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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물 



프랑시스 퐁주 




  나보다 더 낮게, 언제나 나보다 더 낮게 물이 있다. 언

제나 나는 눈을 내리깔아야 물을 본다. 땅바닥처럼, 땅

바닥의 한 부분처럼, 땅바닥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반짝이며, 형태 없고 신선하며, 수동적이라 

못 버리는 한 가지 아집이라면 그것은 중력. 그 아집 못 

버려 온갖 비상수단 다 쓰니 감아 돌고 꿰뚫고 잠식하고 

침투한다.

  그 내면에서도 그 아집은 또한 작용하여 물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순간순간 제 형상을 버리고, 오직 바라는 것은 

저자세, 오체투지의 수도사들처럼 시체가 다 되어 땅바

닥에 배를 깔고 넙죽이 엎드린다. 언제나 더 낮게, 이것이 

물의 좌우명. '향상(向上)'의 반대. 


(역: 김화영)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오랜만에 읽는 이름. 프랑시스 퐁주. 물에 대한 시다. 물은 정말 그렇다. 그렇구나. 



(6월 10일. 어딘가에서) 



하지만 물처럼 살지는 못하리라. 물은 물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별은 별대로.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다시 시집을 읽어야겠다. 나이가 들어 다시 시집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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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

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

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

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

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

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편은 유명한 연극연출가 임영웅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구르몽의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으니, 술 생각이 났다. 나이가 들어도 좋은 시 읽을 때, 술 생각 나는 건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즘 사람들은 구르몽의 시를 알까. 쓸쓸하기만 한 6월 밤이다. 나라는 엉망이 되었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로 변해간다. 이제 시인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린다. ... ... 나는 어쩌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 가슴을 가진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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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城 

김화영(지음), 문학동네 






여행은 나의 삶이 남의 삶이나 공간을 만나는 감촉이며 공명(共鳴)이다. - 7쪽 




'예술기행'이라는 부제를 읽곤 프랑스의 여러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대부분 프랑스 문학 작품과 연관된 기행 산문집이다. 예술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미술이나 조각, 음악에 대한 다채로운 내용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대를 했다. 


김화영, 그는 1974년에 이미 카뮈 연구로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카뮈에 있어선 국내 최고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년 그는 어느 형편없는 출판사의 노이즈 마케팅에 휘말렸다. 그 때 나온 기사들이나 광고를 거의 읽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번역 문제는 늘 있어왔던 것이고 해석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불어를 한글로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며, 김화영 교수의 번역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는 있기에. 하지만 내가 그 기사들이나 광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예의 없고 버릇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성실한 프랑스 문학 연구자이며 한국 독자들에게 프랑스 문학을 소개해왔으며 카뮈 전집을 한국에서 읽을 수 있게 한 老교수에 대해 '엉터리 번역'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마케팅을 했고,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형편없음을 여러 기사들을 통해 증명하고 있던 여러 일간지의 기자들마저도 앵무새처럼 '엉터리 번역'이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런 상황에 독자들은 자신들의 무지몽맹함을 뽐내며, '엉터리 번역'에 동조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실은 지금도 인터넷 서점 리뷰들을 보면 그 때 올라간 많은 리뷰들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영어 번역본을 한글로 번역했고 이를 프랑스어 원문과 대조했음이 드러났다. (관련 사항은 엔하위키 미러 - 이방인 항목 참조) 더구나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indifference님 블로그 참조) 하지만 그래서? 일은 이미 벌어졌고 새움출판사는 자랑스레 이 책을 팔았고 지금도 팔고 있다. 세상은 이렇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상처를 낸 사람은 잘 살아갈 것이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서두에 나오는 여러 성들의 모습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성만 남거나 그 성을 가지고 있던 귀족은 없고 그 후손도 없고 관리인만 남아있거나 ... ... 그런데 성마다 남모를 사연들이 있어서 하나하나 놓칠 수 없다. 아마 지금 프랑스에 가서 그 성들을 보는 것과 이 산문집에서 표현된 성들과는 벌써 거의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책은 젊은 불문학자의 글에서부터 노년에 이른 불문학자의 글이 한 곳에 담긴 것이다. 첫 장 '예술의 성'은 이미 1980년에 열화당을 통해 문고판으로 나온 바 있었지만, 책 후반부의 여행 산문들은 1990년대 이후의 흔적들이다. 


