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지음), 김수희(옮김), AK 



강상중 교수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소개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의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이름을 쓰는 재일한국인으로, 그리고 일본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한국과 일본 너머 어떤 곳을 지향하는 듯하다. 적어도 강상중을 읽는 일본인 독자나 한국인 독자는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식견을 가졌을 것이다. (손정의도 이와 비슷하고 그는 이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넘어 세계인이 되었으니까)


이 책은 강상중 교수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안내서이다. 나쓰메 소세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오에 겐자부로를 지나 나쓰메 소세키로. 그 중에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단연코 최고다. 이는 그가 일본소설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이미 20세기 전체를 물들이게 될 어떤 근대성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강상중 교수는 <<살아야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출판사)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강상중 교수는 이 책에서 가볍고 부드럽게 그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를, 그리고 소세키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소세키의 생애와 주요 소설들에 대해 스케치를 하며 소개하고 있다.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집단적으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가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시민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 <<나는 고양이로서이다>> 중에서 


어쩌면 반-시대적이며 지식인 중심적인 소세키의 소설을 부담스러워할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나 또한, 아직 <<나는 고양이로서이다>>를 읽지 않았지만, 소세키 소설이 가진 태도를 이 책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할까. 


그리고 몰랐던 사실 하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대해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속에서 매우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소세키 소설이 시대를 넘어 감동과 울림을 가지게 된 계기가 아닐까. (1,000엔 지폐에 원래 이토 히로부미가 인쇄되었는데, 주변국의 반발로 나쓰메 소세키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에 비추어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대해 열광하지만, 일부 독자들에게 소세키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쩌면 일종의 교과서 소설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재미있고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상중 교수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딱 그 수준에 맞추어 서술해내간다. 



* 최근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다. 아래와 같은 장정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나는 이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번역된 소설들 다수를 구입한 상태지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성적인 화해 Les accommodements raisonnables 

장 폴 뒤부아(지음), 함유선(옮김), 현대문학 





출처: http://lci.tf1.fr/culture/livres/2008-08/le-nouveau-jean-paul-dubois-est-savoureux-4873947.html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를 고려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또한 집중해서,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는 능력이었다. 특히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닌 걸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육체의 살결도 배의 연한 살도 손가락의 기교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정도 흥분이 지나가자, 우리의 신체를 연결하는 뼈 마디마디가 모두 별 차이가 없어졌다. (안나든 셀마든) 누구의 육체든. 그렇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에 이르고 싶다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그런 방식이었다.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부드럽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요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오래 모든 걸 계속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 307쪽 



우울증에서 벗어난 아내와의 섹스. 폴은 '누구의 육체'든, 그렇다며, 자신을 뒤돌아본다. 우리는 이 소설 내내 어떤 궁지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프랑스 남자를 만나지만, 그가 왜 그 지경에 몰렸는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변화, 우울증에 걸린 아내, 도망치듯 프랑스를 벗어나 미국으로 온 주인공 폴. 


몇 해 전 나에게 놀라운 감동을 안겨주었던 <<프랑스적인 삶>>과 달리, <<이성적인 화해>>는 밋밋하고 까닭없는 방황이 이미 진행된 채로 소설은 시작했고 시작과 동시에 그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스크립터 닥터(script doctor)인 폴의 아버지 스테른, 아내 안나, 그리고 자녀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건너간 헐리우드의 휘트먼, 셀마, ... 폴의 주위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들, 폴과의 대화, 교감을 통해 소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 한국에 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그렇다고 공감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장 폴 뒤부아는 인물에 대한 사려깊은 태도와 쓸쓸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회고조의 문장으로, 내가 읽었던 <<프랑스적인 삶>>에서처럼 뒤부아만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작 <<프랑스적인 삶>>에 비한다면, 이번 소설을 평이했다. 


도리어 소설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폴이 부러웠다. (작중 인물의 환경을 부러워하다니!) 툴루즈에서 LA로.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요양소로 들어간 아내 안나. 그 사이 폴은 안나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셀마를 만나 육체적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안나가 우울증에 빠져있듯, 셀마는 마약에 취해 있고, 파티를 할 때, 섹스를 할 때, 그저 쓸쓸했다. 이성적인 화해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방황 끝에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그런 희망을 꿈꾸는 걸까. 셀마와의 짧은 밀애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안전한 방황인 셈이다. 안나는 미국으로 오지 않았고 셀마는 프랑스로 가지 않는다. 갈등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가 왜 변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변화란 의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테니 말이다.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은 권하지만, 이 소설은 권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이미 읽은 이들에겐 이 소설 몇 배의 감동을 <<프랑스적인 삶>>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보수적인 기준에서 권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 이 소설은 여느 작가들의 소설들보다는 훨씬 좋다. 






이성적인 화해 - 6점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현대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 윤상인, 박이진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이런 인터뷰집은 감동적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인터뷰를 위해 그가 냈던 소설들을 다시 읽었고(거의 50여 권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한 오자키 마리코는 질문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은 지 십 수년이 지난 나에게도 이 책은 <<개인적 체험>>, <<동시대 게임>>, <<조용한 생활>>을 읽던 그 때 그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리어 최근 들어 오에 겐자부로를 읽지 않았구나 하는 후회까지 들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가의 일반적인 인터뷰집이라고 하기엔 문학(이론)적이고 다양한 작가들-일본 작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작가들-이 등장하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어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그는 한 때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내가 예전에 쓴 글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의견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때 부정적이었음을 인정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노벨문학상까지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나는 <<해변의 카프카>> 이후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외국어에서 받아들인 것을 일단 메이지 이후의 일본 문장체로 전환하고 그런 후 나의 소설 문장으로 만들어 가지요. 
그런데 바나나 씨나 무라카미 씨는 외국 문학을 자신의 육체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육체로부터 문어체가 아니라 오히려 구어체, 일상 회화와 같은 문체로 자연스럽게 방출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내 소설의 문어체, 즉 쓰기 언어적인 특질이 과거의 것이 되고 그 다음 단계로 살아있는 구어체 문장을 두 작가가 만들기 시작했지요. 더구나 무라카미 씨는 요즘 들어 자신의 구어체를 새로운 문체로 향상시키고 있다고나 할까, 확고히 굳히고 있어서 세계 곳곳에서 작품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선한 눈부심은 나로서는 달성 불가능한 것이지요. 
- 264쪽 


문체에 대한 이야기다. 외국문학에서 영향 받았음을 숨기지 않고 외국문학에서 유래한 문장을 일본어 문장으로, 그리고 그만의 독자적인 문체로 만들어나가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면 한국어 문장이라는 건 뭘까? 


