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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데미한 허스트의 작품



제프 쿤스도 그렇고 데미안 허스트도 그렇고 현대 미술에서 잘 나가는 스타 예술가들을 보면, 진지함보다는 번뜩이는 재치와 탁월한 유머와 놀라운 비즈니스 감각과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풍부한 비평적 언어와 적절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재/주제를 제시하고 어느 공간에서나 어울리면서 그 중심에 예술 작품이 위치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궁금하게 한다. 예술작품 앞에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사람이 무조건 한 두 마디를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실패하지 않는 작가가 된다. 다른, 심각하고 진지한 예술가 앞에 서서 현대 미술을 주도하는 예술가가 되는 셈이다. 


현대를 가벼움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 현대의 공기일 것이다. 느린 속도는 태도의 진지함을 부르고 빠른 속도는 사고의 가벼움을 부른다. 연예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만남도 그렇다. 현대는 본질적으로 허무함이 극에 이른 시대다. 이는 보들레르가 진단한 바, 덧없는 모더니티의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백년 전에는 그것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면 지금은 삶의 일부로 허무함이 내려앉아 익숙해진 시대라, 그 체감 온도는 다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현대의 허무함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장 보드리야르처럼 그 덧없는 허무함에 삶과 인생을 기대고 그 속으로 사뿐하게 내려앉는 꿈을 꾼다. 아니면 기존의 모든 것들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거나 해체하며 새로운 것을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미 가고 아직 오지 않는 시대'가 현대가 된다. 종종 현대를 고전적 현대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짧은 순간, 20세기 초반 세잔, 젊은 피카소,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등에게서 언뜻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결국 저 허무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연인이라는 존재는 결국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연인이며, 뜨겁던 사랑은 결국 차갑게 식어갈 것이기 때문에 사랑인 것이다. 


프로젝트 초반부터 삐걱대는 곳에 와서 뭔가 해결 책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어느 프로젝트에선 예상했던 것보다 품질 수준이 높고 난관이 예상된다. 다행인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 그런데 그 시간이 흘러서 뭘 할까. 결국 허무할 것을. 


내가 바로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허무함을 인지하면서도 고전적 태도로 직진했기 때문이다. 바니타스 작품들이 나왔으나,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삶의 반성이거나 도리어 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였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17세기 유럽이 아니고 나 또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래서 뭘....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상황도 여의치 못해 술마저 줄이고 있는데...아, 디오니소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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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에 대하여 De la se'duction 

장 보드리야르(지음), 배영달(옮김), 백의 



1. 


철 지난 책을 읽었다. 작년에 몇 달에 걸쳐 읽었는데, 의외로 재미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려나. 읽다보면 반-페미니즘처럼 읽히기도 하나, 딱히 그렇지도 않다.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매우 찝찝하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공격할 만한 과격한 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보드리야르는 여성의 유혹, 쾌락 등은 존중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책은 '유혹'의 관점에서 유혹을 둘러싼 일련의 일들을 상징적 차원, 이론적 차원에서 조망한다. 그래서 일종의 말 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말장난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특히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를 분석하는 챕터에선 절정에 이른다고 할까. 


보드리야르는 서문에서 대 놓고 유혹이 얼마나 당해왔는가는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이 유혹을 복권시키려는 시도임을 숨기지 않는다. 


지울 수 없는 어떤 운명이 유혹을 짓누른다.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유혹은, 그것이 교묘한 것이든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든, 악마의 전략이었다. 유혹은 늘 악의 유혹이다. 아니 사람들의 유혹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교(artifice)인 것이다. 유혹에 대한 이러한 저주는 도덕과 철학을 통해서도, 오늘날의 정신분석과 '욕망의 해방'을 통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 악, 퇴폐가 지니는 가치들이 격상되었기 때문에, 저주받았던 모든 것이 오늘날에 와서 종종 예정된 자신의 부활을 반기고 있기 때문에, 유혹이 저주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 그렇다 해도 유혹으 결국 제자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 서문 



책 자체가 유혹적이고 자극적이고 은밀스럽다.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유혹당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장들도 꽤나 은유적이면서도 직접적이서, 읽는 재미도 상당하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좀 덜하긴 하지만)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 단어나 문장에 너무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 독자들에게 분명하고 명확한 메시지 전달에 어렵고 다 읽고 난 다음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하는 의아심을 갖게 하는 건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책 읽기를 권하는데, 과거의 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여러 가지 모색을 계속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염세주의적이고 절망적이긴 하나, 그 시선 자체로 충분히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를 지닌다. 일종의 묵시록적 예언가처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을 주장했고,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앵무새 인문학자들은 '시뮬라시옹'만 따라 외쳤으니. 



