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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

김승곤 외 지음, 홍디자인출판부, 2000년 



몇 개의 논문은 읽을 만하다. 가령 최인진의 <사진 수용 단계에 있어서 다게레오타입의 전래 유무에 관한 연구>같은 논문은 이런 논문집이 아니곤 읽을 일이 거의 없다. 특히 3부에 실린 세 편의 논문, 이경률의 <현대미술과 사진적 레디메이드>, 박주석의 <초현실주의 사진과 비평>, 최봉림의 <사진 초상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는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나 대체로 재미없었다. 논문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김승곤 선생 회갑 기념 논문집'이라는 부제에 어울리지 않게 신변잡기적인 에세이가 실려 있기도 했다. 책의 출간년도가 2000년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한국의 사진 비평이나 이론의 수준이 딱 이 정도 수준이라는 걸까. 한국 사진 이론의 변천을 전문적으로 다루지도 못하고 그 때 당시 활발히 활동하던 이들에게서 글을 받아 모은, 그냥 진짜 '기념 논문집'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구입한 이유가 있었는데, 어느 전시 평문에서 어떤 글을 읽고, 그 문장이 있던 이 책을 구입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문장이 무엇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이 책도 구입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으니 ... ... 


사진 이론에 관심 있다면 이 책보다는 다른 책들이 더 나아보이는데, ... ... 아, 사진 이론 관련 책들이 뭐가 있나. 직업적 사진가나 사진 작가, 혹은 사진 애호가는 많지만, 사진에 대한 글/비평에 대해 관심 있는 이는 적거나 거의 없다(이는 문학을 제외한 모든 예술 분야가 똑같다). 그러니 이 책을 추천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다른 책에는 무엇이 있나 하는 생각에 예술 이론 분야에 한글로 된 책들의 부족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 - 6점
김승곤 외 지음/홍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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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버 

2017.12.8 - 2018.1.31. 

아르코미술관 제 2 전시실 




몇몇 작품들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대단한 느낌은 없었다. 결국 설치작품들은 규모와 공간의 문제일까. 스펙터클이 중요한 것일까.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작품을 보기 전에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거나 들어야 한다는 것은 작품의 해석과 수용에 치명적이다. 결국 조형 예술이 활자언어에 종속되어 그것의 해석/비평에만 의지하게 된다. 무채색의, 별 감흥없이 서있다가 설명을 듣거나 읽었을 때야 비로서 '아'하고 반응한다면, 그것은 독립적인 조형작품이 아니다. 대체로 이 전시의 작품들이 그랬다. 


현대 미술은 너무 자주 비평적 언어에 종속되어, 먼저 개념적 어젠다를 설정한 후, 마치 개념의 설계도를 따라가듯 작품이 만들어지거나, 그렇게 전시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를 이야기하고자 한 이 전시는 실패했다. 애초에 '러시아 혁명'은 우리로부터, 일반 대중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 즉 관객과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다. 프랑스 혁명의 귀결이 '나폴레옹'이듯 러시아 혁명의 귀결은 '스탈린 체제'와 '냉전'이다. 차라리 혁명이 아니라, 혁명을 부르게 되는 상황에 주목하고, 그 상황에 대한 보다 나은 해결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 예술가의 역할로 보긴 어렵거나 제한적일 것이다. 


이상엽의 사진이나 양유연, 이우성의 작품은 이미 보았다. 양유연의 최근 작품은 처음이었으나, 그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페인팅에서의 스타일의 변화는 사각 평면에 담긴 것 뿐만 아니라 사각의 평면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페인팅이 담기는 매체, 또는 형태도 중요하다. 이상엽의 사진은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이다. 



전시 팜플릿에 이번 전시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옮긴다. 



- 지금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체제로의 이행은 역사적 필연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존속하지 않지만, 100년 전 인류의 한 사회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길로 사회주의 혁명을 관철했다. 러시아혁명이라 명명되는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 내재되어 있던 본성을 끄집어낸 사건이었으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라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이 전시 <<옥토버>>는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러시아혁명에 주목하면서도 한국사회에서의 계급투쟁과 계급적대를 한국의 근현대사와 당대의 운동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 이처럼 <<옥토버>>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지배/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며, 더 나은 사회와 체제를 이성적으로 열망하고 희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회의 진보적인 힘에 대해 예술언어는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담아내고자 한다. 




양유연, 얼룩, 장지에 아크릴릭, 198x138cm, 2017




이상엽, 자본주의_모스크바, 종이에 잉크젯, 100x150cm, 2004



이상엽_울란우데, 부랴트공화국_Epson 9800 K3 ink, Hahnemuhle paper, monochrome_17×17 _2006


이상엽_모스크바, 러시아_Epson 9800 K3 ink, Hahnemuhle paper, monochrome_11×14 _2007 



이상엽의 사진 작품 몇 개 더 찾아 올린다. 사진이 좋은 점은 실제 보는 것과 모니터로 보는 것과의 차이가 다른 장르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양유연이나 이우성의 작품은 실제로 봐야 하지만.. 



이우성의 아르코 전시 작품 이미지는 구하지 못했다. 대신 학고재 전시 풍경을 학고재 웹사이트에서 일부 옮긴다. 학고재






2009/02/09 - [예술의 우주/리뷰] - 그림 좋다 展 과 Propose 展 - 순수와 상업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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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입하려고 목록에 올려놓았다가 다른 책들에 밀려 결국 사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X 포트폴리오>에 속한 몇몇 보기 어려운 작품을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X Portfolio

Robert Mapplethorpe (United States, 1946-1989)

1978

Photographs; portfolios

Black clamshell case with gelatin silver photographs

Closed: 14 13/16 x 14 x 1 15/16 in. (37.62 x 35.56 x 4.92 cm); Open: 14 13/16 x 29 3/4 in. (37.62 x 75.57 cm)