역자가, 예를 들어 엘리엇의 시상 속으로 깊이 집중해 들어가서 엘리엇을 일본어로 자기 안에서 공명시키기 위해서는 이 단어 밖에 없었구나 ... ... 그런 사정을 내가 알 수 있을 정도의 번역을 보면, 그것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나의 언어가 조금씩 솟아나옵니다. 
- 274쪽 


한국에서는 이제 번역 시집은 팔리지 않고 아예 새로운 시집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 종사자들의 문제가 아닐까. 동시에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로부터 영향받아 우아하게 변할 수 있었던 한국어 문장은, 번역 문학의 영향이라는 문제를 도외시한 채로, 정체 불명의 시장(market) 언어로부터 몰락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들은 번역 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번역 문학에 대해, 번역된 문학의 문장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도리어 어떤 소설가의 소설을 두고 번역투의 문장이라며 비난했던. 그러니 좋은 번역문학가가 드물고 좋은 번역에 대한 관심도 없다. 아예 언어에 대한 사랑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와 문체가 된다. 

소설가로서 살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신의 문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 
- 52쪽 

 
오에 겐자부로는 그가 영향을 받았던 많은 작가들을 언급한다. 윌리엄 블레이크, 맬컴 라우리, 토마스 엘리엇, 오든 등 그는 많은 외국 문학 작품들과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면서도 일본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동시에 묻어난다. 실은 프랑스어와 영어가 자유로운 것이 그가 세계 문학으로부터 다양한 영향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금 가장 주의하고 계시는 것은? 
"와타나베 가즈오 선생님이 말씀하신 '스스로의 믿음에 빠진 기계가 되는' 것. 노년이란 정말로 그런 방향으로 하락해가는 듯해서요." 
- 416쪽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일본 천황이 주는 문화훈장을 거부했다. 지금도 그는 문학가로서 할 수 있는 바 현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 그가 한 때 석방을 위해 노력했던 시인 김지하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모두 '스스로의 믿음에 빠진 기계가 되는' 듯하다. 오에 겐자부로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작품late work'를 자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까. (*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마티)


"고향을 잃은 망명자는, 언제까지나 안주하지 않고 중심을 향해 비판하는 힘을 지속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아마 올해도 노벨문학상 발표 때가 되면 한국의 몇 명 작가들 집 앞으로 기자들이 몰려갈 것이다. 하지만 몰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 부끄럽다고 여긴다. 한국 사회는 날로 형편없어지는데, 그 사이에 한국 문학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작년 슬픈 사건 때 잠시 들렸을 뿐... ... 그것도 문학계의 원로들은 사라진 자리였다. 오에 겐자부로가 칠순의 몸을 이끌고 나와 원전 반대를 말하던 것과는 사뭇 대비된다. 


마지막으로 오에 겐자부로가 어학 공부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 걸 옮긴다. 영문학과를 다니고 있긴 하지만, 외국어 공부는 참 어렵다. 다시 마음을 잡아야겠다. 


어학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사전을 세심하게 찾아보는 것.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시에서도)은 카드에 옮겨두고 외워버릴 것. 붉은 줄을 그어둔 책을 시간이 지나 몇 번이라도 다시 읽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시에서도)은 자신의 일본어로 번역해보는 것. 같은 작품을 두 가지 외국어로 읽어보는 습관을 기르는 것."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윤상인.박이진 옮김,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문학과지성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1. 너무맛 2015.06.12 00:09 신고

    일본 작가에 대한 견해는 항상 보류하는 저이지만...

    마지막에 외국어 공부부분만큼은 정말 최고의 공감력을 이끌어 내는 좋은 조언을 해준 작가이군요 !!!!

    • 지하련 2015.06.13 00:58 신고

      오에 겐자부로, 아베 코보, 특히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대단한 작가들입니다. 아직 야스나리는 읽지 못했는데, 올해 한 권 정도 읽어볼까 하고 있고요. 몇 명의 일본 작가들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작가들이 더 분발해야 되는데, 그러기엔 출판 시장이 작고 독자의 층도 너무 얇죠. ㅜ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지음), 김난주(옮김), 바다출판사 




1. 부모를 버려라, 그래야 어른이다

2. 가족, 이제 해산하자

3.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4.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5. 아직도 모르겠나, 직장인은 노예다

6. 신 따위, 개나 줘라 

7. 언제까지 멍청하게 앉아만 있을 건가 

8. 애절한 사랑 따위, 같잖다 

9. 청춘,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10. 동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 이 책의 목차다. 정말 이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도 이십 여년이 지났다. 그의 소설, 투명한 서정성이랄까, 그런 느낌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의 산문은 거침없다. 그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문장과 달라,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런 각오로 소설을 써야 된다는 점에서 도리어 감동적인 면까지 있다. 그런 면이 잘 드러난 산문집은 <소설가의 각오>(김난주 역, 문학동네)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이 산문집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도 거침없다 못해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식상하다고! 