나에게 이 책은 여러 성들의 모습과 이야기가 좋았다. 서양미술사에서 언급되는 성들은 그리 많지 않고 조형적 혁신을 이룬 대표적인 작품 위주이지, 그 성에 담긴 사연 위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몇 명의 작가들, 특히 샤토브리앙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샤토브리앙에 대해선 포스팅했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거나 기행 산문집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하지만 우리가 요즘 흔히 접하는 그런 기행 산문집 - 글을 거의 없고 사진들로만 가득찬 - 이 아니다. 보기 좋은 사진들 대신 프랑스 소설가나 시인의, 기억하고 노트해 둘만한 글들이 인용된다. 그러니 이 책의 독자들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이방인>> 번역을 언급한 것은 그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몇몇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태가 바로 잡히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바 기자나 학자가 아니라 이름 없는 블로거가 실질적인 대응을 했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자주 접하게 되는 역자들이 있다. 이휘영, 김현, 민희식, 김화영, 이재룡 ... 그들의 노고를 잊지 말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8점
김화영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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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내가 이루어진 것도, 내 일생동안 이끌고 다녀온 이 권태에 처음으로 전염된 것도, 나의 고통이요 나의 쾌락인 이 슬픔에 물든 것도 콩부르의 숲에서였다. 그 곳에서 나는 내 가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다른 가슴을 찾아헤맸다. 그 그곳에서 나는 내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 곳에 그의 이름이 복권되고 집안의 재산이 쌓이기를 바랐다. 시간과 혁명이 씻어간 또 하나의 악몽. 여섯 형제 중 남은 사람은 셋. 형과 쥘리와 뤼실은 이제 없고, 어머니는 고통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재는 무덤 속에서 파헤쳐졌다."


"혹 나의 작품들이 내 죽은 뒤에 남게 되고 내가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어느 날 <회고록>의 인도를 받아 어떤 여행자는 내가 그린 장소들을 찾아오리라. 그는 성(城)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거대한 숲은 찾아도 없을 것이다. 내 꿈의 요람은 사라져버렸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성탑만이 그 종탑과 사귀고 폭풍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던 옛 친구들인 거대한 참나무 숲의 죽음을 울고 있으리라. 그 성탑처럼 홀로 남은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해주고 나를 보호해주던 내 가문이 내 곁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인생은,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성탑들처럼 견고하게 땅 위에 지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그의 손으로 세운 성만큼 폭풍에 견디지 못한다." 

-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 * 


김화영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에서 인용된 샤토브리앙의 글이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대단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샤토브리앙이지만, 다른 나라로의 소개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듯 싶다. 그의 대표작인 <아탈라>, <르네>는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품절이고. 




아딸라 - 르네
샤또브리앙 저/신곽균 역

영역본을 찾아보았으나, 3권 정도 검색되었다.



 

- 샤토브리앙, <Atala / Rene>



-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Memoirs from Beyond the Tomb>



읽고 싶은 건 역시, <무덤 너머로의 회상>이다. 학생 시절이었다면 어떻게든 불어로 읽으려고 했을 텐데, 돌이켜보니, 영어라도 제대로 해놓고 불어공부를 할 걸 하는 후회가 앞선다. 지금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역본을 찾아보고 있으니. 


프랑소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은 30년 걸쳐 씌여진 회고록이다. 소설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1786년에 태어나 1848년에 죽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귀족의 몰락, 프랑스 대혁명, 왕정복고, 나폴레옹 ... 격변기를 보냈고, 그 이야기들이 <무덤 너머로의 회상>에 담긴 것이다.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지금 샤토브리앙을 읽는 독자들은 많지 않다. 


