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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도. 그래서 그 조각이나 파편들을 이어붙여 우리가 이해가능하거나 수용가능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학문적/이론적 시도는 애체로 불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이나 그 삶 속의 사람들, 사건들, 이야기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그 조작과 파편들의 일부이거나, 그 일부를 묘사한 글이나 풍경이 전부이지 않을까. 그리고 기시 마사히코의 이 책,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생각'(7쪽)으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은 정리되지 못한 채 겉돌기만 하고 '원래 이렇지, 뭐' 식의 자조로 끝난다고 할까. 그런데 이 자조 앞에서 우리들은, 독자들은 이론적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무너진다. 기시 마사히코가 펼쳐놓는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 앞에서, 이야기들 속에서 결국 마주하는 건 쓸쓸한 우리들이거나 어디로도 갈 곳 없고 공감받지 못하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기시 마사히코는 구술 조사를 주로 하는 사회학자다. 


사회학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활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왔다. - 9쪽 



여기에는 다 쓸 수 없지만 구술 조사의 현장에서는 이렇듯,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난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구술현장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널려 있다. 사회학자로서는 실격인지 모르지만, 언젠간 '분석할 수 없는 것'만 모아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 13쪽 


이 책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호소력이 있으며 애잔하다. 


아버지는 수감되고 어머니는 증발되고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맡겨졌으니 아무도 없는 방이 되었는데도, 악취와 해충에 대한 민원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어왔다. 그래서 아파트 관리 회사의 입회 아래, 그 분이 여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곳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가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텅 빈 깨끗한 방이었다고 했다. - 62쪽 


학문의 테두리 안으로 모이지 않지만, 어찌되었건 우리 삶이며 일상이고, 우리가 길을 가며 마주치게 되는 이 도시의, 이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딱히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이 수행해왔던 사회학적 연구 속에서, 그 연구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저마다의 사연으로 누군가에게 알려지길, 읽히길, 그리고 읽혀졌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으로 이렇게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일지도.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 80쪽 


우리들은 '책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어떤 참여를 하게 된다. 소극적 형태의, 작은 공유이거나 공감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다.  


네모진 종이책은 그대로 온전히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네모난 창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으면 실제로는 자기 집이나 거리 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여기에 없는 어딘가 '바깥'이 있고, 자유롭게 문을 열고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가 오면 진정 창과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풀쩍 뛰어나가는 것이다. - 82쪽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타인에게 무신경한 현대의 우리들. 그렇다고 해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에게 신경 써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좁은 지구에, 다 같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만 알아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저마다의 쓸쓸한 사연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아주 작은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것이 고통 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는 '구조'를, 우리는 일체의 감동이나 감정을 빼고,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각자가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라는 것을 조용하게 나눌 수 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 141쪽 


기시 마사히코(岸政彦)

사진 출처: http://www.hankookilbo.com/m/v/9716234b333841bb96d0651e0d0ad18a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10점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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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알랭 투렌(지음), 고원(옮김), 당대 








다소 급하게 읽은 것일까. 투렌이 이야기하는 ‘2와 2분의 1 정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미심쩍긴 하다. 실은 이런 고민할 시간이 없다. 내일은 월요일, 출근을 해야 하며, 나를 기다리는 몇 개의 회의가 있고, 내가 채워야 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도 월급쟁이인 형편에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상한 위치에 서 있으며, 똑똑하고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를 매우 싫어하는 전형적인 관리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처럼 고객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고객에게 욕을 들어가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리더의 모습을 지키려고 애쓴다.  


이런 내가 알랭 투렌의 10년도 더 지난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거나 내가 갑자기 행복해지거나 여유가 생기게 되진 않을 테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 이 책을 왜 읽은 것일까(솔직히 읽지 않은 책이 서가에 꽂혀 있으니 읽은 것일테지만).


알랭 투렌은 에필로그에서 ‘이 책은 하나의 팸플릿이 아니다’라고 적는다. 그러면서 이 책은 중립적이라고 강변한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시각이다. 비판적 시각은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기만 한 것에서 하나의 계획을 찾아내도록 자극하는 [행위자들과의] 교감에 의해 주어져야 하며, 동시에 사건 속에서 뒤섞여 있는 의미들을 구분해내기 위해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즉각적인 동의를 얻거나 인기를 모으기는 힘들다. 