'부모를 버려라, 그래야 어른이다'나 '가족, 이제 해산하자'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초반에 언급된 가족 사회, 즉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로만 유지된다는 것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국가가 국민에게 관심 없는 건 다 아는 이야기고 직장인이 노예라는 거나 애절한 사랑에 대한 내용도 다 아는 내용이긴 매 한가지다. 


그런데 이런 식상한 이야기가 마음을 흔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 아니라, 마치 술자리에서 인생 선배가 말하는 느낌이랄까. 우리들은 종종 '알아, 그래 알고 있다고'라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알고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알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전부이지 않은가.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적어도 인생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살아볼 만한 것이 된다는 점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8점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바다출판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1. 기린모옥 2015.05.04 20:46 신고

    마루야마 겐지
    라는 이름 잘 기억해 둘께요
    감사합니다.

    • 지하련 2015.05.05 21:10 신고

      이 산문집보단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들이 좋습니다. ~ 산문집은 <소설가의 각오>가 이 책보단 나아요. 그의 소설은 참 서정적인데, 그의 산문은 직설적입니다. ~ 너무 직설적이라서 의외라는 느낌을 읽을 때마다 받아요. ㅎㅎ


불한당들의 세계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보르헤스전집1)





리타 기버트: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보르헤스: 아니요. 그리고 저는 여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충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인생조차도 겨우 간신히 꾸려왔으니까요. ... ... 나는 약간 표류하며 나의 삶을 살았지요. 



69세의 보르헤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충고를 할 수 없음,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 ... 


지난 설 연휴 읽었는데, 이제서야 간단하게 리뷰를 올린다. 그 사이 이 소설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은 보르헤스의 첫 작품집이다. 


직역하면 <오욕의 세계사>라고 부를 수 있는 보르헤스의 첫 작품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이후의 그의 소설 세계를 가늠할 많은 특징들이 씨뿌려져 있는 묘판과도 같다. (123쪽) 


역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문학 연구자에게 흥미롭겠지만, 이제 문학을 떠나 있는 나같은 독자에겐 호소력이 없다. 보르헤스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소설집은 그다지 재미 없었다. 보르헤스 팬들에겐 의미 있겠으나, 보르헤스의 세계를 제대로 알기엔 <픽션들>이나 <알렙> 같은 다른 소설집이 나아 보인다. 


(간단하게 더 언급하지만, 이 소설집은 일종의 재-쓰기로 이루어진다. 이미 책이나 신문 등으로 알려진 불한당 이야기를 보르헤스는 자신의 관점으로 다시 단편소설로 쓰고 있다. 하지만 첫 작품집이라는 점에서 보르헤스 특유의, '메타-네러티브 Meta-Narrative'의 형식은 흔적으로만 드러날 뿐, 본격적이진 않다. 이 점에서 역자인 故 황병하 교수는 '씨뿌려져 있는 묘판'이라는 표현을 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 8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민음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오늘의 내가 이루어진 것도, 내 일생동안 이끌고 다녀온 이 권태에 처음으로 전염된 것도, 나의 고통이요 나의 쾌락인 이 슬픔에 물든 것도 콩부르의 숲에서였다. 그 곳에서 나는 내 가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다른 가슴을 찾아헤맸다. 그 그곳에서 나는 내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 곳에 그의 이름이 복권되고 집안의 재산이 쌓이기를 바랐다. 시간과 혁명이 씻어간 또 하나의 악몽. 여섯 형제 중 남은 사람은 셋. 형과 쥘리와 뤼실은 이제 없고, 어머니는 고통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재는 무덤 속에서 파헤쳐졌다."


"혹 나의 작품들이 내 죽은 뒤에 남게 되고 내가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어느 날 <회고록>의 인도를 받아 어떤 여행자는 내가 그린 장소들을 찾아오리라. 그는 성(城)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거대한 숲은 찾아도 없을 것이다. 내 꿈의 요람은 사라져버렸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성탑만이 그 종탑과 사귀고 폭풍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던 옛 친구들인 거대한 참나무 숲의 죽음을 울고 있으리라. 그 성탑처럼 홀로 남은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해주고 나를 보호해주던 내 가문이 내 곁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인생은,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성탑들처럼 견고하게 땅 위에 지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그의 손으로 세운 성만큼 폭풍에 견디지 못한다." 

-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 * 


김화영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에서 인용된 샤토브리앙의 글이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대단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샤토브리앙이지만, 다른 나라로의 소개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듯 싶다. 그의 대표작인 <아탈라>, <르네>는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품절이고. 




아딸라 - 르네
샤또브리앙 저/신곽균 역

영역본을 찾아보았으나, 3권 정도 검색되었다.



 

- 샤토브리앙, <Atala / Rene>



-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Memoirs from Beyond the Tomb>



읽고 싶은 건 역시, <무덤 너머로의 회상>이다. 학생 시절이었다면 어떻게든 불어로 읽으려고 했을 텐데, 돌이켜보니, 영어라도 제대로 해놓고 불어공부를 할 걸 하는 후회가 앞선다. 지금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역본을 찾아보고 있으니. 


프랑소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은 30년 걸쳐 씌여진 회고록이다. 소설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1786년에 태어나 1848년에 죽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귀족의 몰락, 프랑스 대혁명, 왕정복고, 나폴레옹 ... 격변기를 보냈고, 그 이야기들이 <무덤 너머로의 회상>에 담긴 것이다.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지금 샤토브리앙을 읽는 독자들은 많지 않다. 


위에서 소개한 책들 말고 국내 번역된 책들이 있으나, 발췌번역이거나 요약본이라 다소 부족해 보인다. 