안타깝게도 로버트 메이플소트의 <X 포트폴리오>는 위 사진정도만 보여줄 수 있음을. 대신 LA카운티미술관 웹사이트에선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을 볼 수 있지만, 심신미약자들이나 보수적 신앙심에 불타오르는 이들에겐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계기는 저 작품 때문이었다. 사람들, 특히 미국 (상업주의) 사회가 보여준 아름다움에 대한 위선적 태도때문이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아름다운 포르노성 사진이 공공장소에 전시되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는데, 이 논쟁의 모든 면에서 지식인들의 부정직성이라는 돌림병이 침투했다. 이것이 그가 아름다움에 관한 글을 쓰게 된 실제 계기였다. 비굴한 태도를 부르는 이 스캔들에 휩쓸린 사람들이 모두 산적 떼처럼 거짓말을 했으며 영리한 위선의 옷을 입었다. 모두 이 일의 귀추에 대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다. 모두에게 돈이 걸린 문제였다. 비평가인 저자가 그 논쟁에 참여한 이유는 오로지 맨해튼 다운타운 시절부터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친구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16쪽 



책은 재미있다. 다소 과격한 어조로, 산만하게 여러 이론가들을 오가며, 아름다움에 대한 부조리와 위선을 드러내고자 저자는 고분분투한다. 현대 미술에 대한 지식인들과 치료기관들(*)의 오해와 위선에 대해 공격하며 그것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지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이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지 않다. 오로지 허위에 대한 공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데이브 하키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의 인간적 속성들은 로마의 신들처럼 수없이 많고 다양하며 효용 면에서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것들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손 닿는 곳에 있다. 새로움, 친숙함, 오래됨, 자율, 드묾, 신성, 변덕, 장엄, 기발함, 공모, 효용 등이 그런 것이다. 이들이 당장에 띠는 가치가 우리의 제물을 바칠 사당을 결정한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구체화한 외관과 닮음의 장관을 -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자신 너머의 모든 것 사이의 공간을 좁히는 다신교적 포용으로 그 장관에 합류하기 위해 - 마음껏 받아들일 자유를 느낀다면 결코 자신의 욕망을 미심쩍어하는 일은 없다. 

- 171쪽 



아마 보들레르의 말처럼, "아름다움은 행복을 추구하는 습관적인 방식만큼이나 종류가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 


현대미술에 대한 여러 이슈들 중 한 가지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들과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과격한 방식의 소재나 주제, 표현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전시하며 해석할 것인가다. 이 점에서 데이브 하키는 명확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래서 인접 학문을 전공하고 현대 미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 대부분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들이 주는 무한한 감동을 알지 못한다. 역겹고 추악하며 구토를 유발하는 작품들 앞에 서서 왜 우리들 중 일부는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가를 그들은 알지 못하면서 현대 미술에 대해 떠든다. 더 심각한 경우는 부게로나 제롬과 같은 위선와 허위에 가득찬 19세기 작품들을 예로 들며 도상학적 해석을 이어나갈 때, 작품은 감상과 감동의 대상이 아닌 지적 해석의 수단으로만 존재하게 만든다. 그들 대부분은 왜 마크 로스코 작품 앞에서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는지 알지 못한다. 마크 로스코 작품 앞에서 서면 오로지 나와 작품만 존재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마 데이브 하키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이미 죽은 친구 메이플소프의 작품들 두고 역겨운 비난을 일삼는 이들을 앞에 두고 말이다. 




Dave Hickey(1940 ~ )





*치료기관: 데이브 하키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치료기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조롱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그들의 시각으로 서열화하고 해석하며 위치지우기 때문이며, 이를 교묘하게 전파하여 세뇌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용 - 8점
데이브 히키 지음, 박대정 옮김/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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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Paul Celan / unter judaisierten Deutschen 

장 볼락Jean Bollack(지음), 윤정민(옮김), 에디투스, 2017




<죽음의 푸가>로 잘 알려진 파울 첼란의 연구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흔아홉의 나이에 파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시인.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가 그 말을 번복하게 만든 작가. 하지만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 한국 시인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파울 첼란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 때, 이 책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울림은, 번역된 시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진하다. 길지만 <죽음의 푸가>를 옮기면,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타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중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시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연민과 고통, 그것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서정적이지만 아프고 아름답지만 고통스럽다. 1960년 파울 첼란이 뷔히너 상 수상 연설인 <자오선Der Meridian>은 그의 시론, 문학관을 잘 알 수 있는 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글로 제대로 번역된 글은 없으니...)



“어떤 시인도 결코 타인의 문제로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만 말할 뿐이다. (… …) 말해진 것은 제 각각의 판단에 맡겨진다.” 

- <자오선> 중에서, 파울 첼란



이 책에서 장 볼락은 파울 첼란에 대해서,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이면서 독일어로 글을 쓴 시인이라는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몇몇 작품에 대해, 시어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깊이 있는 분석을 전개한다. 단어 하나하나 짚으며 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한, 뛰어난 예를 보여주고 있다(이 점에서 이 책은 문학 평론가들, 혹은 평론을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첼란의 모든 시는 시가 갖는 진리에의 요구와 씨름하며, 그런 이유로 그의 시는 시로서의 자기 특성을 부각합니다. 

- 37쪽



첼란의 시문학은 일종의 사유 양식입니다. 첼란은 그것을 기억과 동일시합니다. 이처럼 응축된 사유형태는 철학으로도 신학으로도 분류될 수 없습니다.

 - 51쪽




유대인으로서의 첼란, 예술과 시, 그리고 첼란의 문학에 대한 태도, 몇몇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답고 있는 이 책은 작지만, 탄탄하고 깊이있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장 볼락Jean Bollack(1923 - 2012)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 10점
장 볼락 지음, 윤정민 옮김/에디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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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번역자인 김혜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이우환의 글들은 주로 1960년대 말 쓰여졌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출간된 이 책을 2000년에 일본에서 재 출간하였고, 2011년에 한국의 학고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책은 일본 미술계의 ‘태풍이면서 바이블’이었다. 