- 225쪽 



책은 지극히 1999년의 프랑스적 상황 아래에서 쓰였고 그렇게 읽힌다. 공공부문 파업이 극에 달했고 좌파, 우파 정부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1999년의 프랑스 파리. 하지만 199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이 2014년 한국에서 설득력을 가진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파업이나 정치적 시위 등의 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으며, 연이은 보수 정권에 의해 공중파를 비롯한 주류 미디어까지 편향된 보도 행태를 보이는 지금, 우리가 이 책에 기대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신의 이념과 갈등, 희망들을 가로지르면서 그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곳곳에서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 21쪽 



나는 다음 세 가지 이념을 옹호할 것이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가 우리의 정치적 행동능력을 앗아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둘째, 절대적 소외계층들은 지배에 대항하는 봉기를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권리의 요구 - 특히 문화적 권리의 요구 - 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혁신적인 개념화를 통해 행동한다.

셋째, 제도적 질서가 평등과 연대에 대한 요구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이기까지 하다.

- 23쪽 



그는 전 지구화(Globalization)은 이데올로기적 공갈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는 프랑스의 극좌파들은 이 이데올로기적 공갈을 더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극좌파는 현실적인 대안 없이 공격적인 문제 제기와 투쟁을 위해 전 지구화 담론과 대항해 자신들을 위치지운다고 본다. 


그리고 알렝 투렌은 전 지구화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파편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사회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이 책에서 ‘파편화’에 대한 심도 깊은 언급은 없다. 그래서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으나, 투렌의 책은 딱 2권만 번역되었고 그 마저도 절판이었다.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건가. 프랑스 최고의 사회학자 중 한 명인데)





이 책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세 번째 비판 방식은 긍정적인 행동들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모든 표상과 싸우고 있다. 여기서는 새로운 행위자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권리와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또 오늘날 새로운 행위자들의 부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본다. 저항과 반대 세력들은 이미 낡아버린 경제적 모델 - 오래 전부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좋지 않은 결과들이 그 자체의 성장을 막아버린 모델 - 의 옹호에 몰두하기 때문에, 20여 년 전부터 약화되어 온 행동능력을 재건하는 것은 오직 이 같은 문화적 권리를 요구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들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황을 분석하고 존재 가능한 행위자들을 정의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 정책의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 

- 28쪽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행위자들에 의한 권리와 정체성,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지구화는 지배세력의 보다 고효율의 의사소통 체계를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모든 주체성과 사회적 보호와 집단 기억과 사적인 계획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로부터의 구원은 지배당하는 이들과 그들의 지지 속에서 나와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오직 노예 그 자신일 뿐이라는 생각은 헤겔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역시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바로 이들이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평등과 노동 권리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며 또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 80쪽 



결국 투쟁은 단지 지배질서에 대한 대항으로써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가치들의 이름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사회와 진보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반대했다. 자유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식민지배에 투쟁했다.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행방과 신체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운동은 사회전체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었다.

- 110쪽 



알랭 투렌. 1925년생인 그는 아직도 왕성한 활동하고 있다.



책은 짧지만, 나는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이런 책들도 계속 읽어야 쉽게 읽을 수 있는 듯), 결국 이론을 지나 실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기에 나로선 더 힘들었다. 최근 들어 나의 변화 -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고려에 하염없이 끌려 다니며,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식적인 이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현 경제 상황이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그저 지나가는 생각에 머물 뿐이었으며, 누군가와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본 적조차 없다. 이런 변화가 솔직히 나로선 황당하지만(나는 이런 시절이 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한국의 40대 대부분이 이런 상황일 것이다. 


현실 정치의 문제는 우리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나, 현실 정치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개인들은 참으로 많은 시간 투자와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한다. 어쩌면 첨예화된 기업 활동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정치적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강요함으로서 바람직인 정치의 부재를 통한 자본 이익의 극대화를 꿈꾸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알랭 투렌은 이 책에서 ‘비판적 시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결국 지배당하는 이들에 의해서 이 세계는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시간은 빼앗겼으며, 우리 스스로 행위자임을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나도 투렌이 거부하는 비관주의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부언하자면, 책의 주요 논지는 기존 좌파적 활동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우파나 전 지구화와 같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그걸 위해서우리는 투자를 해야 한다.) 