2. 


한 때 장 보드리야르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대신 아감벤(아니 이 어려운 학자가!)이 유행이다. 인문학이 유행을 탄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현실은 더 개판이 되고 있는데,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할 실천적 이론들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유행을 탄다. 


가끔 불평을 하는 것 중 노선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폴 드 만을 찬양하다가 알튀세르를 지지하면서 소개하거나 새롭게 번역된 마르크스의 저술들을 소개한다. 즉 인문학의 유행을 따라다니는 건 뭐라고 할 생각이 없으나, 분명한 가치 판단은 해야 한다. 그래서 서로 절대 만날 수도 없는 학자들을 똑같이 지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인문학을 바라보아야 한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도,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도 현실 정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발을 땅에 딛고 손은 언제나 일을 하면서, 인문학도 똑같이 그런 우리 삶을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보드리야르는 그것 - 우리 삶 - 이 상징적 차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반어적 의미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였는데, 한국의 앵무새 인문학자들은 탈정치화된 유토피아를 그대로 이야기했다. 도리어 미국의 감독이 시뮬라시옹이 구현된 디스토피아를 영화로 제작하는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3. 


보드리야르의 이 책도 품절이다. 다시 출간될 일은 요원해보이니,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를 권한다. 대체로 이해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다만 몇몇 문장들은 무척 자극적이고 흥미롭다. 아마 이 정도만으로도 이 책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혹에 대하여 - 10점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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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을 깼다. 메일을 확인하고 앞날에 대한 걱정을 잠시 했다. 나이가 들수록 걱정만 늘어난다. 이 시대 탓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면 원래 그런 건가, 내가 유독 그런 건가, 이런 잡념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잡은 책이 조중걸의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다. 나에겐 일종의 복습이고 반복이 되겠지만, 돌이켜보니, 서양미술의 역사에 빠져 공부하던 시절이 행복했음을 깨닫는다.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사전문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를 '불구'라고 조롱하면서 전인적 인간을 이상으로 삼고,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다윈Charles Robert Darwin과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에게 야유와 경멸을 퍼부어대고, 현대의 강단 철학자들이 감상적이고 우아한 어구를 인용하며 학생들을 헛된 이념 속에 가둬두려 하는 것은 모두 그들이 기득권자이기 때문이고 또 자신들의 기득권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56쪽)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러한 이념의 회화적 대응물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재현적 요소도 없다. 그것은 단지 서로 다른 네모들의 집합일 뿐이다. 세계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추상적 창조물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모방으로써의 예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이제 창조로써의 예술만이 남게 되었다. (307쪽) 




결국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고,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비트겐슈타인)이니, 추상적 기호 이외에 남는 건 없었다. 사랑도 그랬고, 그녀도 그랬던 셈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압도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지금 진짜라고 믿는 것들은 다 시뮬라크르인지도 모르겠다. 실은 내가 나비였고, 인간이 된 꿈을 꾸는 것일게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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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n 1호 - 10점
Noon 편집부 엮음/GB(월간지)



2009년에 창간호가 나온 후 소식이 없는 잡지 ‘noon -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and visual culutre’를 읽었다. 주제는 violence of the spectacle이다. 아마 몇 명은 바로 예상하겠지만, 이 주제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언급된 그 스펙타클에 대한 것이다. 기 드보르는 이 놀라운 저작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스펙타클을 새롭게 정의 내린다.


“스펙타클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기 드보르는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들의 구성체로서의 스펙타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스펙타클 환경(상황)에 주목하고 과감하게 이것을 스펙타클이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측면에서 히사시 무로이의 아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오늘날 인간은 각종 매체를 통해 조성된 ‘현실의 연장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의 연장세계란 인간이 ‘현실’이라고 믿는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호와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기 드보르의 책을 번역본으로 두 번 정도 읽었지만, 그 땐 - 벌써 십수년 전의 학부시절 -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잡지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는 실베르 로트랑제와 배영달은 기 드보르 -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 르페브르Henri Lefebvre -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를 연결 지으며 스펙타클 사회의 비극을 학구적 언어로, 아주 건조하고 논리적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보드리야르 사상이 가지는 비극성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이론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의 참혹함과 그 이론의 무책임함에 주목하지 않은 채 열광하는 철부지 인문학 수입상들을 경멸해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은 보드리야르의 문제가 아니라 보드리야르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들 탓이겠지만.