* *


얼마 전 웹서핑을 하다 보게 된 정보 하나, 언어 사용인구로 따져, 한국어가 13위였는데, 순위에 민감한 사람들이 한국어의 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읽었는데, 실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국어로 된 양질의 정보가 얼마나 많고 이 정보들에의 접근이 얼마나 쉽고 편리한가다. 따져보면 한국어로 구할 수 있는 양질의 정보는 많지 않다(영어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나, 비교는 늘 최고와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이 사회에 조금이나 기여한 게 있다면, 한국어로 된 정보에 이 블로그가 조금의 도움이 되었다는 것밖에 없는 듯해 좀 씁쓸해졌다. 


정부 차원에서 한글 번역 - 여기에는 외국 서적에 대한 번역 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된 국문학 서적에 대한 번역도 포함되어야 한다 - 에 대한 다양한 공적 사업이 진행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늘어나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그게 가능할까 싶다. 기업은 돈 되는 일에 매진하고 정부는 지금 당장 돈이 되지 않고 나중에도 돈이 되지 않으나,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기초 사업에 힘을 써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이 나라 정부 관료나 정치인이 이런 이야기 한 적을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다.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만남 Une Rencontre 
밀란 쿤데라(지음),한용택(옮김), 민음사 



1. 
에밀 시오랑(치오란), 아나톨 프랑스, 프란시스 베이컨,  셀린, 필립 로스,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 .... 밀란 쿤데라가 만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 이 산문집은 편파적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낯선가는 경험해본 이만이 알 수 있으리라. 좋아한다는 그 고백이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짓게 만들고 나를 일반적이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결국 기괴한 사람으로 만드는가를.  
 

그리고 치오란은 어떤가! 내가 그를 알게 된 시절부터 그가 한 것이라고는 인생의 황혼기에 블랙리스트에 자리 잡기 위해 이 리스트에서 저 리스트로 돌아다니는 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징낳아 그의 앞에서 아나톨 프랑스를 언급했을 때, 그는 내 귀에 대고 짖궂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여기서는 절대로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당신을 놀릴 거예요!"라고 말이다. - 71쪽 

  
에밀 시오랑과 아나톨 프랑스를 알고 읽어본 이만이, 그리고 밀란 쿤데라를 알고 있는 이만이 위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독자는 한정되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독자의 수는 줄어들 테지. 


  

- 이 책에서 언급되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는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인데, 얼마 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 에밀 시오랑의 책은 3권이나 번역되었다. 허무주의적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에밀 시오랑은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로 온 이후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활동하다가 죽는다. 20세기 프랑스 문필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구사한 몇 되지 않는 이로 손꼽히지만, 번역된 책에서는 이를 온전히 느낄 수 없고 다만 그의 도저한 허무주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2. 
"한 쪽에는 그 어떤 열정도 생기를 불어넣을 수 없는 무관심한 사람들, 소심한 사람들, 이성적으로 사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논증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보이며, 감성으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자들은 늘 유죄를 선고하곤 했다."
- 아나톨 프랑스, <신들은 목마르다> 중에서 

아나톨 프랑스의 장례식이 프랑스 국장(國葬)으로 치러지고 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톨 프랑스에 대한 기묘한 침묵에 대해, 심지어 아나톨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시대에 뒤쳐지고 취향이 이상한 사람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아나톨 프랑스를 인용하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감정적인 비판을 꼬집는다. 

하지만 비단 프랑스 지식인만 그럴까. 위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의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을 떠올렸다(실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마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증하는 듯 싶지만(왜냐면 현란한 이론가를 인용하거나 뭔가 그럴싸한 주의, 주장으로 언어를 구사하기에), 결국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판단내리니까.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이라는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한국엔 보수란 없다. 보수적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 대부분 한국에선 진보적이라고 봐야할 수준이다) 


3.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은 위대한 유럽 소설가이다. 그의 예술에 첫 번째로 영감을 준 것은 사회적 또는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고, 지리적 호기심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추구이며 진정한 실존적 치열함이고, 이 덕분에 그의 소설은 (내 생각으로는) 소설의 현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나이 속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것은 나이와 함께 변한다는 점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먹어가는 나이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나이의 수수께기, 오직 소설만이 밝힐 수 있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 49쪽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Gudbergur Bergsson)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름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가령 크세나키스! 


    

- 베르그손이 표지로 나온 책. 그리고 그의 소설, <백조 The Swan>의 영역본 표지. 




4.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산문집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글에서 시작해, 그가 아끼는 몇 권의 소설과 소설가들, 아나톨 프랑스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작가 리스트에서 기묘하게 사라지게 된 것에 대한 조소, 지금은 사라진 체코, 프라하의 봄, 망명한 체코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 크세나키스, 야나체크와 쇤베르크의 음악, 말라 파르테의 소설에 대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즐거운 이유는 바로 아래같은 이유다. 바르트를 좋아하냐는 프랑스 젊은이의 물음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좋아하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카를 바르트를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부정신학의 창시자 말예요! 천재예요! 바르트가 없었다면 카프카의 작품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걸요!" - 69쪽 

밀란 쿤데라는 그 젊은이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 대해 묻고 있음을 알지만, 카를 바르트(Karl Barth)를 이야기한다. 카를 바르트를 모를 그 젊은이를 위해 카프카를 살짝 언급하면서 '너랑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어'라며 속내를 비친다. 이 얼마나 현란한 거부인가! 


5. 
고백하건대, 내가 현재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밀란 쿤데라다. 내가 얼마나 그를 좋아하는지, 이 짧은 산문집을 읽으면서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 김승옥, 르 클레지오, 뒤라스, 주제 사라마구, 이탈로 칼비노를 지나, 밀란 쿤데라.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체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불어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에밀 시오랑이 루마니아 사람이듯. 그래서 번번히 후보로만 언급될 뿐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보다 한참 문학성이 떨어지는 모디아노가 받는 그 문학상을 말이다. 일본의 하루키가 받게 된다면, 아, 밀란 쿤데라는 어쩌란 말인가. (내가 알기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는 사무엘 베케트가 유일한 듯 싶다)  하긴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소설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도 받지 못했으니. 좀 우습긴 하다. 