‘힐링’ 따위로 청년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창업’ 열풍으로 우리의 물질적 빈곤이나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는 불순한 이데올로기 이며, 하나는 개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면서 정부와 유관 기관들의 지원 정책으로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알랭 투렌의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어떤 실천의 어렴풋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프란츠 파농이 생각했던 것처럼,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주역 역시 식민지지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식민지인들, 다른 문화에 이미 확고하게 적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 82쪽 





어떻게자유주의에서벗어날것인가

알랭투렌저 | 고원역 | 당대 | 2000.11.06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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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M이라고 하면, Digital Right Management만 아는 나에게, Day Reconstruction Method는 생소했다. 이에 관련 자료 하나를 찾아 프린트해놓았는데,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이 조사방법론은 각 개개인들이 영위하는 삶의 질을 조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내가 프린트해놓은 자료는 Approaches to Well-being이라는 슬라이드가 문서 첫 장에 등장한다. 


조사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어제의 일을 사적인 내용들까지 포함해서 적는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각각의 이야기들로 나누어서 리스팅을 해야 하며, 해당 이야기마다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기술해야 한다. 그리고 각 이야기마다 시간도 적는다. 


그 다음에는 기술된 어제의, 이야기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 

- 집인지, 직장인지, 그 외의 장소인지 

- 혼자, 아이와, 가족과, 친구와, ... 등등 같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인지

- 해당 활동이 무엇인지, 출근 중인지, 일하는 것인지, 쇼핑인지 ...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해당 이야기에 대한 감정적 상태의 평가를 진행한다. 0에서부터 6점 척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감정적 상태의 평가 항목들은 아래와 같다. 


Impatient for it to end

Happy

Frustrated/annoyed

Depressed/blue

Competent/capable

Hassled/pushed around

Warm/Friendly

Angry/hostile

Worried/anxious

Enjoying myself 

Criticized/put down

Tired 


이를 통해 DRM은 수행되며, 실제 결과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루 중 행복한 때는 2시간 42분 뿐 http://blog.daum.net/solista/2338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연구 결과가 아니라, 이러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조사 방법론을 세울 수 있는 연구자들이었다. 아마 이 조사방법론으로 다른 것들도 조사할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례를 찾지 못했다. 나 또한 다른 프로젝트 관련 문서에서 DRM을 발견하고 자료를 찾아놓았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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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10점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새물결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지음), 김덕영, 윤미애(옮김), 새물결 



국내에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 ~ 1918)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였으며(신칸트주의자이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다), 사회학, 미학, 문화비평을 아우르며, 동시에 그의 글들은 대부분은 현대 문명이나 문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정신, 일상, 태도, 형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고, 그의 문장은 짧으면서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런 글을 썼다는 점에서 놀라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발터 벤야민 이전에, 그 누구도 이런 식의 글을 본격적으로 선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57쪽)이고, 이 형식 밑에는 ‘모방’이라는 태도가 흐르고 있다. ‘모방은 우선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투자되는 에너지가 헛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56쪽).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이 거의 없는, 쓸모 없는 개인적 차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게오르그 짐멜을 읽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확실히 그는 한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새벽에 읽어나, 지난 몇 주간 읽었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끝냈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번뜩이는 짐멜의 통찰력은 놀라웠지만, 전체적으로 '짐멜의 사회학이란 배부른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쓸모없는 지적 유희'라는 주류 학계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부분적 동의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짐멜은 그의 지적 재능을 낭비한 경향이 심했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은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역자가 고르고 고른 글이었을 텐데 말이다. (2013. 4. 8) 


적어도 그는 전통적 인문학이 원하는 바의 '어떤 체계'를 벗어나 인상적이고 표피적인 일상의 현상을 분석하였다. 그는 편지, 식사, 유행, 손잡이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글을 썼다. 그의 글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시도 자체가 마치 유행과도 같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어떤 것에 대한 감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감상이 아무리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도 하더라도 그는 짧은 글들을 적었고 학문의 체계를 향하던 그 당시 다른 학자들 - 뒤르켐, 베버 등 - 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력하게 짐멜 읽기를 권하는 것은, 내일 아침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무너져 저 깊은 아래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가지고, 돈과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불편한 타협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게오르그 짐멜 만한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짐멜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험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삶의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형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전체성이란 개별적인 내용들이 아무리 뚜렷하고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를 지라도, 그 안에는 통일적인 삶의 과정이 관통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 외부는 내부의 형식이 된다. 비록 멀고 친숙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적 삶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 때문에 모험에 대한 기억은 쉽게 꿈과 같은 색채를 띤다. 
(204쪽) 


20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게오르그 짐멜의 전체를 알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짐멜이 어떤 사상가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래는 20개의 글 제목이다. 