“사람들은 유희 속으로 들어가는 한, 스펙터클 속에서 가짜인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 보드리야르



그리고 21세기 초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분간하지 못하는 뉴미디어 시대가 펼쳐졌다. 이는 미디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스펙터클에 현혹된 우리들의 문제이다. 미디어가 감각을 기만하고 기만당한 감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감각이란 없다. 대신 비판적 이성이 있을 뿐이지만, 이미 그 이성은 탐욕적 금융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 만드는(making money) 도구적 이성이 된 지 오래다(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21세기 초를 경험했다면 어떠했을까?).

이런 올드-뉴미디어들의 총체적 문제가 바로 21세기적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이 ‘재현’으로 물러난다.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어떤 것 속에 우리들의 삶이, 일상이 퍼즐처럼 끼어 맞춰지는 형국이다. 실베르 로트랑제는 폴 비릴리오을 이렇게 인용한다.


사회적-정치적 공간의 동질화 - 원격 현전(telepresense), 편재성 환영(illusion of ubiquity) - 는 속도로 생산된다. 속도가 폭력의 형식인 것이다. 즉석 응답은 공간을 폐기하며, 즉석의 시간성은 실재의 일반화된 탈실재화를 유발하면서 기억과 역사를 말소한다. (The homogeneisation of the socio-political space - telepresence, the illusion of ubiquity - was produced by speed, and speed is a form of violence. lnstant response abolishes space, instantaneity cancels memory and history, provoking a generalized derealization of reality.)


다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공간의 거리는 무의미하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간은 동질화된다. 이 동질화란 하나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이 거의 동시에 전 세계를 휘감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9.11 사태가 터졌을 때 모든 미디어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SNS는 내 물리적 존재가 가지는 공간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편재하는 가상의 실재가 되며, 인터넷 상의 프로파일과 히스토리로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은 바로바로 수정, 삭제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건 구글Google 서버에 저장된 기록이 전부일 것이다. 동질화된 공간의 무자비한 속도는 축적되는 기억과 지나간 역사를 지우며, 브레이크가 상실된 가속패달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진짜와 가짜가 사라진 액체 형태의 스펙터클 시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술로 더욱 강력하게 무장하고 확장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미술 잡지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못하고 있다. 다만 잡지 서두에 실린 니콜라 부리요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볼까 한다.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 형식은 단연 얼터모던의 중심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호연결된 단수성을 정의한다. 오늘날의 모더니티는 독립된 소군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론을 통합한다기보다는 아이디어와 형식, 인물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통로이며, 표준화되거나 동질화된 영역이라기 보다는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서 제시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은, 니콜라 부리요의 언급처럼 상호연결된 단수성으로 저항하고 있지 않을까. 스펙터클의 분석과 해체야 말로 21세기 예술가들의 사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 부리요의 저 언급은 짧지만, 무자비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예술 실천의 단초로 해석될 수 있다. 



* 아래는 위 본문에서 언급한 책들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한 리스트다. 읽기 쉬운 책들은 아니지만.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옮김) 현실문화연구(* 현재 절판)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적인 저서. 그러나 현재 절판이고 번역에 대해서도 다소 말이 있었던 책. 아래는 영역본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역본)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그리고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기 드보르의 Comments!


토탈 스크린
장 보드리야르 저/배영달

장 보드리야르의 토탈 스크린! 보드리야르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겐 읽어봐도 좋으리라.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저/박정자

앙리 르페브르의 이 책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실은 그만큼 번역이 어려운 책이었던 셈이지만, 박정자 교수의 노고가 안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Classics in Communication and Mass Culture)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영역본)


관계의 미학
니꼴라 부리요 저/현지연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 번역본이다. 번역된다는 소문만 전해들었고, 실제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오늘 검색해보고 알게 되었다. 니콜라 부리요는 미술계에선 꽤나 유명한 이론가이며, 그의 관계 미학은 한 때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기도 했다. 학문의 세계 종사자들과의 인연이 사라진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독서가 전부다.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저/이재원 역

폴 비릴리오. 아직 읽지 않은 비릴리오. 한 번 읽어봐야 겠다.