위에서 소개한 책들 말고 국내 번역된 책들이 있으나, 발췌번역이거나 요약본이라 다소 부족해 보인다. 


* *


얼마 전 웹서핑을 하다 보게 된 정보 하나, 언어 사용인구로 따져, 한국어가 13위였는데, 순위에 민감한 사람들이 한국어의 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읽었는데, 실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국어로 된 양질의 정보가 얼마나 많고 이 정보들에의 접근이 얼마나 쉽고 편리한가다. 따져보면 한국어로 구할 수 있는 양질의 정보는 많지 않다(영어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나, 비교는 늘 최고와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이 사회에 조금이나 기여한 게 있다면, 한국어로 된 정보에 이 블로그가 조금의 도움이 되었다는 것밖에 없는 듯해 좀 씁쓸해졌다. 


정부 차원에서 한글 번역 - 여기에는 외국 서적에 대한 번역 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된 국문학 서적에 대한 번역도 포함되어야 한다 - 에 대한 다양한 공적 사업이 진행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늘어나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그게 가능할까 싶다. 기업은 돈 되는 일에 매진하고 정부는 지금 당장 돈이 되지 않고 나중에도 돈이 되지 않으나,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기초 사업에 힘을 써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이 나라 정부 관료나 정치인이 이런 이야기 한 적을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다.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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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푸른 이야기(une histoire de bleu) 
장 미셸 몰푸아(Jean-Michel Maulpoix) 지음, 정선아 옮김, 글빛(이화여대출판부) 






늦가을, 잔잔히 비 내릴 때, 하늘의 흐느낌을 듣고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럴 때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착잡한 눈물을 슬레이트 지붕과 아연 홈통을 두드리는 맑디맑은 빗물에 보태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부드러운, 거의 평온해진 동작이다. 이 시각, 이 계절에, 우리는 언어를 뒤흔들지 않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 이번만큼은 그 적절함이 빗줄기의 속삭임과 유리창의 어둠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확신하며. 그 순간, 뜻이 확실치 않아 오래 전부터 밀쳐두었던 책 몇 장을 다시 읽어보고 싶으리라. 이번에는 그 감동을 되찾고 그 의미를 이해할 거라고 확신하며. 그래서 만일 펜을 들게 된다면, 무엇을 발견하기보다는 기억해내기 위해서이리라. 자신의 얼굴이 비친 수면 위로 마침내 몸을 숙이듯. 
- 144쪽
 

몰푸아의 시집을 읽으면서 작고 낮은 웃음을 천천히 흘러 나왔다. 번역 시집을 읽으며 이런 기분에 빠진 건 정말 오랜만이니, 역자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푸른 바다에 대한 끝없는 무한과 사랑, 그리고 서정성에 대한 시집이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읽는 이의 마음을 스다듬는다. 

아주 드물게, 좋은 번역 시집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단어들로만 구성하여 풍부한 시적 풍경을 만들고 그 속에 독자를 안내한다. 이 시집도 여기에 속한다. 아주 드문 번역 시집에. 


청명한 날이면, 난바다는 찬란히 부서진다. 

하얀 기와 얹은 하늘. 낮잠에 취한 바다가 잉크빛 기다란 상처 자국을 수평선의 뺨에 새긴다. 그곳에 돛단배들이 고요한 한길을 내고 새를 키우는 사람의 순백색 사랑을 심는다. 