- 현대 문화에서의 돈
- 대도시와 정신적 삶
- 유행의 심리학. 사회학적 연구
- 장신구의 심리학
- 이방인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손잡이, 미학적 접근
- 얼굴의 미학적 의미
- 양식의 문제
- 알프스 여행
- 식사의 사회학
- 감각의 사회학
- 감사. 사회학적 접근
- 신의. 사회학적 접근
- 편지. 비밀의 사회학
- 모험
-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
- 비밀, 사회심리학적 스케치
- 분별의 심리학
- 다리와 문 

특히 몇 편의 글들은 놀라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현대 문명/문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미학적 분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분한 호소력을 가진다.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경건함, 곧 신에 대한 열망을 인간 영혼의 항구적인 상태로 만든 최초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서 그 이전의 신앙 형식들은 종교적 분위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연결시켰다.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돈이 바로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사람들이 빈번히 탄식하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물론 거기에서 돈에 대한 표상과 신에 대한 표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관련성들을 밝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심층적인 본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과 대립은 신을 통해서 통일성에 도달하게 되며, 또한 신은, 중세 말기의 저 특기할 만한 근대정신인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sa,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순의 지양 - 또는 대립의 지양 - 이라는 사실이다. 존재의 모든 낯섦과 화해 불가능성은 신에서 통일성과 화해를 발견한다는 이 이념으로부터 평화, 안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 유래하는데, 이 감정은 신에 대한 표상 및 우리가 신을 소유한다는 표상과 결부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돈이 자극하는 감정들은 이것과 심리학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27쪽- 28쪽) 


그의 돈(화폐)를 둘러싼 현대 문명에 대한 분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 분석은 철학적이며 문화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역자는 짐멜의 이러한 넓은 관심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다소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한 편 짐멜을 사회학자만으로 보기에는 그의 지적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원래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학 이외에도 철학, 미학,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인식 도구와 수단을 구사하면서 방대한 모더니티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거장이다. 우리는 아마도 짐멜의 지적 세계를 인식의 다신주의, 아니 어쩌면 인식의 범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85쪽) 


두서없는 서평이지만,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권한다. 이 책 이외에도 짐멜 선집 2권이 더 번역되어 있으니, 다른 책을 구해서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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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린다. 겨우 일어났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발바닥이 아팠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주문한, 드립용으로 잘게 부서진 브라질 산토스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린다. 물 끓는 소리, 위로 향하는 수증기, 떨리는 손, 돌보는 이 없는 듯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뒤엉켜 어느 일요일 아침을 구성하였다.

요즘 힘겹게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


본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사적인’이라는 용어는 공론 영역의 이러한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의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의 박탈,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 사적 생활의 이러한 박탈성은 타인의 부재에 기인한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한 사적 인간은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마치 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 사적인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타인에겐 아무런 의미도 중요성도 없으며,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한길사), 112쪽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논의는 현대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들 중 하나다. 그리고 여느 문명의 말기마다 그랬듯이 사적 영역의 강화가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다. 사적 인간의 출현은 그 동안 이루어진 공적 영역의 강화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무너지는 공적 영역 앞에서 현대 학자들의 담론은 무력하기만 하게 보인다.