우리는 이우환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며 일본 현대 미술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그의 일부 글은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 받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우환은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다음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그런 다음 한국 미술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1960년대 말 이우환은 현상학에서 바라보는 바,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시각을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모노하(もの派)라는 미술 운동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술 이론가 이우환을 제대로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탄탄함과 생생함이 가시질 않는데, 60년대 말, 70년대 초 메를로 퐁티,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현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를 질투했을까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1960년대 말의 이우환만큼 탁월한 식견으로 뛰어난 글을 쓰는 미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를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테이블이나 의자, 풍경 자체는 아무런 시각적인 원근법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다. 실재는 인간의 가치 조정 없이 스스로의 거리를 가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 쪽이 중심이 되어 저 쪽을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표상 관념에 의해 시야의 세계를 원근법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110쪽)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한다. 그는 근대 철학은 실제 세계와는 무관한, 우리 관념의 표상을 상정하고 그 표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고 말한다. 즉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념으로 해석, 투영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바 외부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현상학자들, 특히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는 바이며, 그 외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메를로 퐁티에서 출발해 니시다 기타로에 이른다. 



우리의 신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미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행위하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표현 행위인 것이다. … … 행위하는 것과 보는 것이 결합하는 곳에 신체가 있다. 행위적-직관적으로 사물이 보이는 곳에 신체가 있는 것이다. 

- 니시다 기타로, <인간의 존재> 중에서(227쪽 재인용) 



… …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온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 니시다 기타로, <무의 자각적 한정> 중에서(228쪽 재인용) 



관계항2007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이우환은 이미 1960년대 근대 철학, 근대성(Modernity)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방향이나 실천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그 전에는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뭐지?)


그가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 활동은 이런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공간인 동시에 시간인 지점이 열리는 순간, 시간은 동시성의 장소로서 만남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오는 시간도 가는 시간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의 안과 밖이 상호매개되는 열린 만남의 세계라는 점에서, 비대상적 차원인 것이다. (231쪽)



이런 측면에서 그는 상당히 관념적인 작가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특히 그가 지향하는 미니멀한 표현 방식과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나는 니시다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삼아, ‘무의 장소’를 관계성의 표현을 통한 무한한 울림-여백으로 전개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 

(… …)

예술의 과제는 인간이 더욱 직접적인 세계로 해방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어떻게 열어 제시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의 상태성으로부터 그것의 현재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242쪽) 



딱딱한 미술 이론서인 관계로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술 전공자에게 추천하기에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 어렵다. 실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무안하게 여겨질 정도다. 1960년대 말 쓰여져, 그 당시 일본 미술계의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을 두고 '어렵다'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직까지 한국 문화, 예술계의 지적 토양은 1960년대 말 일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근대 철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거칠게 나누고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다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실은 그의 목적, 원근법적인 서양 근대 미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하긴 이 책은 전문 철학 서적은 아니니... 


미술 이론 전공자이거나 비평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만남을 찾아서 - 10점
이우환 지음, 김혜신 옮김/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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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원제 Le Photographique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지음), 위베르 다미슈 Hubert Damisch(불어 옮김), 최봉림(불어를 한글로 옮김), 궁리 (대림이미지총서05) 





Jackson Pollock (1912-1956)

Gelatin silver print, 1950

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Institution

Gift of the Estate of Hans Namuth

Image copyright Estate of Hans Namuth



그러나 분명 나무스는 사진가로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가적 역량으로 촬영 각도, 프레이밍, 흑백 콘트라스트, 그리고 문제가 되는 사진 대상의 모든 구성 요소를 고려했다. (...) 

나무스의 사진 속에서 폴록은 언제나 커다란 화폭 사이에 끼여 있는데, 어떤 화폭은 벽에 세워져 있고, 어떤 화폭은 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 연속 상태 속에서 검은 선과 하얀 선은 뒤얽혀 공격적인 모티브를 형성하며, 또한 아틀리에의 바닥에 보이는 얼룩 반점들 속에서 반복된다. 그리하여 사진은 위아래가 하나로 붙은 공간을 재창조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형상이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인체가 중력과 단단한 바닥과 맺는 관계는 아무래도 애매 모호할 뿐이다. 작업실 공간은 더 능동적이고 더 현란한 또 다른 공간에 의해 포섭되어 진다.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들의 연쇄 결합은 콜라주의 결합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애초의 작업실 벽과 바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보여주는 특수한 평면적 시각 효과에서 기인한다. 

- '텍스트로서의 사진 - 나무스와 폴록의 경우' 중에서, 146쪽 



Jackson Pollock painting in his studio on Long Island, New York, 1950.

Credit: Hans Namuth



한스 나무스의 사진은 잭슨 폴록으로 가는 창과도 같다. 크라우스는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한다. 우리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을 알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탁월한 시각으로 카메라로 잡아 해석해낸 한스 나무스에 대해선 소홀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여기저기 실린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들을 모아 불어로 번역한 위베르 다미슈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사진에 대한 글들의 가치를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에 비해 손색없다며 격찬한다. 이 격찬에 대해서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점만은 분명하다. 잭슨 폴록 대신 한스 나무스에 대해서 설명하듯, 이 책은 온전히 사진에 대해서만, 사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씌여진 책이다. 회화적 전통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진만을 위한 이론적 지평을 만들고 해석하며 독립적 가치를 논한다. 


하지만 이 책 만만치 않다. 거의 한 달 내내 들고 다니며 읽었다. 겨우 다 읽고 정리하는 지금, 이 모음집에 대해서 뭐라고 적어야 할 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흥미로움으로 따지자면, 탁월한 비평집들 못지 않았지만, 책은 쉽지 않았다. 사진 이론서이지만, 인문학 서적이며, 사진에 대한 깊은 이해 뿐만 아니라 현대 인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쩌다가 미술 비평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직접 사진을 찍는 이들 중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러므로 발자크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신체는 일련의 유령들로 구성된다. 유령들은 사방 모두 아주 얇은 막이 무한히 포개어진 잎 모양의 무수한 층들로 이루어지며, 눈은 이를 통해 신체를 인지한다. 