noon은 창간호를 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낸 책인데, 반응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론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미술 전문 잡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사례를 다시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아르코에서 나왔던 '볼'은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고(황당한 사건들 중의 하나), ... ...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듯 싶지만, 그건 호사가들의 수다에 지나지 않고 진지한 관심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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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프랑스의 사회학자. '시뮬라시옹'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학자이다. 나는 장 보드리야르의 암울한 사회 분석을 싫어했으며, 그것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의 끔찍함을 무시하면서 장 보드리야르를 전파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멸했다. 그들 대부분이 의지하는 책이나 이론은 오직 시뮬레이션 이론이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극단적인 반-플라톤주의자이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자면) 마키아벨리와 같은 전도된 이상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20세기 후반 이후의 매스미디어에 의해 희석되고,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사라지고 미디어들에 의해 새롭게 조작된 것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하이퍼-리얼리티나 시뮬레이션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철학의 시작부터 고매한 영혼을 아프게 했던 눈 앞에 보이는 것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에 종지부를 찍고 거짓과 가상의 승리를 예견하는 듯한 그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면서 그의 이론이 마치 포스트모더니즘 구세주인양 전파하던 국내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역겨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찬양하는 이론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사이퍼와도 같음을, 그리고 그 귀결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사람들과 만날 일도, 그런 사람들이 쓴 글을 볼 일도 없지만, 나는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울화가 치민다. 마치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설은 끝났'고 '영상(영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류의 글을 아무런 생각없이 써댄 문학이론가(문학평론가)들을 떠올릴 때마다 치미는 울화와 비슷하다. 그 때부터 한국 문학의 하향 평준화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나는, 전혀 다른 매체적 특성을 가진 소설과 영화를 마치 한 부모 밑에서 난 이복형제 다루듯 써댄 글들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웠다.

장 보드리야르. 마치 악마의 날개를 단 천사처럼...

얼마 전 나는 그가 죽기 전에 쓴 '세계화의 폭력성'이라는 글을 읽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키아벨리를 떠올렸다. 전도된 이상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를. ... 어찌되었건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의 분석에 있어서 탁월한 시각으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며,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나, 끊임없이 되새겨 볼만한 통찰을 숨기고 있으며, 그의 암울한 세계관과 대결하면서 현실 세계를 꾸려나가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그 글의 일부를 옮긴다. 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써, 유용한 시사점을 담고 있는 글이라 여겨진다. 이 글은 르 몽드 디플로마크 2008년 12월 한국어판에 실렸다.


세계화의 폭력성


- 원래 보편성은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런데 이데아가 세계화 속에서 현실화 되면서 이데아는 이데아로서 자멸하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인간이 그 본보기다. 인간은 죽은 신의 빈자를 차지한 뒤, 세상을 홀로 지배하게 됐지만, 최종적 이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적이 없어진 인간은 적을 내부에서 키우며, 비인간적인 종양 덩어리를 분해낸다.

- 바로 여기로부터 세계화의 폭력성이 생성된다. 즉 모든 형태의 거부, 나아가 최후의 죽음 같은 모든 형태의 기이함까지도 몰아내는 시스템의 폭력성과, 사실상 알력과 죽음이 금지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폭력성과,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 폭력성 자체를 종식시키고 모든 자연적인 질서, 몸, 성별, 탄생 혹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동되는 폭력성 등이 그것이다.

- 폭력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유해성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왜냐하면 그 폭력성은 바이러스성이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염되고 쇠사슬처럼 엮어져 반응하며, 서서히 우리의 모든 면역력과 저항능력을 파괴한다.

- 누가 세계화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까?

-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긍정적인 양자택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로부터 나온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특이성들. 그 특이성들은 양자택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규칙을 따른다. 가치 판단이나 현실 정치의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 특이성들은 최상 혹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 종교적인 교리만큼이나 교조주의적인 세계 권력은 모든 형태의 다양성과 개성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교조주의 적 논리 아래, 모든 다양성과 개성들은 좋든 싫든 간에 세계의 질서를 따르든지,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 한쪽의 일방적인 기부는 권력행사다. 선(善)의 제국, 선의 폭력성은 바로 보답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혹은 노동(하지만 노동은 상징적인 보상이 못된다. 결국 폭동이나 죽음이 유일한 대응책이다)을 빌미로 노예의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는 주인을 대신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도움을 줄곧 받아야 하는 무자비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굴욕당한 사람들과 모욕당한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세계화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테러리즘 또한 총체적인 테크놀로지, 절망적인 가상(virtuelle)의 현실, 그리고 '세계화되어' 퇴락한 모든 종과 인류의 윤곽을 그려낼 네트워크와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근간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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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뮬라시옹이 뭔가 한참 고민했는데
    시뮬레이션을 프랑스어로 발음한거로군요;;

    사실 이번 글은 대부분 이해도 못했고 대략적인 그림만 그려질 뿐인데요.