 




만남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민음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태양은 누군가가 석유를 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신문 가져올 동안 좀 들고 있어"하며 내 손에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불타고 있는 거대한 50센트 짜리 동전 같았다. (23쪽) 


가을은, 마치 육식 식물 속으로 질주해 내려가는 롤러 코스터처럼, 포트 와인과 그 진하고 달콤한 와인을 마셨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기억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39쪽)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52쪽) 


-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 낚시> 중에서 



출처: http://www.pasunautre.com/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으면 왠지 우울해진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Essais sur le roman) 

미셸 뷔토르 Michel Butor(지음), 김치수(옮김), 문학과 지성사 







문체에 관한 노력이 있을 때마다 작시법이 있다. 

- 말라르메 


소설가란 아무 것도 헛된 것이 없는 어떤 사람입니다.

- 헨리 제임스 




소설 쓰기를 포기한 채, 소설론에만 관심이 갔다.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형식에만 관심 있었다. 소설 속 사건은 이미 신문의 사회면, 자극적인 인터넷 기사, 혹은 막장 드라마에 밀린지 오래다. 사건에 대한 평면적 전달 속에서는 사건의 특이함만이 시선을 끌게 된다. 현대 소설가들 대부분은 사건의 입체적 전달을 고민해 왔다. 프랑스의 누보 로망도 여기에 속한다. 소설가를 꿈꾼다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것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은 서로 무관한 일이고 도리어 서로 방해된다. 한국의 독자는 게으르고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성실한 독자들은 먹고 살기 바쁘며, 순수 문학을 위한 출판 시장은 너무 작고 이마저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미셸 뷔토르의 소설 에세이를 번역한,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는 1996년에 출판된, 거의 읽히지 않는 소설론이다. 불어불문학과 대학원 과정에서나 읽힐 법한 책이라고 할까. 역자인 김치수 교수(이대 불문학과, 문학 평론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대학의 수업 시간에 참고 문헌으로 읽어야 할 학생들이 그 문장의 어려움 때문에 받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을 91년에 번역해놓고도 이제야 내놓게 된 것은 나의 게으름 탓이기도 하지만 뷔토르의 독특한 문장의 맛을 살리기에 불충분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238쪽) 


역자의 사정이 이러하니, 이 책의 독서도 쉽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숨겨진 보석과도 같다. 미셸 뷔토르는 공간, 시간, 인물과 대명사, 그리고 문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현대 소설의 건축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와 소설의 관계를 지나, 소설적인 시를 강조한다. 그는 “새로운 형식이 새로운 내용을 드러낼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 형식이 다른 형식에 비해서 더욱 단단한 내적 일관성을 드러낼수록 그 형식이 더욱 정확한 것이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하며, 소설의 형식적인 측면이 어떻게 내용에 영향을 끼치는가를 소설가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설명한다. 


소설이 시적일 수 있고 시적이어야 하는 것은 단지 몇 문단에서만이 아니라 그 전체에서이다. (48쪽)  


2000년대 초반 우연히 서점에서 구한 이 책을 최근에서야 읽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 사이 두 세 번 초반 몇 페이지를 읽긴 했으나, 쉬운 독서는 아니었음을 밝힌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너무 함축적이어서 천천히 그리고 집중해서 읽어야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에 대해, 소설 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였다. 사건, 혹은 인물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의 건축술과 장식, 배경 등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성을 갖추어야 함을.  


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선이란 점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면서 기하학을 만들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사물들을 뒤집어보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한 점을 두 선의 만남으로 정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적 사유는 집단을 개인들의 합계로 생각하기 시작해서, 그 사유가 개인을 순수하게 여러 집단의 만남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인정하는 날까지 생각할 것이다. (126쪽) 


이 책은 누보 로망 계열 - 미셸 뷔토르 스스로는 싫어하지만 - 소설가가 쓴 소설론이다. 쉬운 책이 아니고 일반 독자에게 권하지도 않겠다. 다만 진짜 소설을 쓰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참으로 팔리지 않는 이 책을. 


가장 훌륭한 텍스트들은 영원히 미완으로 그리고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197쪽) 





새로운소설을찾아서

미셸뷔토르 저 | 김치수 역 | 문학과지성사 | 1996.07.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1. 최형우 2016.05.25 10:25 신고

    마지막 내용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ㅎ
    진가에 대한 인정은 어렵다
    그런듯 하다가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지하련 2016.05.25 11:44 신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영원히 미완으로' 남아있다는 건 읽는 독자들마다 각기 다르게 읽을 것이며, 작품의 완성이란 읽는 독자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만 끝나는 것이겠지요. 현대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가령 '작가는 없고 독자만 있다'는 식의 태도로 이어집니다. 끊임없이 읽히는 텍스트는 영원히 미완인 상태죠.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도 '미완'인 상태와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완성되지 않았으니, 진짜 평가는 완성된 후에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평가되는 작품이 되는 겁니다. 아직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나 <<일리아드>>에 대한 연구논문들이 나오고 있죠. 가장 훌륭한 텍스트의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 새롭게 읽히고 새롭게 평가되죠.
      이건 모든 작가들의 꿈이겠죠. 제임스 조이스가 <<피네겐의 경야>>를 쓰면서 꿈꾸었던 어떤 이상일 겁니다. 아예 말라르메는 '이 세상은 한 권의 책으로 담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이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한 권의 책으로??

