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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계절과 계절 사이. 도로와 도로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사이에 앉아 책을 읽으며 창 밖과 창 안쪽을 번갈아 바라다보았다. 풍경 안에 있지만, 풍경 밖으로 계속 밀려나갔다. 단어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문장이 되지 못했다. 복 없는 단어들이여. 결국 사라질 것들이다. 


고비 사막에서 발견되었다는 미이라의 뉴스가 떠올랐다. 하지만 가고 싶은 곳은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모두 사막 속으로 사라질 지도 모를 일이다.


토요일 오전, 동네 카페에 앉아 이 사람, 저 사람 보면서 잠시 나를 잊었다. 내가 있는 곳, 내가 처한 곳, 내 앞 절벽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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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시간이 사라졌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니 말이다. 주말 집 근처 공원을 산책했고 늦봄 꽃 향기에 취했다. 그 향긋한 내음 사이로 아이는 웃고 뛰었다. 


그리고 월요일이다. 주말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채, 다시 월요일을 시작한다. 지난 금요일에 면접을 봤던 웹 개발자는 출근하지 않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문자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꽤 상심했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된다. 혼자 고민해야 될 문제는 아니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에만 신경 쓰기도 바쁜데 말이지. 


다시 월요일이다. 그리고 비가 온다. 비를 맞으며 출근 했다. 팻 메쓰니의 음반을 뮤직 사이트에서 찾아보았으나, 없다. 비오는 날, 나는 팻 메쓰니의 New Chautauqua를 즐겨 들었다. 캘리포니아 어딘가의 지명이다. 하지만 가고 싶진 않다. 너무 쓸쓸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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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창동거리에서 어시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 동성동인가, 남성동 어디쯤 있었던 레코드점에 들어가 구한 음반이 쳇 베이커였다. 그게 94년 가을이거나 그 이듬해 봄이었을 게다. 그 때 우연히 구한 LP로 인해 나는 재즈에 빠져들고 있었고 수중에 조금의 돈이라도 들어오면 곧장 음반가게로 가선 음반을 사곤 했다.


어제 종일 쳇 베이커 시디를 틀어놓고 방 안을 뒹굴었다. 뒹굴거리면서 스물두 살이 되기 전 세 번 정도 손목을 그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삶의 치열함이라든가 진정성 같은 거라든가.


스무살 가득 나를 아프게 했던 이들 탓일까. 아직까지 인생이 어떤 무늬와 질감을 가지고 있는지 도통 아무 것도 모르겠다. 문학도, 예술도 마찬가지다. 이집트 예술가의 진정성과 현대 예술가의 진정성은 전적으로 다른 양식을 향해 간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고 내가 누군가에게 탓함을 당할 이유도 없다. 나라는 개별자만 있을 뿐, 보편적인 개념으로 날 구속할 순 없다.


그런데 이 얼마나 슬프고 기가 막힌 일인가. 내 삶의 가치나 의미 같은 건 순전히 내 속에서만 존재 가치를 가질 뿐, 이 건조한 도시의 거리에선 아무 가치도,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니.


누군가 내 옆에 누워 자기가 누렸던 사랑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내 사랑의 흔적을 물었던 적이 있었던 것같다. 기억의 아련함. 그 때 내가 한 말은, 사랑은 지나가면 그저 잊혀질 뿐, 그걸 되새기기 위해, 그걸 되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 ..., 그런데 과연 그런 걸까. 하긴 그 때 내 옆에 누워있던 그 이는 바로 떠나버렸고 그 이후 소식을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꿈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쓴 소설 속이었나.


과거는 중첩되어 쌓여져가고 가끔 내 마음 안 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만 되살아날 뿐이다. 그냥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뿐. ‘이제 네가 싫어졌어. 그 뿐이야’라고 말했던, 나에게 청혼했던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가끔 과거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내 폐 깊숙한 곳의 H2O를 사라지게 한다. 금세 호흡곤란을 느끼며 자리에 눕는다. 그렇게 누워 남극의 얼음들처럼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그렇게 잠만 잤으면. 우리 인간이 아는 영원함이란 고작 몇 천 년이거나 몇 만 년 수준이다. 영원함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개념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상상적 개념은 너무 많고 그런 개념에 목을 매는 꼴이라니.


