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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엘리베이터 고장.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다 만난 봄,날의 기억. 

언제 인생의 봄은 다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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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아요. 난 지금 사랑에 빠졌거든요.

Don't Kill Me, I'm In Love



그러게, 사랑에 빠진 이를 죽이는 건 아닌 것같다. 하지만 그것이 불륜이라면. 레이몽 라디게의 소설 <<육체의 악마>>가 끊임없이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는, 위험한 사랑만큼 진실해보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위험한 사랑을 했듯, 젊은 날 우리는 모두 금기된 사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이 지나고 벚꽃이 피고 가늘기만 한, 얇은 봄바람에도 그녀의 손톱 만한 분홍 꽃이파리가 나부끼는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나는 애상에 잠기지 않, 아닌 못한다. 생계의 위협이란 이런 것이다. 


새장 속의 새를 아들은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새 한 마리 사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들마저도 남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거다. 




나라고 해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냐만은,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다, 라고 중얼거리지만, 그런 게 아니면 도대체 무언가. 인류가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종류의 악행들의 시작이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가 되기엔 어리석기만 하다. 다행인 것은 어리석다는 사실을 현대의 이론가들은 희미하게 깨닫기 시작했으니. 


새장을 보면, 늘 막스 베버가 떠오르고 구조주의자들이나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하게 되는 건, ... 내가 너무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는 걸까. 


아니면 새장 속의 자유마저도 부럽게 느끼는 걸까.


지난 봄날, 그 하늘거렸던 사랑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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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삼각지로 걸어가다 문득 마주친 대도시의 오후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조르주 베르나노스). 느리게 숨죽여 있던 무채색 건물이 숨을 쉬고 우리들의 숨겨진 영혼이 노래하는 순간이다. 태양이 사라지더라도 태양을 기다리지 않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꿈 속 노을가 근처에서 막걸리 중이다. 그의 삼각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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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오열을 터뜨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가 아니라 오로지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퇴폐 뿐이다. ... ... 따라서 모든 강박 관념과 상반된다 할지라도 이같은 가증스러운 추함이 없이 지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조르주 바타이유



과연 그럴까? 하긴 아름다움은 오열을 터뜨리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퇴폐로 인한 상처는 오열을 불러올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니 바타이유의 말이 맞는 걸까. 그렇게 동의하는 나는 그러한 퇴폐를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일까. ... 


아련한 봄날, 외부 미팅을 끝내고 잠시 걸었다. 부서지듯 반짝이는 봄 햇살 사이로 지나가는 도심 속 화물열차. 바쁜 사람들 사이로 새로운 계절이 오는 속도처럼 느리게 지나쳤다. 그 사이로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잠시 서고, 시간이 멈추고, 도시는 그 정체성을 잠시 잃어버렸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사람들, 꽃과 여자에 대한 욕망이 살과 피로 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을 사람들에 대하여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기에는 삶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질투를 느낀다. 

- 까뮈, '제밀라의 바람' 중에서



 얼마 전에 읽은 김경주의 '밀어' 덕분에 몇 명의 저자와 몇 권의 책을 알게 되었다. 까뮈의 저 산문도 알게 되었는데, ... 이번 봄, 까뮈를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으로 내 가족의 생계가 유지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러면 나는 정처없이 피폐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그냥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여유로워졌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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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곤한 봄날 오후가 이어졌다. 마음은 적당하게 쓸쓸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초조했다. 잔뜩 밀린 일들은 저 깊은 업무의 터널 속을 가득 메우고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모니터와 사각형의 문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얇게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면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며 가슴엔 윤기 나는 석탄층(石炭層)이 깊었다.





오랜만에 읽는 이성복의 시는 아름다웠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이 내 오래된 서가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나이를 먹었구나.



사무실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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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과천에서의 하루. 사쿠라를 찍었다. 작은 배낭 하나 메고 일본 여행 가고 싶은데, 시간이 나질 않는다. 과천에 같이 갔던 이와는 현재 연락이 되지 않고. 


골목길 어느 집 정원 담벼락에 흘러넘쳐 나온 장미꽃의 농염함. 나에게도 이런 농염함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다가가는 짙은 향기와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자극적인 색채까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면, 아예 꿈을 꾸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마치 나에게 사랑처럼. 