      가장 훌륭한 텍스트들은 끊임없이 새로 읽히고 새롭게 해석되며 시대를 초월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미완이며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 거죠. ~



아무것도 쓸 수 없다. 다만 이 견딜 수 없는 초조감을 적어 잊어버리고 싶다. 지금 나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걱정, 앙심, 초조, 강박관념이 나를 긁고 할퀴고, 되풀이해서 덮치도록 내맡겨져 있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해도 안 되고, 일을 해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어도 내가 쓰고 싶은 주제의 일부가 내 마음 속에 부글거리고 일어난다. 서섹스 전체에서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또는 내 안에, 그것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사물을 즐길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만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 1921년 8월 18일 목요일 


어느 책에선가 예술가의 자살율을 살펴보았더니, 소설가들의 자살율이 최고였다고 전했다. 화가와 음악가의 자살율은 기억나지 않는다. 언어를 다룬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고된 일이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아직도 이 백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워낙 이 책 저 책 오가며 읽는 터이기도 하지만, 비밀스러운 일기가 출판되리라고 그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난 후 더구나 동양의 작은 나라의 중년 남자가 읽는다는 건 ... ...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고등학교 때 읽은 후, ... ... 아직 없다. 다만 그녀의 비평, 수필은 여러 번 읽었고 이제 그녀의 일기다. 등대로... 델러웨이 부인 ... 은 번역서만 가지고 있을 뿐, 읽어야지 할 뿐이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서울엔 이미 어둠이 내렸고 긴 새벽을 위로할 술 한 잔이 그리워진다. 버지니아 울프였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장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진 2013년,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건 참 낯설고 쓸쓸한 일이다. 지독히도 쓸쓸한.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시다. 그래서 나는 술집 앞의 술 취한 수병처럼 후회하고 있다." 

- 1924년 8월 15일 금요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 10점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마음산책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Pol-Serge Kakon)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i12bent.tumblr.com/post/242749612/jean-seberg-nov-13-1938-1979-was-an  



그러고 보면 이 책의 독자는 정해져 있었다. 로맹 가리Romain Gary, 혹은 에밀 아자르Emile Ajar의 팬이거나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의 여 주인공 진 세버그Jean Seberg를 잊지 못하는 이들로. 그러나 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재미있지 않다.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글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장은 우아하지도 치밀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십 대의, 소년같았던 진 세버그를 잊지 누벨 바그La Nouvelle Vague 팬들에게 이 책은 진 세버그의 불행했던 정의감과 열정, 정처 없이 나약하기만 했던 사랑의 감정을, 술과 약에 취해 있던 그녀를 지켜주던 로맹 가리의 마음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연이 어느 날 이 길이 아니라 저 길로 지나갔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누구나 의문을 품어본다. 생각 없이 극장 문이나 교회당 입구에 들어서는 일, 한 발짝의 걸음이 그렇듯이 한 번의 눈길이, 미소가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81쪽)




책은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인생, 그리고 그 둘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 자살로 이어지는 여러 장면들을 시간 순에 따라 배열하고 있다. 때로는 무미건조하게, 때로는 서정적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에밀 아자르를 제외하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사려고 노력했던 로맹 가리와, 그와는 확연히 다른, 격정적이며 혼란스럽고 정처 없는 삶을 살다 마흔 하나에 자살하는 진 세버그 사이에서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서술하기란 저자인 폴 세르주 카콩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꽤 벅찬 일이였으리라. 그 만큼 둘의 인생은 확연한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엔 사랑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이고, 사랑은 거친 현실적 삶 속에서 잊히는 것이다. 진 세버그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잊고 싶었을 것이고, 우연히 만나는 낯선 사랑이 자기 삶의 해답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흑인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젊은 시절의 불합리를 고치고 싶었을 테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비현실적이었고 미 정부와 FBI는 그녀의 그런 활동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방해하고 압박했다(이 책에서 이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유대인으로 자라 2차 세계대전을 참전하였던 조종사 출신의, 소설가 로맹 가리에게 이러한 진 세버그의 열정은 한편으로는 아름다웠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 세버그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로맹 가리는 혼신을 다해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치 딸에게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권총을 입에 물고 당기기 전 책상에 남긴 편지에 가리는 이렇게 썼다.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 (231쪽)



진 세버그가 그녀의 차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 1년 후, 로맹 가리도 권총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프랑스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에밀 아자르가 실은 로맹 가리 자신이었음이 밝혀지고, 로맹 가리를 비난하면서 에밀 아자르에겐 격찬을 보냈던 문학 평론가들은 입을 닫았다.



언젠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이 작가는 자살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 어쩌면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에 대한 사랑을 에밀 아자르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말 대로 ‘이 경계를 넘어서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Au-delà de cette limite votre ticket n'est plus valable).’






출처: http://www.purepeople.com/media/romain-gary-et-jean-seberg-en-1971_m573983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고 포기를 모르는 마음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랑에 대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 그리고 진 세버그 팬에게만 권할 뿐, 나머지 독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이 책은 그 가치를 발휘할 테니.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어느 인터넷서점의 파워블로그 혜택을 받게 되었다. 꾸준히 포스팅을 하고 트위터에 글을 보내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월 5만원 상당의 포인트는 꽤 좋은 혜택이다. 포스팅이야 꾸준히 하는 것이고 트위터에 글을 보내, 이 블로그로의 유입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 내 블로그로 오는 이들은 꾸준히 방문하는 일부의 단골 손님들과 검색 엔진 통해서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크게 신경쓸 건 없는 듯하다. 

여하튼 며칠 전 인터넷서점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오늘 퇴근 전에 여기에다 올려놓는다. 요즘 소설 잡으면 몇 달 동안 읽는다. 좋은 소설을 잡은 탓이기도 하지만, 실은 네 다섯 시간 이상 집중할 여유와 새벽까지 지탱할 건강이 사라진 탓이다. 독서가의 입장에선 참으로 절망적인 일이다. 다행인 것은 절망적인 일임을 알게 되었으니,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아암.~.

