. 인상주의 미술에서 시작된 평면에 대한 탐구, 칸딘스키의 음악적 추상 미술 등은 잭슨 폴록 작품의 기원을 형성하는 것들 중 일부다(폴록 이전의 미국 회화도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추상 표현주의와는 다른 방향을 향했고, 더구나 이는 그에게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전후 미국 사회를 특징지었던 대중 문화의 요소를 끄집어내어 작품에 활용하였고, 탁월한 비즈니스적 감각으로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꾸미고 포장하였다. 시의적절한 이슈와 이야기를 만들었고, 언제나 화제를 몰고 다니며, 상업 미술뿐만 아니라 순수 미술계의 촉망받는 스타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은 기존 미술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위해 대중 문화(Pop Culture)에 바탕을 두고, 반복과 복제를 자신의 창작 방법으로 삼았다. 기존 미디어에서 활용되었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와선 이 이미지를 그만의 방식으로 복제하였으며, 다양하게 반복하였다. 그는 소비 사회의 특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은유화하였으며, 소비할 수 없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예술 작품의 유일성은 무시되었고, 작품의 아우라는 거듭된 복제-생산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즉 유일한 작품에만 아우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수로) 복제된 작품에도 아우라가 있음을 앤디 워홀은 보여주었고 현대 미술계와 시장은 열광했다.


하지만 편집증적이고 과도하고 반복된 소비 행위 뒤에 어떤 불안이 숨겨져 있듯, 반복과 복제의 테마는 앤디 워홀이 가졌던, 삶과 죽음에 대한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NYC - MoMA: Andy Warhol's Campbell's Soup Cans
NYC - MoMA: Andy Warhol's Campbell's Soup Cans by wally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현대적 바니타스(Vanitas)와 초상화


마를린 몬로(Marilyn Monroe)가 죽은 며칠 후, 앤디 워홀은 몬로가 나온 광고 사진 이미지로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몬로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우리 시대의 섹스 심벌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평범한 인물로 보았으며, 몬로 그림은, 죽은 사람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 죽음 시리즈의 일부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앤디 워홀.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앤디 워홀을 팝아티스트가 아닌 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초상화가 순수 미술의 부수적인 장르로 치부되던 20세기 후반, 그는 일련의 초상화를 선보였고, 한결같이 17세기 바로크의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긴장된 화려함 속에 죽음을 향한 숙명 같은 것을 심어놓는다. 그래서 그의 최고 걸작은 「금빛 마를린 몬로(Gold Marilyn Monroe)」일지도 모른다.




Gold Marilyn Monroe
Gold Marilyn Monroe by IslesPunkFan 저작자 표시비영리





현대 예술의 이콘(Ikon), 앤디 워홀


내가 살아있다는 것,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앤디 워홀은 그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창조해 내며, 대중의 시선 속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언제나 앤디 워홀 자신이 있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작품들이 자화상 연작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대중 스타들이 영원한 현재를 살 듯, 앤디 워홀도 스타로서의 그런 삶을, 끊임없이 대중 앞에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스스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속엔 언제나 죽음이 있다. 포장되고 꾸며진 자신 위로 포장되기 전의, 꾸며지기 전의 자신의, 진짜 나의 죽음. 그래서 워홀에게 과거란 없는 것이며, 오직 꾸며진 현재만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금빛 마를린 몬로」는 비잔틴 양식의 이콘화(Ikon)를 떠올리게 하지만, 금빛 배경의 중앙에는 세속적이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미 죽은 몬로가 있듯.





이 글은 북릿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booklet-app.tistory.com/notice/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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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로빈슨 칼리지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공부한 마크 퀸Marc Quinn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이나,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대단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다(도리어 현대 예술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질문 제기를 한 번 귀담아 들어보는 것도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크 퀸의 'Self'라는 작품이다.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색깔을 보고 무언가를 상상했다면, 그 상상했던 그 무엇이 맞다. 4.5 리터의, 약 5달 동안 모은 자신의 피를 얼려 만들었다(첫 작품 제작 기간임). 먼저 자신의 얼굴을 석고로 뜬 다음(casting), 자신의 피를 넣어 얼려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기는 어느 정도 될까?


Marc Quinn, Self
82" by 25" by 25"
blood/stainless steel, Perspex, refrigeration equipment, 1991
이미지 출처: http://www.maryboonegallery.com/artist_info/pages/quinn/detail1.html 


82인치에 25인치라, 대략 계산해보면 높이만 무려 2미터다. 더 놀라운 것은 세계적인 콜렉터이자, 현대 영국 미술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데 일조한 찰스 사치는 이 작품을 1991년도 만삼천 파운드에 구입했다는 것이다.
(요즘 수준으로 따지면 얼마 정도나 할까? 뭐,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아참,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도 한 점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총 4점이 제작된 상태다. 얼마 전 한국에 방문했던 마크 퀸은 약 6주에 한 번씩 헌혈을 해 약 5년 정도를 모아야, 한 점 정도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도대체 이런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뭘까?