인간은 결코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환영처럼 만질 수 없는 것으로 어떤 단단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또는 무(無)에서 어떤 사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다게레오식 사진 촬영은 사진 찍는 대상의 여러 층 가운데 하나를 급습하여 은판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술한 신체는 다게레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유령, 다시 말해 신체를 구성하는 본질적 부분을 잃어버리는 게 분명하다. 

- 나다르의 회고록 <내가 사진가였을 때> 중에서 (32쪽 재인용) 



거의 읽히지 않는 나다르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위 문장을 읽으면서 '사진적인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진은 인영, 흔적, 자국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어쩌면 이것은 이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크라우스는 퍼스의 '인덱스Index'에 의존하며 사진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Alfred Stieglitz

Equivalent

1930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등가물'에 대해 크라우스는 이렇게 적는다. 



그것은 대기 상태의 각인이다. 빛의 굴절을 통해 가시화된 구름의 형상은 바람의 방향과 습도를 기록하고 가시화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의 흔적을 구름이 고정시키는 한에서, 그것들은 자연의 기호들이다. <등가물>에서 스티글리츠는 이 자연의 기호들을 비자연 기호로 변환시키는 곡예를 수행했다. 다시 말해 구름이라는 자연의 기호를 사진이라는 문화의 언어로 전환시켰다. 

- 209쪽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파울라 또는 햇살, 베를린>, 1889년 



현재(2014년)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도서관에서라도 구해 읽으면 좋을 것이다. 특히 사진, 이미지, 미술사 전공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의 난이도는 상당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롭다. 






사진인덱스현대미술

로잘린드크라우스저 | 최봉림역 | 궁리 | 2003.07.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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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미술 잡지에서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고 되새겨볼 만한 문장들을 읽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옮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발적이며 능동적이고 탈식민화된 예술적 실천이다. 그런데 나도, 우리도 그걸 자주 잊는다. 다시 이 블로그가 거기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겠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현명하다. 이 때 현실이란 혼종성, 디아스포라, 그리고 상호교환적인 네트워크가 점차 강해지는 상황이 영속화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전체 구조를 바꾸는 것은 힘든 일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사회, 현실을 위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경쟁력 있는 기관을 설립해야 하고, 가치 중심적 시스템 하에 더 많은 지식인들을 양성해야 한다. 나아가 억측하기를 그만 두고 우리 현실과 관련된 증거들을 생산해야 한다. 이 증거들은 강력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가져올 것이다. 

- 슈시 술라이만 (말레이시아 12Art Space 디렉터) (경향 아티클, 2013년 4월호에서 인용) 




Playing for Dying Mother, 2009

After Puvis de Chavannes’ “Jean Cavalier jouant le choral de Luther devant sa mere mourante,” 1851

Wong Hoy Cheong



The Charity Lady, 2009

After Jean-Baptiste Greuze’s “La Dame de Charite,” 1775

Wong Hoy Cheong






앨버트 허쉬만의 '반동의 수사학'에서 빌어 와 말하자면, 그것은 개선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반동의 미사여구를 기만적인 것으로 만든다. 가치 밑바닥에 숨어 개선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만약 당신이 그런 수사적인 논쟁을 하게 된다면, 당신의 결론은 '무반응'일 것이다. 당신은 어떤 개선 가능한 행동들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행동도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역효과를 낳거나 혹은 성취된 것들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동의 수사학은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삶을 점유하고 있다. 경제적인 인플레이션과 핵무기, 노동자 착취, 도시 개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거짓말 등. 만약 아시아 예술가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서구의 시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적인 게 아닌 자기 식민화일 뿐이다. 당신이 스스로 원하는 바대로 할 지, 아니면 남들이 무얼 하라고 얘기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난 믿는다. 

- 우 따건 (대만 콴두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경향 아티클, 2013년 4월호에서 인용) 








Tu Wei-Cheng

Happy Valentine’s Day

installation

http://collabcubed.com/2012/08/27/tu-wei-cheng-happy-valentine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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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epthestyle 2013.06.18 14:36 신고

    '만약 아시아 예술가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서구의 시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적인 게 아닌 자기 식민화일 뿐이다'
    멋집니다.

    제가 작년에 국내 모 예술제에 다녀왔는데 엄청나게 실망하고 왔다죠.
    솔직히 한국작가들이 창조해 낸 거라면
    그래도 작품속에 타국의 작가들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느낌이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팔기위한 작품을 내놓는 자리의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 예술제를 한국전체의 작가들의 작품에 확대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거의 70%는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만 담고 있더군요.
    (다행이 30%정도는 한국의 미가 물씬 느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굳이 한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게다가... 앤디워홀 모작은 왜 그리도 많던지,,

    여튼 그 이후로 음악이나, 옷이나 주변에 모든 것들을 접할 때마다,
    서구사회와는 구분되는, 그리도 중국과 일본과는 구분된 한국적인 특성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 편협한 시야로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발행하신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 정체성identity가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는 소극적인 듯 합니다. 그리고 타인들과 뚜렷하게 두른 '개성적인 자기'를 드러내면 도리어 소외를 당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요. 미술 사회(일종의 장 champ)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 곳도 한국 사회의 일부인지라... 막상 부딪혀보니,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개성적인 작품을 그린 것도, 그 작품으로 인정 받는 것도 ...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헤쳐나가야 되는데, ... 여튼 대중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 순수 미술 분야인 듯합니다. ~.. ^^
      댓글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다만 이 견딜 수 없는 초조감을 적어 잊어버리고 싶다. 지금 나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걱정, 앙심, 초조, 강박관념이 나를 긁고 할퀴고, 되풀이해서 덮치도록 내맡겨져 있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해도 안 되고, 일을 해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어도 내가 쓰고 싶은 주제의 일부가 내 마음 속에 부글거리고 일어난다. 서섹스 전체에서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또는 내 안에, 그것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사물을 즐길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만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 1921년 8월 18일 목요일 


어느 책에선가 예술가의 자살율을 살펴보았더니, 소설가들의 자살율이 최고였다고 전했다. 화가와 음악가의 자살율은 기억나지 않는다. 언어를 다룬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고된 일이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아직도 이 백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워낙 이 책 저 책 오가며 읽는 터이기도 하지만, 비밀스러운 일기가 출판되리라고 그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난 후 더구나 동양의 작은 나라의 중년 남자가 읽는다는 건 ... ...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고등학교 때 읽은 후, ... ... 아직 없다. 다만 그녀의 비평, 수필은 여러 번 읽었고 이제 그녀의 일기다. 등대로... 델러웨이 부인 ... 은 번역서만 가지고 있을 뿐, 읽어야지 할 뿐이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서울엔 이미 어둠이 내렸고 긴 새벽을 위로할 술 한 잔이 그리워진다. 버지니아 울프였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장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진 2013년,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건 참 낯설고 쓸쓸한 일이다. 지독히도 쓸쓸한.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시다. 그래서 나는 술집 앞의 술 취한 수병처럼 후회하고 있다." 