마을 버스를 타고 나가던 길. 혼자 나오는 길은 늘 일상처럼 펼쳐지지만,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긴 이 세상 전체가 낯선 곳이니. 독일의 미술사학자 보링거의 견해처럼, 나는 추상주의자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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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집을 나섰다. 지난 밤 숙취가 풀리지 않아서였고, 노동절이라는 핑계로 다소 여유를 부리고 싶어서였다. 지하철 대신 김포공항에서 삼성동까지 오는 공항버스를 탔다.

역시 연휴의 시작인지라, 88도로는 꽉 막혔고(여의도 구간은 현재 공사 중이라 한 차선을 막아놓아 더 막히고 있다), 강변북로도 사정은 비슷했다. 마치 연휴의 시작이 아닌, 그저 평범한 금요일 오전 같았다.

혼자서, 나이가 이만큼 들고 보니, 긴 연휴가 불편하기만 하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도 결혼을 하든지, 연애를 하든지, 외국으로 나가든지 한 탓에, 누군가를 불러 술 한 잔 마신다는 것도 불편한 일이 되었다.

어디 혼자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있을까 싶다.

오전에 한강 변을 지나는데, 하늘을 나는 브이자로 나는 새떼가 보기 좋았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상쾌했다. 내 마음도, 내 일상도, 이런 봄날을 닮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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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벗어난 지도 벌써 9년이 지났다. 어느새 민방위이다. 넓은 영등포 구민 회관 입구 쓰레기통에다 민방위 관련 책자를 놔두고 왔다. 강당 앞쪽에 앉아 있는데, 몇 통의 전화가 왔고 몇 개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신기한 일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전화와 문자메시지. 보통 때라면 오지 않았을.

바람은 너울치듯이 나무가지 앉았다가 지붕에 앉았다가 전신주에 앉았다가, 그렇게 봄을 심어놓으면서 지나가고 도시의 퀘퀘한 매연 틈 속에서 햇살은 곧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후 두 시 반. 주머니 속의 핸드폰으로 문제 메시지 하나가 와있었다.

"그대에게로 향하는 나의 마음이 멍에가 되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 같아 미안하구요."

낯선 전화번호. 누구일까. 누구였을까. 그리고 민방위 교육 사이 쉬는 시간, 누구신가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 네 시 쯤,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낯선, 삼십대 후반이나 더 이상되어보이는 지쳐가는 가느가란 목소리의 여자. 무슨 사랑인 것일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전화번호를 남기지 않은 어떤 메시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봄날의 사소한 표정만큼의 관심이 자기에는 왜 없냐며 물었던...

그 여자는 나에게 문자를 잘못 보내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그 여자가 사랑하는 이는 누구일까. 그러고 보니, 저런 문장을 문자로 보낼만큼 그 여자의 마음은 여리고 감동적이리라. 그리고 그녀는 사랑에 슬퍼하면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정면성'이라는 게 있다. 이집트 미술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이 단어는 사랑에 빠진 남녀에게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사랑을 나누기 전에는 그 사랑 앞에서 한없이 주눅이 들고 자신의 사랑이 훼손당할까 두려워하며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거릴 때 나타나며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는 사랑이 떠나갈까봐, 혹시 배신을 당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다가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도리어 그것에 짐짓 태연한 척하면서 견디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야의 까페에서 혼자 맥주병을 세워놓고 새벽까지 우는 것이다.

봄날 오후, 낯선 여자의 목소리 속에서 그 날 심야의 까페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여, 행복하여라.


Cherry Blossom
Cherry Blossom by Sprengben [why not get a friend]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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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
     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
     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
     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
     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
     는 참혹......,그러나 킥킥 당신
       
        - <혼자 가는 먼집>, 허수경.
       
       
       
       
        어젠 가을바람 속에 앉아 소주와 맥주를 번갈아마시며  술 한
     잔 마시고, 음악을 바꾸고, 시  한 편 소리 내어 읽고,  다시 술
     한 잔 마시고, 밖으로 나가 가을 오후의 대기와 바람과 구름, 저
     편 산꼭대기를 가슴에 안아보곤, 다시  음악을 바꾸고 시 한  편
     소리 내어 읽고, 다시 술 한 잔, 그렇게 저녁 8시쯤까지 마셨다.
       
        가끔 살아가다보면, 미친 짓도 필요한 법이다. 음표들이 일제
     히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혹은 시어들이, 아니면 가을 바람이,
     그러면서 하루가 저물었다.
       
        혼자 술을 마신 이유는 오랫만에 맑은 가을날이 왔는데, 집에
     서 빈둥빈둥거리자니 꼭 손해보는 것같아서였다.
       
        오늘도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젠장. 오늘도 미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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