    저는 여느 작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만 보더라도 세상의 흐름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쉽게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필름 표면 위에 빛을 이용해서 새기는 것으로 시작한 사진이
    기술을 타고 발전해서 현재까지 이르렀고
    그를 통한 각종 manipulation과 alteration이 있었고,
    결국에는 필름을 넘어서서 전자신호로 이뤄지는 디지탈시대에 이르기까지 했지만,
    필름은 단지 생산량이 줄어들었을 뿐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사랑받고 있으며
    단종시켜버린 폴라로이드 필름또한 수많은 매니아들의 영향으로
    생산공장이 다시 생길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 글쎄요.
    이쪽 분야를 전혀 모르는 제가 보기에는
    역사, 인생, 시대를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걸로 바라본다라고만 생각되네요.
    사람의 삶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건 사실이지만
    애기가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다시 애기가 된다고 하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말만 길었지.... 저도 먼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_-

    •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민음사)나 리처드 J.레인의 '장 보드리야르, 소비하기'(앨피)를 한 번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장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특히 현대 매체 예술(미디어 아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약간 어렵긴 하지만, 한 번 읽어봐도 될 것같아요. ^^

    • 어... 어렵네요 그냥 이렇게 보기만 해도;;;
      기회가 되면 찾아보겠습니다만...;;;
      이건 한글이던 영어던 못 알아보겠는걸요;

무관심의 절정 - 6점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은민 옮김/동문선


무관심의 절정

장 보드리야르/필리프 프티와의 대담, 이은민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80



영화 <<매트릭스>>의 주연 배우인 키아누 리버스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고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국내 광고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충격적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엔 그의 사상은 기존 관념이나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체계적인 사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스타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과격한 논리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문제는 진지함과 성실함이 미덕으로 간주되어야 할 학문의 세계 속에서도 갈수록 말장난만 심해지는 이 사상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말장난은 언뜻 보기엔 뭔가 대단해 보이는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여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책을 읽고 그 책의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가 아주 대단한 사상가라고 오해한다는 점이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가지는 ‘미학주의’의 무책임함과 경박함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는 ‘노동자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자본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벗어나는 이들은 부모들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사라졌고, 계급 투쟁도 끝났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 자유를 상실했고 더 이상 자기 원천의, 자기 목적의 주인도 아닙니다. 그는 네트워크의 볼모입니다. 우선권은 네트워크에 있지 그것에 가입한 사람에 있지 않습니다. 집단 역시 네트워크 쪽에 있지 개인 쪽에 있지 않습니다. 집단 역시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상의 하이퍼 리얼리티는 동시에 이 두 항을 삼켜왔습니다. 개인/집단의 이 극점들은 약화됩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이 세계는 갈등이 끝났으므로, 역사에는 종말이 왔고(* 후쿠야마와 비슷한 견해임) 이제 개인, 즉 주체는 자유도, 목적도, 정체성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어떤 야만성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동물적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심각하게 가상과 실재를 혼동하고 있다. 즉 그에겐 이미 실재란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에게 가서 ‘당신은 아무 의미 없는 실재구만’이라고 말하곤 감옥에 넣어버린다고 해서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이론 속에선.

아마 혹자는 그것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지 말고 은유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은유’란 문학이나 예술의 단어이지, 철학이나 사상의 단어는 아니라는 점을 명시해야만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 두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끄 데리다의 경우 이 둘 사이를 오가면서 철학의 허구성을 해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비실재성이 실재를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 앞에는 언제나 우리의 삶이 놓여 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 앞에는 우리 삶이 놓여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면서 자신이 맞다고 주장하는 말장난에 능한 얼치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무수한 식자들이 있고. 한 번 보드리야르의 팬들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대로 한 번 살아본다면 어떨까? 까뮈의 팬들이 뫼르소처럼 살아가지 않는 이유는 문학이 가진 미덕과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설마 나에게 보드리야르는 위대한 소설가예요라고 말하는 이는 없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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