Marc Quinn, Kate Moss(Endless Column)
178x54x51cm, Painted bronze
2007

얼마 전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전시된 케이트 모스(Kate Moss) 시리즈들 중 하나다(국내에서 처음 있었던 마크 퀸의 전시였는데, 조용히 지나갔다).  저 이상야릇한 포즈는 요가(Yoga) 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케이트 모스와 요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가의 본래적 의미, 명상이나 영적 단련을 떠올리기 보다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성적인 자극만 주는 작품이다.

마크 퀸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렸고 그래서 이 작품들을 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이상적인 아름다움(ideal beauty)라고 하기에는 다소 ... ㅡ_ㅡ;;
(실제 마크 퀸은 케이트 모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며 그녀를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지출처: http://theworldsbestever.com/2008/01/24/kate-moss-thursday-2 

Alison Lapper Pregnant
이미지 출처: http://mocoloco.com/art/archives/001480.php 

위 작품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마크 퀸의 대표작이며,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정상과 비정상, 아름다움과 추함, 그 어느 사이 쯤 위치해 있는 듯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정의에 대해 묻고 임신한 앨리슨 래퍼, 즉 엄마, 생명잉태에 대한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즉 육체란 무엇인가라고 묻으며, 인간 존재에 대해 탐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Marc Quinn, Innoscience
10" by 27" by 13"
medical milk formula/synthetic, polymer wax
2004

실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보다는, 생명의 신비보다는, 반대로 '이따위 생명으로 왜 살아가는 걸까', '혹은 살아가야만 할까'를 떠올리게 되는, 내 삐딱한 시선 때문일까? 이미 죽어 박제가 된 듯한 저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살아가면서도 이미 죽은 상태, 어쩌지 못하는 삶의 노예가 된 현대인의 자화상을 떠올리는 건 왜일까?


Meditation on Illusion, 81.5x43.5x64.5cm, Painted bronze, 2007
이미지출처: http://www.ganaart.com/exhibitions/2008-07-11_marc-quinn/#


위에서 볼 수 있었던 마크 퀸의 작품들은 실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이는 데미안 허스트도 마찬가지다.) 해골은 서양미술사에서 '바니타스vanitas'를 상징하는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인생의 허무함을 넘어서기 위해 제목은 '명상'? 그런데 '환각 속의 명상'?

Golden Meditation, Bronze, 2008 
(* 파리 Fiac 2008에서 찍은 사진임) 

이번엔 '황금빛 명상'? 자, 그렇다고 케이트 모스가 빠질 수야 없지.

이미지 출처: http://www.canadianart.ca/art/books/index1.html


피악에서 마크 퀸의 '황금빛 명상'을 보았을 때, 무척 흥미로웠다. 설마 'Self'의 그 마크 퀸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YBAs의 예술가들 대부분이 현대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추상적이고 의미있는 질문을 매우 잘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우리 왜 사는 걸까?', 혹은 '왜 살고 왜 죽는거지?'라고 했을 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YBAs의 예술가들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할 때부터 던져온 어떤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답하지 못한, 오직 창조주 신만이 아는  질문을,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던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크 퀸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환기시킬 뿐이다. 자극적인 것들만 찾아해매는 전 세계의 기자들과 천박한 호기심으로 무장한 세속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 던지기를 하는 셈이다. 내가 보기엔 전혀 먹히지도 않는 질문 제기이긴 하지만.




* 위 작품 이미지의 저작권은 다른 이들에게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퍼온 것이며, 문제가 될 경우에는 삭제하도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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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 2008.11.28 18:53

    비밀댓글입니다

  • 예술에 대해 조금 보수적이시군요..예술 역사의 한 시대마다 뛰어난 작품들은 그시대를 반영했기에 언제나 질타가 있었죠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로댕이나 브랑쿠시 자코메티 등등도 그랬었죠...조각의 역사에서 옛시대의 미켈란젤로도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었구요 언제나 문제는 과거 조각의 인습적 형상과 철학을발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식과 시대를 반영하는 리얼리즘과 사이의 논쟁이었으니...

    • 좀 보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실은 마크 퀸의 모든 작품들에 '정서적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같네요. 'golden meditation'은 무척 마음에 들었으나, 다른 작품들은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소재나 주제를 잡는 감각은 좋은데, 딱 거기서만 멈춰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뭐, 현대 미술이 개념적인 방향으로 경도되어 있긴 하지만서도.... 다양한 현대 작품들을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마크 퀸도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병에 담긴 접시꽃들과 다른 꽃들(Hollyhocks and Other Flowers in a Vase), 1710
Oil on canvas, 62*62cm
National Gallery, London





Jan van Huysum의 작품이다. 18세기 초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던 이 화가는 17세기부터 본격화된 정물화(Still-Life)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대체로 정물화는 Vanitas(생의 허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 시계, 불이 꺼진 양초, 시들어가는 꽃, 해골 등을 그림 속에 담아내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이후로 갈수록 진기하고 보기 드물며 값비싸고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변해간다.

생의 허무에 대한 공포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고 그 사이를 생의 아름다움, 그것이 비록 찰라이거나 꿈일 지라도 그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초기의 정물화가 교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면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러한 성격이 퇴색되고 그저 진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 로코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어떤 감수성은 아닐까. 꼭 현대인들이 시계를 보며,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는 대신 시계의 디자인이나 장식에 더 몰두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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