세상을 길게 보면, 어느 것이 문제인지 알게 되지만, 그 해결책은 터무니 없게 거대하거나, 실현불가능하고, 또는 우리들에게 참혹스런 인내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탁상공론으로 끝나거나 어느 책 말미에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몇 세기 후에 재발견되어 빛나는 유행이 될 것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무겁고 딱딱한 커피 향 속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오가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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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프랑스의 사회학자. '시뮬라시옹'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학자이다. 나는 장 보드리야르의 암울한 사회 분석을 싫어했으며, 그것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의 끔찍함을 무시하면서 장 보드리야르를 전파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멸했다. 그들 대부분이 의지하는 책이나 이론은 오직 시뮬레이션 이론이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극단적인 반-플라톤주의자이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자면) 마키아벨리와 같은 전도된 이상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20세기 후반 이후의 매스미디어에 의해 희석되고,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사라지고 미디어들에 의해 새롭게 조작된 것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하이퍼-리얼리티나 시뮬레이션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철학의 시작부터 고매한 영혼을 아프게 했던 눈 앞에 보이는 것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에 종지부를 찍고 거짓과 가상의 승리를 예견하는 듯한 그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면서 그의 이론이 마치 포스트모더니즘 구세주인양 전파하던 국내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역겨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찬양하는 이론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사이퍼와도 같음을, 그리고 그 귀결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사람들과 만날 일도, 그런 사람들이 쓴 글을 볼 일도 없지만, 나는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울화가 치민다. 마치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설은 끝났'고 '영상(영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류의 글을 아무런 생각없이 써댄 문학이론가(문학평론가)들을 떠올릴 때마다 치미는 울화와 비슷하다. 그 때부터 한국 문학의 하향 평준화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나는, 전혀 다른 매체적 특성을 가진 소설과 영화를 마치 한 부모 밑에서 난 이복형제 다루듯 써댄 글들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웠다.

장 보드리야르. 마치 악마의 날개를 단 천사처럼...

얼마 전 나는 그가 죽기 전에 쓴 '세계화의 폭력성'이라는 글을 읽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키아벨리를 떠올렸다. 전도된 이상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를. ... 어찌되었건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의 분석에 있어서 탁월한 시각으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며,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나, 끊임없이 되새겨 볼만한 통찰을 숨기고 있으며, 그의 암울한 세계관과 대결하면서 현실 세계를 꾸려나가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그 글의 일부를 옮긴다. 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써, 유용한 시사점을 담고 있는 글이라 여겨진다. 이 글은 르 몽드 디플로마크 2008년 12월 한국어판에 실렸다.


세계화의 폭력성


- 원래 보편성은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런데 이데아가 세계화 속에서 현실화 되면서 이데아는 이데아로서 자멸하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인간이 그 본보기다. 인간은 죽은 신의 빈자를 차지한 뒤, 세상을 홀로 지배하게 됐지만, 최종적 이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적이 없어진 인간은 적을 내부에서 키우며, 비인간적인 종양 덩어리를 분해낸다.

- 바로 여기로부터 세계화의 폭력성이 생성된다. 즉 모든 형태의 거부, 나아가 최후의 죽음 같은 모든 형태의 기이함까지도 몰아내는 시스템의 폭력성과, 사실상 알력과 죽음이 금지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폭력성과,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 폭력성 자체를 종식시키고 모든 자연적인 질서, 몸, 성별, 탄생 혹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동되는 폭력성 등이 그것이다.

- 폭력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유해성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왜냐하면 그 폭력성은 바이러스성이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염되고 쇠사슬처럼 엮어져 반응하며, 서서히 우리의 모든 면역력과 저항능력을 파괴한다.

- 누가 세계화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까?

-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긍정적인 양자택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로부터 나온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특이성들. 그 특이성들은 양자택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규칙을 따른다. 가치 판단이나 현실 정치의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 특이성들은 최상 혹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 종교적인 교리만큼이나 교조주의적인 세계 권력은 모든 형태의 다양성과 개성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교조주의 적 논리 아래, 모든 다양성과 개성들은 좋든 싫든 간에 세계의 질서를 따르든지,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 한쪽의 일방적인 기부는 권력행사다. 선(善)의 제국, 선의 폭력성은 바로 보답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혹은 노동(하지만 노동은 상징적인 보상이 못된다. 결국 폭동이나 죽음이 유일한 대응책이다)을 빌미로 노예의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는 주인을 대신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도움을 줄곧 받아야 하는 무자비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굴욕당한 사람들과 모욕당한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세계화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테러리즘 또한 총체적인 테크놀로지, 절망적인 가상(virtuelle)의 현실, 그리고 '세계화되어' 퇴락한 모든 종과 인류의 윤곽을 그려낼 네트워크와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근간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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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뮬라시옹이 뭔가 한참 고민했는데
    시뮬레이션을 프랑스어로 발음한거로군요;;

    사실 이번 글은 대부분 이해도 못했고 대략적인 그림만 그려질 뿐인데요.