- 1924년 8월 1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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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는 광주비엔날레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큐레이터이다. 그는 지난 2009년 니콜라스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기획한 '얼터 모던 Altermodern' 전(영국 런던 테이트미술관)의 카탈로그에서 네 개의 모더니티를 제안하였고 그 내용을 오늘 읽은 '시선의 반격' 도록에서 김현진의 글에서 확인했다. 간단하게 인용하자면 이렇다. 



오쿠이 엔위저는 모더니티를 서구 1세계의 supermodernity, 아시아의 고속개발국가들의 andromodernity, 이슬람권의 speciousmodernity, 아프리카의 aftermodernity로 분류.



큐레이터 오쿠이 엔위저는 자신의 글에서 네 개의 서로 다른 모더니티의 모델을 규정하면서 한국, 중국, 인도와 같은 나라들의 모더니티를 '앤드로 모더니티'andromodernity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서구의 supermodernity를 모델로 받아들여 발전과 선진화에 방점을 두는 개발적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개발의 대안적 모델들을 고민하면서도 일종의 고속 개발을 통해 성취되는 이 하이브리드형 모더니티라고 설명하면서도 남자를 뜻하는 andro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우고 부수면서 건설하고 전진해 나가는 남성적인 속성이 여기에 잠재해있다. 


- 김현진(큐레이터) 




내가 위 내용이 무척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아직도 '모던modern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고, 그 모던-유럽에서 시작된-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변형되는 것을 오쿠이 엔위저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엔위저가 설명하고 구분한 네 개의 모더니티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각기 다른 모더니티임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시각에서 각 로컬 모더니티를 바라보고자 하는 일반적 접근에 대해 그의 구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9년 12월에 진행된 전시 도록이다. 아트선재 센터에서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한 권 사서 서재에 놔두었다가 오늘 펼쳐보았다. 


위에서 언급된 오쿠이 엔위저의 의견을 볼 수 있는 글은 'Modernity and Postcolonial Ambivalence'이다. 전자 논문으로 확인할 수 있고 잘 검색하면 복사본 pdf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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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아직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펼치면서 마치 비밀스러운 과거 - 문학이 모든 것이었던 시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시선(視線)들은 문장이 풍기는 향기에 숨겨져 모호해지기만 하니 말이다. 


시선 -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원근법이다. 데카르트적이거나 반-데카르트적이고, 무언가(어떤 대상)를 궁금해하거나 원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적이거나 반-플라톤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글들은 원근법을 아름다운 안개 - 결국은 모호할 뿐인! -로 숨기고 우리를 이끈다. 


종종 아름다운 글들은 우리들은 아프게 한다. 그건 아름답기만 할 뿐이기에. 


문학 비평은 문학 작품에 기생하고 결국 작품 속에 묻힌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비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비평이 기생하는 작품에 따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에서 시작했지만 문학에 가 닿지 못한 이유도 이 탓일까. 


오늘 신형철의 책을 펼치면서 그가 소개하는 여러 작가와 작품들, 나에게 대부분 생소하기만 한 이들 - 몇 명은 술자리에서 만나기도 했고 몇 명은 같이 학교를 다니고 했지만 - 속에서 그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산문집,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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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기억 - 8점
안치운 지음/을유문화사



안치운의 연극과 기억’(을유문화사, 2007)을 읽었다. 그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여러 지면에 쓴 연극평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 여간 읽기 불편한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문제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심연을 가로질러가 무대를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글은 살아남기 위한 표현이되 노력이다. 비평가의 글은 살아남기 위한 열정의 소산이 아니던가. 공연을 재현하는 비평은 공연의 표현이다. 삶이 삶의 표현이듯이. 비평 없이도 연극은 가능하지만, 연극 없이 비평은 불가능하다. 연극을 가능하게 하는 비평이야말로 비평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평의 꿈이다. 그렇지만 비평이란 글은 결코 연극의 얼굴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다. 다만 비평이 무용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서문' 중에서)



하지만 안치운의 글은 너무 문학적이다. 마치 연극 무대를 벗어나,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유하는 듯하다. 글이 사라지는 시대에, 이런 산문은 낯설다. 연극이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난 지금, 그런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은 더욱 더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는 기묘한 슬픔으로 채워진다.
 

뮤지컬 공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에 연극은 혼란스럽다. 혼란은 근원적인 것이다. 연극하는 이가 줄어드는 반면 뮤지컬을 하고자 하는 배우들은 늘어난다. 빨리 먹고 빨리 자리를 드는 패스트푸드가 점차 많아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길거리에서 잡아타는 택시들이 대부분 중형 택시인 것처럼, 뮤지컬은 관객을 태우고 쏜살같이 앞으로 내뺀다. 반면에 연극은 땀 흘리며, 천천히, 헉헉 숨 가쁘게, 절룩거리며 그 뒤를 따라간다. 속도가 잃고 간 것들, 예컨대 과거의 반추, 현재의 반영, 미래의 기다림을 주우면서 간다. (21쪽)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의 층이 얇아지고, 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의 층이 얇아질 수록, 진지한 사유로 매체를 바라보고 풍부한 향기의 산문를 쓰는 이의 존재는 불행하다. 안치운이 그렇다.