수풀 넘쳐나는 정원들은 박하, 물망초, 봉숭아 향 날리며 난바다를 향해 더 높이 자란다. 페인트칠한 나무발코니에 뱃사람들의 가슴이 물거품처럼 튀어오르면, 라일락 꽃잎 술렁이는 소리가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바다의 대기실에서 보낸 어느 여름날 일요일. 드리워진 커튼이 조금 벌어져 있다. 불빛이 깜박인다. 바다의 투명한 물결이 왁스 칠한 가구와 종이 위로 흐르며 잔잔히 흔들린다. 출범을 앞둔 빈약한 함대 한 척. 그리고 물살 위의 배처럼 살랑대는 한 편의 시. 알 수 없는 욕망 하나 눈을 뜬다, 아니 잠든다. 난바다를 향해 문들이 살짝 열리다 이내 다시 닫힌다. 몽상에 젖은 자, 손가락을 푸르름에 적시면 그의 몸은 이윽고 모래가 된다. 
- 16쪽 


시의 제목처럼 첫 문장 하나가 떨어져 나오기도 하고, 아예 없기도 하다.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사적인 테마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짧은 시들이 모여 어떤 지향을 가지긴 하나, 이는 비평가에게 맡길 일이니, 우리는 그저 읽으며 조용해질 뿐

'무한은 인간의 문제'라고 여기는 몰푸아는 이 시집을 통해 자신만의 시론(詩論)을 펼쳤는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론인가! 


http://www.maulpoix.net/ (장 미셸 몰푸아의 홈페이지. 프랑스어로만 구성되어 있음)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폴 발레리의 문장. 






어떤 푸른 이야기 - 10점
장 미셸 몰푸아 지음, 정선아 옮김/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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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행복 - 10점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고봉만 옮김/문학과지성사


츠베탕 토도로프(지음), <<덧없는 행복 - 루소 사상의 현대성에 관한 시론>>, 고봉만(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6년 1판 1쇄




결국 루소는 도덕적 개인individu moral로 향한다. 이는 <<에밀>>의 귀결이기도 하다. 사회 상태와 자연 상태의 대립이라는 루소 사상의 큰 틀은 그 대립의 어정쩡한 화해로 무마되는 셈이다. 루소의 방황들은 ‘자신의 보편적 정신, 자신의 미덕을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휘’하며, ‘결혼을 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신의 국가를 존중’하고 ‘인류를 위해 몸을 바치는’ 도덕적 개인을 권하며 끝난다. 그리고 토도로프는 책의 말미에다 이렇게 적는다.


     루소는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바로 그
   비참함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처럼 우리 자신의 나약함으로부터 우
   리의 덧없는 행복은 생겨난다.’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루소는 매우 선명하다. 토도로프는 루소의 사상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루소 사상의 귀결은 ‘덧없는 행복’이었으며, ‘도덕적 개인’이라는 점은, 이 책 초반에서 설명하던 루소 사상이 가진 에너지와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인다.



실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일련지도 모른다. 인간애(휴머니즘)란 무한하고 빛으로 가득 차있는 신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호하게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와는 단절되어져 있다고 말했던 어떤 시대와 어떤 개인들의 생과 이 세계를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면, 그 몸부림의 귀결이 신이 사라진 이 세계 속에서 개인과 사회의 평화로운 화해를 바라며, 유한한 인생 속에서 실현가능성이 높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결론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성이란 이러한 결론을 향해가는 일련의 과정일 지도 모른다. 신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고 신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되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생과 이 세계의 비참함이 가져다주는 우울한 배반감과 절망 속에서 우리의 바람과 희망은 결국 실현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루소의 저 덧없음은 젊은 날 가슴 속에서 밝게 빛나는 한 점 별빛을 향해 무수한 방황을 거듭하던 영혼들이 결국은 지쳐 되돌아와 앉던 그 자리들이였는지도 모르겠다.

-----

* 2011년 1월 4일 덧붙인다.