    저는 여느 작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만 보더라도 세상의 흐름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쉽게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필름 표면 위에 빛을 이용해서 새기는 것으로 시작한 사진이
    기술을 타고 발전해서 현재까지 이르렀고
    그를 통한 각종 manipulation과 alteration이 있었고,
    결국에는 필름을 넘어서서 전자신호로 이뤄지는 디지탈시대에 이르기까지 했지만,
    필름은 단지 생산량이 줄어들었을 뿐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사랑받고 있으며
    단종시켜버린 폴라로이드 필름또한 수많은 매니아들의 영향으로
    생산공장이 다시 생길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 글쎄요.
    이쪽 분야를 전혀 모르는 제가 보기에는
    역사, 인생, 시대를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걸로 바라본다라고만 생각되네요.
    사람의 삶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건 사실이지만
    애기가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다시 애기가 된다고 하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말만 길었지.... 저도 먼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_-

    •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민음사)나 리처드 J.레인의 '장 보드리야르, 소비하기'(앨피)를 한 번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장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특히 현대 매체 예술(미디어 아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약간 어렵긴 하지만, 한 번 읽어봐도 될 것같아요. ^^

    • 어... 어렵네요 그냥 이렇게 보기만 해도;;;
      기회가 되면 찾아보겠습니다만...;;;
      이건 한글이던 영어던 못 알아보겠는걸요;





사회변동의 이론 Theories of Social Change
리차드 아펠바움 R.P.Appelbaum 지음, 김지화 옮김, 한울


오래된 책이라 지금 시중 서점에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문학 전공자라면 꼭 읽을 책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집에 온 사람 중에 사회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친 분이 있었는데, 방에 꽂힌 하버마스 책을 보고는 '이런 책도 읽어요'하면서 묻던 것이 기억난다. 도리어 난 그 물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상식으로는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역사서와 철학서는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문화이론서니 기타 비평서들을 읽어야 한다. 그러니깐 기본적인 책은 다 읽어줘야 한다. 대학에서, 대학원에서 이런 상식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으니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너무 어렵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인문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어려운 학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이다. 사법고시생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이 인문학도다. 예일대의 인문학 대학원에서는 힘든 인문학 전공을 포기하고 가는 곳이 로스쿨이나 경영대학원이라고 한다. 이야기가 잠깐 딴 곳으로 흘러갔는데,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요하임 빙켈만은 책을 읽기 위해서 하루 4시간만 자기 위해서 잠 습관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인문학자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주위에 알고 있는 위엄 있으신 대학 교수님들부터 살펴보라. 이런 사람이 몇 분 있는지.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어낸 원인이다. 인문학의 위기가 있다면 말이다.

서두부터 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은 사회학 책이고 사회학 전공자들만 읽어야 된다는 편견을 버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가령 미술사를 전공하는 이가 제일 먼저 읽어야 할 책은 서양철학사와 서양지성사, 서양문화사이다. 이러한 총론을 읽고 난 다음 각 개별 학자나 시대에 대한 서적을 읽어야 된다. 쓸데없이 화집 들고 다닌다고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사는 역사학의 한 분과학문이다. 그림책 보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는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신기한 일이다. 책 좀 더 읽고 시간 아껴가며 공부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으라고 주문하는데 말이다. 여하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자.

아펠바움의 이 책은 사회 변동에 관한 여러 학설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사회 변동 Social Change에 관해선 이 책 한 권 정도는 읽어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그냥 한 권 통째로 외워둬야 되지 않나 싶다. 그러니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베끼는 편이 마음이 편하지.

간단하게 목차를 살펴보자.

머리말 - 예비적 정의
1. 진화론
1) 고전적 진화론: 진보의 관념
1. 찰스 다아윈
2. 단선적 사회진보이론
3. 유기체 이론: 전문화, 분화 및 통합
2) 진화론의 현대적 변형
1. 근대화론 또는 통시적인 단선적 변동이론
2. 기능주의와 체계이론의 여러 측면들: 적응성 향상
3. 신진화론: 다선적 진화, 일반적 진화와 특수적 진화
2. 균형이론 - 항상성 homeostasis 개념
1) 생물학에서의 유추
2) 사회과학에서의 이용
1. 기능주의와 체계이론
2. 문화지체이론
3. 인간생태학이론
3. 갈등이론 - 모든 사회유기체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변동
1) 맑스주의: 변동의 변증법
2) 현대갈등이론: 맑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
갈등관념의 유지
4. 생성몰락이론 - 성장과 쇠퇴의 과정
5. 사회변동이론의 분류 및 연구
1) 사회적 변동의 연구
1. 여러 주요 이론가들이 보는 변동연구 분야의 현상태
2. 대안적 도식
2) 사회변동의 이론들


