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4

흰밤, 백석

흰밤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묵은 초가지붕에 박이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백석, 1935년 11월, 혼자 술에 취해 거실 탁자에 앉아 시집을 꺼내읽다 왈칵 눈물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눈물에, 내가 왜 이럴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감수성이라는 게 살아있었나 하는 안도감을 아주 흐르게 느꼈다. 글쓰기는 형편 없어지고 책읽기도 그냥 습관처럼 변해, 종종 내가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요즘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지혜가 생긴 것도 아니고 논리 정연해진 것도, 그렇다고 사람들을 감화시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십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다. 도리어 거짓말장이가 되고 불성실해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선사..

흰 밤

어제 날이 너무 좋아, 지나가는 말로, 미치기 좋은 날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밤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잠시 백석의 시를 떠올렸다. 그랬다. 그랬다. 흰밤 백 석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1935년 11월 '朝光'

나 취했노라

고대의 길과 근대의 길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양재역 사거리에서 강남역 사거리 사이의 길들은 곧지만, 늘 막혀 있다. 느리고 뚝뚝 끊어지는 경적 소리와 숨 넘어 가는 엔진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의 길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익히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차지만, 근대의 길엔 늘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곧지만 호흡하기 힘든 분위기로 내 삶을 옥죄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6월 3일 금요일 밤 10시. 무릎엔 아무런 상처도 없지만, 실은 영혼의 무릎에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도망가지도 못하도록 나를 몰아 붙였지만, 실은 늘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이 때까지 나온 시집의 첫 장 중에서 가장 멋지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슬픈 것은 장정일의 시집이다. 늘 도망 중이라는. 발 한 쪽을 앞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