오늘 펭귄 클래식 한국어판에서 새로 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받았다. 그리고 머리말에 츠베탕 토도로프의 글이 실려있었다. 토도로프라는 이름에, '덧없는 행복'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그만큼 '덧없는 행복'이라는 책은 루소 해설서로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는 문학이론가로만 알려져 있던 토도로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내 서평이 제대로 책을 소개하고 있지 못해 안타깝지만,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은 매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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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내 마음 - 10점
샤를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해서만 굴러간다./-모든 이가 의견 일치를 하는 것은 바로 보편적 오해에 의한 것이다./-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면 불행하게도 결코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보들레르를 읽는 것일까. 참혹하고 끔찍하며 슬픔에도 불구하고 왜 보들레르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보들레르를 이해하고 감동받는 이라면 분명 그는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나는 살아간다는 것,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히 말해 살아가면서 보들레르를 읽는 것 말이다. 보들레르의 유려한 독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긴 이런 질문보다 먼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보들레르의 이 산문집은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에게도 권하지 않고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은 이 책을 읽고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아니면 쓰레기같은 동경을 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들은 보들레르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내려갈 때의 고통이나 번민,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은 누가 읽어야하는 것일까.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마음먹은 사내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즉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할 것이다.

자고로 책은 먼저 쓸모가 있어야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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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박동혁 옮김, 하서. 1990)
* 1856년, 플로베르가 35세 되던 해 나옴.




그러나 뭐라 해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 불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지만 만일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열정적이고 품위 있는 성격, 천사와 같은 시인의 마음, 하늘의 마음, 하늘을 향해 애조띤 축혼가를 부르는 청동 하프 같은 마음, 이런 것들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지 못했겠는가? 아! 모든 것은 다 틀렸다! 일부러 애쓰며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거짓이다! 어떤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다.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겨져 있다.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이 입술에 남는 법이다.
- 278쪽

에마가 죽고 샤를이 죽고 그들의 어린 딸이 방직 공장에 가게 되었다는 짤막한 상황 설명으로 소설이 끝나게 되었을 때, 어떤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에마는 몇 번의 밀애 속에서 사랑을 경험한 것일까? 그러한 에마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에마는 백 오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무심코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온 사내에게 몸을 맡기고 근사한 말투와 매너로 유혹하는 사내에게 입술을 허락하며 깊은 눈빛과 재력을 겸비한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그녀들.

근대의 사실주의란, 초창기 사진처럼 세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경의 이면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무언가를 폭로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그러한 양식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치기도 하며 주인공의 방황에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하고 그/그녀가 그 모험을 무사히 끝마치기를 바라거나 아예 그런 헛된 모험을 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험이라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당연히 와야 할 행복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틀렸었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한한 행복이라든가 정열, 도취 등 책에서 읽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과연 세상에선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에마는 그것을 알려고 애썼다.
- 44쪽에서 45쪽

소설 초반에 읽게 되는 이 문장 앞에서 진지하고 사려 깊은 독자라면, 우리의 에마가 어떤 모험을 하게 될 것이고 그녀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게오르그 루카치가 그의 초창기 저작인 <소설의 이론> 첫 머리에서 언급하는 그리스 문화의 구조와는 정반대로 펼쳐지는 근대의 비극적인 구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루카치, <소설의 이론>(반성완 역, 심설당), 29쪽

근대의 풍습이란,

“저기 탄 사람들은 내일이면 파리에 닿을 텐데.”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그들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고 마음을 가로질러 밤하늘의 별이 총총한 국도를 달려갔다. 그러나 어느 거리까지 가면 반드시 그녀의 꿈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흐릿한 장소에 부딪혔다.
그녀는 파리의 지도를 하나 샀다.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를 더듬으며 그 안을 온통 헤매 다녔다.
- 64쪽

우리의 에마처럼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 그것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사랑의 모험에 미련 없이 육체와 영혼을 내맡기는 것.