제일 먼저 진화론이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회변동에 대한 일관적 설명을 한 중요한 학자들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아마 다윈은 '과학자아냐'라고 반문할 지 모르겠으나, 다윈이 19세기와 20세기에 끼친 영향력은 마르크스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가 진보에 대한 개념, 가령 환경에 적응해나가 결국 성공하리라는 관념은 전적으로 다윈에게 의존된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성격은 마르크스에게도 나타난다. 미래에 대한 개념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었지만, 이 미래에 대한 개념을 진화, 또는 진보와 연결 짓는 것은 19세기에 와서이다.

사회 변동 이론이란 사회가 어떤 요인으로 변화하고 발전해나가는가에 대한 이론들을 말한다. 가령 사회는 복잡한 방향으로 나가는가, 아니면 단순한 방향으로 나가는가 따위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사회 변동 이론은 진화론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화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중심을 두는 이론(균형이론)과 사회 내의 갈등에 중심을 두는 이론(갈등이론), 이와는 무관하게 사회는 성장과 쇠퇴를 반복한다는 이론(생성몰락이론) 등이 있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학자들은 사회는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가령 마르크스는 사회변동을 '계급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보는데 반해 파슨스는 '균형 유지'에 무게를 둔다. 즉 사회는 어떤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내에 어떤 변동이 발생하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변동이 다시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한다.

생성몰락이론에는 슈팽글러, 소로킨, 베버 등의 학자가 속할 수 있다. 슈팽글러의 경우, 학자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그냥 수필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그의 문장은 꽤 아름답고 감동적이긴 하지만 논증의 대상은 아니다. 최근 그의 <<문명의 충돌>>이 다시 출판되기도 했지만, 웃긴 짓이다. 그를 대단한 학자로 여긴다면 매우 큰 오해다. 아펠바움도 그는 생성몰락이론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의 이론은 검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입문서로서도 매우 적당한 책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고 뒤렌도르프와 소로킨에 대해서 따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뒤렌도르프의 경우에는 마르크스의 사회변동이론을 이어받으면서 논증가능한 형태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경험 데이터로 논증가능한 형태가 아니라는 점과 20세기 들어서 그의 이론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내세운, <<공산당선언>>이나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보여준 형이상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배경에 있다. 적어도 이것은 통찰력 있는 것이며 현재까지도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로킨의 경우에는 사회변동의 체계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모든 것들과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논리적 추론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직관에 의해서 이루어진 작업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문화나 예술까지 포함시킨 그의 사회변동이론은 나로서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리처드 아펠바움의 <<사회변동의 이론>>을 꼭 구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매우 유용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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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입문 - 10점
그래엄 터너 지음/한나래


         
문화 연구 입문

그래엄 터너 지음(김연종 옮김)   한나래
          


         
          이 책의 원제는 <<British Cultural Studies>>이다. 즉,  제목 그대
       로 영국의 문화 연구 전통에 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입문서라고 해
       서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서이기 때문에, 꼼
       꼼히 읽을 필요가 있기도 하다.
        
          이 책의 구성은 제 1부  기본 원칙들-<제 1 장 문화  연구의 이념>,
       <제 2 장 영국의 전통:간략한 역사>. 제 2 부 중심 범주-<제 3 장 텍스
       트와 맥락>,<제 4 장 수용자>,<제 5 장 민속지학, 역사학, 그리고 사회
       학>,<제 6 장 이데올로기>.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문화연구(혹은 문화이론)에 대한 교양강좌가  각 대학교(원)나
       사설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곳에
       서 이루어지는 강의는 절대로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난
       다면, 그건 강의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문화연구(문화이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적
       이 있었음으로해서 몇 권의 책과 여러 강의에도 가보았지만, 알  수 없
       는 묘한 반감같은 것이 있었다. 그 당시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
       만, 최근에 들어 약간의 가닥을 잡았다. 이 가닥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
       하기로 하고, 먼저 '문화이론의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적어보겠다.
         
          1.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
          2.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3. 담론은 권력이다.
         