당인리 발전소 안 길에 벚꽃이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하지만 꽃향기는 내 몸에 닿지 못한 채 강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꽃을 입 안 가득 씹어 먹지 않는 한, 순결한 꽃향기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리고 말을 건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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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리 발전소 안의 벚꽃길


오늘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를 타고 행주대교 옆으로 들어가 강을 따라 올라갔다. 계속. 계속. 가양. 양화. 성산. 서강대교를 지나 여의도로 들어갔다. 여의도를 지나가 한강대교까지 올라갔다. 계속 올라가고 싶었다. 계속 올라가면 양수리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양수리를 지나 계속 올라가고 싶었다. 계속 오르고 오르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곳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한강대교를 건너 동부이촌동으로 들어와 다시 김포공항 쪽으로 향했다.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지쳐갔다. 한강을 보면서 오늘 산 자전거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자전거를 ‘풍륜’이라고 부른다는데, 나는 내 자전거를 뭐라고 붙여야할까.


내 자전거의 이름은 ‘머저리’다. 너무 좋은 이름인 것 같다. 머저리. 머저리. 머저리. 이 세상도 머저리고 나도 머저리다.


다시 양화대교에서 강을 건너 행주대교 아래까지 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있었고 방화동으로 들어가기 전 강가 매점에서 맥주캔 하나를 먹었다. 바람에 내 다리가 흔들거렸다. 아, 머저리를 타면 바람에 흔들거릴 정도로 내 몸도 가벼워진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고 나면 일요일 밤도 자정을 향할 것이고 알게 모르게 월요일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고, 그러다 보면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사소한 위안처럼 느껴지는 밤이다. 서글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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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동에서 나오면 있는 강서 한강시민공원. 한강 하구인지라, 좁은 물길을 따라 있는 바다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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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가양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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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강시민공원 앞 강물 위의 백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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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내 인생의 카아~를 위한 캔 맥주 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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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난데없이 자전거 가게를 방문한 이에게 팔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내 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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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한길사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고 느낄 때, 진정으로 그러하다고 느낄 때, 그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몇 가지 밖에 없다. 그 첫 번째가 죽음이며, 그 두 번째는 죽음이 무서워 벌벌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정도. 그 외에도 있겠으나 내가 아는 바는 이 두 가지뿐이다.

그러니 그-루소-가 정말 '고독'했는지는 두고볼 일이다. 이 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의 두 가지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하나는 그 나쁜 놈들, 자신을 미워하고 모함했던 자들에 대한 증오이며 나머지 하나는 그 증오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산책'이란 삶의 거친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행위들 중의 하나이다. 루소의 산책은 그러한 매력이 그저 산책이라는 행위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 논리와 감정, 합리와 모순 사이에서 갈등하며 스스로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 혼자다. 오직 나 자신뿐,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애정이 넘치는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에게서 만장일치로 추방되었다."


"행복이란 이승의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어떤 항구불변의 상태다. 지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아무 것도 불변의 형태를 갖지 못한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우리 자신도 변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가 오늘 사랑하는 것을 내일도 사랑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처럼 인생을 위한 우리의 모든 지복의 계획들은 망상일 뿐이다."


아무렇게나 인용한 두 단락 속에서 루소가 바라보는 세계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과 대치되는 곳에 '산책의 세계관'이 위치한다. '자연관'이라고 해야 더 옳을 듯한 루소의 그 세계는, 솔직히 나에겐 별 호소력 없는 세계다. 그건 늙은이의 세계다.

이렇게 말해도 옳다면 실존의 세계에서 방황하다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나온 세계관이라 칭하고 싶다. 난 끔찍하기 그지없는 실존의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루소의 '산책의 세계관'은 감동적이지 않다. 차라리 그의 증오가, 그의 미움이 더 매력적이다.





고독한산책자의몽상-개정

장자크루소 저 | 김중현 역 | 한길사 | 2011.01.07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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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책'이란 삶의 거친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행위들 중의 하나이다." 멋진 문장입니다. 지하련 님의 글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이 책이 보고 싶어지네요.^^

    - 현선 드림

    • 읽어볼 만합니다. 루소가 워낙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해요. ^^~. 이 책을 읽은 지도 꽤 되었네요. 올핸 루소의 다른 저서 한 권 정도 읽어야겠군요. 그리고 너무 과찬이세요. ^^ 이 책을 쓸 당시 루소의 처지가 그랬고, 그걸 문장으로 적어본 것에 불과합니다. ㅎㅎ

  • 2014.01.24 18:41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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