---

긴 회의를 끝내자, 잠시 머리가 멍해진다. 이 작고 거친 틈새를 타고, 몇 권의 소설을 이야기해본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필독이다.

김승옥은 한국 근대 문학에 서구에서 이해하는 바의 모더니즘(modernism)이 있었다면, 그 모더니즘의 절정이다. (김승옥의 소설집이 집에 있는데, 다시 꺼내 읽어야 겠다. 몇 개의 단편은 정말 좋은데..) 
 

무진기행
김승옥


우리가 실존주의적 문학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카뮈, .. 또는 베케트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동양에도 그런 소설가가 있으나, 그는 단연코 아베 코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여러 작가들이 선보였던 실존주의적 절망과 자포자기가 동양에서는, 특히 일본에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소화되는지는 극적으로 보여준다. (2003/01/27 - [책들의 우주/문학] -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저/김난주


한국에도 한 때 후일담 문학이 유행했다. 80년대 운동권 세대들의 경험, 도전, 후회, 자기 반성들로 이루어진 이 문학들은 대체로 그 작품성이 낮고 완성도도 떨어졌다. 그래서 관계된 사람들이나 읽는 소설들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제는 읽지 않는 소설들이다. 나는 후일담 문학에 대해서 입에 침을 바르지 않고 찬사를 해대던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기억난다. 그들의 형편없는 심미안이란!

하지만 장 폴 뒤부아의 이 소설은 읽다면, 후일담 문학이라는 것도 이렇게 우아하고 근사하며 문학적 완성도를 이룰 수 있구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후일담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2008/02/01 - [책들의 우주/문학] -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저/함유선

몇 권의 소설을 추천했다. 다음에도 이런 틈새가 생긴다면, 한 번 정리해서 올려볼까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러스트: 메테오 페리코니



보르헤스 씨의 정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레꼴레타 인근의 어느 집에는 이중의 특권을 가진 창문이 있다. 그 창문에서는 한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이웃한 집들과의 벽을 따라 굽이쳐 흐르며, 마치 계절들의 여행처럼 보이는 색채들을 가진 식물들, 나무들, 덩굴들로 가득한 넓은 공간, 여기에선 여기에선 pulmon de manzana로 알려진 - 글자 그대로 한 블록의 허파 - 안쪽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덧붙이자면, 그 창문은 작고한 내 남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서재를 피난처처럼 보호하고 있다. 그 서재는 오래된 책들로 채워진, 진짜 바벨의 도서관이며, 그 책들의 종이들에는 내 남편의 작은 손으로 거칠게 씌어진 메모들이 있었다.

한낮 정오가 지나고 나는 창문을 내다보기 위해 내 업무로부터 눈을 떼고, 봄철로부터 나는 무너질 것이다. 아니면 만약 여름이라면, 자스민 향기, 혹은 오렌지꽃 향이 보르헤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던 책의 종이들와 가죽 냄새들과 뒤섞였을 것이다.

그 창문은 또 하나의 경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창문으로부터 보르헤스가 한 때 살았고,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단편들 중의 하나인 ‘원형의 폐허’(The Circular Ruins)를 썼던 집의 정원을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두 세계를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다. 때때로 나는 보르헤스가 죽은 후에 한 때 멀리 있는 보르헤스에 속했던 그 집의 그 창문을 통해 보는, 오후의 장려함 속으로, 혹은 석양의 부드럽게 타는 듯한 빛깔 속으로 몸이 잠기는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가 의아해지곤 한다. 아니면 바벨의 도서관의 세계, 책들로 가득한 책장들이 과연 그의 손에 닿았던가?

- 마리아 코다마


* 뉴욕타임즈 2011년 1월 1일에 실린 글을 형편없이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1/01/02/opinion/20110102_Windows.html 를 보시면 됩니다. 스페인어로 씌어진 글을 에스더 앨런이 영어로 옮겼으며, 이를 다시 한글로 옮겼습니다. 번역이라곤 해본 적 없기에 오역이 많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양해해주시기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소설의 방법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노영희.명진숙 옮김/소화


하루 종일 밖을 떠돌다, 겨우 들어온 집은 아늑함을 가지지 못했다. 너무 거칠어, 마치 여기저기 각을 세운 채 모래먼지로 무너지는 사막 같았다. 어느새 내 작은 전세 집은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일 공간이 아니라, 또다른 전쟁터였고 내 마음은 새로운 전투에 임해야만 했다. 결국 도망치듯 책으로 달아났지만, ... ...

간단하게 서평을 올리고자 몇 달 전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려 했다. 몇 달 전에도 힘겹게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의 방법'. 그러나 그 때의 기억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오에의, 이 오래된 책은 낯설고 또 힘겨웠다. 내 요즘의 일상처럼.

한때 소설 쓰기를 배웠고 소설가가 된 선후배가 즐비한 지금. 심지어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들 중 2명이 나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어떤 소설들은 너무 먼 곳, 까마득히 아득한 저 어둠 속에 있어, 동년배들의 소설 읽기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늘 도전하게 되는 건 위대한 이야기꾼들. 하지만 소설쓰기를 배우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위대한 소설가들에게서 느끼는 절망은 이루 설명할 길이 없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 중 한 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풍경이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지는 나에게,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소설의 무인도와도 같다고 할까. 그의 소설들은 지극히 일본적인 산문 전통 위에 있으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해 나간다. 마치 놀라운 마법과도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 지역성이 두드러져 낯설지만, 그가 마주하며 싸우는 것은 인간과 세계, 인간과 시간(역사), 그리고 우연히 고통스러운 삶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지역성을 너머 보편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소설책을 읽는 몇 되지 않는 독자들이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들고 있는, ... ... 그러기에는 우리 시대 문학 독자의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 형편없다. 심지어 문학을 평하고 논하는 평론가들의 수준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정체 모를 안개로 왕창 내려앉아 버렸다. 하긴 위대한 문학과 싸운 경험이 있어야 평론가들의 수준도 올라갈 텐데, 한국에 언제 위대한 문학이 있었던가.