          어느 강의에서 적은 것으로 기억되는  이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전적으로 구조주의적이며, 정치적이다. 첫  번째의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라는 문장에서의 '기호'란  꼭 글자 뿐만  아니라,
       영상기호, 패션, 건물, 도시공간, 모든 기호학적인 논의가 가능한 것들
       을 의미한다. 즉, 문화이론의 대상은 우리가(* 독자)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시간적인, 공간적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연구  대상으로 한
       다. 두 번째의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구
       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텍스트를 얼마만큼 분석해낼 수 있을까, 또한 과연 세상의 모든 것들을
       텍스트는 담고 있을까? 세 번째 '담론은 권력이다'라는 문장에서의 '담
       론'이라는 단어와 '권력'이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렇
       다면, '담론discourse'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담론들은 그것이 형성되는 제도와 사회적 실천의 종류에  의해, 그
       리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말을 하는 상대의 위치(position)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담론의 영역은 동질적이지 않다. 담론은 사회적이다.
       어디서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진술이 만들어지고 단어와 단어의 의미가
       사용된다. (... ...) 모든 제도(institution)에는 개인에게  배당된 담
       론이 있고, 담론의 위계질서(hierarchy)가 있다."
          - <<담론이란 무엇인가>> 다이안 맥도넬(임상훈 역. 한울) 11쪽에서
       12쪽.
         
          간략하게 인용하였지만, 인용된 부분을 통해서  보자면, '담론'이라
       는 단어가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해됨을 알 수 있다(*  '권력'이라는 단
       어에 대해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즉,세 번째  문장인 '담론
       은 권력이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지배담론을 쥐고 있는  자에게 권력
       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 이론이 우리 인문학의  주된 흐름
       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일까?
         
          먼저, 문화연구는 유럽의 학문이라는 점이다.
         
          "전체성, 그리고 분리되고 복잡한 부분들을 연결시키는 합리적 틀에
       기초한 설명이 위대한 대륙적 사고 체계의 특징이다."(이안 챔버스. 25
       쪽. 재인용)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니? 즉, 문화연구는 유럽적 학문의  한 경향
       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 먼저 '문화연구'를
       수입함에 있어 저 꼴 사나운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는 것부터  비판,
       분석하여 없애는 일부터 필요하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국내의 인문학연구자들은 서구의 그것을 무비판적
       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한 예로, 영국의 문화 연구에서 '하위
       문화sub-culture'에 대한 연구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짐으로해서 국내
       연구자들도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영국의 하위문화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
       을까? 폭주족(?), 혹은 건달(?) 양아치(?)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 부류
       의 문화가 그들의 하위문화일까? 내가 보기엔 전적으로  다르다고 생각
       된다. 영국의 하위문화적 전통은  젊은 세대의 부모세대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그 이전 세대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폭주족 문
       화는 팝문화영향 때문이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폭주족이었거나, 혹은
       그 비슷한 문화를 향유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너무  쉽게
       연구를 하려는 것같아 안타깝다.(* 연구를 하려면,  먼저 하위문화라는
       단어 자체부터 우리 실정에 맞게 새로 정의내려야 할 것이며,  또한 그
       것은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영국의  문화연구는
       그들의 인문학전통, 특히 영문학  전통에서 벗어나 이루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영국 문화연구자들이  이전엔 문학연구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때문이었다(*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좌
       파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연구는 전통 때문이라기 보
       다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엔
       임상훈처럼 문학을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  해석한다(;<<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 역자서문에서)). 하지만, 그 정치적인 이유는  이미 퇴색되
       어졌다. <<문화과학>>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문화'에 대해서 공개적
       인 채널을 통해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들 문화
       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문화과학>>이 노렸던 정치
       적인 목적은 이루어진 것같지 않으며, 문화담론들은 지배권력의 이데올
       로기로 이용되거나, 상업자본의 그것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
       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존재가 순수예술이다(* 필자의  순수예술에 대한
       사랑을 용서하시라). 여기에 대해선 다분히 감정적인 어조로 <<K에게>>
       라는 글에서 언급했음으로 그냥 넘어가겠다.
         
          글이 서평적인 성격을 넘어서버리고 말았다. 읽는 사람 각자 나름대
       로 읽어주었으면 싶다. 혹시, 현재 이야기되는 '문화연구'에 대해서 알
       고 싶다면, 그래엄 터너의 <<문화이론입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문화이론, 문화연구 라는 말을 섞어 사용하였다. 이 두 단어의 차
       이란 거의 없다. 단지 문화연구라고 했을 때에는 영국의 그것을  더 상
       기시키기는 하지만, 별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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