두꺼운 이 책을 연극하는 몇 명에게 선물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질 못했다. 무릇 이 시대에 진지함이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진지한 사랑마저도 외면당하고 버림받는데, 무엇 하나 살아남는 것이 있을까.

이 책의 독서는 즐겁지 않았고 도리어 쓸쓸해지고 무안한 기분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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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 8점
강수미 지음/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 탐미와 위반, 29인의 성좌
강수미(지음), 현실문화


미술비평가란 존재는 낯설다. 기묘하다. 현대 미술 작품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활자 언어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글로 설명된 미술 작품을 전부라고 믿는 순간, 작품은 은하계 너머 미지의 세계로 달아난다. 활자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어떤 이야기(narrative)를 미술은 시각적 언어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활자언어로 된 비평은 작품의 보조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이 비평 본연의 업무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작가들마저 아이러니하게도 글(활자언어)로 설명된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싶어 한다. 도저히 현대의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나는 가끔 뛰어난 작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나의 설명을 기다리지만, 나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상황에 못 이겨, 풍부한 비유와 아름다운 단어들로 표현하는 순간, 나는 그것이 그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듣길 원한다. 미술비평의 시작은 그런 설명이 활자언어로 옮겨지고 책으로 나오고 신문에 실리던 때부터일 것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여인 디오티마에 대해 이야기하던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지도 모르겠다.

미술 비평집이란 그 탄생부터 이러한 한계를 가진다. 활자언어로 담을 수 없는 이미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또한 대부분의 비평집들이 형편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대로 뛰어난 비평집은 자신의 언어와 작가나 작품의 언어가 평행선을 달리며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예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나 이 순간 그것은 비평을 넘어서 하나의 이론이 되고 하나의 창조물이 된다. 그리고 그 창조물은 글쓴이의 소산이 되며, 활자언어를 위해 시각적 언어로 된 미술 작품은 보조적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게 된다. 즉 비평 본연의 업무를 저버린 꼴이 된다.

이 점에서
강수미의 이 책은 매우 적절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된다. 군데군데 생경한 단어와 표현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흩어뜨리지 않는다. 확실히 그녀는 작가와 작품의 편이다. 그녀는 자신이 보았고 느꼈던 것만을 이야기한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동시에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적당한 글쓰기이다. 유혹, 관찰, 경계, 확장, 정치. 책 내용의 구분도 적절하며, 작가의 배치도 적절했다. 다만 도판의 크기가 작은 점은 안타까웠다. 몇 명의 작가와 작품이미지, 그리고 강수미의 설명을 옮긴다.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도 이 블로그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최지영, chandelier, 캔버스에 유채, 145×112cm, 2008

마치 손이 벨벳의 도도한 결을 쓰다듬을 때와 같이, 도자기의 서늘하고 매끄러운 표면 위를 미끄러질 때 그런 것처럼, 조명등의 따사롭고 깊은 빛 아래서 그러듯이, 우리 눈이 그림을 감촉하는 것이다. 이 감촉성, 그 감각적 매혹과 욕망의 충족이 최지영 그림이 무대 위에 올려 상연하는 사물의 실재다.(54쪽)

박홍순, Paradise in Seoul, #006, 2007

그가 한강을 대상으로 작업한 최근 사진들은 작가와 카메라가 '즉자적으로(literal)' 깊고 낮은 시점을 취함으로써, 우리가 실제 한강 주변에서 바라보는 '생활세계로서의 한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140쪽)

정연두, 로케이션 #19, 사진 인화, 122×145cm, 2006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사진이미지에 대해서도 전적인 믿음을 갖지 않는 시대에 오히려 아무런 의도나 개념도 없이 '진짜'를 제시하는 것. 이것이 정연두의 <Location>이 가진 깊은 의도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 풍경'을 '모조 풍경'으로 오인하도록 덫을 놓고, '사실'과 '시뮬레이션'의 요소들이 모두 한 지면에 드러난 사진에서 숨겨진 의도(사실은 없는 의도)와 은폐된(사실은 은폐되지 않은) 사실/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어딘가에서 찾아보는 헛수고를 부추긴다. (152쪽)


* 작품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작가들에게 있습니다. 본 블로그는 비상업적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저작권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작품 이미지를 삭제토록 할 것입니다.
* 작품 이미지는 neolook.com에서 가지고 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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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 8점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이후



수잔 손택을 알게 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을 통해서였다. 가라타니 고진은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인용하면서 근대 일본 문학을 이야기했다. 아마 내가 문학 이론서를 읽으면서, 최초로 감탄했던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의 책이 아니라.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의 책을 종종 읽지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나, 작품의 결을 파악해 나가는 방식이나, 작품과는 무관하게 서술되거나 인용되는 이론들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긴 수작으로 평가받은 고진의 책이나 수잔 손택의 이 책과 비교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젊은 날의 수잔 손택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이 책에는 젊다는 것이 가진 거친 유쾌함, 거친 통찰력, 날카로움으로 가득차 있다. 문학, 영화, 연극을 종횡무진 오가는 그녀의 시선과 거침없는 분석은 즐거운 독서 경험을 안겨준다. (인)문학 전공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특히 프랑스 문학 예술에 대한 손탁의 관심은 매우 높아서, 셀린느의 소설이나 고다르, 브레송, 레네에 대한 영화에 대한 글,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언급은 매우 흥미로웠다. 