이 책은 체계적인 구조를 지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 쓰기에 한 번쯤 도전해본 이라면 이 작은 책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 시대에 소설 쓰기가 어떠한 과정과 태도로 이루어지는가를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스토리 만들기에만 몰두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스토리 너머 존재하는 표현(문체), 상상력, 이미지, 리얼리즘, 태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쓰기를 배운 이들에게조차 이 책은 딱딱하고 재미없고 지루하며 쓸데없는 내용만 가득하다고 여기게 할 지 모르겠다. 그만큼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국내 저자가 쓴 소설 작법 관련 책들 중에 이 정도 수준이 되는 책이 있기나 할까.  

진짜 문학, 진짜 소설을 꿈꾼다면, 대학 교수나 문학평론가(이론가)가 쓴 형편없는 이론서가 아니라 소설가가 쓴 이런 에세이가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 책을 집어들고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여긴다면, 이 책의 저자 오에 겐자부로나 나를 탓하지 말고 자신을 탓하길.


무엇보다도 저는 무엇을 쓰는가는 새로운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쓰는가에 관한 방법을 나타내는 식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작가가 무엇을 쓰는가의 문제까지 간섭하고 또 지도하는 것은 비문학적인 월권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젊은 독에게 이 책을 다시 보이면서 제가 제시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그 독자가 자신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대답해 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쓰는가"와 "무엇을 쓰는가"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매듭짓는가? 또 전자가 후자를 만드는가 하면, 후자가 전자를 결정하는 일도 있는, 이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를 오랫동안 계속해 온 인간으로서, 이 몽상의 신선한 의미를 의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993년 3월 1일, 오에 겐자부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오정희(지음), <<내 마음의 무늬>>, 황금부엉이, 초판3쇄



산문집을 출판한 뒤, 보름 만에 3쇄를 찍은 이 산문집을 보면서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게 꼭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도리어 읽을 책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신뢰할 만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휙 돌고 나오고 나온다. 일간지에 실린 광고 생각부터 오정희가 가지는 개인브랜드까지.

얼마 전 어느 신문 기사에 한국 문단은 정부가 먹여 살린다는 짤막한 시평이 실렸다. 소설 써서 정부 지원금 받고 재단 지원금 받고 하면 연봉이 한 이 천 만원 정도 된다는 웃지 못할 글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진짜 밥벌이용 소설인 셈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출판해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원금 신청에 사용하고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도,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안목도 없고.

그러니 광고나 대문장만한 리뷰를 보고 책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정희의 산문집 서평 서두부터 시답잖은 문장으로 시작한 것이 그리 유쾌하진 못하겠지만, 나로선 오정희의 산문집이 나오고 난 뒤, 여기저기에서 들려준 격찬은 다소 어색하고 조금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이 산문집의 시작은 ‘무척’ 좋다. 꼭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긴장감은 떨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엮기 위해 억지로 붙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편집자의 몇 마디 글은 ‘나는 오정희의 열성팬이예요’라고 광고하는 듯 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이렇게 글 쓰는 사람이 없나 하는.

그리고 이 생각은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기싱의 고백>>(효형출판)을 떠올리면서 더 심해졌다. 무릇 산문집이라면 조지 기싱의 책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아니면 미셸 투르니에나.

오정희의 산문집도 꽤 좋은 책이다. 무리 없이 읽히고 간간히 그녀만이 우리에게 선사해줄 수 있는 문장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평범한 수준의 산문집이며 도리어 오정희라는 이름과 견준다면 다소 실망스러운 산문집이다.

혹시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이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내 마음의 무늬 - 6점
오정희 지음/황금부엉이


신고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오늘 쉴새없이 불었던 가을바람을 떠올린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마르그리뜨 뒤라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을이나 겨울에 부는 바람은 늘 그녀를 떠오르게 한다. 한 때 뒤라스의 소설만 읽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는가 보다. 그녀의 책을 서점에서 본 적이 오래 되었고 그녀를 이야기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하긴 그녀는 사랑 속에서 죽었으니.


<연인>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잠시 ...  내가 그녀의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벌써 6년이나 지났구나. ... 뒤라스. 1998년 겨울. 그 겨울. ... 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ry Flannery O'Connor, 1925.3.25 ~ 1964.8.3




어제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식사를 많이 한 것이 원인이 된 듯하다. 그런 와중에 11시까지 일을 했고 밤새 배를 잡고 뒹굴다 급기야 아침에는 토하고 말았다.

이틀이 지나가고 있건만, 무식하게 약을 먹고 있지만, 배는 계속 아프다. 오늘 일찍 집에 들어왔지만, 몇 시간을 잤지만, 배는 계속 아프다.

아픈 몸이라. 무척 낭만적이다.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병"를 영어원서로 사서 읽고 있는데.. 몇 페이지 읽었나.

병하니, 프란네리 오코너가 생각난다. 홍반성난창으로 죽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생의 구원이라는 테마만 생각했다니. 그리고 보면 나는 죽지 않는다면서 죽은 프랑스의 어느 소설가도 있었는데.





신고
늦은 봄날의 일상

가끔 내 나이에 놀란다. 때론 내 나이를 두 세살 어리게 말하곤 한다. 내 마음과 달리, 상대방의 나이를 듣곤 새삼스레 나이를 되묻는다. 내 나이에 맞추어 그 수만큼의 단어를.....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쓸쓸한 커피숍

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통영 출장, 그리고
통영 출장, 그리고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