에마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연애란 뇌성이나 번개처럼 별안간에 나타나는 것 - 하늘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생활을 뒤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처럼 뿌리째 뽑아버리고 사람의 마음을 깊은 못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지붕의 낙수 홈통이 꽉 막혀 있을 때는 빗물이 집의 발코니 위에도 호수를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에마는 벽에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102쪽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욕망과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옷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미칠 것 같은 마음의 괴로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그의 모습을 혼자서 남모르게 그려보기 위해서 고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혼자 생각하는 기쁨이 충만 되었다. 에마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앞에 있으면 그 감정은 사라지고 그저 멍한 기분만이 남아서 드디어는 슬픔으로 변해버렸다.
- 109쪽

시골 의사인 샤를 보바리, 그리고 그의 부인 에마 보바리. 그리고 에마 보바리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 레옹. 얼마 뒤 레옹은 마을을 떠나고 로돌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로돌프에게 연애란 하나의 취미, 취미의 대상으로서의 에마 보바리.

아. 너무 가슴아픈 이 부분을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우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참으로 보기 드문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떠올려보자. “호감은 열정으로, 열정을 종속으로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는 한 개인을 도취상태로 몰입시키면서 일시적으로 당사자, 즉 사랑에 빠진 자의 책임 능력을 제한한다; 사랑은 아픔을 낳는 행복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아픔이다.”(* <사로잡힌 영혼> 중에서 )

이렇게 순수하고도 순진한 문학 평론가가 어디에 있을까. 샤를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바람난 에마를 너무 사랑했던 샤를. 끝내 패배하게 되는 모험으로 가득찬 시대에 샤를은 에마를 사랑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모험을 하지 않았는데,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도 모험의 회오리 속에 말려든 것일까.

근대란 사랑이라는 행복하게 하는 아픔마저도 절망으로, 끝없는 혐오로 만드는 시대다. 우리의 에마는 끝없이 사랑을 노래하였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쓰라린 사랑의 아픔,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의 상실뿐이었다. 사랑의 대가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샤를에게

“네, 네... ... 그 말씀대로예요. 당신은 참 좋은 분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에마는 샤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기분 좋은 감촉이 샤를의 슬픔을 한층 더하게 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애정을 이토록 나타내 주는 아내를 지금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절망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가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해주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처치를 해야 할 긴급한 상황에 몰려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 312쪽

과연 에마에게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러한 에마를 사랑하는 샤를. 에마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샤를, 왜 샤를은 에마를 사랑해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런 헛된 질문을 하지는 말자. 모든 사랑은 모험이며 불륜이다. 근대의 사랑이란 끝없는 절벽을 향해 가는 자기 파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사랑을 왜 하는 것일까 따위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고 사랑이 아름답다니 행복하다니 하는 10세기쯤에나 나올만한 말로 순진한 대부분의 독자들을 현혹하지도 말자.

그러나 이러한 환멸은 곧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어 에마는 전보다 더 강한 정염에 불타고, 전보다 더 레옹을 탐하며 그를 찾아갔다. 그녀는 옷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코르셋 끈을 마구 잡아당겼다. 끈은 미끄러져 나가는 독사처럼 그녀의 허리께에서 소리를 냈다. 맨발의 발끝으로 문이 잘 잠겨졌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올 때는 입은 옷을 몽땅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상대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식은땀에 젖은 그 이마,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 입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필사적으로 껴안은 그 팔에는 뭔가 막연하지만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 277쪽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찾아, 사랑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이미 모험을 떠났던 이들은 가슴에 절망과 파멸, 또는 허무를 안고 돌아와 우리 곁에서 잠든다. 20세기 후반 이후를 물들이는 건 이들이 남기고 간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의 존재를 아는 몇몇의 진지한 이들은 그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선 몇 백 년 전부터 시작된 그 모험의 존재를 규명하기 시작한다. 그건 한때 위대하다고 칭송받았던 모험의 유산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어 ‘이것 때문이야.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게 된 거야’ 하고 불평하고 욕을 하는 행위들인 것이다. 꼭 샤를이 죽은 에마가 숨겨왔던 사랑의 유산들을 보고 절망하고 끝내 그건 운명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오늘의 몇몇 진지한 이들도 근대의 유산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렇다. 샤를이 끝내 에마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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