예술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예술 자체로 경험해야한다. 투명성 transparency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이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혁명이었다. 또 한때는 예술작품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한다.도시의 공기를 더럽히는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처럼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 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추상미술은 일상적 의미에서 아무런 내용도 담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내용이 없으니 해석도 있을 수 없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 10점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민음사
가라타니 고진의 이 책은 필독서이다. 문학 평론이란 어때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책이다. (그런데 절판되었다고 한다. 다소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지만, 그만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나 문학 평론에 대한 관심이 낮아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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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색 빗물의 파동 - 김영민 개인전
2009. 1. 29 - 2009. 2. 20 
굿모닝신한갤러리(여의도) 
 


Untitled, 130.3X162.2cm, Mixed media on Canvas, 2008


얼마나 한참 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비포장 길 한 쪽 구석, 오전에 내린 비로 얕고 작은 웅덩이 하나가 생겼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앉아, 바지 끝이 닿는지도, 소매 끝이 더러워지는 지도 모른 채, 맑게 갠 하늘이 빗물 웅덩이의 수면 위로 비친 모습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부면 그 작은 웅덩이에도 물결이 일었다. 바로 옆 미루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요동을 쳤고 내 작은 손가락 하나에도 흔들거렸다. 약간 떨렸고 약간 안타까웠다.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서, 그 작은 웅덩이에 생긴 자그마한 변화가 그, 혹은 그녀에게 갑자기 생긴 상처처럼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캔버스 가득 흔들거리는 물 표면의 흔적이 가득했다. 작은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만드는 일련의 운동들, 파동들, 상처들이 보였다. 나는 김영민의 작품을 보면서 어렸을 적 기억의 사소한, 그리고 아련하기만 한 순간을 끄집어 올렸다.

Untitled, Digital print on OHP Film, 2008


작가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물 표면의 한 순간을 캔버스에 옮겨놓는다. 그는 현대의 거대한  도시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들과 그 빗줄기들이 만나게 될 지상의 어느 물 표면들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정해진 동선을 그리며 이루어지듯, 작가가 사용하는 색들도 일정한 변화의 영역 안에서, 아슬아슬한 농도와 터치로 자신들의 존재를 견디는 듯 보이고, 무한히 이어질 듯 느껴지는 파동들은 연약한 색채들 속에서 흐려지고 뒷걸음질 치며, 캔버스의 여백 속으로 사라진다.

Untitled, 162.2X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08


실은 이 세상에 정지해 있는 것이란 없다. 김영민의 작품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운동의 정지된 한 순간을 잡아내고 있지만, 실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다. 꼭 엘레아의 제논이 말한 ‘나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에 대해 베르그송이 지적하듯, 우리는 시간을, 운동을, 우리의 삶을 공간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회화들이 한 곳에 집중하면서도 화면의 전체 공간 자체를 열어두듯, 김영민의 작품들도 반복된 파동들의 겹침, 흐릿하지만 특정 범위 안에서의 변화되는 색채들, 그리고 완결성을 거부하는 선과 터치를 통해, 정지란 없고 오직 운동만 있음을 표현해낸다. 마치 우리의 생이, 우리의 영혼이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은 채, 어딘가를 향해 있듯 말이다. 하지만 정처 없이 운동하는 것은 아닐까. 계속 저렇게 물결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술이, 우리 삶이, 내 영혼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게오르그 짐멜이 로댕의 작품을 보면서, 심리학을 추구했다고 말하듯이, 김영민의 작품들도 본질적으로 심리학주의를 향하고 있다. 게오르그 짐멜은 ‘로댕의 예술과 조각에서의 운동모티브’라는 글 속에서 근대의 심리학주의는 내면적 세계의 반응에 입각해, 세계를 체험하고 해석해내며, 영혼의 끊임없이 변하는 요소들을 통해 확고부동한 내용을 해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모든 실체가 정화되며, 따라서 운동의 형식을 띠게 된다고 지적한다.

Untitled,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07


이와 비슷하게 김영민의 작품들 속에서 파악되는 운동의 형식(파동)은 바라보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비추고 있다. 내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듯이 김영민의 작품들은 캔버스에 표현된 색채의 파동들 속을 지나, 우리 마음의 창, 기억의 입구, 추억의 향기가 된다. 그래서 운동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은 시간에 대한 은유이며, 갈 수 없지만, 변하지도 않는 과거의 어떤 순간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이미 사라져버린 것, 가지 못하는 곳, 아련한 어떤 것들에 대해 작가는 작은 원형의 물결들로 표현해 낸다. 하지만 이를 과거 지향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현재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운동은 정지될 수 없는 것이며,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지속적’이라는 형용어는 김영민의 작업을 특징짓는 한 단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Untitled, Digital print on OHP Film, 2008



* 위 글에 사용된 작품 이미지들은 작가의 허락을 받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비상업적 용도를 위한 작품 이미지를 포함한 본문을 다른 곳에서 인용할 수 있으나, 작품 이미지의 변조나 부분적 도용, 또한 상업적 이용은 금지됩니다.
* 본 전시가 열리는 굿모닝신한갤러리는 여의도 신한증권 건물 1층에 위치해 있습니다.(5호선 여의도역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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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각의 나무'에서 내는 계간지다. 얼마 전 봄이 오는 길목에 구입한 여러 권의 잡지들 중의 하나였다. 작년부터 미술잡지만 읽어오던 터에, 인문학 공부가 소홀하던 터에, 최근 인문학 트렌드도 알 겸, 요즘 필자들은 누가 있는가 구경할 겸, 구입하였다.

하지만 서문부터 읽다, 책장을 덮고 몇 달째 방치해두고 있다.

"누군가가 부자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가난해진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 "누군가가 건강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더 병들게 되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누군가의 지식과 교육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더 무지해졌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영국의, 한때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마이클 하워드가 '더 타임즈'의 광고에 실은 16개의 강령 중 마지막 세 강령이라고 한다. 이 강령을 읽으면서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건종 편집주간의 부연설명.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적대적 관계는 우리 시대의 자유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허구적 표상체계이다. 이 허구적 표상체계 안에서 개인의 자유는 권력의 지배를 의미하고, 재화 생산의 효율적 체계인 시장의 자유는 시장의 시스템을 선점하고 장악하고 있는 집단의 자유가 된다.'

실은 '허구적 표상체계'라는 단어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라는 말일까.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한 것일까. 역시나 모호하다.

하지만 마이클 하워드의 저 강령은 정말 마음에 걸린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현대 세계는 한 쪽으로만 부와 풍요가 몰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는 그것을 해결할 힘이 있는 것일까.

나이가 든 탓일까. 예전에는 생각을 하고 책을 읽어볼 생각부터 했는데, 이제는 가슴부터 턱하고 답답해지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에드먼드 버크와 애덤 스미스를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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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입문 - 10점
그래엄 터너 지음/한나래


         
문화 연구 입문

그래엄 터너 지음(김연종 옮김)   한나래
          


         
          이 책의 원제는 <<British Cultural Studies>>이다. 즉,  제목 그대
       로 영국의 문화 연구 전통에 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입문서라고 해
       서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서이기 때문에, 꼼
       꼼히 읽을 필요가 있기도 하다.
        
          이 책의 구성은 제 1부  기본 원칙들-<제 1 장 문화  연구의 이념>,
       <제 2 장 영국의 전통:간략한 역사>. 제 2 부 중심 범주-<제 3 장 텍스
       트와 맥락>,<제 4 장 수용자>,<제 5 장 민속지학, 역사학, 그리고 사회
       학>,<제 6 장 이데올로기>.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문화연구(혹은 문화이론)에 대한 교양강좌가  각 대학교(원)나
       사설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곳에
       서 이루어지는 강의는 절대로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난
       다면, 그건 강의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문화연구(문화이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적
       이 있었음으로해서 몇 권의 책과 여러 강의에도 가보았지만, 알  수 없
       는 묘한 반감같은 것이 있었다. 그 당시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
       만, 최근에 들어 약간의 가닥을 잡았다. 이 가닥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
       하기로 하고, 먼저 '문화이론의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적어보겠다.
         
          1.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
          2.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3. 담론은 권력이다.
         
          어느 강의에서 적은 것으로 기억되는  이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전적으로 구조주의적이며, 정치적이다. 첫  번째의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라는 문장에서의 '기호'란  꼭 글자 뿐만  아니라,
       영상기호, 패션, 건물, 도시공간, 모든 기호학적인 논의가 가능한 것들
       을 의미한다. 즉, 문화이론의 대상은 우리가(* 독자)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시간적인, 공간적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연구  대상으로 한
       다. 두 번째의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구
       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텍스트를 얼마만큼 분석해낼 수 있을까, 또한 과연 세상의 모든 것들을
       텍스트는 담고 있을까? 세 번째 '담론은 권력이다'라는 문장에서의 '담
       론'이라는 단어와 '권력'이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렇
       다면, '담론discourse'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담론들은 그것이 형성되는 제도와 사회적 실천의 종류에  의해, 그
       리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말을 하는 상대의 위치(position)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담론의 영역은 동질적이지 않다. 담론은 사회적이다.
       어디서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진술이 만들어지고 단어와 단어의 의미가
       사용된다. (... ...) 모든 제도(institution)에는 개인에게  배당된 담
       론이 있고, 담론의 위계질서(hierarchy)가 있다."
          - <<담론이란 무엇인가>> 다이안 맥도넬(임상훈 역. 한울) 11쪽에서
       12쪽.
         
          간략하게 인용하였지만, 인용된 부분을 통해서  보자면, '담론'이라
       는 단어가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해됨을 알 수 있다(*  '권력'이라는 단
       어에 대해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즉,세 번째  문장인 '담론
       은 권력이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지배담론을 쥐고 있는  자에게 권력
       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 이론이 우리 인문학의  주된 흐름
       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일까?
         
          먼저, 문화연구는 유럽의 학문이라는 점이다.
         
          "전체성, 그리고 분리되고 복잡한 부분들을 연결시키는 합리적 틀에
       기초한 설명이 위대한 대륙적 사고 체계의 특징이다."(이안 챔버스. 25
       쪽. 재인용)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니? 즉, 문화연구는 유럽적 학문의  한 경향
       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 먼저 '문화연구'를
       수입함에 있어 저 꼴 사나운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는 것부터  비판,
       분석하여 없애는 일부터 필요하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국내의 인문학연구자들은 서구의 그것을 무비판적
       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한 예로, 영국의 문화 연구에서 '하위
       문화sub-culture'에 대한 연구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짐으로해서 국내
       연구자들도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영국의 하위문화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
       을까? 폭주족(?), 혹은 건달(?) 양아치(?)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 부류
       의 문화가 그들의 하위문화일까? 내가 보기엔 전적으로  다르다고 생각
       된다. 영국의 하위문화적 전통은  젊은 세대의 부모세대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그 이전 세대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폭주족 문
       화는 팝문화영향 때문이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폭주족이었거나, 혹은
       그 비슷한 문화를 향유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너무  쉽게
       연구를 하려는 것같아 안타깝다.(* 연구를 하려면,  먼저 하위문화라는
       단어 자체부터 우리 실정에 맞게 새로 정의내려야 할 것이며,  또한 그
       것은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영국의  문화연구는
       그들의 인문학전통, 특히 영문학  전통에서 벗어나 이루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영국 문화연구자들이  이전엔 문학연구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때문이었다(*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좌
       파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연구는 전통 때문이라기 보
       다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엔
       임상훈처럼 문학을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  해석한다(;<<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 역자서문에서)). 하지만, 그 정치적인 이유는  이미 퇴색되
       어졌다. <<문화과학>>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문화'에 대해서 공개적
       인 채널을 통해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들 문화
       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문화과학>>이 노렸던 정치
       적인 목적은 이루어진 것같지 않으며, 문화담론들은 지배권력의 이데올
       로기로 이용되거나, 상업자본의 그것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
       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존재가 순수예술이다(* 필자의  순수예술에 대한
       사랑을 용서하시라). 여기에 대해선 다분히 감정적인 어조로 <<K에게>>
       라는 글에서 언급했음으로 그냥 넘어가겠다.
         
          글이 서평적인 성격을 넘어서버리고 말았다. 읽는 사람 각자 나름대
       로 읽어주었으면 싶다. 혹시, 현재 이야기되는 '문화연구'에 대해서 알
       고 싶다면, 그래엄 터너의 <<문화이론입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문화이론, 문화연구 라는 말을 섞어 사용하였다. 이 두 단어의 차
       이란 거의 없다. 단지 문화연구라고 했을 때에는 영국의 그것을  더 상
       기시키기는 하지만, 별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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